깜찍한 푸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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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은 무서운 형님? |
(너무도 부지런해서 읽을 시간이 부족한 분들을 위해 요점정리를 먼저 한다.)
1- 푸틴과 이반 뇌제: 푸틴이 러시아를 중세로 되돌리고 있다거나 신냉전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강력하고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수직적 소통 과정과 비판자를 용납하지 않는 독단이 이반 뇌제와 닮았기 때문이다.
2- 푸틴과 표트르 대제: 용감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며 과감한 개혁을 통해 서양의 우수한 기술을 수용하여 러시아를 서양열강으로 만든 것이 공통점이다.
3- 푸틴과 예카테리나 여제: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영토를 가장 많이 넓힌 군주다. 동으로는 시베리아로 진출하였고, 남으로는 오스만 투르크(터어키)를 물리치고 흑해를 획득하고(현재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게 되는 역사의 출발점) 나아가 발칸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근원적인 원인). 그녀는 말년에 프랑스와 척을 짓게 되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의 빌미를 제공한다. 푸틴이 흑해와 유럽에 하는 행위들이 예카트리나와 닮았다.
현재 러시아를 이끌고 있는 21세기의 푸틴과 과거 러시아 역사의 데자뷰를 살펴보자.
이반 뇌제와 강력한 국가
이반 4세, 차르로 등극((1533~1584. 즉위 1547년)
이반 뇌제는 러시아 차르의 폭압적이고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의 정식 명칭은 이반 4세. 우레와 같은 충동적 성격 때문에 ‘뇌제(雷帝)’라는 별칭이 붙었다. 러시아 왕을 칭하는 ‘차르(tsar)’라는 말은 원래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Caesar)’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차르’가 되면서 긍적적 의미는 떨어져 나가고 강력하고 폭압적인 의미만 남게 되었다. 내용을 보자.
(우=> 사진) 이반 뇌제의 흉상. 발굴된 그의 두개골과 옛 초상화를 바탕으로 조각한 것이다. '강렬'과 '잔혹'으로 표상되는 그의 성격이 잘 나타났다.
광기에 가까운 격정으로 한 시대를 군림한 인물, 이반 4세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양극단의 평가를 내린다. 그는 온 나라를 피로 물들인 폭군이자, 국가를 단단한 토대 위에 세운 능력 있는 군주였다. 그의 별명인 뇌제(雷帝, 그로즈니)에 이 두 가지 평가가 함께 담겨 있다. 그는 벼락처럼 두려운 군주이면서 번개처럼 위광이 빛나는 군주였다.
그의 통치는 흔히 전후반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얘기한다. 전반부에는 능력 있는 군주의 특성이 두드러지고, 후반부에는 폭군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는 일관되게 토착귀족들에 대항하여 차르의 권력을 강하는 데 힘썼다.
1500년대만 해도 러시아는 작은 국가였다. 몽골에게 거의 300년 동안 수탈을 당해 남아있는 것도 거의 없었다. 여기에다가 모스크바는 내륙의 한가운데 위치하여 있던 터라 무역도 쉽게 할 수 없었다. 이 무렵 러시아는 스웨덴을 비롯한 여러 나라로부터 위협을 받는 소국에 불과했고, 이반 자신은 모스크바 대공에서부터 출발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크렘린의 어린 임금, 아니 ‘죄수’ 이반 4세는 이반 3세를 계승한 바실리 3세(Vasili III)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반은 대공 지위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적대적인 대귀족들의 틈에서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형식적으로만 대공이었으며, 크렘린의 탑 속에 갇혀서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불운한 소년이 머지않아 폐위되거나 암살될 거라고 여겼겠지만, 묘한 정치적 역학관계 덕분에 이반은 끝내 살아남았다. 그리고 16세이던 1546년 12월 말에 “내년에는 혼인할 것이며, 또한 차르로서, 전 러시아의 지배자로서, 즉위하겠다”고 선언했다. 1547년, 17살의 나이로 이반은 정식으로 대관식을 가졌다. 이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대귀족 끼리 파벌 다툼으로 싸우는 사이 하급 귀족과 상인들은 통일된 러시아가 탄생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때 이반은 그에게 비잔틴식 기독교 군주의 이념을 가르쳐준 수도 대주교 마카리의 권유로, 대공 대신 '차르'라는 칭호를 공식으로 채택했다.
(우 포스터: 1997년에 개봉한 애니매이션 '아나스타샤'. 러시아의 마지막 공주. 이반뇌제의 부인과 동명이인이다. 실제 러시아를 멸망으로 이끈 점술가 라스푸틴과의 대결한다.)
전에 할아버지 이반 3세가 차르를 칭한 적은 있지만 이 칭호로 황제의 자위에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3주일 후 그는 아나스타샤 로마노프와 결혼했다. 왕비의 가문인 로마노프 가는 명문으로서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로마노프 가는 1613년부터 차르로 즉위하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멸망). 이반은 결혼에 앞서 사려 깊게 자신의 배필을 골랐다. 그의 선택은 결국 옳은 것으로 드러났다. 1660년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아나스타샤는 포악함을 숨기고 있던 이반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선정을 펴도록 돕는다.
개혁입법으로 지방 정부의 자치권을 중앙으로 대거 귀속시키고 상비군을 창설하고, 토지제도를 개편해 “귀족의 토지세습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각자의 봉토는 황제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승인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반은 외교, 군사 부문에서 업적을 쌓아 러시아를 강하게 만드는 한편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할 힘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모스크바 공국을 위협해온 카잔 한국 정벌에 나서 1552년 병합하고, 흑해인근의 볼가강까지 진출했으며, 1556년에는 볼가강 하류를 장악하고 있던 아스트라한 한국도 러시아군에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투르크어로 '강'이라는 뜻을 지닌 볼가 강 전체가 아시아인의 강에서 러시아인의 강이 됐다. 동쪽 장벽이 뚫려, 러시아는 시베리아까지 넘볼 수 있게 됐다. 이반은 민중의 환호 속에 모스크바로 개선했고, 승리를 기념하여 대성당을 짓는다.
한편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과의 교역 루트를 개발했으며, ‘동방정교의 수장’이라는 호칭에 걸맞도록 투르크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티나와 이집트의 정교도들과 비밀 연락을 취하며 그들의 반 투르크 봉기를 후원하기도 했다. 이런 통치는 러시아의 대부분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연대기 작가들은 저마다 이반 4세의 치세를 “전반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뇌제”의 진면목 그러나 문제는 후반기였으며, 이반이 동양에서는 “뇌제(雷帝)”로 번역되는 “그로즈니(공포, 잔혹)”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이 시기의 통치 때문이었다. 그 전환점은 1553년, 이반이 중병에 걸렸을 때였다. 병명은 불분명해서 뇌염이라고도, 매독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그는 자신이 결코 일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생후 5개월 된 아들, 드미트리(Dmitry)에게 신하들이 충성 서약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반은 기적적으로 쾌차했으며,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선출회의의 주역들이 자신을 배반했음을 알고 치를 떨었다. 그러나 곧바로 그들을 숙청하지는 않고 다시 기회를 주려는 입장이었는데, 앞으로 정복의 주된 방향을 어느 쪽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도 차르와 선출회의의 입장이 대립했다.
선출회의는 동방으로 더 뻗어나가야 한다고 여긴 반면, 이반은 서방 공략을 염원했다. 당시 북극해를 통해 영국과 교역하고 독일과의 교류도 늘고 있던 러시아로서는 발트 해로 나가는 출구가 꼭 필요했다. 결국 차르의 고집대로 1558년부터 리보니아를 침공했는데 이는 스웨덴,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차르에 맞서 개입한 이후 막대한 손해만 거듭하면서 얻는 것은 없는 “진흙탕 싸움”으로 변해버렸다.
리보니아 전쟁에서 처음에는 러시아군이 승리했으나 이후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이 개입하면서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든다. 리보니아에 전 군사력을 투입하다시피 하다 보니 남부의 크림 한국과 동부의 타타르를 비롯한 외적이 침입해와 모스크바를 유린하는데도 제대로 맞설 수가 없었으며, 엎친 데 덮친 식으로 역병과 기근이 꼬리를 물면서 이반 4세의 인기는 바닥을 쳤다.
병의 후유증인지, 걸핏하면 성을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광기를 드러내던 이반의 자제심을 마지막으로 부순 것은 1560년,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Anastasia Romanovna)의 죽음이었다. 이반은 거의 광란에 빠졌으며, “사악한 반역자 놈들이 내 아내를 독살했다!”고 소리질렀다.
이로부터 자신의 측근은 물론이고 이복형 블라디미르와 그 친지들을 숙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귀족과 지방귀족을 가리지 않고 눈에 거슬리는 것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오프리치니키(Oprichniki: 흑위병, 16세기판 KGB)”라는 군대가 창설되었다. 검은 옷을 입고 개의 머리와 빗자루를 매단 검은 말을 타고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개는 차르의 적을 물어뜯고, 빗자루는 쓸어버린다는 뜻으로 이들은 이후 10여 년 동안 러시아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이 “흑위병”들은 오직 이반 4세의 말에만 복종하면서, 귀족이건 농민이건 가리지 않고 약탈하고 학살했다. 사람들을 끓는 물에 삶거나, 긴 꼬챙이로 꿰거나, 기둥에 묶고는 통닭 굽듯 천천히 돌려가며 굽는 등, 온갖 잔악한 수법이 자행되었다. 학살 중에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570년의 노브고로트 학살인데, 이들은 러시아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며 모스크바의 지배를 고까워해온 이 도시를 공격해서 1,500명의 지방귀족과 셀 수 없는 숫자의 평민들을 한꺼번에 살육했다.
그래도 귀족은 달아날 수라도 있었지만, 농민은 그나마 불가능했다. 무차별적인 탄압과 약탈에 질린 농민들이 남부나 외국으로 달아나는 일이 잦아지자, 이반 4세는 농민이 소속 토지에서 평생을 살도록 법을 고쳤다. 이것은 이후의 황제들에게 계승, 발전되면서 러시아 농노제의 기원이 된다.
교회도 무사하지 못했다. 공포정치 시대가 되자 이반의 교회 탄압은 무차별적으로 바뀌었는데, 동방정교회는 가톨릭처럼 이혼을 절대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좋지 못한 일로 여겼고, 네 번 이상의 결혼은 금지되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 황후를 잃은 뒤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 이반은 걸핏하면 황후를 갈아치웠고, 따라서 교회와 충돌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아홉 번 결혼했으며, 마지막 두 번은 결혼식조차 치르지 않은 채 살았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또는 그 시녀에게) 청혼했다는 말도 있다.
지나친 폭력과 무자비한 자신의 전제권이 횡포로 확립 되었고 러시아 특유의 차르 전제 체제는 이로써 기틀을 잡았던 것이다.
병의 후유증에다 계속되는 우울증, 수은 중독 등이 불러온 광기의 산물로 생겨난 공포의 끝은 자멸이었다. 1581년, 이반은 임신 중이던 황태자비의 옷차림이 단정치 않다며 그녀를 지팡이로 때렸고, 이 충격으로 그녀는 유산하고 말았다. 황태자가 이를 항의하려고 부황의 침실로 뛰어 들어가자, 이반의 지팡이는 황태자의 이마에도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잠시 뒤, 궁정의 신하들은 피투성이가 된 황태자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차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것이다. 아들이 죽고 난후 이반 뇌제는 자신이 처형한 사람들을 위해 직접 기도하며 참회를 구했다. 그에게 살해당한 사람수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만도 4095명에 이른다.
스스로 아들 이반을 해치고 망연해 있는 이반
아무튼 이로써 이반은 사실상 유일한 후계자를 잃었다. 그가 3년 뒤에 죽자(시종과 체스를 두던 중 뇌일혈로 쓰러졌다고 한다),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고 만다. 그 뒤 1614년까지의 시기는 러시아 역사에서 “혼란의 시대”로 불린다. 이반 4세의 아들을 참칭한 ‘가짜 황제’ 드미트리가 등장하는가 하면, 이반 4세 시절 잃었던 특권을 되찾으려는 귀족들과 농민들이 충돌하면서 폴란드가 개입, 한때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등 거의 망국의 위기가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여러 제도들, 차르 체제라는 큰 틀은 로마노프의 황제들에게도 계승 발전되면서, 근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만든 표트르 대제(1672~1725)
“러시아를 만든 사람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표트르 1세를 꼽을 것이다. 표트르 1세는 1672년 5월 30일에 태어났다. 10대 청소년 시절 표트르는 공식적인 공부는 게을리 하면서, 이런 저런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며 전쟁놀이와 궁정놀이 등을 하며 보냈다.
파격적이며 관습에 구애되지 않던 표트르는 2m가 넘는 거구로 성장했다. 그는 러시아를 넘어 더 넓은 세계를 꿈꾸었고, 마침내 서유럽 유학에 나서서도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다녔다. 그는 러시아 황제의 신분을 감추고 공장과 박물관, 병원, 대학과 천문대 등을 열심히 견학하고 다녔으며,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직접 손에 망치를 들고 배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영국에 갔을 때는 당시 세계 최강이던 해군을 배우는데 온 힘을 쏟았고, 영국 해군의 명예 제독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표트르는 낙후된 러시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해 있던 서유럽을 돌아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영혼에 깊이 새겼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러시아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서구식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만 한다.”
표트르의 유학은 1698년, 소피아가 본국에서 쿠데타를 시도함으로써 갑작스레 중단되었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장군들의 손으로 반란이 진압된 뒤 러시아를 전혀 다른 나라로 탈바꿈시키는 개혁이 시작되었다.
17세기의 러시아는 ‘은둔의 왕국’이었다. 서구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을 뿐 아니라 뒤졌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국교인 러시아정교는 가톨릭 또는 개신교인 서유럽의 문화적 영향을 못마땅해 했고, 아직도 중세적 특권을 누리고 살던 귀족들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19세기 말 조선의 쇄국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꽉꽉 막혀 있던 사회가 당시의 러시아 사회였다.
표트르는 이런 뿌리 깊은 사회관습에 그야말로 ‘가위를 들이대고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그는 귀족들을 만찬에 초대해 다가가서는 긴 수염을 붙잡고 가차없이 가위질을 해댔다. 땅에 엎드려 눈물로 호소해도 아랑곳없었다. 그래도 굳이 수염을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물렸으며, 1년이 지나자 그 세액은 새로운 함대를 건설할 만한 돈이 되었다. 또한 동양식의 풍성한 옷을 없애고 서양식 양복을 입게 했으며, 역법 역시 유럽이 쓰던 것과 같게 바꾸었다. 문자도 간소화하여 쓰기 편하게 바꾸었다.
서구문물을 거부하던 교육과는 정반대로, 귀족의 경우 외국어를 익히지 못하면 귀족 신분을 박탈당하게 했다. 교회도 개혁하여 황제가 정점에 서는 위계적 조직으로 재편성했다. 이런 급진적 개혁이 저항을 가져오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표트르 만의 카리스마로, 그리고 잔인할 정도의 가혹하고 철저한 형벌 제도로 거침없이 러시아를 뜯어고쳐 갔다.
하지만 이런 모든 개혁은 가장 큰 시험대를 통과해야 했다. 바로 전쟁이었다. 표트르는 먼저 남쪽으로 투르크를 공격할 생각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면 대안은 북쪽이었다.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해야만 개혁도 계속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고, 개혁의 목표인 ‘강대국 러시아’도 실현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걸고 폴타바 전투에 임했다.
북방전쟁에서 승리하고 발트해를 바라보는 표트르 1세
전투는 치열했다. 선두의 표트르는 총상을 입었으나 꿈쩍도 않으며 계속 싸우고, 격려하고, 지휘했다. 10년 넘게 이어진 북방전쟁을 통해 결국 발트 연안을 되찾았다. 북방전쟁은 그 뒤로도 10년을 넘게 끌었으나, 사실상 이 싸움으로 승패는 판가름이 났다.
승리한 결과 오래 전 잃어버린 발트 연안을 되찾은 러시아는 새로운 북방의 패자로 떠올랐고, 표트르는 더욱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귀족회의인 두마는 그에게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바쳤다. 그에게 영광의 기념물은 무엇보다도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였다. 표트르는 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완전히 유럽식으로 건설했고, 그곳은 발트 해를 한 손에 움켜쥔 군사적 요충지인 동시에 러시아의 ‘서쪽으로 열린 창’으로서 서구문물의 본격적인 유입지가 될 것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1722년에 14관등제도를 마련하여 관료제도를 실적에 따라 정해지는 근대적 관료제도로 개편했다. 또 러시아 최초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기존의 토지세와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도입했다. 이 밖에도 행정, 군사, 경제, 문화, 교육, 종교 등에서 전방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표트르의 개혁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근대화’ ‘서구화’는 반쪽짜리였다. 유럽의 앞선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정, 산업, 교육 제도는 열심히 모방했지만 정치적 자유와 사상적 자유는 외면했다.
그의 개혁으로 구시대에 머물러 있던 귀족제도가 합리적으로 재편성되고, 그 위에 황제의 절대 권력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의회민주주의가 도입되지도 않았고,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인 농민과 농노는 여전히 중세적인 속박에 묶여 있었다. 아니, 인두세 도입 등은 그들의 생활을 더욱 괴롭게만 했다. 그것은 표트르의 개혁 목적이 애당초 “러시아를 부강한 나라로 만든다.”는 데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와 왕자가 세상을 떠나자 표트르의 몸과 마음은 눈에 띄게 피폐해졌다. 표트르는 마음의 고통을 오로지 술로 풀었다. 지나친 음주로 요독증에 걸리고서도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자, 이 초인의 강인한 육체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그가 쓰러지자 개혁은 방향을 잃었고, 그 틈을 탄 귀족들이 슬금슬금 과거의 기득권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1724년 말에는 최후의 타격이 왔다. 그가 평생 사랑했고 의지했던 황후, 예카테리나(밑의 예카테리나와 다른 인물)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불거졌던 것이다. 그 대상자인 남자를 다른 죄목으로 엮어서 처형하고 두 달 뒤, 대제는 죽음을 맞이했다.
“내가 이룩한 이 모든 것들을, 나는···.” 빈사의 황제는 여기까지만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1725년 1월 28일이었다. 표트르가 채 마치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자랑스럽게 여긴다”였을까? 아니면 “···후회한다”일까?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감탄했고, 러시아 땅에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 뚜렷하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그의 행동이 또한 러시아의 모순을 심기도 했고, 그 자신과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기도 했다.
예카테리나 대제
예카테리나 2세(대제, 1729년 5월 2일 - 1796년 11월 17일)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제위 기간: 1762년 - 1796년)이다. 행정 개혁과 내치, 문예 부흥 등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계몽 전제 군주'라고 평할 수 있다.
그녀는 본래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강한 독일을 이끌고 있는 메르켈 총리의 집무실 뒷벽에 예카테리나 대제의 그림이 크게 걸려 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았으며, 화려한 바람기와 남성 편력은 너무도 유명하였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가 되었다.
표트르 1세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예카테리나는 큰 공적으로 인해 러시아의 영웅이자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으로도 평가된다. 그녀는 영토 확장과 민생 안정, 내분 수습, 경제 발전 등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국력을 대폭 신장시켰다. 내각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하였다.
정변으로 황권을 얻어 그녀는 국내 정치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예카테리나 2세는 대외 정치에서 그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처음 착수한 계획은 동방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민족 및 우크라이나 민족의 주거 지역을 폴란드로부터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자신의 2번째 손자인 콘스탄틴을 새로운 그리스 제국의 황제로 앉히고자 하였다. 이 계획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넓히는 데에 그녀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을 이용했다.
2회에 걸쳐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승리와 프로이센과의 3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 등으로 서쪽과 남쪽으로 팽창해 20만 평방 마일 이상의 영토를 넓혔으며, 러시아의 통치자들이 오래도록 꿈꾸어온 흑해의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다넬스 해협을 비롯한 오스만 제국의 영해 내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서유럽보다 훨씬 뒤처져 있는 러시아를 문명사회로 변모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문학, 예술, 과학을 장려하고 새로운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힘썼다. 그래서 대규모 예산을 교육에 투자하고 수많은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또한 자신의 자금을 풀어 100개가 넘는 새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옛 도시들은 확장되고 새로이 단장되었다. 풍부한 상품과 함께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졌으며 교통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족의 반란 등으로 국내 사정은 매우 혼탁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젊은 시절의 자유주의적 이념에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또한 유럽의 여러 군주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프랑스에 군주제를 부활시키자고 호소했다. 이것이 차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의 빌미가 된다.
(우=> 상트페테르부르크)
제정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대제가 1701년 러시아 서북부의 황량한 습지에 계획도시를 건설할 것을 발표. 작은 오두막을 짓고 직접 공사 현장을 지휘한 표트르 대제 덕분에 황량하기 그지없었던 습지가 도시로 탄생.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12년 새로운 수도가 되어 1918년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기기 전까지 러시아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흔히 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창이자 진정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도시이다. 구소련 때는 레닌그라드로 불렸다.
1793년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당황하게 되었고 예카테리나 2세는 건강이 악화되어 앓아눕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외교 및 통상 관계를 단절하였다. 1796년 67살이 된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별궁에서 요양하던 중 사망하였다.
(‘러시아의 역사’와 ‘연도별 사건’은 다음 편에 알아보자)
첫댓글 표도르가 앞에만 잠깐 등장했다고 실망하셨을텐데요. 푸틴은 표도르 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ㅜ,,ㅜ 떡밥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