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님: 인간의 뇌를 조건으로 하지 않으면, 당연히 인간의 뇌를 조건으로 성립하는 식은 없을 겁니다. 다만 인간의 뇌를 조건으로 성립하는 식만 식인 것은 아닐 뿐입니다.
알라야(아뢰야)식 역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인간의 뇌를 조건으로 할 때 알려질 수 있는 알라야와 개의 뇌를 조건으로 할 때 알려질 수 있는 알라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알라야의 성립은, 반드시 소위 자증분의 성립과 함께 합니다. 단지 필요에 따라, 알라야의 성립과 자증분의 성립을 분별하여 설했을 뿐입니다. 즉 알라야가 성립하면, 마나스라 이름할 작용도 성립해요. 단지 수행 특히 아라한과 관련하여 해당 작용을 마나스라 이름하지 않을 뿐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마음 즉 식"]이란 불교에 없습니다. 식은 조건발생입니다. 알라야도 마찬가지예요. 의도 즉 행온은, 과보로서의 식을 있게 합니다. 식이 조건발생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금생에서 소위 다음생의 식을 직접적으로 일으키게 하는 의도를 일으킨다면, 소위 다음생의 식은 발생합니다. 물론 한개의 식만 발생하지는 않아요. 무엇이든 발생은 덩어리입니다. 이름을 잘 살펴서 법에 비춰 혼동을 하지 말고 조건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나가야 합니다.
기억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물은 1기압일 때 100도가 되면 끓습니다. 흡사 물이 기억을 하고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와 같이, 특정한 조건에서는 특정한 상태가 발생합니다.
특정한 상태의 발생에는, 그에 상응한 식이 있습니다. 흡사 수소가 산소를 알아차리고 결합하여 물분자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듯이 그러합니다... 불교의 식이란, 서양의 관념에 비춰보자면 차라리 물질과 아주 흡사합니다. 물질과 본질적으로 다른 영혼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예요.
이해의 편의를 위해 비유해 보자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들 수도 있습니다. 프로그램에서 각종 조건이 있어요. 해당 조건이 있음을 아는 것이 식입니다. 해당 조건임을 아는 것은 산냐입니다. 즉 산냐는 조건함수를 포함한 프로그램 함수들이예요. 이와 같이 산냐와 식은 불가분입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작동합니다. 인간의 뇌를 조건으로 하지 않지만 말이죠...
법을 꾸준히 공부하고, 법에 비춰 생각하며, 꾸준히 평이한 알아차림을 하다 보면...정말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기라 이름하든 하지 않든, 글로 일일이 적는 일이 불가능할만큼 많은 각종 조건들을 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알았던 것들...그러한 것들이 흡사 모래집이 파도에 흩어지듯, 부분부분으로 해체되어 각 부분부분이 생동하면서 드러나게 됩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판단들이 어떻게 그와 같이 있게 되는가?"를 알게 됩니다. 인중유과라는 인과론도, 상속 없이 시간속에서 인식이 가능할 수 있도록 고안된 거예요. 인도의 인과론에서...시간은 파생물이지, 주어져서 일직선으로 흐르는게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속에서 파생되는 거예요. 과거와 현재 미래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됩니다. 대단히 독특한 고안물이예요. 고대 희랍에서는 알려진 바 없는 사고입니다. 뭐...이러한 부분까지 알 필요는 없는데요... 불법을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인중유과식의 알라야 해석은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불법의 알라야를 드러내지 않아요. 하지만 이해나 표현의 어려움등으로 인해서 그와 같은 식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조건을 살피는 습관 없이는, 이해를 그르칠 수가 많아요. 인중유과론과 연기론의 본질적 차이점은, 힘 즉 흐름에 대하여 살피는 방식에 있어요.
언젠가 다른 곳에서..."아톰도 깨달을 수 있는가?"라는 말이 나온 적이 있는데요. 저는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적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불교의 중생이란 생명에 국한되지 않아요... 저에게 생명이란, 차라리 물질적 구조의 특수형태에 붙이는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에는 공감하지 않는 소위 정통불자분들이 많겠지만 말이죠... 제가 볼 때, 서양에서 말하는 물질은 불타고 있어요... 그 불길이 이끄는 바에 의해, 소위 생명이라 이름하는 형태도 드러나게 된 거예요... 그와 같은 불길을 따라 온 우주가 불타고 있어요... 나라는 세계도 불타고, 한량 없는 중생이라는 세계들도 불탑니다. 그것이 제가 아는 세계죠...
과거 적은 바 있는 글과 관련해 혼동을 일으킬까봐 지적합니다. 최초 생명체와 관련한 꼬리말이 이곳에 소개된 적이 있어요... "진화론에 따라 추측되는 최초 생명체는 무슨 업에 따라 있게 되었는가? 따라서 윤회란 거짓이다..."라는 상대방의 사고구조를 파고 들어간 겁니다. 진화론에 따라 추측되는 최초 생명체를 운운하며 업보를 부정하는 것은, 생명체에만 업을 인정하면서 물질에서 생명체의 발생을 긍정하는 모순이 있게 됩니다. 만약 물질에서 생명체의 발생을 긍정한다면, 생명체에만 긍정되는 최초의 업을 관념화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우리가 잘못된 판단에 대응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가능합니다. 몇 가지 조건을 고려하죠..
제 판단에는 그랬습니다. 해당 인물에게는, 그리고 해당 까페에서는...위에서 적은 온 "우주가 불탄다"는 논리를 적으면, 혼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많구요. 불필요한 논쟁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많아 보였습니다. 제가 학창시절 나름 대로 공부하여 정립한 사고를 정리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데요... 그 작업 중 "물질은 있으려고 한다", "물질의 있으려는 성질이 최고도로 조직화된 형태가 생명이다"등의 명제도 나옵니다. 그 작업을 하다가, 가만 보니까...불교다 말이죠... 그래서 "부처님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해당 작업을 때려치웠는데요... 지금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분명 물질은 있으려고 합니다. 에너지가 불타오름이죠...
한소희님: 구산스님의 법문중에 살아있는 골뱅이에 "불성"이 있다하면 대충 그럴 것 같이 여기기도 하지만 삶아서 먹고 버린 골벵이 껍데기에도 "불성"이 있다하면 좀체로 납득이 가질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 몇 몇년 동안 내내 이 말씀이 소위 제 "화두"였습니다 이제 방문객님의 글을 < 다른 글들에서도 같은 주제로 쓰신 적이 있을 때 부터 물론> 읽으니 좀 더 안개가 거치는 느낌입니다 허나 아직 "
방문객님: 누나가 적는 글을 보면, 우리나라 스님들 법어를 잘 아시는 듯 한데요. 이곳에 홍련님도 그렇구요... 저는 한국 스님들 글을 거의 안읽어봐서요, 관련 내용이 나오면 십중팔구 모르는 거죠... 가끔 부끄럽다는...
뒷부분에 추가된 내용은 즐겨 적지 않는데요... 지금도 인간의 뇌기능이 소멸하였을 때와 관련한 논점이 나오지 않았다면, 거론하지 않았을 거구요. 여타 곳에서는...주로 스스로를 파악함에 있어, "생명이란 개념과 관련한 거품(차별적 요소)"를 지양하는 것과 관련해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그와 같은 필요성에 따라 관련 내용을 서술하는 것이죠... 불자의 입장에선 그 정도가 적절한 듯... 잘몬하믄 삼천포로 가버려서...
불성이라 이름한 것은, 무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멸하는 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그처럼 소멸하는 속성을, 불성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이름하자면, "사심(놓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구요...
물질은 있으려고 하는데, 소멸의 속성이 있어요. 역설적으로...있으려고 하기에, 소멸의 속성이 있게 되는 것이죠. 불법에 비춰 생각해 보면...있으려고 하여서 있다는 것은, 조건에 따라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기의 이치에 따라 조건지어진 것일 수 밖에 없기에, 소멸의 속성을 띄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점은, 골뱅이 껍데기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생명에서는, 소멸의 속성이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질 뿐이죠.
학창시절엔 물질과 관련하여 고찰을 상당히 했었는데요, 유물론의 영향도 있고해서... 지금도 그 영향력과 함께 하긴 하지만...어쨌든 당시에는, 물질의 성질에서 생명의 성질을 끄집어 내려고 했거든요... 집중의 성질등은, 삼매와 관련하여서도 물질의 성질에서 찾을 수 있어요... 학창시절에 살펴 본 바로는 그래요... 나름 대로 고찰하며 글을 적다 보니, 완전히 불법이었단 말이죠... 하지만 그러한 논의가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선 스스로의 마음작용과 관련하여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고...일단 그러한 앎이 있으면, 마음을 물질에 기울였을 때 저절로 알게 된다고 보거든요... 그게 적절한 순서 같아요...
용수님: 식물이 생명체냐 아니냐 식물이 윤회하냐? 안하냐? 윤회의 대상이 비생명체까지 확대되면 모든것이 윤회한다는게 맞다고 생각됩니다. 생명체만 윤회한다고 가정하면 모순이 많아지죠
방문객님: 식물이 윤회하는가 하지 않는가? 변함에도 불구하고,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스스로와 동일시하는 작용을 떠나서 윤회라는 이름이 가능하지는 않거든요. "그러한 동일시작용까지 식물에게 있는가? 없는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구요...
제가 어릴 때 생각한 것으로 이야기하자면,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는 겁니다. "나름의 저항을 하면서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는 거죠... 물질도 그렇고, 식물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다는 겁니다. 과학상식정도로도 그러한 점은 알 수가 있죠? 그러한 성질이 동일시작용의 뿌리일 수도 있다는 거죠...
현존하는 불교 전승들의 정설은, "식물은 윤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육도 중 축생계는 있지만, 식물계는 없다는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입장에 승복하고 있지 않단 말이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승복하지 않는다고, "식물도 윤회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구요... "식물이 윤회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인 것도 아니구요... 당장 알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다만 개인적으로 승복하고 있지 않기에..."불교에 따르면 식물은 윤회하지 않는다" 내지 "식물은 중생이 아니다"와 같은 단정을 접하면, 반감이 일어납니다.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한 주장이 나오는 입장을 이해함에도 그렇단 거죠..
육식과 관련하여... 저는 육식을 엄격하게 금하는 일이 불법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육식을 지나치게 즐기는 것, 고기가 없으면 밥맛이 없다... 그런 정도는 문제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채식만 지나치게 즐기는 것, 육식이 제공되면 구역질난다... 그런 정도가 문제인 것과 같은 평면에서 바라봅니다.
도축과정이 잔인하지 않을 것등의 요구는 별도의 문제인 거죠... 지나치게 맛만을 추구한 나머지, 사육과정에서 동물을 학대한다... 그러한 것들은 지양해야 한단 말이죠...
한마디로 계율에 엄격하지 않다... 제가 그런 놈이란 말입니다. 지나치게 금기시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 좋지 않단 말이죠... 그게 제 견해인 거예요...
무아라는 것에서도 그렇습니다. 본글을 적으면 적을 내용이었는데요... 본글이 중요한건 아니니까, 그냥 적읍시다...
무아냐 아니냐... 이게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예요. 무아라는 사실이 있는데, 그러한 사실들을 뭉떵거려 나라고 간주하는 사실이 있을 뿐이예요. 그러한 사실들을 뭉떵거려 나라고 간주하는 사실도 '나'는 아니구요... 그리고 그와 같이 간주하는 사실이 있기에, 무상함에도 거듭 생하여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즉 무상함에도 거듭 생하여 여기에 있는 것의 조건 중 하나가, 그와 같이 간주하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없앨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앨 수 없습니다... 그걸 없애는 일은, 불가능한 거예요.
금생의 몸을 취하게 한 업력은 금생의 몸이 스러져야 스러집니다. 그와 같이 동일시하는 간주작용은, 금생의 몸을 취하게 한 업력에 따른 겁니다. 그러한 사실을 조건으로,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한 사실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금생의 몸이 스러지지 않는 한, 그러한 업력은 주어진 겁니다. 견뎌야 할 사항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점을 분명하게 알고, 동일시작용이 있을 때 동일시작용이 있다고 알면 되는 거예요... 끊임 없이 있으므로, 끊임 없이 동일시작용이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업력을 강화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떠한 것들이 그러한 힘을 강화시키는가?
유쾌한 느낌이 있을 때, 그 느낌을 강화하기 위해 그 느낌의 조건이 되는 것에 마음을 지나치게 기울이는 것...유쾌하지 않은 느낌이 있을 때, 그 느낌을 벗어나기 위해 그 느낌의 조건이 되는 것을 밀어내고 다른 곳을 끌어당기려는 것...등입니다. 간단하게는, 대상에 지나치게 마음을 기울이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배고픔이 있을 때, 배고픔이 평안하도록만 밥을 먹는 거예요. 대승불교식 표현으로, 배고픈 중생이 반열반하도록 하는 거죠...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위에서 육식이나 채식과 관련해 적은 내용이기도 합니다. "내가 배고프다"보다는 "배고픈 중생이 있다"가 좋아요... 그러한 마음이 동일시작용을 덜 강화시켜요.
그와 같이 절제를 하여 대상에 지나치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즉 계를 지키면서...이제 대상이 아닌 것과 관련하여 그와 같은 동일시작용을 강화하는 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에는 무엇이 있는가? 대표적인 것이..."있다"와 "없다"와 관련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견해를 일으키는 겁니다. 특히 6식의 성격상, 있다는 견해는 자연히 따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견해가 강합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조건으로 있다, 그 조건을 여의면 없다"는 점을 끊임 없이 살피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작업은, 있다고 아는 작용과 동일시하는 작용을 조건으로 행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절대적 진실이라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습관에 따라, 금생의 몸을 취하게 한 업력에 따라, 우리 조건 즉 6식의 성격에 따라, 있다고 아는 작용과 동일시하는 행위를 끊임 없이 하도록 조건지어져 있으므로...그와 같이 연기에 따라 아는 행위도 끊임 없이 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한 행위를 끊임 없이 확고하게 행할 수 있도록, 의심을 다스리는 일도 하고 법을 이해하는 일도 하는 거예요...
왜 불교에서는 자살을 허용하지 않나? 자살은 말이죠... 동일시작용을 금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일의 극단적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대상에 지나치게 마음을 기울인 나머지,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일의 극단적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위에 적은 내용 일부를 옮겨 오겠습니다.
[무아라는 사실이 있는데, 그러한 사실들을 뭉떵거려 나라고 간주하는 사실이 있을 뿐이예요. 그러한 사실들을 뭉떵거려 나라고 간주하는 사실도 '나'는 아니구요... 그리고 그와 같이 간주하는 사실이 있기에, 무상함에도 거듭 생하여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즉 무상함에도 거듭 생하여 여기에 있는 것의 조건 중 하나가, 그와 같이 간주하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불교의 윤회는 내가 윤회하는게 아니구요, 소멸함에도 거듭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발생하는 조건을 다스리는 힘을 기르는 일이 수행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윤회를 부정하고, 거기에 무슨 불교가 가능하겠습니까?
무아라는 것은 말이죠... "아"라고 이름할 것을 드러내는 작용을 떠나 말해질 바가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무아라는 말에만 경도된 나머지, "무아와 윤회는 모순이다"와 같은 주장을 하는 거예요. 한술 더떠서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는데, 기존에 있던 인도의 윤회사상을 받아들였을 뿐이다]와 같은 주장도 하는 겁니다. 무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윤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글자만으로 상상을 해서 말합니다. 흐름을 살피려고 하지도 않고, 고정된 무엇으로 대체하려고만 합니다.
무아라면 윤회한다... 진제와 속제는 함께 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만으로는 불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인 거예요.
정리합시다. 밥 먹으면 배불러요... 밥 먹고 배부르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아라한도 그래요... 무아라서, 밥을 아무리 먹어도 배가 안부른게 아니예요... 그런즉 "전혀 다른 상태임에도, 배고픈 상태에서 배부른 상태가 되었다"와 같이 동일시하는 간주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예요. 그러한 간주작용이 일어나는 조건을 알고, 그러한 간주작용에 매몰되지만은 않는 조건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일 수 있도록, 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조건일 수 있도록, 있다와 없다에 대한 견해등을 다스리고 대상에 지나치게 마음을 기울이는 행위등을 절제합니다. 이게 기본적 구조입니다... 밥 먹으면 무아라도 배불러요...
마음이 그와 같이 일어난다면, 사실이 그와 같이 드러날 겁니다. 그리고 불교가 놓치지 않고 주목하는 것은..."사실이 그와 같이 드러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그와 같이 일어나는 것"이죠...
첫댓글 윤회한다는게, 참 무서운 거죠...
[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bikkhu이다] 청정도론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불교카페 글이 있네요.
얼마전에 방명록에 올려진 잊지않기 님의 해일꿈 이야기를 읽으며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에서 2/3에서 격렬한 죽음을 경험했다는 논문의 구절이 떠 올랐었는데.... 정년을 앞두고 원전결사대에 참여하는 일본 원전기술자를 보면서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삶'이 참 잘 사는 삶이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