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서론
개관
Prof. Dr. Cornelis Van Dam
박상현
주의 날이면,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정부를 무시하고, 왕 중의 왕에게 복종하여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입니다. 왜 억압받는 공산주의와 이슬람 정권에서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위험을 감내합니까?
왜 부유한 유산을 소유한 자유 서방 세계에서는 교회에 가는 것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까? 왜 개혁교회에서 예배에 출석하는 것이 줄어들고, 주의 날에 두 번째 예배를 거의 잊어버리는 경향이 우세해져 가는 것처럼 보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중요한 측면은 반기독교적인 정권에 사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이는 것이 수반하는 경이로운 특권에 대한 더 큰 감사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우리에게 상기하는 일이 유익합니다.
몇 가지 기본적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를 예배하고, 왜 예배하는지 질문에 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다음 우리는 예배의 장소와 시간과 방법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개관에 이어 이런 영역을 더 자세하게 검토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예배하는가?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한 분 참되신 하나님
역사 여명부터, 사람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는 숱한 예배가 노골적으로 말해서 자기 기만적인 행습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참되신 하나님의 증거가 압도적이어서 모든 사람이 변명의 여지가 없음에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라고 말씀합니다.
고대 애굽인들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을 인간이나 소와 같은 형태를 띤 공상적인 형상들을 만들었습니다. 옛 애굽 사람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취해서, 씻기고, 입히고, 나일강을 따라 배에 태우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어떤 사람은 사냥할 때 그들이 사랑을 쏟은 신과 신의 형상을 데려 다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압력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 신들이 자신들의 상상력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신들 앞에서 음식을 차려놓고 나면, 신들이 그들의 몫을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는 음식이 항상 많이 남아 있었고, 그래서 제사장들은 결단코 주리지 않았습니다. 자기기만의 또 다른 실례는 그들이 자기 신들에게 인도해줄 것을 구했을 때, 복화술을 통해서나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에 따라 “예”나 ‘아니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도록 형상을 조작함으로써 대답을 제공하는 이는 항상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일어난 일은 고대 근동의 모든 이교도 문화에서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물론 고대 이교 문화권에서 일어난 일은 원칙상 오늘날도 여전히 유형은 다르더라도 현대 이방 종교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짓 예배의 기본적인 특성은 사람이 자신의 이미지를 본떠서 신을 만들고, 현재 인간의 필요에 따라 그를 본뜬 다음 예배자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 신을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작은 다양한 형태로 취할 수 있습니다. 더 면밀하게 말해서, 기독교라 불리는 모든 것이 참된 기독교는 아닙니다.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누구에게 예배하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으로부터 분명한 실례가 이 진리를 강조합니다.
종된 집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구약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예배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이 시점에 이방 문회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진리는 출애굽 직후에 시내산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특정한 시점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산에 올라간 모세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을 보장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을 만들었던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그렸습니까? 그들이 마음에 떠올랐던 최고의 것은 금송아지였습니다. 그 이유는 애굽과 다른 이교 문화권에 따르면 이는 실물보다 좋게 그려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에 계신다는 것을 즐거워하며 파티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기만에 빠져 여호와께 예배하고 있다고 상상했습니다(출32:4∼5). 하지만 하나님께서 불과 며칠 전에 시내산에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셨는지 잠깐만 숙고해보면, 그들의 행위가 예배가 아니라, 사실상 악한 죄된 방식으로 하나님의 가시적인 존재에 대한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그들의 행동을 폭로했습니다.
참 하나님을 이런 망상적인 형상으로 대체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본질상 산타클로스인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화내지 않고, 벌을 주지 않고, 항상 선물을 줄 용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형상에 따라 자신이 만든 이 하나님을 조종하여 그들의 양심과 예배의 필요를 달래줍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경보다는 문화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압력이 거세지면, 그들은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실 하나님에 대해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예배하는지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로 우리에게 오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찾거나 생각한 일도 없었지만, 그분은 성경으로 자기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 자신을 계시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이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고 말씀과 선포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시는 분이셔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 대상은 상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로 우리에게 오신 성경의 하나님만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거룩하십니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하나님의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왕이시며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옳고 그런지를 결정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법이며, 그 누구에게도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5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참조,시104:19;계19:16)이십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그분의 것입니다(마6:1). 분명히 하나님은 만주의 주이며 완벽한 통제권을 행사하시고, 만물을 다 아시기에(시139;히4:13) 조작당하실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에게만 순종과 예배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참조.대상29:10∼13).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품성 가운데 언급해야 할 또 다른 품성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심은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과 구별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과 또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 “초월적인 분”이십니다(사40:25;합3:3).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지만, 동시에 죄와도 구별되신다는 것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점과 흠도 없으십니다(시89:35;사30:1).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그의 백성에게 오셔서 그들과 언약을 갱신하실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품성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셨을 때,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며, 초월적인 분이신데도 정말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실 때 천둥과 번개와 우레와 큰 나팔 소리가 동반했습니다(출19:16;살전4:16).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성별하고, 산을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받았던 하나님은 백성은 하나님을 만나러 나섰지만, 산기슭까지만 갔습니다. 그다음 우리는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19:18∼19)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위엄 속에서 경외하십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치시지 않도록”(출19:24)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련하여 다시 경고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분명하고도 물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짜이십니다! 하나님은 조종당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또 다른 좋은 실례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에게서 소명받았을 때였습니다. 이사야는 지극히 높은 보좌에 좌정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위에 스랍이 있었고, 각 날개 여섯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은 얼굴을 두 날개로 덮었고, 두 날개로 그들의 발을 가렸고, 두 날개로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사6:2∼5).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는 자신의 죄가 없어졌다고 확신했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그의 반응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있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구를 예배해야 하는지 알면, 왜 그를 예배하는 사람들이 죄와 허물이 많은 세상에서 성별하고 거룩하고 구별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더불어 연기가 올라오던 시내산과 이사야가 소명받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고, 우리를 주장하셨습니다. 응답으로 우리는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고, 성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는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엄청난 특권입니다.
결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와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시95:2,6∼7) 이것이 구약시대에 해당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토대로 성령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오신 오늘날은 훨씬 더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이들이 하는 습관처럼”(히10:25) 예배에서 함께 만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예배로 우리는 예수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갑니다(19절).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22절) 합니다.
우리가 위의 내용을 숙지하고, 공적인 예배를 정의하자면,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의 은혜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거룩한 회집에 함께 모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적인 태도와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여전히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예배의 내용과 어조와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이십니다. 우리는 이 말이 함축하는 바를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예배합니까?
우리가 예배하는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옛 언약 시대 사람들에게 모세의 책에 나오는 많은 율법과 규례를 명확하게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약시대 교회가 부지런히 예배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영감받은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10:25)라고 촉구합니다. 여기에 모임은 공적인 예배 모임입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이 공적인 예배를 요구하십니까? 다시 말해서 회중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기를 요구하십니까?
첫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예배하지 않습니다. 예배가 우리에게 유익하기에 예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배는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배의 유일한 이유가 아닙니다. 예배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감사하고 경의를 표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의 초점이자 목적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에 계십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웨스터민스터 대교리문답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배에서 우리의 필요와 바람이 초점이 되거나 앞서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오히려 하나님이 초점이 되고 전방에 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이자 이유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우선순위는 예배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즉각적인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째로, 궁극적으로 예배와 관련하여 던지는 질문들은 내가 예배에서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내가 찬송과 감사와, 경청과 배움으로, 또 우리의 희생을 드리고, 우리의 기도할 때,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하는가입니다. 내가 무엇을 얻게 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 내가 무엇을 드리는가가 핵심 요지입니다. 우리가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그다음 우리가 유익을 얻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경배와 찬송을 드린다면, 우리의 타락한 상태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영광을 감소시켰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부정함을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전 무구한 거룩하심이 그분의 자녀들에게 반영되어야 할 필요성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우리는 분명히 고백된 죄 용서로부터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백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 우선순위가 주기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오고, 그다음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한 기도가 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예배의 주된 이유라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예배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유익합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불신자들을 위한 예배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문제부터 시작하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라는 게 요지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드리고, 경청하는 일에서 거룩한 분이신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예배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모호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방문객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될 것입니다. 공예배 시에, 우리의 죄로 인해 크게 불쾌함을 당하셨지만, 과분한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허물에 대해 해법을 제공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공적인 예배는 절대로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서는 안 됩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대면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경이로운 거룩하심과 위대하심과 그들의 잃어버린 상태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대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 용서하시는 은혜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명확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이 그들의 공적인 예배를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유지해야 한다고 말할 때 강조했던 요지입니다. 그다음 사도는 불신자들이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14:25)라고 주지시켰습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는 번잡함과 타락한 세상의 죄악과 다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복을 주시고, 우리에게 그의 정결과 화해하게 하는 복음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 우리를 둡니다! 주중 첫날에 교회에 가는 일은 정말로 기쁜 일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동안, 말하자면 믿지 않은 세상의 노골적인 타락과 저주와 선언에 문을 닫고, 여호와의 복된 임재를 즐기고 음미하며, 주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룩함과 은혜를 경이로워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뜻과 길과 관련하여 쉼을 얻고 상쾌함을 얻고 격려받고 권고받고, 책망받고, 성례의 사용으로 말씀의 메시지를 확증하게 되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요약하자면, 예배를 위한 두 가지 중요한 이유는
1)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와 존귀를 드리기 위해서,
2) 우리 자신의 회중으로 하나님의 임재에 두어, 그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례를 사용하기 위해서 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올바른 이유로 교회에 간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삶의 방향을 하나님과 그의 뜻과 왕국으로 재정립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죄 가운데서 잃어버린 바 된 세상 안에서 순수하게 거룩하도록 무장하게 될 것입니다. 요점은 참된 예배는 우리가 평생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여 교회 안에서 그의 임재의 오아시스가 우리의 가정을 채우고, 우리가 가는 직장에도 채우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증명합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우리는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예배하는가?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어디에서 예배합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 건물 주소를 알려줄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제기하는 질문은 다소 다르며,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한다“라고 말할 때 대체로 제시하는 답변 배후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관점을 바르게 얻기 위해서 구약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익합니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
옛 언약 백성이 예배드렸을 때, 하나님, 곧 하나님의 임재에서 드렸습니다. 규범적이고 탁월한 예배 장소는 성막이었고, 나중에 성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막과 성전의 몇 가지 원리와 의미를 생각해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막과 나중에 성전은 이곳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 한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선택하신 곳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예배의 핵심 요지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 책 다음 장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사시는 장소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음 사항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성막이나 성전에서 하나님이 그룹 위에 좌정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막은 인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기적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주권자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의 영광스러운 하늘 거처에서 내려오셔서 그의 백성 한 가운데 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하나님이 사랑하실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인생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셔서, 오직 은혜로만 그들을 구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계실 곳이 아닌 곳에 그분이 자신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신 것은 그 백성에 대한 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신7:7∼9).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에 대한 계획을 세워 모세에게 전달하셨고, 마침내 성막이 세워졌습니다. 그런 다음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에서 내려오셨습니다(출40장). 자 하나님의 면전에서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는 공적이고 규정된 방식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과 동행하고자“ 하시는 바람은, 이른바, 광야 생활과 삶 전체를 통해서, 에덴동산의 경이로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낙원에서의 교통이 얼마나 완벽하고 복되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예배는 참으로 완벽했고, 아름다웠습니다! 죄가 이를 파괴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의 성막 안에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셨습니다. 에덴동산처럼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고, 그런 의미에서 성막은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죄도 없었고, 부정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성소였습니다. 에덴동산과 같이(창3:24) 이곳을 그룹이 지켰습니다. 그룹은 성막의 두 벽을 형성하는 휘장에 수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에 스룹이 수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거룩하시며, 거룩하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다른 요지로 데려갑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단히 과소평가하는 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그의 진짜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지만,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음성을 거역했습니다(출32장).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영광 가운데서 성막에 내려오셔서, 공식적으로 그들 한가운데 그의 거처를 삼으시는 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아주 쉽게 여호와 거룩하심을 폄하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어떻게 타격을 받아 죽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죽은 이유는 그들이 향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이상한 향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레10:1∼3). 아니면 웃시야 왕 말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향 제사를 드렸을 때 어떻게 타격을 받아 나병에 걸렸는지 생각해보십시오(대하26:16∼20).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그의 거룩함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이 사실은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옷을 입어야 했는지 엄격한 요구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 참으로 굉장한 일입니다.
세 번째 요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그의 거룩함으로 보호하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백성 한가운데 거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죄 많은 백성 가운데 계실 수 있도록 속죄 제사를 제정하심으로써 보호막을 제공하셨습니다. 피가 속죄를 위해서 뿌려져야 했습니다. 이 피는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피가 뿌려져, 그의 백성과의 하나님의 교제가 올바르고 정의로운 기반 위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레17:11).
하지만 속죄 제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의무를 요구했습니다. 언약 백성은 스스로 정결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셨기에, 진영은 깨끗하고 거룩해야 했습니다! 백성들에게 거룩과 속한 것, 부정과 정한 것 사이를 구분하고(레10:10), 진영이 계속 정결하게 유지되도록 하는(민5:3;35:34) 방법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일이 레위인들의 과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굉장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르게 인정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을 때, 주님은 그의 백성을 쳐부수시고, 죽음으로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거룩함을 요구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전5:1)라는 경고가 적절합니다. 예배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데려가며,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현재 거하시는 장소
다음 장에서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지상에 하나님의 현재 거주하시는 장소가 더 이상 물리적인 성막이나 성전이 아니라, 교회가 지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전이자 거처이며(고전3:16∼17;엡2:22), 각 회원이 성령의 전이기도 합니다(고전6:19).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며, 우리 공적인 예배에 엄청난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 가지로, 이 말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공적인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일 때,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갈 때, 우리가 가끔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집에” 가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 즉 회중이 공적인 예배가 시행되는 성별된 거룩한 장소입니다. 따라서 아직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기 위해서 체육관이나 공동 시설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나오는 결정적인 요인은 물리적인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계시는 하나님의 회집한 백성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건물, 그의 성전을 형성하는 살아 있는 돌들과 같습니다(벧전2:5).
이러한 현실은 예배를 대단히 즐거운 경험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고, 그의 임재를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존중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12:28∼29)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문화권과 사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출석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신자들의 교제를 경험하는 일이 분명히 주의 날에 경험하는 기쁨의 일부일지라도, 더 큰 기쁨은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에서 이 중차대한 사실을 숙고하고, 이 자리의 경이로움을 묵상하고, 예배를 위해 자신을 정신적으로 계속 준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위해 교회에 모였을 때 거룩한 땅을 밟고 있습니다. 오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여! 그러나 전도서 5장 1절을 부연 설명하면, 우리가 “교회에 갈 때 발걸음을 조심해야 한다!”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달리 말해서 “조심하세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유럽의 중세 대성당에 들어가면, 넋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석조 아치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고, 건물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경외심과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중세시대의 건축가들은 사람의 영혼이 강제적으로 하늘을 바라보도록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올 때,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고, 얼마나 위대하신지 모릅니다! 누구나 조용해지고, 차분해지고, 지나다니는 관광객도 부드럽게 말하게 됩니다.
자 예배드리러 모였을 때, 우리는 참으로 훨씬 더 우리의 본향 교회 안에서 경외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에 있을 때 존경심과 경외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 예배해야 하는가?
우리는 주의 날, 즉 한 주 첫날인 일요일에 예배합니다(행20:7;고전16:2;계1:10). 하지만 매주 하루가 다르게 구별되었다는 사실 속에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이 사실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관점을 가지기 위해 구약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의 의미
주님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내리신 직후에, 모세가 이스라엘에 전달한 소위 언약의 책 안에 그의 언약적인 의지를 요약하셨습니다(출20:22∼23:33).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안식일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셨을 때, 핵심 요지는 안식일이 그의 백성들과 심지어 땅을 위해서도 상쾌함과 쉬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축약된 네 번째 계명이 주어졌을 때 강조되었던 바가 쉼이라는 요지였습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23:12)
안식일에 대해 3장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여기 서론 개요를 방편으로 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계명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하라! 입니다. 고대 근동의 문맥에서 볼 때,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명령입니다. 어떤 다른 문명권에서도 재충전을 위해 매주 하루 동안 일을 중단하는 특권을 즐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만 아니라, 동물들도 쉼을 취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과로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받고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쉬지 않고 일하는 일의 노예 생활에서도 해방되었습니다.
창조 때 제정된 안식일은 창세기 3장 17∼19절의 저주에 대한 하나님의 예비 구속 응답의 일부가 되었고, 여기에서 사람의 노고는 수고와 땀이었고, 결국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쉼을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7일을 연속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주간 기념행사를 위한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안식의 원리는 예를 들어 안식년에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안식년에 땅을 경작하지 않고도 은혜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관련된 요지가 있습니다. 안식일과 전기들에 의해 제공된 이 휴식 시간은 모든 죄와 비참으로부터의 장래의 쉼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 장래의 소망의 첫 단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얻을 수 있는 구원과 휴식이었습니다. 일단 그들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 그들의 원수로부터 안식과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주신 평강 속에서 살게 됩니다(신12:9∼10). 우리는 결국 약속의 땅을 학수고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했던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4:1;9∼10)
일요일에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안식의 선물은 구원의 의미로 가득 차 있고, 그로 즐겁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마지막 날에 사는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이라는 선물 때문에 주님을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정말로 많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원리상 우리를 종으로 삼은 모든 속박과 지배에서 건져내 주셨고, 우리를 주 안에서 자유와 기쁨 속에 두셨습니다. 일요일은 이 실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날 일요일을 기념함
일요일이 그냥 쉬는 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일요일은 거룩한 날이요, 거룩한 시간이요, 우리 삶에서 여호와의 갱신 사역의 표징입니다(겔20:12,20). 일요일은 하나님이 친히 구별하신 날로서, 하나님께서 이 파산된 세상과 우리의 억압받는 삶에 가져오시는 쉼과 구원을 우리가 음미할 수 있도록 구별하셨습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하시고 만물의 갱신 안에서 오는 완벽한 쉼을 예상하도록 우리를 돕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네 번째 계명이 이런 이유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기억하라”라는 단어는 단순히 정보를 상기하게 하는 지적인 활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문맥에서, 이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숙지하고 음미하는 예배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위대한 업적을 회상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배 시간에 시편 찬송의 아름다움은 우리 앞서간 하나님의 백성과의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이 어떻게 복수와 단수를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는지를 주목하십시오.
이를테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의 큰일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고, 또 그의 왕국의 최종적인 완전함이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 속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요일은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로 특징지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우리의 죄와 비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자주 병을 고치신 일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의도, 즉 생명의 갱신을 보여주셨고(요5:1∼17), 참된 안식과 온전함은 오로지 자신 안에서 발견된다는 사실도 보여주셨습니다(막2:1∼3:6). 일요일의 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특징지을 수 있는 치열한 경쟁으로 해방하여 주셨음을 상기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일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매주일 하루씩 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더 긍정적으로 말해서, 일요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가 얽혀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 즉 우리의 죄 많은 육체와 세상과 사탄으로부터 해방하게 하신 주 우리 하나님께 확고하게 집중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일요일은 부활절 아침에 그리스도의 승리를 음미하는 날입니다. 교회와 우리 집에서 예배하는 날입니다. 단순히 즐기는 날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만물의 재창조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이 서론 장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간략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그분에게는 겸손하게 다가가야 함을 보았습니다(전5:1;히12:28∼29). 우리 구주의 사역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경배하기 위해서 그분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영역, 예배를 준비하는 것과 예배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예배 준비
그리스도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다가가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에 불과하며, 부패한 본성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창조주이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바른 태도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능력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아주 겸손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교회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우리가 예배하고 섬기고자 하는 분은 그분이 거룩하시기에 우리도 거룩해야만 한다(벧전1:16)고 말씀하셨던 분이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구약의 제사장이 성막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타나기 전에 죽지 않도록 물로 씻어야 했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출30:20∼21). 우리가 신자이자 제사장이라는 정체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벧전2:5), 우리의 몸과 영혼이 깨끗한지 확인하는 데 있어서 그에 못지않게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
또는 히브리서 10장 22절의 말씀으로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준비는 죄된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합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토요일 저녁에 불신자가 지내는 것과 다르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교회 회원들은 다가오는 주일을 숙고하면서, 자기 하나님을 만날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전날 밤부터 세속적인 오락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고 교회에 와서 선포되는 말씀이 마른 땅에 떨어지는 것은 여호와의 목전에 두려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는 한주 내내 거룩함과 경검함을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확실히 토요일 저녁에 적절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배를 준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분하게 주신 축복을 헤아리는 것이 유익합니다.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여기 지상 우리에게 내려오셔서(사57:15)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기에 우리는 경이로움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생사간에 유일한 위로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한다고 성경을 요약하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옳습니다(제2문답). 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즐기는 삶의 전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있을 때 우리의 죄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에 대한 성령께서 일으키신 감사가 우리로 예배하도록 충동합니다!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요4:23∼24) 예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전 존재로 이 예배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오순절에 부어지신 성령과의 교제가 하나님의 진리와 조화를 이룰 것을 요구합니다. 예배는 결단코 몸짓이나 형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 존재가 예배에 가담되어야만 합니다. 예배는 반드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마15:8). 하지만 이도 진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락과 같은 예전을 만들어내서는 안 됩니다. 예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전적으로 일치해야 합니다. 고전적 개혁주의 예전은 예배가 우리의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에 응답하는 넓은 문맥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기에 대단히 높이 치하해야 할 중요한 유산입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드린 대로, 예배가 공적인 예배의 외적인 요인들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 가는 것이 결단코 질질 끌려가 강요되는 일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는 큰 기대감으로 믿음으로 가야 합니다(히11:6;롬14:23)! 존 프레임은 바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배에서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고, 우리와 만나시고, 복음에 일치하게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의 말씀의 권능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실 하나님을 신뢰한다. 신실한 예배자들은 ‘늘 똑같은 예전이잖아!’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가지 않을 것이다. 신실한 예배자들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하게 될 것이다.”
예배의 요소들
우리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질문에 답하면서, 예배의 더 구체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개혁주의 예배는 십중팔구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124:8)라고 암송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다음 하나님이 친히 복음을 설교하는 그의 종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전1:3)나, 아니면 유사한 인사 본문(딤전1:2;계1:4∼5a)으로 인사하십니다. 오전 예배는 주로 민수기 6장 24∼26절의 이 경이로운 축복으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보내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4∼26)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그의 이름을 두시고 그들에게 축복하십니다!(민6:27) 두 번째 예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고후13:14)라는 말씀으로 아름답게 끝납니다. 하나님의 인사와 축복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공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려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중심이시며, 예배에 현존하신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여, 만일 불신자가 예배에 들어온다면,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게”(고전14:25) 될 것입니다.
언약 예전에서, 설교는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 목사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설교자는 자기를 보낸 위엄이 있는 분을 대신하여 복음을 선포합니다. 설교자는 회중의 최신 여론 조사에 따라 부드러운 메시지를 전하는 멋진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단에 있는 사람은 즐겁게 웃기 위해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청지기이며, 인가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설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에 갑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달하도록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응하는 방법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낭독하고 설교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표와 인인 두 가지 성례를 은혜로 주셨고, 이 성례들은 말씀의 설교를 확증합니다. 세례의 물로, 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 씻음을 우리에게 표하고 인치십니다. 주의 식탁의 떡과 포도주의 표와 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하고, 구주가 그의 몸과 피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셨다고 우리에게 확신시키시며, 그가 우리의 주리고 갈한 영혼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신다고 확신하게 합니다.
우리는 찬송과 기도와 연보로 성례들을 통한 말씀 설교와 그 확증에 반응합니다. 이 세 가지 반응을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군가가 주장하듯, 노래하는 것은 말하기의 집중적인 형태입니다. 노래하는 것은 말을 향상하고, 쉽게 외우게 하고, 우리의 마음과 삶에 더 가깝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과 찬송과 같이 성경 일부를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노래 부르는 것과 연주하는 것은 다윗이 주로 조직한 성전 예전의 큰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전문적이었고, 화려하게 시행되었습니다. 4천 명의 레위인들이 악기를 연주했고, 288명의 합창단이 노래했습니다(대상23:5;25:7). 다양한 악기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15가지 악기를, 랍비들은 36개의 악기를 언급합니다. 거대한 합창단과 관련된 악기들을 고려할 때 회중은 다시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신약교회의 변화입니다. 공적인 성전 예배가 하나님의 성전인 회중에게 주어졌습니다.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예배에서 노래와 찬송에 참여하는 회중을 강조합니다. 악기는 신약성경에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예배 시간에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지만, 예배 시에 사용되는 오르간이나 악기는 무엇이든지 회중의 찬송을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오래된 개혁주의의 원리를 강조합니다. 회중의 노래가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성경에서 직접 가져온 시편과 찬송은 공적인 예배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계시의 일부로, 이들은 한 계층을 차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활용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시편들은 저 너머를 가리키며 우리에게 주님께 새 노래를 부르라고 권합니다(시33:3;96:1;98:1;149:1). 이러한 새 노래들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찬송들을 포함하지만, 새 노래를 불러야 할 필요성은 교회에도 주님을 찬송할 새 찬송을 만들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고전14:26;계5:9;14:3;15:3).
예배 문맥에서, 기도와 연보는 함께 취급되어야 하고, 둘 다 희생 제사입니다. 실제로 희생 제사란 무엇입니까? 이는 선물입니다. 희생 제사의 동기는 하나님께 신실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탁월한 입지를 인식하고,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보여드립니다. 희생 제사의 성격을 띤 선물에서,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이 얼마나 자주 드리는지, 그리고 너무 아낌없이 드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는 자녀 됨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존성을 인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쉽게 선물을 주고, 가장 좋은 것을 받으실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선물을 드리고, 하나님께 희생 함으로써 누구든 하나님을 거슬러 반역해 지은 죄를 슬퍼하는 것을 보여드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물은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빌4:!8;히13:16)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물로 특징지어져야 합니다(롬12:1∼2).
드리는 것과 바치는 것은, 우리가 연보하고 기도할 때, 우리 예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따라,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입술의 제사, 찬송의 제사(히13:15;호14:2도 참조하라)입니다. 아삽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14절과 사60:6도 참조하라)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죄에 대해 슬퍼하는 상한 심령의 제사이기도 합니다(시51:17).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을 구하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시42:5∼8). 우리는 하나님의 탁월한 위치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인식하고 그분의 구속에 대해 감사함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기도는 분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16문답)이 말하듯이, 기도가 감사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기에, 기는 예배에 필수 요인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방법에 대한 마지막 논평은, 예배는 전 회중의 참여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의 일을 하는” 목사에게만 맡겨질 수 없습니다. 목사 한 사람만 예배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목사 한 사람이 진행하는 원맨쇼를 구경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며(계1:6), 반드시 예배에 참여해야 하지, 단지 구경꾼 노릇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회중 전체가 참여해야 합니까? 모든 사람이 순서를 정해서 교회 앞에 나와 숫자를 헤아리는 것으로 말입니까? 아닙니다. 예배에 최대한 많이 참여한다는 것은 모두가 성경을 펼치고, 귀를 쫑긋 세우고, 필요하다면 펜과 종이로 설교를 메모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중의 참여는 “아멘”으로 반응하거나 찬송하거나 사도신경과 다른 적절한 양식(신조나 신경들)들을 외우는 것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중의 기여를 위해서 연단에 서도록 함으로써 집회 참여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교회가 있는 목적은 예배드리는데 있습니다. 교회 예배는 항상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교회 예배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핵심 요인의 일반적인 개관
1부
전형적인 개혁주의 예전
예배로의 부름
보툼: 시편 128편
인사: 로마서 1장 7절(오전)l 계시록 1:4∼5a(오후)
응답송
하나님의 율법 낭독(출20:2∼17 혹은 신5:6∼21) 오전, 오후에는 사도신경
죄 용서와 갱신과 하나님의 말씀을 열기 위한 기도
성경 낭독과 종종 찬송으로 이어짐
설교
세례나 주의 식탁, 성례 집전(필요할 때)
감사와 회중의 필요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필요를 위한 기도
찬송
강복선언(민6:24∼26 오전; 오후 고후13:14)
예배의 관점
이장 앞부분에서 우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의 은혜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거룩한 회집에 함께 모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적인 태도와 활동”으로 정의했습니다. 이러한 정의로 예배는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하며, 우리 주일 예배는 하나님께 예배와 경배와 찬송의 주간으로 흘러넘쳐야 함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참조.롬12:1∼2;벧전2:9).
예배가 삶 전체에 통합되어 있어, 교회 예배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하여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됩니까? 공 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바로 그 임재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관점을 제공합니까? 히브리서 12장은 이를 아름다운 방식으로 요약합니다. 이 본문은 예배 시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22∼23절)라고 교회에 말합니다.
이 본문과 11장에서 이어지는 구절에 대해서 해야 할 말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는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들이 지상의 예루살렘 또는 시온을 예배 중심에 두었다(히12:21)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초점을 천상 예루살렘에 맞춥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하늘에 들어갑니다(히12:11). 진실로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완전한 이 영광의 예배를 기대합니다. 참으로 천군 천사들의 경외할만한 모임입니다! 예배와 찬양을 위한 열린 공간이 얼마나 거대하겠습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계4:8)라는 찬송이 대기를 채웁니다. 거기서 심판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지금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이 그때 절정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생에서 우리는 그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일의 예배가 참으로 이렇게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