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391-불교의 생사관(生死觀) / 탄허스님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삶과 죽음일 것이다. 즉 생사(生死) 문제야말로 그 무엇보다 앞선 궁극적인,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몸을 담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 기필코 풀어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교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 불교에서는 생사문제를 이렇게 해결한다.
즉 마음에는 생사가 없다(心無生死)고. 다시 말하면, 마음이란 나온 곳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 또한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확연히 갈파한 것을 '도통(道通)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 찾아보라.
마음이 나온(生) 구멍이 있는지. 따라서 나온 구멍이 없으므로 죽는 구멍도 없다.
그러니까 도(道)가 철저히 깊은 사람은 이 조그만 몸뚱아리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 수가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중생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천년만년 살고 싶어 한다.
도인(道人)·성인(聖人)은 굳이 오래 살려고 하지 않는다. 죽는 것을 헌옷 벗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굳이 때 묻은 옷을 오래 입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중생들의 우견(愚見)일 따름이다.
도를 통한 사람은 몸뚱아리를 그림자로밖에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은
간밤에 꿈을 꾼 것이나 같다고 할까.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서 무슨 일 인가 분명히 있었긴 있었으나 헛것에 불과하듯 삶도 그렇게 본다. 그러므로 굳이 이 육신을 오래 가지고 있으려 하지 않는다.
벗으려고 들면 향 한 대 피워놓고 향 타기 전에 마음대로 갈(죽음)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존재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고, 육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으며, 일년에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있고, 또 우주는 일었다가 없어짐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도인(道人)에게는 생사가 없다. 혹자는 '그 도인도 죽는데 어찌 생사가 없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겉만 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옷 벗는 것을 보고 죽는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옷'을 자기 '몸'으로 안다. 그러니까 '죽는다.' 그렇다면 도인이나 성인은 무엇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몸 밖의 몸, 육신 밖의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좀 어렵게 말하면 시공(時空)이 끊어진 자리, 그걸 자기 몸으로 안다. 시공(時空)이 끊어진 자리란 죽으나 사나 똑같은 자리. 이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똑같은 자리, 우주가 생기기 전의 시공이 끊어진 자리, 생사가 붙지 않는 자리란 뜻이다. 부처님은 바로 이 '자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오셨다.
이 세상의 삶이 '꿈'이란 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덥고 춥고 괴로운 경험 등을 했을 것이다. 꿈을 꾸고 있는 이 육신이 한 점도 안 되는 공간에 누워, 또 10분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몇 백 년을 산다.
우주의 주체가 '나(我)'이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우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 우주 속에서 내가 나온 것이 아닌 것이다. 세간(世間)의 어리석은 이 들은 꿈만 꿈인 줄 안다. 현실, 이것도 꿈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꿈인 줄 모른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인이 깨쳤다는 것은 이 현실을 간밤의 꿈으로 보아버린 걸 말한다. 우리는 꿈만 꿈이라고 생각할 뿐, 이 현실은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몇 백 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어서 아등바등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성인의 눈엔 현실이 바로 꿈이다. 즉 환상이나 집착이 없다. 그러므로 천당과 지옥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 이 정도로 말 해 놓고 나서 우리의 삶이 영원하다고 본다면 영원할 수도 있고 찰나라고 본다면 찰나일 수 있을 것이다.
좀 수긍이 될지 모르겠다. 요컨대 우주 창조주 즉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우주 생기기 전의 면목을 타파한 걸 '하느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란 하늘 어느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어떤 실재적인 인물이 아니다.
이 말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될 것이다. 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 내 얘기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 태어난 젊은이라면 3천만, 5천만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즉 나 하나의 잘못은 3천만, 5천만 명에게 영향이 미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중에는 어른이 되어 무슨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준비를 갖추며 살 일이다.
청년은 그런 자신을 길러야 한다.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