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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수필가협회 하오명자문위원님께서 제 1회 경맥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지난해 8월 16일에 시상식을 가졌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나와 있습니다.
제 1회 경맥문학상 수여
경맥문인협회, 경맥동문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경맥문학상 수여
경맥문인협회는 경맥문학 제 6호 발간 및 개교 제 117주년(대구고보 100주년)을 기념하여 경북중·고등학교 동문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2016년 제 1회 경맥문학상>을 수상하기로 하였다.
첫 번째 경맥문학상 수여인지라 그 방법과 작가 선정 등에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였다. 먼저 수상자를 제1회부터 제36회까지 동문 작가로 한정하였다. 그 중에서 작고한 동문 작가와 생존한 동문 작가분들 중에서 각 한 분씩을 선정하여 수상하기로 하였다. 수상자 선정은 경맥문인협회가 위촉한 3인의 심사위원께서 정하기로 하였다. 금년에는 36회 이규직 수필가(심사위원장), 44회 이원락 수필가(제 2대 경맥문협 회장), 44회 김범선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가 담당해 주시기로 하였다.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기념품이 증정된다.
경맥문학상 수상 작가를 선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작고하신 경맥문인의 경우 (대구고보 1회 ~ 36회 중)
1) 객관적인 작품집, 수상 경력 등으로 문학적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기신 분
2) 경맥문학지에 원고가 한 번이라도 게재된 분
3) 경맥문인으로서 후배에게 자랑스러운 면모를 남기신 분
4) 기타
둘째, 생존하신 경맥문인의 경우 (대구고보 1회 ~ 36회 중)
1) 객관적인 작품집, 수상 경력 등으로 문학적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기신 분
2) 경맥문학 지에 원고가 한 번이라도 게재된 분
3) 경맥 동문회와 경맥문학 발전을 위해 헌신한 분
4) 기타
경맥문협과 경맥예총이 재학생 후배들을 대상으로 경맥문학상과 경맥음악상을 심사하고 수여한 적은 있으나, 경맥 동문을 대상으로 경맥문학상을 수상한 적은 대구고보 100주년이 되는 금년(2016년)이 처음이다. 내년(2017년) 경맥문학상 수상자는 1회에서 40회 동문 작가분들 중에서 각 한 분씩을 선출할 예정이다.
제 1회 경맥문학상 심사평
제 1회 경맥문학상 수상자 후보를 대구고보 1회부터 36회까지로 한정해도 너무나 많은 분들이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래도 불가피하게 후보군을 압축할 수 밖에 없었는데, 먼저 작고하신 분들 중에서는 널리 알려진 백기만 선배(대구고보 2회, 시인, 전 경북문학협회 회장)와 이효상 선배(대구고보 4회, 시인, 전 국회의장), 이설주 시인(대구고보 11회) 그리고 이윤기 소설가(대구고보 49회, 그리스, 로마 신화 전문가) 등이 물망에 올랐다. 친일 행적이 너무 뚜렷하신 분들은 제외되었다. 심사위원들은 그중에서도 자신의 시세계는 물론이고 이상화와 이장희를 소개하는 등 한국문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신 목우 백기만 선배를 제1회 경맥문학상 수상자로 뽑자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백기만은 빼어난 문인이셨을 뿐만 아니라, 1919년 3.8 대구만세운동에서도 학생대표로 활약한 독립 지사로서 지금 그 유해는 신암동 선열공원에 모셔져 있다. 백기만은 <대구시민의 노래>도 작사하였다.
생존 동문 작가분들 중에서는 손장락 시인(28회, 의사), 이문희 시인(35회, 전 가톨릭 대구대교구장), 하오명 수필가(36회, 전 죽순문학회장), 김상훈 시조시인(전 부산일보사 사장)등이 후보에 올랐다. 이 중에서도 하오명 수필가는 제4대 죽순문학 회장으로서 한국 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수필가, 시인, 약사, 경제학박사, 기업경영인, 대학교수, 차(茶)전문가, 서예가 등 팔방 문화인으로서의 면모를 갖고 있다. 하오명은 첫 수필집 「녹두빛 찻잔」을 쓰면서 ‘차와 문학’을 표현했고, 두 번째 수필집 「풀꽃 편지」에선 ‘서예와 문학’의 어울림을 표현하려 애썼다. 하오명의 문화사랑, 대구사랑, 모교사랑, 후배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상하 기념회, 이상화 시비 건립에도 앞장 섰다. 하오명의 모든 것을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므로, 그가 2010년 6월 21일 죽순문학회에 발표한 <깊은 생각, 넓은 사랑>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 자신이 깊은 생각, 넓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6년 9월 1일
제 1회 경맥문학상 심사위원 수필가 이규직(36회, 심사위원장)
수필가 이원락(44회, 전 경맥문인협회 회장)
소설가 김범선(44회,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깊은 생각, 넓은 사랑
하오명, 36회
진실을 노래하는 민족시인, 민족서예가를 만났다.
필자의 부모는 팔공산 남쪽 영천 신령이 고향이다. 아버지의 개화(開化)덕분에 도시 진출이 이루어져 필자는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과 상화 고택과는 불과 50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광복 전, 어린나이에 비포장 길 앞에서 오가는 사람, 지나가는 차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때로는 바람개비를 돌려보고, 연도 날렸다. 그 때 흰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잘 생긴 어른이 지나갔었다. 지금 생각에도 병색이었다. 그가 바로 민족시인 이상화 선생이었다.
계산동 뽕나무 골목은 명나라 두사충과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거기에 민족서예가 회산(晦山) 박기돈 선생의 댁이 있었다. 文友 김상영 교수의 외할아버지여서 가끔 그 댁을 찾아갔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각>, 쌍계사의 <적묵당>, 파계사의 <산신각>의 수려한 필치가 그 분의 작품이었다. 회산 선생은 서예가 겸 경영자여서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 현 대구상공회의소 전신) 초대회장을 지내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한 민족의식이 투철한 분이었다. 회산 선생의 서예, 한의사였던 처조부(妻祖父)의 서예, 가친(家親)의 서예와 현사(玄史) 김승호 선생 등의 가르침으로 서예에 도전도 했었다. 그 만남들이 나를 아마추어 서예가의 길로 이끌었다는 생각이 든다. 팔공산 용수동의 명상, 행선(行禪)의 오솔길에 <묵연(默然), 불연지대연(不然之大然)>이라는 석각을 한 것도 넓은 문학의 길을 열어 준 셈이다.
상화 고택(상화기념사업회)에 들러 일을 마치면 윤장근 회장과 회산선생 고택인 안빛고을 식당에 가서 시락국(시래기국)을 먹는다.
조선조 마지막 선비 회산선생을 만난 것 같은 감동을 느낀다.
<경북문학협회> 최연소 회원이 되다.
대구대학(현 영남대학 전신) 재학 중 현대 문학에 희곡을 응모해 후보작이 되었지만 능력의 한계를 느껴 그만 두었다.
그 뒤, 단편소설 <행렬(行列)>, <회색지대>를 써서 구대학보(邱大學報-대학신문)에 연재했었다. 소설이 인연이 되어 당시 학보사 편집국장 하봉룡 선배의 권유로 취미, 젊음, 계절, 여행의 글을 쓰다가 「구대문총(邱大文叢)」의 편집을 맡아했었다.
하봉룡 선배가 “오명이는 수필이 적격이야, 수필을 써!”하던 권유가 문장수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수필의 길에 들어서버리게 했다.
훗날 Y일보 문화부장이 된 하봉룡 국장의 부름으로 S다방으로 갔다. 계산동 시절에 알았던 몽재 이원식 선생이 함께 있었다.
“이 선생님 잘 알지? 백기만 시인과 경북 문협을 만들려는데 젊은 문인이 필요하다기에 자넬 추천했어. 괜찮겠지?”
“제가 자격이 됩니까?” 라고 사양했지만 이 선생이 이미 명단에 이름을 적은 뒤였다.
20대인 1958년에 경북문학협회 창립 회원이 되었다.
어느 날, 석우(石牛)선생과 몇몇 문우들과 더불어 비슬산의 J문인의 전기(傳記)문학관에 들른 적이 있었다.
지난 문학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둘러보던 어느 문우가 “아, 여기 동명이인이 있네요, 하씨는 드문 성인데… 하오명이라고 50년대인데…”
그 때 석우 선생이 웃으며 “그 동명이인이, 바로 이 하오명이야!”
그래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늘 대구가 자랑스럽고 대구를 사랑했다.
새로 부임한 방송사 사장과 독대를 한 적이 있었다. 문화도시, 전통도시 대구를 위해 남성로에 대구 성문-영남제일관을 세워 줄 것을 제의했다. 그는 나를 한참동안 한심한 듯 바라보더니
“하 선생! 대구의 젊은 경영자가 낡은 성문 만들기 운동을 제의하다니… 정말 대구의 장래가 큰 걱정이오.…” 스포츠를 즐기던 그 분 취향엔 대구의 얼이 담긴 문화재 복원이란 것이 복고조의 후진성 같은 느낌이었나 보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정채진 시장과의 만남에서 영남웅도 대구를 위해 금호강 큰 언덕위에 <대구성문세우기>를 제의했었다.
“참 좋은 생각이요. 추진해봅시다.” 그 분은 박대통령의 펜라이터였다. 문학적 감각이 있는 분은 감흥이 달랐다. 공보실장인 곽무열 형이 중심이 되어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실물의 1.5배 크기로 동대구 진입로에 대구성문이 우뚝 세워졌다. 몇 년 뒤, 대구 JC(청년회의소)와 자매를 맺은 전주 JC에 부탁하여 전주 풍남문에 비치된 <조선조 대포>를 기증받으려 했으나 전주 측의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해 아쉽게 생각되었다.
그 무렵 틈만 있으면 문우(文友)인 M신문 김경환 형과 문경 도요지, 합천 도요지로 뛰어다니곤 했었다.
“하형! 「죽순(竹筍)」은 대구만의 시지(詩誌)가 아니야. 우리나라 최초의 시지(詩誌)야! 자네가 좀 참여하게. 석우(石牛) 선생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게 안쓰러워. …” 많은 얘기가 오갔다.
“참여하겠네!”
김경환 형, 석우 이윤수 선생과 다방에서 만났다.
“석우 선생님! 달성공원의 상화시비를 탁본해서 한지에 인쇄합시다. 500部정도 만들어 죽순지에 부록으로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그 경비만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요. 해 봅시다. 서울의 지도 제작사를 내가 알아요,…”
석우 선생은 솔직하고 정열적이며 행동파였다. 여름 무더위에 한지 500장을 메고 서울지도제작사를 찾아 인쇄를 했었다.
상화 詩 <마돈나>탁본은 인기가 있었다. 상화 시인의 아드님이 십대 때 쓴 필체인데 소박하면서 친근했다. 어떤 문인은 “「竹筍」誌보다 상화 詩 탁본이 탐이나 서점에서 「죽순」을 샀습니다.”라고 말했다.
몇 년이 지나 석우 선생, 박동희 선생, 이광달 화백이 함께한 자리에서 “전국지 「죽순」이 거듭나기 위해, 상화 시인상을 제정하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소장한 박통의 메달을 참고삼아 이광달 조각가가 부조로 금메달을 조각하면…” 덩달아 이 화백은 “석우 선생이 상화시인상을 제정하시면 저는 상화 흉상을 만들어 시상품으로 기증하지요.”라고 제의했다.
“하하하… 그래요.…” 석우 선생이 어린애처럼 웃었다.
“합시다. 구상(具常)선생을 앞세워 전국 최고의 시인상을 만들겠소!”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 24회째 내려오는 상화시인상이다.
K방송사 서정호 총국장의 전화가 왔었다.
“하선배님, 대구 총국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문안드립니다.”
“방송사 자문위원장을 했어도, 총국장의 전화를 직접 받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저녁에 만납시다.…”
서 총국장, 최진근 국장과 자리를 함께 했었다.
“선배님, 지난번엔 도지사께 건의해서 조지훈 시인의 「다부동에서」라는 시비(詩碑)를 다부동에 세웠습니다.…”
“참 좋은 일을 했네요.… 부탁이 있습니다. 대구시민을 대신한 부탁입니다.”
“무슨 부탁인데요?”
걱정스레 나를 쳐다봤다.
“어렵겠지만, 대구엔 자랑스러운 인물 전신상이 없습니다. 총국장도 시인이니까, 민족시인인 상화시인 동상을 세워봅시다.”
“아니, 1, 2억 들텐데요.…”
그는 술잔을 들이켰다.
“예총의 문 곤 회장이, 미협 회원 그림 200점정도 내놓고, K방송사에서 팔아주면 1, 2억 모금이 되겠지요.… ”
“…최국장 되겠어요?”
“예, 총국장의 의지만 확실하다면 가능합니다.”
상화시인 동상 건립은 추진되었다. 상화 시인이 책을 두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손에는 만년필이 쥐어져 있다.
장난기 있는 사람의 소행으로 만년필은 두 차례 도난당했었다. L조각가에게 만년필이 더 있느냐고 물었다.
“예. 시민의식을 염려해서 여분으로 세 개 더 만들어 두었습니다.”
모두들 웃었다. 지금도 상화 동상 앞에 가면 만년필을 먼저 살피는 것이 나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상공회의소에도 문학이 있다.
서울의 「마케팅」지(誌)에 글을 쓰게 된 것은 문학청년 김규창 교수 덕분이다. 경영강의, 경영글에도 문학적 소양이 있으면 수강자에게 강의가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대구 상공회의소 의원을 하면서 「대구상의(大邱商議)」誌의 편집을 맡았었다. 경영이란 큰 사막 속에 문학은 오아시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산의 묘소, 묘비 조성은 김홍식 회장의 추진으로 이루어졌다.
본초제약(本草製藥)을 경영하면서 회사 홍보물, 개별 약품 안내지에도 문학적 풍류를 심으려고 애를 썼다. 그 때 문인(文人)으로서의 글짓기가 경영업무 속에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는 행복감에 젖곤 했었다.
수필가도 가끔 시(詩)는 아니지만, 시형식의 글을 쓴다.
대구 M방송의 <하느님의 정원>이란 프로그램이 이틀간 방영된 적이 있다. 연출가인 공재성 국장은 베네딕토 수녀원장에게 한 해 동안 촬영 중 “11월에 눈이 오면, 하느님이 계시고, 눈이 안 오면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라고 얼음장을 놓았다고 했었다.
수녀님들의 기도덕분인지 11월에 눈이 내렸다. 그 프로를 보면서 詩형식의 글을 썼다.
하느님의 정원(庭園)
성(聖) 시간이 멈춘
성스러운 정원
베네딕도 수녀원은
기도하고 일하는 은혜와 축복의 땅이다.
미(美) 눈 나리는 정원의 성모상
기도하는 수녀님들
숲 속 붉은 벽돌집
경건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집 정경(情景)
기(祈) 감사, 아침, 묵주, 낮, 저녁
끝기도로 이어진
하느님을 향한 찬미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
공(共) ‘기도하고 일하라’는 가르침은
묵상, 기도, 독서, 청소, 식사
운동, 합창, 봉사 함께 하며
공동체의 기쁨과 행복을
심고 길렀네.
학(學) 영성교육, 음악, 농사, 음식, 체조
무용, 봉사 등을 전인교육으로 익혀
인내와 헌신으로
실천했었네.
희(喜) 늘 기쁨, 사랑과 평화의 인사
성지순례, 봉사의 바자회, 사물놀이
소박하고 마음이 가난했기에
그토록 기쁘고 행복했었네.
필자가 붓글씨로 직접 이 시를 써서 선물하자 베네딕토 수녀원에서는 액자에 넣어 현관에 걸어두고 있다.
필자는 첫 수필집 「녹두빛 찻잔」을 쓰면서 ‘차와 문학’을 표현했고, 두 번째 수필집 「풀꽃 편지」에선 ‘서예와 문학’의 어울림을 표현하려 애썼다.
대구수필의 일원이 되면서 회원의 에세이집 출판을 축하하기 위해 서판에 ‘글과 풀꽃’을 담아 주었었다.
서울의 S신문 사장 문태갑 선배가 고향에 돌아왔다. 서울서 하던 풍류모임-송지영, 윤길중, 정주영 씨 등-을 대구서 해보자며 화가, 조각가, 문필가, 시인, 음악가, 다인(茶人)등이 어울려 삼목회(三木會)를 하자고 해 여섯 사람이 동의했었다. 목적은 대구권의 작은 문화운동을 하자는 뜻이었다.
모두 풍류와 해학이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필자는 특별한 재간이 없다. 그래서 두루마리에 <詩형식 글>을 써서 대구사람을 위해 「대구(大丘), 대구(大邱)여」를 낭송했었다.
대구, 대구여!
푸른 하늘 힘찬 산맥
달구의 벌판을 품고
비슬의 넉넉한 가슴
팔공의 웅혼한 기백으로
넘어져도 일어서는 대구여
우리는 늘 오뚜기
푸른 숲 맑은 물이
개울길 열어 땅을 깨우고
맑은 신천, 청정 금호강
천리물길 낙동강이 세운
아름답고 큰 언덕 대구여
우리는 늘 상록수
사랑, 감동, 희망의 도시
인정 넘치는 골목길
스카이라인 높아서 활기차네.
자연과 풍류가 어우러진
고운 눈매, 힘찬 가슴, 대구여
우리는 늘 파이오니어!
작은 한일(韓日)문학모임을 하다.
석우선생은 일본 큐슈의 시인 미나미 구니카즈(南邦和) 선생을 죽순회원에게 소개했었다. 원산(元山) 태생이고, 백제와 조선을 사랑하는 시인이었다. 무용詩 「백제의 환상」을 일본에서 발표했다. 백제의 멸망과 그 후의 얘기였다. 그는 꾸준히 신라와 조선의 이야기도 시로 썼다. 문인이 민간외교를 할 수 있음을 제시한 셈이다.
석우선생은 오사카의 「사꾸(柵-울타리)」시지(詩誌)의 시가히데오(志賀英夫)편집장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 뒤 죽순회장 윤장근 선생은 많은 문인의 작품을 번역하여 「사꾸」誌에 게재해 주었다.
윤 선생의 주선으로 일본 큐슈 다카치오에서 한일문학모임을 가졌고, 제주에선 이일향 시인의 후원으로 <한일작은문학회>를 가졌었다.
제주 유기농 차밭인 경덕원 풍경을 그려준 나가하라도후(中原道夫)시인의 그림은 경덕원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사꾸」詩誌에 표지화를 그리는 80대 신석필 화백의 그림도 우리 문인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가 <한일작은문학회>에서 발표한 시는 「어깨동무」였다.
어깨동무
하늘이 열리던 날
넓디넓은 몽골계 유목민
한줄기는 몽골, 만주, 고조선 족
바다건너가 일본을 이루었네.
벼농사, 젓가락, 도자기, 쇠붙이
한자(漢字)같이 쓰며
석굴암 부처님, 奈良 東大寺 大佛
모두 배우고 가르치며
어깨동무 했었지.
곳곳이 벚꽃, 무궁화 피고지고
몽골 반점조차 함께 했고,
솟대와 도리이(鳥居)는 닮아도
하나는 선비나라
또 하나는 무사나라
그땐 어깨동무는 풀었었다.
이제
세상이 좁아졌네.
문화의 시대, 세계화의 시대
아리랑을 함께 노래하자.
사쿠라도 함께 부르자.
마음의 어깨동무,
풍류의 어깨동무를 해 가자꾸나.
우리의 홍살문과 솟대 그리고 일본의 도리이(일본 신사의 일주문)를 비교하여, 임진왜란 때 우리는 평화로운 문사(文士-선비)였고, 그들은 공격적인 무사(武士)임을 빗대고 싶었다.
한 우물을 파지 못했다.
내 천직은 약사(藥師)다. 약사로 만족치 않고 평생을 강단에 서서 경영, 건강, 차(茶)를 얘기 했었다.
Y대학은 후기에 겸임교수로 발령해 주었다. 가장 오랫동안 나를 지탱한 것은 문학이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중국인의 인생노정에 <반로가출(半路家出)>이란 말이 있지 않는가.
퇴임 후, 새로운 인생항로를 개척한다는 말이다. 나의 반로가출은 분명 문학, 차(茶), 서예, 그리고 문화기행이다. 여기 공통점이 있다. 이 모두는 미학(美學)이기보다 인간학(人間學)이 중심이 된다. 나는 수필가다. 그래서 행복하다, 앞으로 인간학에 뿌리를 둔 수필을 쓰면서, 보람 있는 인생길을 걷고 싶다. 노후에도 문학이라는 고향이 있어 행복감에 젖는다.
인간학은 무엇인가. <사랑과 진실>이 아니겠는가. 나 또한 <사랑과 진실>이라는 화두를 잡고 넓은 세상을 살고 싶은 것이다.
문학은 독자에게 생각과 감동을 준다.
문학에서 생각이란 넓은 생각, 깊은 생각 그리고 창의적인 생각이다. 나의 문학 활동은 감동을 주기보다 생각 찾기에 더 몰두하였다고 믿는다.
작가 尹章根 선생은 필자의 에세이집 「녹두빛 찻잔」을 이렇게 서평했다.
<서평> 하오명 에세이집 「녹두빛 찻잔」을 보고
尹章根(作家)
수필은 수필다운 맛과 멋이 있어야함은 재론의 여지도 없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에세이집이라는 명칭을 붙인 많은 책자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대개는 허잘 것 없는 신변잡기들이다.
사실 수필은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이라지만 거기에는 생활과 예술의 항적이 있어야 하고, 또 인생의 명암이 여울처럼 흘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수필의 생명인 리얼리티를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격조와 기품이 깃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내 생각이다. 설령 문장이 좀 미숙하다해도 격조와 기품 있는 문장을 대하게 되면 뭉클한 감동을 갖게 되는 바로 여기에 수필의 지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둠에 눈이 익으면 사물의 정체가 확실해지듯 품위 있는 수필은 읽으면 읽을수록 삶의 진실을 정확히 보게 된다.
1장 <또 5분 늦었군>, 2장 <건강 에세이>, 3장 <경영 에세이>로 구성된 하오명의 수필집 「녹두빛 찻잔」을 읽어보고 느낀 소감은 문학에의 관심과 향토애, 건강과 경영의 묘를 주제로 한 이른 바 생활의 수필이라는 것이었다. 불수감(佛手柑)이라는 과일은 그저 향기를 즐기는 것이지 결코 먹는 것이 아니다. 먹어서 영양을 섭취하는 실용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오명의 에세이는 불수감 같은 감상용이 아니라 생활의 길목들에서 실제로 보고 느낀 경험담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누구나 쓸 수 있을 것같이 보이는 평이한 문장, 누구의 눈에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문장, 그러나 특수한 직업적 세련이 이 시대의 감각적요소와 잘 접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듯 만들어진 언어는 생명력이 없다. 논리성이 희박한 우리 언어가 냉철한 지성과 우아한 품격을 요구하는 수필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수필가들은 숙명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
이 고독을 하오명은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그에게 거는 기대와 함께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궁금증이다. 문학연조가 짧지 않는 그로선 건전한 일상인으로서만 아니라 감성의 수필인으로서도 꾸준히 제 갈 길을 걸을 줄로 안다.
금호강 둑에 이설주 시인의 「금호강」詩碑를 세우다.
이설주 시인 詩碑 건립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송영목 죽순회장과 공동으로 금호강 변에 4m 높이의 거석(巨石)에 「금호강」詩를 새겨 세우던 일이 꿈만 같다.
따님인 이일향 시인과는 수변공원에 이 시인의 시비 건립 때 함께 일한 인연이 있었다. 「시인의 길」을 만든 채희복 선생 댁의 자연석을 선정했다. 금호강 관리는 대구시가 아니라 부산국토관리청 소관이었다.
몇 차례, 서류검토로 가을 건립예정이 한겨울로 연기되었다. 금호강 세찬 강바람에 공사 관리하느라 독감으로 고생했다. 건강을 염려해 따라온 아내도 감기와 폐렴을 앓았다.
나의 불찰이었다. 차안에서의 기온과 강둑의 세찬 바람을 대비치 못해, 자초한 셈이었다.
대부분의 詩碑는 눕혀서 석각을 한다. 그러나 설주시인의 시비는 자연석을 세운 뒤 석각을 하는 힘든 작업을 했었다.
<대구의 약령시축제>를 시장에게 제의했다.
경북과 대구의 통합된 경상북도 약사회장 시절 대구시장을 설득해 대구시 축제 속에 <약령시 축제>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추진과정에서 약령시측, 한의사측은 ‘약사회 배제론’이 나와 축제에서 제외되었다.
3년 동안 공들인 <한독의약박물관>이동전시, <일본 도야마 의과 약과 대학의 동물생약(호랑이 성기, 곰쓸개, 사향 등…>을 전시하는 <대구생약전시회>개최로 대구 축제를 축하했었다.
대구수필문학과 茶
(社)우리茶문화연합회, 대학원에서 <茶와 茶學>강의를 오랫동안 했었다. 2003년엔 대구광역시 음식박람회에 출품한 모든 음식을 제치고 <희락차(喜樂茶)>라는 차와 이론으로 대상을 받았다. 희락차는 茶와 꽃과 민차가 조화를 이룬 차다.
“우리도 하선생의 희락차 한번 마셔 봅시다.”라고 해서 늘 내 茶가방 속에 다기(茶器), 녹차, 발효차, 화차(花茶)가 들어 있다.
대구 수필의 문우들을 매월 만나면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차를 우렸다. 몇 년 지나니 젊은 여회원은 자청해서 다동(茶童-차 서빙하는 사람)이 되어 주었다.
대구 수필의 홍 억선 선생 수필 교실에서 <차와 문학>이란 강의도 했고, 대구 수필가 협회 장호병 선생 수필교실에서도 영상물 강의를 했었다.
대구수필은 일박이일 문학기행을 간다.
나는 다양한 茶를 준비한다.
“왜, 남들은 좋아하지 않을 텐데, 굳이 茶가방을 챙겨요?” 아내의 핀잔이다.
“대구수필회원은 커피보다 차 마니아가 많아졌어. 두 차례, 세 차례 마시거든…. 여보, 나는 다기와 차를 준비하는 게 즐거워.…”
오늘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대구 수필 사무국장이었던 김인기 선생의 글이었다.
“마냥 茶人인 河五明 선생님께
…그간 선생님 덕분에 茶煙에 많이 젖었습니다.…그 무엇이든 지극한 경지는 역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찻잔을 그윽이 바라보며 기다리듯 글도 그렇게 기다려야 하겠지요.…“
아내도 편지를 읽으며 茶봉사의 고마움을 이야기 했었다.
국내 문화기행은 글쓰기를 이끌었다.
영남권의 향토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 모여 <영남문화회>를 만들었다. 역사학자를 대동한 답사와 해설이 옛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강원도 월정사, 상원사, 충청도, 호남, 북부 경북 둥의 사찰과 서원을 둘러보았다. 답사지를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의 해설과 현장에 모여 탑과 옛 건축물의 이모저모를 설명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약사후배들과 더불어 약석산악회(藥石山岳會)를 만들어 산행과 문화기행을 하는 것도 거의 30여년이 된다. 영남문화회에서 들은 지식으로 필자가 가끔 해설을 하곤 한다.
근년엔 <일박이일팀>을 만들어 예향(藝鄕)과 문향(文鄕)을 찾는다.
특히 통영 기행이 크게 기억된다.
통영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다. 통영이란 지명도 충무공의 통제영에서 따왔다니 더 말해 무엇하랴. 유적지로는 세병관과 충렬사가 옛 일을 말하고 있다.
늘 한국인을 폄하하는 일본인들과 해군제독들도 이순신 장군만은 존경했었다. 특히 일본의 문인(文人)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郞)는 “이순신 장군은 기적과도 같은 이상적 군인이자 세계 역사상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는 위인”이라 칭송했다.
통영시 들머리의 통영 옻칠미술관은 우리의 옻예술이 일본을 앞서고 있어 흥미로웠다. 다양한 그림과 빛깔은 볼수록 새로웠다. 미술관 다실에서 마신 원뿔 커피잔의 커피는 맛있었다.
청마 거리에서 사랑의 편지를 띄운 우체국, 그녀를 기다리던 찻집(지금은 서점)을 둘러보고 100여 계단 가파른 언덕의 청마문학관을 찾았다. 전시물 중 「죽순(竹筍-1946년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 동인지)」4집에 표지복사본만 댕그라니 전시되고 있음을 보고 씁쓸했다. 청마 선생은 대구여고 교장을 역임했고, 대구 생활을 한 시인이다. 죽순문학(당시 죽순 구락부)과도 인연이 깊은 분이다.
언젠가는 통영의 청마문학관, 김춘수 문학관, 청도의 이호우 문학관에 「죽순」1~10집 복간본을 전시해야겠다.
박경리 선생의 묘소는 주변이 작은 공원을 이루고 있었다. 곳곳에 자연석 詩碑가 평안히 누워 있었다. 평상의 시비들은 기단석 위에 시비를 세우지만, 여기엔 큰 반석이 자연스레 쉬고 있는 듯 했고, 가까이 가서야 읽을 수 있는 크기였다.
〈옛날의 그 집>이란 詩碑에서는
…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의 詩다.
일행과 박경리 묘소를 찾았다. 꽤 넓은 야산에 소박한 묘였다. 참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살폈다.
통영은 남해, 충무공, 박경리라는 문화 기행지를 품었다.
중앙시장 건너편 언덕의 달동네가 이젠 통영의 몽마르트 언덕으로 탈바꿈해 컬러풀한 동피랑으로 거듭나 있다. 젊은 화가와 시인들의 열정으로 벽과 건물이 빛깔잔치를 펼치고 있다. 아랫마을에서 동피랑 윗마을까지는 꽤 가파르고 먼 길이다. 동피랑 야산에서 내려다보는 통영바다는 아름다웠다. 밤 경관은 더 아름다우리라는 아쉬움을 남기고 내려왔다.
다음날, 미래사를 찾았다. 미래사 앞 언덕위의 오솔길은 편백나무 길이다. 향긋한 편백향 이 싱그러웠다, 500미터 정도 걸으니 석조 관세음보살상이 남해를 보는 트인 벼랑에 이르렀다. 가까이의 바다, 멀리 작은 섬, 틈틈이 지나는 어선, 하나의 그림이었다.
이진흥 시인은 “지난번엔 날씨가 흐려서 남해를 못 봤습니다. 오늘은 남해 절경을 만끽하겠네요!” 라고 했다. 가져간 음료와 간식을 나누며, 남해를 다시 바라보았다. 모두들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젖어 일행 중 아무도 내려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경남엔 형제 같은 벗들이 있다.
지리산을 매주 산행하는 사진작가 심영보 선생은 지리산 20골, 지리산의 나무와 산나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천왕봉 아래 법계사의 작은 삼층석탑이 그렇게 커 보이는 것은 그를 통해 배웠다.
함안 박물관 교실에 다니며 국화와 감로초(달콤한 수국)를 길러 茶를 만드는 문경출신 황영환 선생의 안내로 조선조에 낙향한 고려인들이 만든 고려촌을 찾았다. 옛 고려 우물을 보면서 삼별초의 의지를 느끼게 했었다.
의령에는 바위 속의 핵돌, 한마디로 보석돌을 찾는 돌공예 작가 조정우 선생이 있다. 핵돌(바위 속 1/100의 핵돌)로 향로, 찻사발, 다관(茶罐), 찻잔, 돌바늘을 만들고 있다.
“조 선생은 바위 속에 잠든 보석을 불러내는 군요.”라는 감탄에 그는 그저 빙그레 웃는다.
조 작가 부인은 암투병에서 재기, 재활한 분이다. 병원의 항암치료와 약선(藥膳)음식과 말차(末茶-茶道用 가루차)를 꾸준히 먹고 마셔 건강해진 사람이다.
부인을 대동하고 버스로 서울병원을 갈 때 검정비닐 봉지에 요강을 메고 간 사람이다. 아내를 향한 진솔한 사랑에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이들을 묶어서 <지리산 사람들>이라 부르며 사랑한다. 그들의 생활, 인정(人情)에서 내가 늘 찾고 싶은 인간학(人間學)이 실천되고 있었다.
인간학의 주인은 문학인이라고 생각한다. 의사는 몸이 병들어 고통 받는 이들을 치료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병들어 우울하고 불안한 반건강(半健康)상태를 다스리는 사람은 심의(心醫-마음 다스리는 의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가 바로 문학인이 아니겠는가.
대구에는 문학관이 없다. 그러나 북로드가 있다.
▫ 문인들은 대구에는 문학관이 없다라고 불평한다. 서부 도서관에 <향토문학관>이 그나마 있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다. 향토문학관은 영남권, 신라권을 포함해야 한다. 다행히 향토문학관 해설서엔 일연선사의 삼국유사와 신라 향가를 설명하고 있다.
후배 문인들에게 계절에 맞춰 향토문학관 찾기를 권하고 있다.
▫ 중국의 실크로드, 차마고도가 있다면 대구에 북로드(Book Road)가 있다.
고려 때 일연선사의 「삼국유사」는 대구권에서 쓰여 졌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신라의 향가(鄕歌)를 우리는 만날 수 있었을까.
삼국유사 해설서가 여러 가지 있지만, 나는 사진과 자료가 충실한 이범교 역해의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上下권 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용연사, 용연사 적멸보궁 - 인홍사(仁弘寺-後 仁興寺) - 계명대학교 도서관 - 경북대학 야외박물관 삼층석탑 - 용천사(湧泉寺)- 북지장사 옆 화랑세속오계비 - 청도 운문사(雲門寺) - 군위 인각사, 인각사 일연선사 기념관 등이 삼국유사의 북로드라고 생각한다.
▫ 제주에 올레길이 있다면, 대구엔 고려 임금님, 왕건의 길, 임금님의 길이 있다.
팔공산 평광동(신숭겸 장군의 영정을 모셨던 묘영재 터, 우씨 재실, 80년 사과나무) -지묘동 표충단 - 왕산 - 신숭겸 장군상 - 파군재 - 불로동 - 무태 - 반야월 - 안심 - 앞산의 은적사 - 안일사 - 왕굴 - 임휴사로 이어지는 길은 바로 신숭겸 장군의 충절, 왕건왕의 불굴의 집념과 옛 향토인의 고려사랑으로 고려 건국의 기초가 다듬어진 역사의 현장이 아닌가.
충절과 사연이 담긴 이곳에 대구 시인들의 시가 적힌 詩碑가 곳곳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죽순(竹筍)의 중책을 맡다.
한 번도 「죽순」誌, 죽순문학회를 떠난 적이 없었다. 이윤수, 윤장근, 송영목, 김기진, 김삼일, 김소운, 김창제, 손윤석, 손정휴, 송일호, 유상종, 윤한걸, 이일향, 임재훈, 임정희, 장호병, 정성윤, 정원호, 정후용, 최선영, 하오명 동인 등 모두 죽순을 지켜온 분들이다. 이윤수 선생 시비를 앞산 공원에 세울 때, 윤장근 회장과 문희갑 시장, 타계한 김경호 선생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겨울철, 찬바람 속에 개울을 흙으로 메우고, 큰 바위(시비)를 크레인 차로 옮기던 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웬 놈들이 공원을 마구 헤치느냐?” 항변도 들으면서 시비는 세워졌다. 훗날, 시비 언저리가 장마로 허물어졌다. 市당국의 협조로 시비 주변이 다시 정돈되어 퍽 다행스러웠다.
필자가 송영목 회장에 이어 4대 죽순문학회 회장이 되었다.
죽순문학회의 중책을 맡으며 훌륭한 문우들에게서 사랑과 인생을 끊임없이 배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크다.
「죽순」은 지금껏 전국의 상화시인상 수상자, 전국 시인의 참여로 비중 높은 시지(詩誌)가 되어 왔다. 문학운동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죽순」의 전국화, 「죽순」의 국제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이효상 시인의 시「산(山)」을 새긴 詩碑에는 구상 선생의 「죽순」문학이야기가 담겨 있다.
「죽순」은 우리 고장의 자존심이다. 우리 고장의 문인들이 명예롭게 참여하는 종합문학지로 우뚝 섰으면 한다.
대구를 방문하는 분들에게 대구광역시와 대구 예총의 일등 선물, 대표 문화선물이 「죽순」誌 가 되도록 필자는 70대 노구를 이끌고 여러 문우들과 더불어 전진 또 전진 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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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오명선생님 감축드립니다.
동문문인들이 주는 상이라 아주
의미가 깊어보입니다.
게시해주신 이명희선생께도 감사드립니다.
허창옥전임회장님의 부탁을 받고 올렸습니다
늦어서 꽃바구니도 못보내 드렸습니다ㅠㅠ
하오명 선생님, 늘 고마운 마음 간직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경맥문학상 수상을 늦게 알게 되어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평생을 대구문단에 몸담으시고 죽순, 대구수필 등 문학단체에 기여하신 공을
크게 칭송해 주신 것 같습니다.
대구수필 회원이라면 하회장님께서 10여 년간이나 직접 우려주시던 차의 맛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수상작인 글 중에 대구수필과 차의 인연을
한 자리에 올리셨기에 회원으로서 영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축하와 기쁨 모두 한 마음으로 드립니다.
하오명선생님, 늦게 축하드려서 송구합니다. 마음을 한아름 안겨드립니다. 늘 강건하시옵고 평화로우시기를 빕니다.
하오명선생님 축하드립니다.
경맥문학상 수상을 축하, 축하드립니다.
하오명선생님, 경맥문학상 수상을 축하 드립니다.
하박사님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일찍 죽순지를 통해 알았습니다만 축하가 늦었습니다.
경북고의 맥과 전통을 잇는다고 해서 경맥이란 이름이
나온 것이지요? 차와 작품, 그리고 인품을 통해 후배
들의 귀감이 되시는 선생님의 수상을 축하 드립니다.
하오명 선생님, 경맥문학상 수상을 축하 축하드립니다.
수필에 입문하기 전,
선생님의 茶에 관한 글을 지면으로 통해 많이 접했답니다.
그 글 속에 선생님의 인품과 문학사랑이 드러났습니다...
하오명 회장님, 경맥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오명 자문위원님 제 1회 경맥문학상 수상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