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읍의 진산인 성황산에 있는 서림 공원 입구에,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매창(梅窓)의 시비가 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 시비에 적힌 시조>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그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음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 쓴 시이다.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서운해 하면서 가버렸다. 계랑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났으므로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매창은 1590년 무렵 부안을 찾아온 시인 촌은 유희경과 만나 사귀었다. 매창도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매창도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남겼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쓰인 그의 시들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自恨, 허경진 역>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년을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이듬해(1610) 여름, 오랜세월을 정신적 교감을 주고 받았던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이를 슬퍼하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哀桂娘(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그가 죽은 후 45년 후(1655)에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에 그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사람들이 이 시집을 찍어달라고 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 어느 쌀쌀했던 날, 문우들과 매창뜸을 찾아 그녀의 시비 앞에서
가슴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떠올라 이 글을 발췌해 올려 봅니다. 소래포구-
첫댓글 포구님아.. 좋은 글 읽게해줘 고맙심데이~. ^^ 음악또한 一品에네여.^^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부안의 매창이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설들은 잘 지내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