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아브라함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왜 하필 아브라함 후손일까요?
다른 사람의 후손에게 주신다고 하면 안 되고 굳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을까요?
성경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런 욥이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믿음이 좋았던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샘플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는 것으로 끝나는 얘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아브라함의 후사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 교회가 참 이스라엘인 것처럼 혈통에 따른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어쨌든 그런 일에 대한 예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 보이는 모습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인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허락하신 새 땅에 들어가려면 맘에 준비 다하여 힘써 일하세…”는 우리한테 딱 맞는 찬송가 가사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여호수아를 본받아서 앞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고, 우리가 거할 처소가 주님 품인 것을 명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허락하신 새 땅보다 조상이 물려준 땅이 더 좋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농담 소재가 아무리 빈곤해도 그런 농담까지 해야 할까요?
요즘은 누구나 살기 힘들다고 합니다.
특히 자영업자들이 힘들다는 말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합니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별수 없습니다.
몰라서 그런 것을 어떻게 합니까?
불신자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에는 혀를 차는 것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그런 말을 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허락하신 새 땅보다 조상이 물려준 땅이 더 좋다는 얘기가 다분히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중에 받더라도 지금 세상에서 잘나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한테 종교를 물으면 태연히 기독교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언제부터 이렇게 싸구려 종교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신자다운 야성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신앙을 나타내어야 할 공간인데 신앙을 내세워서 국물을 얻어먹어야 하는 곳으로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이스라엘을 흉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의 감격은 어디 가고 그새 하나님을 원망하는지 참 답답했습니다.
그것이 구원 얻은 우리 모습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도 체험했고 여리고성의 승리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허락하신 새 땅을 차지하려는 열심은 없었습니다.
싸움은 대충 끝났다고 치고 얼른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것이 그들 마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내용을 반면교사로 삼을 차례입니다.
그들을 흉보는 것은 신앙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한테 그런 모습이 없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베테랑>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올곧게 근무하는 형사 서도철과 돈의 위력을 마음껏 뽐내는 재벌 3세 조태오가 주연으로 나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명대사 중 하나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입니다.
조태오가 연관된 사건을 관할 경찰서에서 서둘러 덮으려고 하자, 서도철이 담당 형사를 질책하며 한 말입니다.
그 말을 빌려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