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예배의 문제점
코로나 펜데믹 시대의 교회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지금 우리는 공적인 예배가 멈춰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신앙적인 관점에 바라볼 때에는, 그야말로 대재앙이다. 모두들 바이러스 공포 때문에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더니만, 이제는 형편이 나아졌는데도 아예 모이지 않는다. "나쁜 습관"에 중독되어 버렸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토록 철저히 경계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인들의 숨통을 조이는 총체적인 비상 상황이다. 코로나 바이스러에 감염되면, 먼저 호흡곤란을 겪는다고 한다. 생명이 소통되지 못하도록, 숨통을 조이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숨통을 조이는 것도 거리두기라는 초강수 대책의 결과로 빚어지는 비대면이요, 접속단절 ('언택트' untacted)의 시대적 현상들이다. 2020년 초에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확산(the coronavirus pandemic)으로 인해서, 전 세계 기독교와 한국 교회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필자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가공할 유행병이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인류는 지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생명을 잃었지만, 그 기간에 교회도 역시 무참히 파괴되었다. 세계대전이 성행할 때에, 자유주의 신학은 기존의 정통신학을 파괴하였다. 전쟁에서의 희생자들 보다 훨씬 더 교모하게 신실한 교회들을 파괴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이 교회의 건물들을 파괴하였다. 그런 세계 대전 동안에 교회에의 출석예배는 불가능했었다. 동시에, 교회가 붕괴되어서 예배가 활성화 될 수 없는 동안에, 교회의 신학을 무너뜨리려는 혁명주의자들의 선전과 책동이 확산되었다. 기독교의 기본 신학이 침탈을 당했고, 자유주의 신학이 번성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시대상과 신학논쟁은 '넓어지는 교회'가 아니라, 사실은 그 정반대로 '변질되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워필드 박사는 핫지 박사와 함께 성경의 영감성을 변호하였고, 보스 박사와 함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개정에 반대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교회가 각종 집회를 생락한 채, 성도들이 직접 예배당에 나와서 참여하는 예배를 축소한다면, 결국 한국교회는 무너지고 만다. 그 사이에 정통신학과 성경적인 신앙은 혼탁한 이론의 공격에 처하게 될 거이다. 성경적인 신학이 무너지게 되면, 교회가 더 쉽게 세속화 되어지고 만다.
교회가 가능한 한, 모일 수 있는 대안들을 발표하고, 이를 속히 시행해야 한다. 주일 예배에 다 모일 수 없다고 하면, 주중예배를 확대해야 한다. 월요일이나 화요일에도 모일 수 있는 한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경청하고, 찬양과 경배에 참여해야 한다. 소규모 집회를 통해서라도, 새벽기도회처럼 어느 날이나 아침이나 오후에나, 저녁에나, 소규모 집회를 개설해야만 한다. 작은 숫자가 모일지라도, 경건의 훈련과정을 지속적으로 가져야만 한다. 가공할 전염병의 위협으로 인해서 교회의 모임이 지속적으로 위축되어 왔는데, 그냥 유튜브에서 은혜를 받으라고만 하고 방치한다면, 결국 교회의 본질이 손상을 입게 되어서 역동적인 은혜를 나눌 수 없게 되고 만다.
교회는 주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란 소명 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교제를 위해서 집회를 가지며,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은혜를 공급받는 예배 공동체이다. "에클레시아"는 분명히 회중들의 "모임"이나 "집회"를 가리킨다. 각 지역교회의 "모임"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본질에 해당한다(행 5:11, 11:26, 고전 11:18, 14:19, 28, 35, 롬 16:4, 고전 16:1, 갈 1:2, 살전 2:14 등).
교회가 "모임"을 소홀히 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없다. 회심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교통하심과 성도의 교제가 상실된다. 교회는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이자, 예배와 기도라는 특수한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았다. 전통적인 교회론에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마 18:20)고 하신 말씀을 매우 중요시 했다. '에클레시아'라는 곳은 하나님께서는 택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향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밖으로 불러내어서 긴밀한 교제로 연결하였다. 개인적으로 선택과 소명을 받아 믿게 되지만, 그들이 함께 연결되기 때문에 교회라고 부른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소명을 받고,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한 지체로 접붙여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란 본질적으로 죄의 비참함 가운데서 은혜의 상태로 불러낸 사람들의 교제이다.
그러면 이제 집합금지 명령에 따라서, 대면 예배가 금지된 비상상태 속에서 어떻게 교제하며, 교통할 것인가? 대단히 비정상적이고, 당황스러운 조치들 속에서 가능한 대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가공할 질병 앞에서,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인간은 너무나 연약하고, 깨어지기 쉽다. 안타깝게도 성도들은 열심을 내기 보다는 흩어지는 쪽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비록 교회에서 모임을 갖지 못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죽음을 이겨내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 참된 성도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은 "집합금지 명령"에 의해서 흩어지게 될지라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할 수 있다.
2020년 봄부터 거의 1년 반 동안 비정상적인 디지털 방송예배가 마치 정상처럼 유지되고 있는데, 긴급한 비상조치를 마냥 따라갈 수만은 없다. 정부와 보건당국의 '집합금지'라는 방법에 대해서, 교회가 무작정 두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한국 정부에서는 예배당 좌석에서 단지 20%만이 출석하도록 허용하고 있는데, 사실상 모든 교회의 모든 집회가 다 제약을 받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을 크게 훼손당하는 비상사태이다. 교회는 모임을 통해서 기본적인 관계를 지탱해 왔는데, 집회가 축소되면서 모든 목회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을 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크게 손상 시키고 말았다.
이제는 대면예배, 소규모 집합예배, 성도들이 수시로 교회당에 출석하여 드리는 주중예배, 매일 예배가 속히 활성화되어야 한다. 새벽에 드리는 소규모 기도회와 같이, 주중에 오전이나 오후에나, 매일 소수가 참여하는 주중 예배가 주일예배의 보충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 대형교회 성도들은 전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인데, 인터넷 방송 예배나 유튜브 예배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초래되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집합 금지조치에 의한 "비대면 예배"는 엄청난 기독교 신앙의 황폐화가 초래되고 있다. 비성경적인 개인주의가 득세를 하고 있고, 남녀간의 결혼으로 이뤄지는 가정보다는 비성경적인 "성의 혁명"을 주장하는 동성애가 판을 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당부하면서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 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바른 교훈을 거절하는 자"를 불법한 자들이라고 명쾌히 지적하였다 (딤전 1:10).
교회는 공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체험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룩한 모임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성도들에게 제공되어야할 모든 은혜의 공급이 차단되어 버렸다. 기계적 편리함에 익숙해진 성도들은 게으름의 "명분"을 쌓아가고 있으며, 아예 교회를 떠나고 있다. 많은 교회가 성도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기가 찰 노릇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펜데믹은 게으른 "습관"에 중독된 기독교인들을 양산하고 있다. 집에서 편안하게 영상예배에 참석한 것만으로 신앙인의 최소한 필요조건을 충족하고 있다고 믿는다. 비대면 예배를 통해서 과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배와 찬양을 올릴 수 있을까? 약간의 의무사항을 이행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하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약간의 의무사항을 수행했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없다.
이처럼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으니, 비정상적인 상황을 합리화 하려고 하는 논의들이 나타나고 있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교회가 생겨났고, 유투브 수입을 늘리려는 설교자들이 늘어났고, 가상 세계에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으니, 모두 다 편리한 신앙생활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필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작정 교회의 집회와 예배모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전염균의 확산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는 이 엄중한 상황에서, 철저히 방역에 힘써야만 한다. 교회라고 해서 결코 의학과 과학의 도움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필자의 장모님께서도 로스엔젤레스 양로원에 계시다가,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서 2021년 초에 소천하셨다. 전 세계가 울고 있는 이 비참한 현상들 속에는 각각의 경우마다, 가정마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나는 일들이 보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각자 서둘러서 바이러스를 퇴치하도록 예방 백신도 맞아야 하고, 철저히 청소와 방역 약품도 살포하고, 마스크도 착용하고, 소독제도 뿌리고, 철저히 손을 씻는 등 모든 방역조치들에 협조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들이 주장하는 대로만, 교회의 문을 닫은 채, 목회자들이 마냥 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인식과 정책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판단인가를 면밀하게 되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펴내는 마음은 너무나 간절하고, 애절하다. 또한 이 책을 통해서 제시하려는 결론은 단순하고도 명백하다. 일시적인 긴급조치로 진행되어온 비대면 영상예배가 온 마음과 시간과 노력을 바쳐서 수행되어야 할 정상적인 예배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유행병으로 인한 임시 조처의 불가피성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동영상이나 컴퓨터나 텔레비전으로 드리는 예배가 결코 온전한 예배라고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편리한 방식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과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겸손한 섬김과 헌신을 표현하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신 6:5, 11:13, 26:16, 대하 15:12, 왕하 23:25, 마 22:37, 막 12:30, 막 12:30).
필자는 우선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기 위해서 미국 교회의 현장들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지금 마치 전국적으로 대단히 정상적인 것처럼 시행되는 예배금지 상황에 대처하는 방안들과 특히 비대면 영상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국의 행정부가 나서서 교회의 모임을 금지하는 조치들은 헌법상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강압적인 국가권력의 횡포이자 권세자들의 편의주의에서 나온 편법적인 조치들이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조치들이 무자비할 정도로 정착되어버린다면, 서구 유럽지역에서 예배가 무너진 것처럼, 결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은 현저히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배 금지조치나 제한적인 조치 등에 익숙한 사람들은 상당 수 교회를 떠나버렸다. 개인적인 편리함과 자유로움에 익숙해진 성도들은 더 이상 교회 출석의 감동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사탄의 전략은 게으른 성도들로 점차 나태하게 만들 후에, 결국 하나님을 떠나도록 속삭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 년여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데도, 전혀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면, 그럭저럭 신앙인으로 살다가 마지막 날에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나락에 빠트리도록 교모하게 조장하는 것이다.
은평제일교회 교인들이 8일 방호복을 입고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2021년 7월 29일 서울행정법원은 은평제일교회가 은평구청장을 상대로 운영중단 처분의 효력을 정지하라며 낸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운영 중단 처분이 지속될 경우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예방하기 위한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고, 효력정지가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밝혔다.
물론 이번에 나온 집행정지는 행정소송 도중에 처분의 효력을 정지하기 위한 임시처분이다. 형사소송법 23조는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법원이 처분의 효력을 정지할 수 있도록 했다. 교회 운영중단처분의 효력을 정지한 법원의 결정 이유는 교회 운영중단이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가져올 우려가 있고 예배를 진행한다고 해서 공공복리(코로나 19확산 방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서울행정법원은 7월 16일에도 교회들의 청원을 허락했다. 코로나 19, 4단계 방역지침에 따라 서울시가 대면 예배를 금지하자, 은평제일교회를 비롯한 10여 개 교회들이 서울시 방역지침에 대해 효력정지 신청을 냈었다. 법원은 "대면 예배 전면금지는 예식장·공연장 등 다른 시설과 형평이 맞지 않는다"며 '20인 미만' 범위 내에서 전체 수용인원의 10%만 참석하는 대면 예배를 허용했었다.
은평제일교회에서는 7월 18일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예배를 진행했는데, 이것이 수용 인원 (2400여명)의 10% 이하였지만, 총인원 19명을 넘어섰다고 해서, 은평구청에서는 방역지침을 위반했다며 10일간 운영중단 조치를 내렸었다. 이에 교회측에서는 운영중단 조치에 대한 취소소송과 함께 집행정지를 신청했었고, 이제 예배를 허용하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은평제일교회에서는 "대형 콘서트장과 영화관의 경우 4단계에서 회당 5000명까지 밀폐된 공간에서 집합이 가능한데, 오직 교회에 대해서만 운영중단 조치를 내린 것은 형평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대형마트, 백화점, 놀이공원 등과도 형평에 맞지 않는다. '야외 예배' 같은 대체 수단이 있는데도, 전면금지한 것은 부당하다는 반론을 제기했었다.
미국에서는 교회의 출석예배 금지에 대항하여 싸우는 교회들의 소송사건들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첫째, 연방대법원은 2020년 2월 초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실내 예배와 집회를 금지하는 조치에 항의하는 "캘리포니아 싸우쓰 배이 연합 오순절 교회"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참고https://www.supremecourt.gov/opinions/).
실내에서 모이는 예배를 금지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를 억제하는 너무나 지나친 조치이므로 이런 명령을 캘리포니아주 개빈 뉴섬 주지사가 내려서는 안 된다고 판결하였다. 이로 인해서 교회 측은 주정부로부터 2백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았다.
다만 연방정부는 집단 발병의 위험이 높으므로, 집회 인원은 좌석의 25%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예배금지 조치는 자유를 억압한 것이어서 취소된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다른 주와는 달리 미국 내에서 유일하게 실내 예배를 엄격하게 금지했던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행정명령으로 종교에 대해서 불공평하게 취급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결하였다. 미국의 연방법원은 보수적인 대법원 판사 6명이 찬성하고, 진보적인 판사 3인은 반대하였다.
두 번째 사례, 로스엔젤레스 타임즈 (2021년 2월 5일자)는 펜데믹 상황에서라도 미국 연방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된다는 결정을 보도하면서, 다만 찬송과 소리를 지르는 것은 추가로 제한 조치를 했다.
셋째 사례, 뉴욕 주지사 앤드류 쿠오모는 2019년 추수감사주일 밤에 교회 예배를 금지하고 가정 내에서 25명 이내로만 모여야 한다는 조치를 내렸는데, 연방대법원은 이 조치를 취하하도록 판결했다.
조그만 상점에서도 그 정도의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는데 오직 교회 모임에 대해서만 제한 조치를 내리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판결했었다.
넷째 사례, 워싱턴 디씨에 있는 캐피톨 힐 침례교회는 행정당국이 코로나 방역지침의 일환으로 야외예배를 제지시킨 일에 대해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이 교회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야외에서 라도 모이고자 했다. 2021년 7월 8월, 지방 법원은 "야외예배 제한 조치가 종교 활동에 부당했다. 컬럼비아 구청측은 교회에 변호 비용 등 총 22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다섯째 사례, 2021년 6월,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로스엔젤레스 패사디나에 있는 하비스트락 교회(Harvest Rock Church) 의 예배 중단을 명령했다가, 135만 달러의 합의금을 지불했다.
이 소송은 '종교적 자유'와 가주 당국의 코로나19 '방역 조치'의 명분이 법적으로 맞붙어 화제가 됐었다. 주정부는 이번 소송과 관련해 해당 교회를 대상으로 부당한 대우나 규제를 가할 수 없음 등을 명령했다. 사법부는 사실상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우선시하며 교회 측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하비스트락처치는 지난해 7월 가주 정부의 찬송가 부르기 금지, 현장 예배 중단 명령 등과 관련, 연방법원에 행정 명령 시행 중단 가처분 신청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한국 교계 내에서는 이러한 미국 교회들처럼 정부 조치에 항의하는 법적 투쟁이 그렇게 큰 이슈로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코로나 대유행과 변이 바이러스 상황에서 초래된 펜데믹 상황에서 과연 한국교회가 어떻게 진로를 정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정말로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그냥 언론에 지침이 나오는 대로 모든 교회의 집회를 취소한다든지, 무작정 유튜브로 진행하는 비대면 예배로만 마냥 세월을 흘러 보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 성도들의 영적인 침체와 교회의 쇠퇴는 불을 보듯이 뻔 한일이다. 마냥 두 손 두발 다 묶어놓고, 보건당국의 정책만 따라가다가 성도들의 신앙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깊이 숙고해야만 한다.
바르고 참된 신앙을 가진 주의 백성들은 열심을 다해서 교회를 지키고, 믿음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힘을 합쳐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살려내는 일에 각자가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 바쳐야만 한다. 순교자의 각오와 결의를 가지고, 교회를 살려내고 지켜야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초래된 성도의 교제 단절과 예배 금지 상황은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는 세력들의 교묘한 수단이 되고 있음을 통찰력 있게 살펴야 한다. 21세기, 세계교회가 처한 위기 상황을 파악하고 진단해서 대처하지 않으면, 순수한 신앙과 성경적인 예배는 혼탁한 기류에 휩싸이고 말 것이다.
끝으로, 펜데믹 이후의 한국교회의 미래를 깊이 생각해 보자. 요즘처럼, 많은 성도들이 영상 예배로 대체하고, 전혀 지역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면 결국 교회는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서구 유럽 교회의 현상이 밀려들어오고 있어서, 교회의 열심과 헌신을 무력화시키고 있고, 무신론에 젖어서 타락한 문화가 혼탁한 사회를 촉진시키고 있다.
1장 왜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가?
슬프게도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 교회에서 개최되는 집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지침을 놓고, 정부 방역당국과 교회 사이에 점점 대립하는 양상이다. 전염병을 관리하는 정부 당국자들이 집회 금지령을 발동하여 교회의 모임을 제한시키고 있다. 금지 조치를 강요하는 정부에게는 다소 유리한 명분이 있었다. 2020년 초, 대구 신천지 집회는 불특정 다수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진원지 역할을 했었다. 이들은 이미 사이비 재림 교주를 따르는 이단으로 규정된 단체인데, 비상식적인 행사들을 진행하여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로 한국교회는 거의 다 예배 금지 조치에 호응하여 방역대책에 협조하게 되었지만, 거의 2년 가까이 오랜 시간이 경과 되면서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아예 일부에서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잘못된 율법주의라고 비난하는 입장과 맞서야만 할 정도이니, 참으로 교회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1. 주님을 기다리며, 천국 소망을 품다
참되고 올바른 예배는 성경에 지시된 내용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방식으로, 적합한 장소에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올려야 한다. 모든 믿는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 교회의 집회에 성실하게 참여하여, 성도 간의 교제와 격려를 나누는 가운데서 힘을 얻는다. 서로의 교제를 통해서 심적인 지원을 받으며, 영적인 성숙과 도덕적 덕을 함양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를 통해서 성경적 교훈을 받아야 한다. 모든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교회처럼 보이지만, 기독교 정통신앙과는 전혀 거리가 먼 집회들과 기도 모임들도 상당히 많다. 경건한 훈련으로 위장을 한 사이비 단체들의 모임도 있고, 이단적인 교리로 속이는 자들이 영혼을 미혹하는 집회를 갖기도 한다. 한 동안 세상을 흔드는 세력처럼 보였던 신천지의 이만희, 전도관이나 구원파 등등 많은 가짜들의 최후를 목격한 바 있다.
참된 성도들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만을 따르는 양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도 함께 하시며,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어서 교회를 이끌어 주신다. 모이는 습관을 실천하는 참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교회에 모이는 성도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지원하며, 양육을 받는다. 이로 인해서 성도는 영적인 양분을 공급받기도 하고, 다른 성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교회의 정기적인 예배와 경건한 기도회, 소그룹 성경공부, 제자훈련 과정, 봉사담당자로서 맡은 부서의 행사 등에 참여하는 성도만이 책임감을 갖게 되고, 자신의 믿음을 연습할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의 모임이 가장 결정적인 요체이다.
예배는 성도들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의무사항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여, 믿음의 반응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였을 뿐이다. 절대로 강압적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겁을 주거나, 압박을 하시지 않으셨다. 진심으로 받은 바 은혜가 넘치고, 헤아릴 수 없어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범사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여 하나님을 향해 경배를 올리는 것이다.
특히 각자 소속된 지역 교회에서 모이는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역시 기계처럼 시간표에 따라서 나아가 단지 출석했음을 확인받는 사항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주일날 오전시간에만 어떤 형태로든지 참가를 해야만 하는 의무사항도 아니다. 일주일의 첫 날,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 뿐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편리한 방식대로 아무 곳에서나, 자기가 참여하고 싶은 시간에 인터넷에 접촉해서 예배를 올리는 것으로 그저 일시적이며, 임시적인 비상상황에서 해결방안일 뿐이다. 경건의 삶을 유지하려면, 개별 성도가 혼자서 제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컴퓨터나 동영상 매체에서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얻어서, 나태해지지 않도록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채, 임의적으로 편리함과 나태함에 젖어서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습관"이 들어서는 안된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서, 선한 영혼을 가꾸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직장이나, 병원이나, 음식점이나, 마켓 등 자신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곳에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직접 방문하고 있다. 필자는 눈이 많이 내려서 주일예배를 포기하고 오지 않았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너무 많은 성도가 결석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한 성도는 교회당 옆에 병원에는 출근하면서, 예배 시간에는 나오지 않았음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렇다. 필자는 그 주일에 많은 반성과 함께 새로운 다짐을 했었다.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한, 내 발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 한 반드시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올리자고 결심했었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이처럼 먹고 살아가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않고 열심을 낸다.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과연 예배를 올리는 일에도 그처럼 열심을 내고 있는가? 하나님께 예배를 올리는 일에는 그정도의 열심히 없다면, 나쁜 습관에 젖어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바, 초대교회 성도들은 미래를 기대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hope)을 품고 살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이 임박하였음을 굳게 확신했고, 최후 심판을 준비하면서 죄를 멀리하고, 날마다 깨어있으면서 경건한 삶을 추구했다. 이들의 종말론적 신앙은 하늘나라에서의 영생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승리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이 교회에서 집회로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성도들이 가진 참된 '소망'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이요, 이러한 영적인 소망은 우리가 그분과의 연합관계에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성도 각자가 가지고 살아가는 "소망"이란 하나남께서 펼쳐나가시는 미래의 정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참된 소망은 믿음과 사랑으로부터 분리할 수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시간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부정적인 생각에 빠진다. 예를 들면, 수능시험을 앞에 둔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서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라본 미래의 소망은 그렇게 부정적이거나, 체념적이거나, 패배주의에 빠졌던 것이 아니다. 주님의 재림을 긍정적으로 기대하면서, 내일에의 선한 소망을 품고 살았기에, 기쁘고 즐거운 기다림으로 (positive expectation of good future) 가슴이 벅찼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준비상태와 같았다. 다만, 신랑이 더디 오게 되면서, 졸기도 하고 나태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마 25:5).
한마디로 압축하면, 종말론적 신앙을 나누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 날"을 향한 설레임을 갖고서, 함께 예배를 올리고 서로 신앙과 사랑을 나누는 교제와 교육을 위해서 모이기에 힘썼다. 그러나 신랑이 더디 오면서, 매일같이 동일한 종말 신앙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버티며 살아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의 영생에 대해서는 헛된 의구심이나 왜곡된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모임을 갖고서 바른 교훈을 전달하면서 힘을 불어넣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종말 신앙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히브리서 3장을 살펴보자. 이 서신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심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인들은 미래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첫 서두에서부터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의 탁월함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보좌에 앉으셨느니라"(히 1:3). 따라서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또한 "바라보자"(히 12:2)고 권고한다. 유대 전통과 구약성경에 탁월한 이해를 제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과 다시 오실 미래적 희망을, 기독론과 종말론의 조합이 가장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날"이 바로 가깝기 때문에 열심히 모이라고 권면한다. 참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함께 모인 성도들이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다. 이런 집회를 거부하는 자들은 잘못된 습관에 빠진 자들이다.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2-25).
왜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모임에 나오기를 권면하면서 살았던가? 어째서 그들은 모임을 폐하려는 자들의 "습관"과는 달리, 열심을 내고 부단히 모이는 일에 대해서 다짐을 했던가? 왜 모이지 않는 자들의 습관이 나쁜 것인가? 왜 우리는 교회에 모여야만 살 수 있는가?
위에 나온 구절은 성도가 다른 기독교 신자와 인간적인 접촉 혹은 친교 모임을 더 많이 하라고 촉구하거나, 차를 마시고 담소하면서 친숙해진다거나, 성도 사이에만 식사를 자주해서 깊이 사귐을 갖도록 하는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라는 조언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기독교의 종말신앙을 배경으로 하고서 모임을 갖도록 촉구하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낙심한 영혼들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하여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내와 영적 투쟁에 관련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배와 관련된 영적인 교제의 모임에 대해 격려하는 것이라고 첨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히브리서에는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대조가 나온다. 옛 언약은 이 세상에 관계된 것들이다. 새 언약은 장차 다가올 세상에 관련된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이미 새롭게 되었고, 장차 올 세대에 접속되어 있다(히 6:5, 9:11, 10:1).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 세상을 깨어버리고 들어온 종말의 시작이었다. 예수님의 모든 구속사역들은 자연 법칙으로 움직이는 세상의 질서 속에 비상적인 긴급조치들이 개입한 사건들이다. 바울 사도의 서신들에 보면, 현재의 세상은 악하지만 장차 올 세상은 순결하다고 대조하였다. 히브리서에서도 불완전한 이 세상과 완전한 미래가 대조적으로 나온다.
히브리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대조에 주목하여야 한다. 거기에다가, 두 가지 언약과 세상의 각각의 특징을 파악하고, 이 두 가지 대립 관계 사이의 관련성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여야 한다. 이 편지는 구약성경에 익숙했던 유대인들이나,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보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스 박사가 히브리서를 이해하도록 제시하는 기본적인 구조는 옛 언약 속에 새 언약이 미리 제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구약 언약에는 하늘나라의 실체가 표상적으로 제시되어 있고, 새 언약의 시대에 도래하는 것들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구약 시대에 나온 것들은 새로운 언약에 비교하면 매우 열등한 것이었다.
특히, 보스 박사는 세 가지를 대조하였다. 히브리서의 가르침에서 독특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사역의 탁월함인데, 구약의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가 가장 기본적인 교훈이자 대조를 이룬다.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 13장 10-12절에서 구약시대의 성막과 제단에서 올린 제물보다 위대하신 속죄사역을 대조시킨다. "여기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고, 우리가 장차 올 것은 찾는다"하는 종말론적 전망을 확고히 심어주었다.
보스 박사가 요약한 두 가지 언약에 대한 대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 되어질 수 있다.
첫째, 장소: 옛 언약은 땅 위에서 이뤄진 것이다. 새 언약의 중심지는 하늘나라다.
둘째, 본질: 옛 언약의 본질은 육체적인 것이다, 새 언약의 본질은 영적인 것이다.
셋째, 효력: 옛 언약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고, 희미하여 실패했다.새 언약은 역동적이며, 영원히 함께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안목을 갖고서, 히브리서 10장 25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종말을 향한 신앙인의 태도와 자세이다. "그 날이 가깝다"는 인식이 가장 중요한 열쇠를 갖고 있음에 주목해야만 한다.
가장 정확한 영어 성경번역으로 알려진 ESV 신약성경에는 '그 날이 가깝다'는 구절을 "아주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그 날"(the day drawing near)이라고 번역되었다. "아주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그 날"을 대비하려는 성도가 깨어서 준비하려고 다 함께 모이는 일에 열심을 냈던 것이다. 이처럼 히브리서에는 종말 신앙의 언급이 깊이 배어있다.
또한 조금 뒷부분에 해당하는 히브리서 12장 22에서는 성도가 소망을 갖고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히브리서 12장 18-29절에서는 "시온산"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 "하늘의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 등을 "교회"(히 12:23)와 동등한 개념으로 열거한다. 모두 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자취와 흔적들이 사용되었던 것들인데, 모두 다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요, 결국에는 미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를 표상적으로 알려주신 것들이다. 히브리서 12장 18절이 지적하듯이 "성도들이 모임을 가지는 곳"은 "교회"이자, "천국"의 영역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약속의 성취를 사모하면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자고 격려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시대에 살던 성도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승리하신 주님의 재림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곧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주님이 오시지 않고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머지않아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기대가 성취되지 않자, 차츰 늦어지게 되면서 일부 믿음이 약한 성도들 사이에서는 신앙생활이 흐트러지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일부에서는 성도들 간의 모임에 나오지 않으면서, 아예 "습관"(habit)이 되어서 교회에 전혀 나오지 않는 자들이 있게 되었다. 그들의 신앙은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러한 자들은 성도들의 모임에 결석하는 일이 그만 습관이 되어 버렸다. 참석을 중단한 자들의 경우에는 믿음이 작동 중지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같이 한자리에 모이는 데에 힘을 썼던 이유는 "말세"가 가까이 온다고 생각하면서, 철저한 준비를 실천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졌던 재림신앙은 생활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매우 역동적인 삶을 영위하는 원천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보다는 주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소망을 더욱 더 확실히 하고자, 모여서 힘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신앙교육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43절에 언급하신 바와 같이, 사도들은 "도둑같이" 아무도 모르는 순간에 찾아올 재림의 날을 준비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재림 신앙을 확고하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함께 그 소망을 나누는 성도들 사이의 격려,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모임이 중요하였다.
베드로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재림을 바라보면서, 긴장감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벧후 3:9-12).
초대교회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었다. 곧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임한다"는 사도 바울의 종말신앙은 그의 전체 서신 속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있는 중요한 교리였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9-23절에서 피조물의 질서가 회복되는 새로운 날에 대한 소망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절에서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은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할 수 없으리라"고 경고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종말론에는 영원한 구원이라는 소망이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때로는 핍박과 비난이 가해져도, 참음으로 기다리자는 격려를 서로 간에 나누고 있었다. 특히 바울 사도는 몸 안에 영혼이 깃들이듯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하시면서, 이 땅이 영원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깨우쳐주신다고 하였다. 주의 영은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록 인도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하는 편지로나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살후 2:1-2)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배와 모임은 종말신앙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심각한 배교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불법의 사람"(살후 3:3)이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나타나서,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높이고, 숭배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경주석자들은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주후 40년에 자신의 얼굴을 황금 신상으로 만들어서 예루살렘 지성소에 세웠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황제숭배가 절대 신앙으로 강요되면서, 교회는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같이 모임을 유지하려고 격려했던 이유는 믿음의 다짐을 새롭게 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교육하고, 양육하고, 온전케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 관한 교훈들을 더욱 더 확신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25절에서, 성도들의 모임이 과연 어떠한 목적으로 유지되어 나갔던가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려는 마음으로 모임을 갖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승리하신 주님의 왕권을 초대 교회의 신앙내용으로 각인되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1장 20-23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가르쳤다. 비록 복음이 완전히 세상을 정복하는 시기에 대해서는 낙관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가 성도의 완전한 성화이자 구원받을 성도의 모델이라는 점을 확신하였다. 그들이 사회적인 차별과 정치적인 압박, 재물이 없어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있더라도, 최후 심판에서 의로우신 재판장이 의인으로 인정할 것을 확신하면서 서로 격려하였고, 승리를 고대하였던 것이다.
종말론적인 모임을 강조하는 히브리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반적인 앞 뒤 문맥을 살펴보자. 히브리서 10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과 속죄를 확고하게 믿어야 할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서 10장은 구약성경의 옛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으로 전환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 규정들, 즉 제사장들의 제도, 회막, 동물제사 등 여러 요소들 가운데 상징적으로 담겨져 있던 제사장의 임무를 완전히 성취하신 것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고난을 직면했을지라도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나도록 격려를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을 아는 자들에게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영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지만,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행동을 택하는 자들도 있다.
이제 조금 더 본문을 좁혀서 한 구절에 집중해 보자. 히브리서 10장 19-25절은 히브리서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주제들로 상호 결속이 되어진다. 그 앞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새 언약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격려한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히브리서 10장 25절은 믿음의 길에서 떠난 자들의 실상을 드러내어 심각한 경고를 하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히브리서 10장 25절을 가지고, 오직 공적인 예배 모임에 나오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단정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불치의 질병을 가진 환자나 장애인이나 혹은 핍박을 당하는 중에 있는 성도, 또는 전쟁의 위험 상황에 있다면, 집회에 나올 수 없다. 그러한 여려가지 예외적인 경우에는 성도가 개인적으로 경건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하는 위기의 시대에서도 특수한 상황들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특수한 형편들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일 오전 예배 시간에 모두 다 교회로 모여야만 한다고 명령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안식일 성수의 조항들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예외 조항들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을 간추려 보자. 먼저, 이 본문에 명확하게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래서 여기서 모이는 모임이 교회에서 소집되는 예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인데, 기본적으로 "모임"을 의미하며, 헬라 도시 국가에서 "백성들의 회합"을 뜻하는 "민회"라는 단어에서 기인했다. 더구나 초대교회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박해 속에서 비밀리에 집회를 가졌다. 공개적인 교회가 아니라 지하교회에 모여서 예배와 성례, 기도와 교육, 권면과 격려, 구제와 자선 등을 함께 나눴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을 통해서 유무상통하고 서로 영적인 교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나오는 모임을 단지 예배만을 위한 집회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사도행전이 증거하듯이, 초기 신앙공동체의 모임에서 사도들의 말씀과 기도, 찬양과 기원, 성례와 고백 등이 가장 중심된 일정이었기에, 이들의 모임은 당연히 교회의 활동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순리이다.
2.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모이는 교회들
미국 로스엔젤레스 밴나이스 시에서 "그레이스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존 맥아더 목사는 비대면 예배를 전면 거부하고 있다. 그는 히브리서 10장 25절을 인용하면서, 예배금지 조치에 반대하는 설교에서, "교회가 문을 열어야 하는 임무"를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법조항에 근거하여 이 지구상의 어느 국가 권력이라 하더라도 교회의 예배 모임을 금지하거나, 제지할 권한이 없음을 주장했다. 결국 이러한 입장을 견지한 소송들에 대한 판결들이 나왔고, 대부분 교회가 승소했다. 필자는 이것이 오직 교회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입장에서 나오는 무리한 주장이자, 성경의 왜곡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목회자로서 본인의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에게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직무일 것이다.
다만, 필자는 히브리서의 이 한 가지 본문만을 가지고, 엄중하고도 기계적으로 적용해야 할 중요한 명령으로 내세워서, 교회에 출석하여 드리는 예배 모임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교회의 예배 모임에 불참하게 되면,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공급받는 역동적인 은혜를 받을 수 없음에 대해서 보다 더 주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지만, "코비드-19 대유행"이라는 초유의 위기 상황 속에서, 수백 명, 수천 명이 모이는 주일 오전 예배가 방역 당국의 지침을 어기는 무리수가 된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심한 충돌과 양쪽의 입장 차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교회는 마냥 두 손을 놓고 정부당국의 예배 금지에 따라가야만 하는가?
교회는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기 보다는 하나님에게 복종해야만 한다(행 5:29).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연합하여 성도들이 모이는 예배를 명령하였고, 성도는 마땅히 따라가야만 한다.
성도들은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다 같이 함께 모임 속에서 서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10장 22절은 성도 사이의 사랑과 교제를 매우 중요하게 강조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성도들 사이의 인격적인 교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앞에 살펴본 히브리서 본문의 맥락에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고, 돌아보는 일에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영적인 교제와 격려의 상황들은 교회에서 모이는 집회를 통해서 성취되어지는 것이므로, 비록 모임을 가지라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권고라 하더라도, 모이기를 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성도의 궁핍과 부족함을 외면하는 것은 성경적 교회가 지향할 목표라고 할 수 없다.
교회가 모임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재림 신앙과 하나님 중심의 삶은 황폐한 상태로 변질될 것이다. 반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경건한 모임을 갖고 간절히 기도하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마냥 고난과 슬픔 속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히 13:5).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도 교회의 다른 동료들을 무시하거나, 그냥 간과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와 의견이 심하게 차이가 나거나, 서로 느끼는 감정이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버리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개인주의, 이기주의, 자아집착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다른 성도에 대해서 무관심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거역하는 행위이자, 배교의 행위와 같은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나오는 "모임"은 과연 무엇을 위한 집회인가? 여기에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가 사용되지 않았음에 유의하여서, 성도들에게 참석하도록 격려하는 모임은 아마도 각 지역의 회당(synagogue)에 속한 기독교인들의 추가적인 집회와 모임이라고 해설하는 주장도 있다. 이미 문맥에서 채택된 단어를 검토하면서, 교회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혹시 회당에서, 즉 아직은 교회로는 완전하게 차별화가 되어진 모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어쩌면 초대교회의 모임은 회당 주변에서 모이던 작은 공동체의 회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자주 언급되어졌듯이, 초창기 교회는 이방인들의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고,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이던 회당과 같이 작은 모임을 통해서 발전하였다. 주후 70년경, 예루살렘이 무너진 후, 가이사랴, 안디옥, 에베소, 로마 등 사도들은 여러 형태의 초대 교회를 건설해 나갔다. 사도 바울은 수없이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했었다. 초기 형태의 교회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에,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성도들은 회당에 모였을 것인데, 아마도 각 지역에서 교제의 모임을 가졌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회당"이라는 장소도 역시 오늘날로 말하자면, 유대인들의 지역별 종교집회소였는데, 초대 교회의 예배당 규모는 이들보다 훨씬 적었다. 이방지역에 살던 유대인들 상당수가 사도 바울처럼 기독교인으로 개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배경과 당시 상황에 근거하여서,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나오는 모임이라는 것을 이렇게 회당 집회 이후의 소그룹 모임으로 해석할 때에도 명확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어지는 "회당"이라는 단어도 역시 여기 본문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초대교회는 회당과는 정체성이 완전히 달랐다. 그 두 그룹은 서로 본질상 완전히 다른 공동체였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의 모임을 "가정집에서 모이던 교회의 집회", "가정교회"(house church)로 해석하는 신학자도 있다. 비록 초대교회 시대에는 교인들의 규모가 아주 작았을지라도, 또한 그들이 모이던 장소도 역시 비좁고, 열악한 곳이었든지 간에, 혹 신앙심이 돈독하면서도 약간 넉넉한 중산층의 집이었을지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공적으로 인정된 장소였을 것으로 본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한다"고 하였다(고전 16:19). 로마서의 말미에서는 "그들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문안했다(롬 16:5). 초대교회 시대에는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는 없었다. 그래서 브루스 박사도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으로 "가정 교회"의 모임일 수 있다는 여지를 열어놓았다. 각 지역마다 여러 곳에 흩어져서 모이던 작은 교회들이 있는데, 일부 성도들은 각기 다른 지역에 모이던 모임을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교회의 초기 역사를 증거 하는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모였었다(행 1:13).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였는데, 그가 석방된 직후에 제일 먼저 찾아간 곳도 역시 그 작은 교회였다(행 12:12).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는 비록 작지만, 이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체험하였다.
초대교회가 가정에서 모이는 경우에, 가정 교회는 숫자는 대략 오십여 명 안팎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가정의 헌신으로 마련된 예배와 기도의 집회 장소들에 모여서 서로 돌아보면서 격려하고, 소속된 성도들끼리 긴밀한 연대를 갖고 있었다. 비록 건물은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각 도시마다 은혜를 입은 성도가 제공하는 가정교회가 왕성하게 세워져 나가고 있었다. 여러 곳에서 작은 가정에서 모여서 차츰 구체적으로 형성되어진 초대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에 기초하였다. 그 도시 안에 거주하는 성도들 사이의 교제와 연대의식이 매우 긴밀하였다. 때로는 전체가 큰 규모로 모여서 예배와 교훈을 듣기도 했을 것이다(행 5:12, 19:9).
가정교회의 집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였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에 초점을 두고 시행되는 경배의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따라서,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다. 또한 이렇게 예배로 부르시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고자 하심이다(히 11:6). 예배에 참석한 성도가 생명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경건의 체험 현장이기도 하다.
참된 성도는 교회에서의 예배로 나아가 함께 경배를 올리는 모임을 포기할 수 없다. 히브리서에서 지적한 바, 아주 오래전부터 거짓 신앙을 가진 자들은 함께 모이는 성도의 교제와 공적인 예배 모임을 포기해 버렸다.
교회 안에서 교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수직적인 차원과 동료 성도들과 만남을 통해서 수평적 교제로 이뤄진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에 육체의 더러운 것과 인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휩싸여 있다. 성도는 이런 것들에 빠진 자들과 확고하게 단절해 버리고, 오직 믿음을 가진 자들과 교제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위로와 상급을 소망해야만 한다.
믿음의 공동체는 사탄의 계략 때문에 거짓 교훈들로 속임수에 넘어가기도 하고,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심각한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이단들이 감언이설로 속이는 자들에게 넘어가기도 한다. 성도들은 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침체에 빠지거나 영적인 무력증에 휩싸일 수도 있다. 불신앙의 미혹에 넘어가게 되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은혜의 감격이 소멸되어지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데, 이런 것들이 습관적으로 되어 버린 자들도 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오고 있을수록,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교회에 모이는 집회를 멀리하는 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라고 탄식하였다. 초대교회의 모임은 이러한 주님의 경고를 기억하고 깨어있으면서, 믿음을 강화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말씀에 따라서 예배하고, 교제를 나누던 공동체였다.
3. 예배자들에게 내리시는 생명의 양식
왜 모이기를 힘써야 하고, 그 모임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약속을 하셨다. 성도의 삶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평생 동안 경건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성도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기에, 교회 밖에서는 그 어떤 경건의 진보라도 이룰 수 없다.
경건한 성도로 우리가 장성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된 교회와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나가는 모든 일들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누구도 개인적인 경건생활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를 통해서 자라나고, 양육을 받는다.
다음 3장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살펴볼 것인데, 교회는 예배공동체로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성경의 전체 교훈들을 구조적으로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이 사람의 임무로서 가장 강조되어 있다. 혼란된 인간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빛과 생명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과 호흡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기술과 문명이 번성해서 첨단 산업을 발전을 도모하여, 엄청난 재화를 만들어낸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까? 결국 모든 인간은 죄악된 문화와 향락에 젖어서 정신없이 살다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지나간 역사와 문명사가 보여주듯이, 이집트 문명, 헬라철학, 로마 제국에서 이미 보았고, 히틀러의 광란적인 독재정권도 몰락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광란적인 도모들은 결국 처절한 진노를 초래할 것 밖에는 없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찬양하면서 감격스러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영광을 올리며, 그의 인도하심에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미 성경을 통해서 제시된 엄청난 은혜의 역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성경은 유기적 영감을 받은 인간 저자들이 기록을 했기 때문에, 구속역사를 다루는 연속성과 다양성이 풍성하고도 분명하다.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계시된 가르침을 벗어난 사람들의 제안들은 결코 믿을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하시는 진리이자,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기도했다(요 17:17). 우리가 구원을 얻은 믿음의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
1)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지시들
우리가 땅 위에 있는 어떤 교회에 모여서 공적인 집회로 드리는 것은 그 예배장소와 관계없이 하늘나라에 연결되어있다. 승천하여 지금도 우편 보좌에 앉으사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에게 속한 공동체이다. 히브리서 12장 18-21절에 설명된 바와 같이, 지상의 교회가 드리는 예배는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에게 올리는 것이요, 하늘에 속한 천상 공동체로서의 예배에 연결되어 있다.
지상의 교회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땅 위에 있는 교회의 모임은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지역에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은 여전히 부족하고, 문제가 많고, 죄악에 물들어 있지만,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살피고 계신다.
신실한 예배는 반드시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들로 구성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인터넷에 연결되어서 가상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이것이 하나님에게 열납되고, 응답이 주어지는 신실한 믿음으로 올리는 경배요, 참된 예배가 될 것인가?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예배를 쉽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람들이 편리하다 해서, 또한 크게 흥행하는 방법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예배의 성공여부를 판단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예배하고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주일 날 오전에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라.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참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다. 바른 예배는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방식에 따라서 올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그저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예배가 얼마나 허망한 행동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배란 매우 엄중한 행동을 포함하는 것임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데, 결코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가벼이 생각하거나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창세기 35장 7절에서, 야곱의 예배행위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내용 안에서만 예배하여야 함을 강력히 제시하여 준다. 레위기 10장 1-3절에서는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지정하시는 방법대로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가, 즉석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사야 1장 12-13절을 읽어보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성경에 적극적으로 권고하는 내용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배 시간에 그런 내용들을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 교회에서의 예배는 실제적으로 지역 교회에 나가서 드리는 예배에 연결해야만 하고, 모든 우선순위를 지역교회 예배로 돌려야 한다.
특히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 순종하는 예배, 진지한 예배를 드리도록 촉구하신다.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모임과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결국 헛된 예배가 되고 말았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1-23).
참된 예배는 피조물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엎드려서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들이므로,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시 95:6-7).
2)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는 특권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집단 공동체를 이뤄나가는 의무를 갖고 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공적인 예배에 나아가서 믿음을 통해서 순종하기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목이 곧은 백성으로 교만하게 우월의식을 갖거나, 혹은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고 누리기에 함몰되어서, 연합된 공동체의 일원임을 잊어버린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도록 하려 함이다. 창세의 첫 부분에서부터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까지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예배와 찬양이다. 땅 위에 내려와서 살아가고 있는 전 인류에게 있어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첫 이야기가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다(창 4:3-5). 그리고 마지막 천상에서의 참된 예배들이 보여졌는데, 찬양과 각종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 되어졌다(계 4-5장).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은 스스로의 설계와 손으로 지은 것이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과 교회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건설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 위가 영원하리라"고 하였다(역대상 17:10-14).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집이요, 자신의 나라를 세우셨다. 그 집에서는 그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경배와 예배를 올리는 장소로 사용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솔로몬은 성대한 낙성식에 언약궤를 좌정시켰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집이라고 아홉 번이나 반복하였다(왕상 8장). 성전이라는 명칭은 없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이 집이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장소라는 의미가 아니라, 비록 하나님은 하늘에 임재하시지만, 그의 백성들이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올리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는 왕들을 통해서 다스리게 하셨지만, 성전을 초월하여서 온 우주에 펼쳐진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신다(시 87:5).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믿음의 반응을 드러내어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 순종하도록 요구하였다. 수많은 구원사건들 중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낸 사건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역사의 본질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예배와 믿음의 반응은 구원을 받은 백성들과의 언약관계를 표현하는 일이었다. 언약에 기초한 예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 예배의 언약적인 성격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관되게 지속되어졌다.
인간의 반응으로 드리는 예배는 전인격을 모두 다 바쳐서 온전히 드리도록 요구되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신 4:29, 6:5, 11:13, 26:26; 막 12:30, 33; 눅 10;27, 마 22:37). 예배에의 부르심에서 하나님은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는 식으로 나가는 반심이 아니라, 전심을 다 드려야만 한다고 요청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예배를 중심적인 신앙 행동으로 규정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인도할 것 인가에서부터 어떤 장소와 순서로 진행될 것인가를 소상하게 가르쳐주셨다. 출애굽기 24장 1-8절에 보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만남이 일어난 집회가 기술되어있다. 출애굽 직후에 시내 산기슭에서 시작된 공식적인 예배는 하나님과의 성도들과의 만남을 보여주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면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공적인 만남은 가장 중요한 기본 구조적 요소들이 제시되어져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출애굽기 19장에서 24장까지에 기술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훗날 기독교인들의 공적인 예배에서 본질적인 요소들이 제시되어져 있다.
신약성경에는 출애굽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들 사이의 연관이 강조되었다. 베드로 사도는 신구약의 핵심적인 두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2:9).
출애굽 사건에서처럼, 어둠 속에 살던 자들을 밖에 있는 빛의 세상으로 불러내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왕에게 속박된 노예로 살다가 구출된 것처럼,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사악한 권세 아래에 놓였던 자들이었으나 주님께서 구출해 내었다(엡 2:2).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 언약을 맺은 성도들은 교회를 이뤄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게 되었다. 구약시대의 맺어졌던 모든 언약의 조항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갱신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과 자신들에게 맺어진 언약을 지키는데 실패하였다. 이스라엘은 거듭해서 후손들의 시대로 내려가면서 언약의 파기자들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지켜질 새 언약을 맺으셨다. 우리들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과의 다짐이나 맹세를 지킬 수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온전한 순종, 죽으심, 부활을 통해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하시면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유지하시는 것이다.
3) 언약의 확증으로서의 제사와 예배
김재성 교수신약의 교회와 그들의 예배는 구약성경에서 이어져 내려온 메시야의 대망과 재림의 소망을 지속적으로 공유한다는 연속성이 있다. 그러나 신약교회에서는 예배와 성례에 있어서 구약의 의식들과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신약교회에서는 더 이상 아들을 위해서 할례를 시행하지 않으며,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으며, 유월절 절기를 예배의 일부로 지키지도 않는다 (고전 7:17-21). 구약성경에서는 성전이 예배의 중심장소였으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신 이후에는 성소의 휘장이 찢겨졌다. 더 이상 그곳에서의 예배란 무의미하다는 하나님의 뜻이 선포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원형으로서 구약시대에 제사의 제도 (system)를 명쾌하게 제정해 놓으셨다. 제사장 마음대로, 혹은 바치는 사람의 뜻대로 제사를 올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구약성경에 강조된 희생 제사를 간략히 살펴보아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 관계들이 그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지속되어 내려온 언약관계는 항상 희생 제사를 통해서 확정되었다.
또한 예배자의 태도를 매우 중요시 하였다. 아벨은 겸손하게 신실하게 "믿음으로" 제물을 바쳤다 (히 11:4). 우리는 동물을 희생시키는 제사의 근원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음을 알게 된다. 그 후로 노아는 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바쳤다 (창 8:20-9:17). 아브라함은 삼 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로 번제를 드렸다 (창 15:9-21).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단을 쌓았다 (창 26:24-25). 야곱은 벧엘에서 단을 쌓았다 (창 35:6-12).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유일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였던 사건을 매우 특별한 사건으로 대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올라갔을 때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질문했던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여기에는 나무와 칼이 있는데, 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이 질문에서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이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 산 위에서 어린 양으로 바쳐질 사건의 예표였던 것이다.
출애굽 이후에도 번제물을 바치는 희생 제사가 언약을 지켜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출 24:5-6). 하나님께서는 친히 희생 제사의 절차와 그 시행을 담당하는 제사장에 관한 모든 규정도 알려주셨다.
번제를 드리는 제사의 의미는 속죄의 피라는 중요한 뜻이 담겨 있었다. 일 년에 한 차례 정한 날에 이르러서 제사장이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민족의 죄악에 대한 속죄를 선포했다 (레 16:1-34). 희생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에 대한 대속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에게서 흘리는 피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상징적인 피흘림이었다. 비록 이스라엘의 죄는 여전히 남아있을지라도, 희생제물의 피에 의해서 가리움을 받게 되어져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죄를 추궁하지 않으신다.
희생 제사는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교회의 예배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대속적인 희생 제사였고, 대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한 것이라고 명쾌하여 풀이하였다 (히 9:11).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화목제물이다 (롬 3:25).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이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언약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물인 것이요(사 53:4-5), 그 백성들의 죄악을 가리우는 것이어서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다. "다 이루었다"(벧전 2:24)고 선언하였다.
교회에서는 예배 가운데서 성만찬 예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감사와 은혜를 맛보게 되며, 악한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시려고 몸을 바친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와 축하의 잔을 나눈다.
4) 성막과 성전과 회당에서 교회로의 전환
구속역사의 진행 과정에 따라서, 회막과 성전에서의 제사시대가 지나가고 교회로 모여서 예배를 올리는 신약시대의 새 언약이 전개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배의 장소와 본질의 전환이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장소와 시기가 매우 중요한 본질이었다. 지성소의 제단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하나님의 임재장소로 간주되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장소로 간주되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머물러 있을 것을 약속하셨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는 것을 다시금 역사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 후로 오백 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다윗은 4천 명을 성전건축을 위해 훈련시켰다 (대상 23:1-6).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아버지 다윗에게 내리신 지시에 따라서 완성했다 (대상 28:11-13, 19). 하나님께서 직접 다윗에게 내리신 계시대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제1차 성전이 파괴된 후,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구약시대의 신실한 임무 수행자들처럼, 신약교회의 예배도 하나님의 명령에만 따라야 하는데,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모두 다 청결한 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역시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라고 명령하였고, 또한 자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것도 허락하였다 (마 4:10, 눅 4:8, 요 20:28-29).
참되고 순수한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예수님은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였다 (요 4:20-24). 한국어 옛 번역에는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되어있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 말씀을 예배를 시작하면서 낭독한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암송했다. 대부분 교회에서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예배의 선포사로서 사회자가 읽어 내려가는 시간에 그저 엄숙할 뿐이라는 생각에서 고개를 숙인다. 아무런 마음의 감동도 없이 낭송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정확하게 헬라어 본문을 영어로 번역하면, "in the spirit and in the truth"이다. 여기서 소문자 '영'(the spirit)은 "성령"(the Spirit)의 인도하심과 임재하심 가운데서"라고 풀이할 수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점은 참된 예배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순종함으로 시행되어진다고 가르친 것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교리나 지침들에 의존해서, 여기서나 어디에서나 예배 장소를 마음대로 정해서도 안 되고, 예배 시간과 내용들을 제멋대로 지어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상 정해진 절기에 제사와 경배를 드리러 모이는 일에 힘썼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날마다 진행되는 예배에 참석하기를 사모하였고, 기쁘게 노래했다 (시 122:1). 이 기쁨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모든 예배자가 갖추고 있는 마음 상태이자, 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을 통해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온전한 예배를 요구하였다. 신성한 율법의 내용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이다. 안식일 규정을 통해서 엄숙한 지침이 주어졌으니,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영광과 찬양을 올려야만 했다.
안식일은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날이요,
둘째로 언약적 행동으로 하나님께 반응으로서의 예배를 올리고, 믿음을 나타내야만 하는 날이다.
안식일 준수는 결코 폐지될 수 없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행위로 의를 성취하라는 지시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어떤 행동을 금지하는 조항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의 깊은 의미는 사람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케 하시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거룩한 구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시고자 함이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날이다." 야고보는 이러한 행동들을 믿음에 수반 되어지는 행함으로 강조하였다 (약 2:17-26).
안식일에 금지한 일은 요즈음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이 있는 것들을 쟁취하려는 행동(servile)이다. 일상의 가정과 일터를 보전하는 행동을 전면금지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고기를 먹으려고 불을 피우거나, 그것을 위해서 나뭇가지를 모으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이런 자들은 중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냥 생명을 보전하는 행동 (preservation)은 허락되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양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구출해 내야하고, 불이 나면 당장 진화작업을 해야만 한다. 이런 행위들은 재물이나 재산을 증식하려는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 성막에서도 일하는 행위를 금지했는데, 다른 날들에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의 시대에 주신 안식일 제도, 성전의 제사 규정과 형식들은 점차 타락한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면서 모두 다 파괴되고 말았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성전제사의 "형태"만 남았고, 안식일 준수의 "본질"도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동물 제사를 시행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성전의 제단이 파괴되었기에, 더 이상 제물을 드리지 못한다고 변명하고 있다. 성전시대가 지나가고 회당제도로 모였는데, 그 예배 내용은 성전과 대동소이했다.
이제, 신실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약 제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내용들을 예배시간에 시행하고 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공적인 기도, 찬양, 금식, 설교, 성경낭독, 그리고 주일 성수와 세례와 성찬을 중요시하고 있다.
히브리서 12장 22-29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서 예배를 올리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교훈들을 발견하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임재 하셨고, 구약 시대의 예배에서도 임재 하였으며, 신약시대의 예배에서도 동일하게 임재 하신다.
시온은 다윗이 통치한지 칠 년 만에 점령한 성채이다. 그곳은 예루살렘 남쪽 편에 위치한 곳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좌정시킨 곳이다. 시온 산에 이어진 북쪽 편 땅 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의 상징적인 건물이 되었다. 시편 122편 3-4절에 의하면, 다윗의 시온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이는 장소였다.
히브리서 12장 22-23절에서는 새로운 시온 (New Zion)이 가장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다. 이 새로운 시온에서 성도들이 예배의 모임을 갖게 되며, 하나가 된 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장소이다. 이곳에서의 모임은 장자들의 총회이며,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로 구성된다. 옛 이스라엘은 다윗의 시온에서 모였으나, 새 이스라엘은 하늘에 있는 시온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 (히 12:23).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서 모이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모습이다.
새 시온에서는 연합된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서 모임을 갖는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완전한 세대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영광의 몸으로 함께하시면서 통치하시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기독교 신자는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모여서 경배를 올린다.
5) 교회 안에서 받는 은혜
종교개혁 이후의 복음적인 신학자들은 성도는 교회 안에서 거룩한 삶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네 가지 중요한 방편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첫째, 선포된 말씀거룩한 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선포 가운데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말씀하시고, 자신을 아는 지식을 불어넣어주신다.
먼저는 설교자에게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경건한 성도들로 하여금 경외, 기도, 사랑, 복종, 신뢰를 가지고 반응하게 하신다. 성령은 설교자를 통해서 "성도들을 새롭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해 나간다." 더욱이 선포된 말씀은 영혼의 치유와 씻음과 고장난 곳을 수리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정한 방편이다. 성령에 의해서 사용되는 설교자는 영혼의 의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둘째, 성례들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사역과 동일하게, 세례와 성찬을 통한 성례들도 연약한 자를 격려하고, 양육하며, 교화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는 외적 상징들과 함께 작동한다. 성례를 시행하므로써,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강화시키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살아있는 제물로 기꺼이 헌신하도록 이끌어주신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신자의 씻음을 상징하며, 인치는 예식이다. 하늘의 아버지에게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표식이며, 성령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을 의미한다. 성만찬도 역시 성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와의 연합됨을 의미하는 것이요, 새생명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빵에 참여함으로 주어진다. 우리가 성례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는 은혜 안에서 성장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에 동참하게 되는 유일한 수단이다.
셋째, 성도들의 교제우리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의 교제에 참여해야만 한다.
거룩함 가운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조언자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을 가꾸는 길이다 (고전 11:1, 엡 4:12-13). 교회에서는 성도들 상호간에 돌봄과 기도의 교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행 2:42, 고전 12:7).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 성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서로 병 낫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존경하는 길을 가는 성도와도 교제하여야 한다 (잠 13:20, 골 3:16). 다른 성도들과 격리 상태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삶은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결함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영원한 나라의 시민들이어서, 받은 사랑에 감격하여 받은 바 은사들의 나눔을 실현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은사들을 제공하는 교제를 감출 수 없고, 숨길 수 없다. 경건한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나", 혹은 "오직 성경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숙하게 된다. 나홀로 이기적으로 살거나, 개인주의를 고집하는 삶은 조화와 균형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태도이다.
넷째, 교회 권징의 시행교회의 권징을 통해서 영적인 성장과 발전이 이뤄지는데, 이것은 교회에 주신 은혜의 수단에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벨직 신앙고백서 (1561년), 32장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서 모든 성도들을 보호하고, 연합시키며, 일체감을 갖게하고, 영적인 능력을 공급하기 위해서 시행한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순종을 하여야할 성도는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마땅한 성도의 반응과 태도를 드러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도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친다.
다함께 모이는 교회는 경건한 성도가 마땅히 지도를 받으면서 영혼을 가꿔가야 하는 곳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매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며, 나그네와 이웃을 대접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성도의 삶은 가정에서나, 시장에서나, 직장에서나, 휴양지에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은혜를 반영하고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상황 가운데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 하거나, 메마른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거룩한 성도로서 매순간 감격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넓은 마음으로 역동적인 생활을 가꿔나가야만 한다. (끝)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조직신학)
첫댓글 카페지기가 드리는 부탁의 말씀...
연말입니다 겨울을 힘들게 버텨야 합니다
작은 나눔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한분이라도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카페를 계속해서 운영하려면 회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치료비,임대료,난방비.먹을것을 마련해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이체 회원이 없습니다 후원도 한달내내 두세분에 불과하니
카페도 생활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카페후원계좌-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