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사는 삶"
[마가복음 5:25–36]
미국 청년 달비는 일확천금을 노리고
서부로 갔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사전 조사를 한 끝에
금맥을 발견했습니다.
몇 주 동안 200m 정도를 파 내려가자
번쩍번쩍 빛나는 금맥이 보였습니다.
온 몸을 휘감는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죠.
그리고 투자자들을 모아
본격적인 채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광산에서는 누런 황금이
물 밀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흥분했고
달비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되는
꿈을 꿨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꼬이지 시작했습니다.
파도 파도 계속 나오던 금이 뚝하고 끊기고
흙덩이만 나오는 것입니다.
자금은 바닥이 났고 결국 달비는
금광 개발을 접고 말았습니다.
그는 광산과 장비를 어느 고철상에
헐 값으로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갔죠.
그 고철상 주인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술자를 새로 불러
지질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얼마 전 달비가 포기했던 곳으로부터
불과 90cm 아래에 새로운 금맥을 발견했습니다.
고철상은 그날로 금맥을 채굴하여
벼락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배가 아파요.
왜 나에겐 저런 달비 같은 사람이 없을까?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의 믿음 생활도
이와 같지 않나는 고민을 했습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러 나옵니다.
아침부터 씻고 단정하게 옷도 입고,
차도 몰고 먼 거리를 달려 옵니다.
그렇게 찬양도 하고, 말씀도 듣고,
기도도 해요.
그런데 정작 만나야 할 황금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갑니다.
반면 어떤 분들은 똑같이
주일 예배에 왔습니다.
그런데 찬양 시작부터 눈물이 앞을 가려요.
말씀을 듣는 내내 아멘 아멘 하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설교자와 시선을 맞춥니다.
기도하는 시간엔 누구보다 간절하게 부르짖어요.
이런 사람은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황금을 발견하고 가져 가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오늘 본문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싼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어요.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죠.
이 여인은 율법에서도 부정하다고 하는
질병으로 12년을 고생했습니다.
전 재산을 써가며 질병을 고치려 했지만
돈만 허비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혈루 근원이 마르며 고침을 받아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왜 이 여인만 치유를 받았을까요?
이 질문에서 오늘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옛 말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뿌린대로 거둔다는 의미죠.
생각은 밭입니다.
그 밭에 무얼 심느냐가 중요해요.
한 청년이 추운
겨울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넘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기름 탱크가 터지는 바람에
전신 3도의 끔찍한 화상을 입습니다.
그는 숟가락을 들 수도,
혼자 화장실을 갈 수도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16번의 대수술과 수백 시간의
고통스런 재활 훈련을 마치고 퇴원했습니다.
그럼에도 흉터가 가득한 얼굴과
일그러진 손은 그대로였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저는 매일 우울함에 빠져 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데 이 청년은 자기에게
닥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요.
그렇게 그는 동료들과 난로회사를 차렸는데
대박이 납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만 갈 것 같죠?
그런데 문제가 또 생깁니다.
첫 사고를 겪은 지 4년 후,
경비행기 추락 사고로 척추를 다칩니다.
평생 하반신 불구로 살아야 한다는
의사 선고가 내려졌어요.
일반 사람 같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이었겠죠.
그러나 그는 원망하지 않고
생각을 바로잡습니다.
결국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고,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기에 이릅니다.
그가 NBC TV 투데이 쇼에 출연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불구가 되기 전에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1만 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9천가지를 할 수 있어요.
물론 제가 할 수 없게 된 1천 가지에 집착해서
슬퍼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9천 가지에 집중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미첼입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생각에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의 밭에 절망과 좌절, 원망의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할 수 있다는 소망의 씨를 뿌렸어요.
오늘 본문의 혈루증 앓던 여인도
생각이 달랐습니다.
본문 27-2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27, 28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여기 보면 그녀가 생각했다고 나옵니다.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옷에 손을 대면 구원 받으리라!”
그녀는 예수님을 만지면 해결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2년간 그녀를 옭아매던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오랜 시간 풀지 못한
숙제가 있으십니까?
돈도 써보고, 사람도 만나 봤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나요?
이제 우리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면 내가 낫는다.’
‘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그 생각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27절을 자세히 보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라고 나옵니다.
생각에는 늘 재료가 있습니다.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사탄은 이걸 잘 알고 우리의 눈과 귀를
세상에 붙들어 두려고 합니다.
자꾸 유튜브만 보게 합니다.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게 하여
잔상을 남깁니다.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듣도록
부정적인 사람들을 붙입니다.
그러면 마음이라는 밭에
그런 것들이 심겨져요.
결국 우리의 생각은
더러운 저질의 밭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전까지 내 생각, 내 경험으로 볼 때
안 될 것 같았던 일들이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은 우리의 감정과 언어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는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다윗이 골리앗을 치려고 할 때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우리 함께 사무엘상 17:46, 47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7:46, 47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의 현실은 최악이었습니다.
사울이 준 최신식 전투 장비가
몸에 맞지 않아서 맨몸으로 싸웠어요.
칼도 무거워서 들지 못해
돌멩이만 들고 있었어요.
이런 상황 속에 건너편에선
키가 3미터나 되는 헐크가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생각에서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아이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 만나주시면
반드시 변화될 거야.
이 시대에 귀하게 쓰임받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거야.’
이런 생각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정말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남편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비록 지금은 주님을 몰라 방황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면
누구보다 귀하게 헌신하는 남편이 될 거야.
믿음으로 가정을 세우고 이끌어 가는
리더가 될 거야.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될 거야.’
혈루증 앓던 여인의 생각이 그랬습니다.
현실은 12년 동안 전혀 차도가 없는
질병으로 인해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지면
반드시 근원부터 고쳐질 거란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생각이 그녀를 변화의 자리로 인도했습니다.
우리도 생각이 변화하여
은혜를 경험하길 축복합니다.
또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바로 간절함입니다.
여인은 12년간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을 만나러 가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거 해결 못 받으면 난 죽는 게 낫다’고 여겼다.
간절함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현대 자동차의 창업주인 고(故)정주영 회장은
어릴 적 가난했다고 해요.
6남 2녀 중 장남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공부대신 농사를 하길 원했죠.
그러던 중 이렇게 살면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가출을 합니다.
처음엔 막노동 판에서 먹고 자며 일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잡혀서 돌아오길 수차례나 반복했죠.
어떨 땐 아버지가 소를 판 돈을 몰래 들고
도망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 완전히 출가하여 서울로 올라왔어요.
여기서 그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시작하여
최선을 다해 일을 합니다.
얼마나 성실했던지 쌀 가게 주인이
그에게 가게를 물려주죠.
그 후 자동차 정비소를 하다가
직접 자동차 회사를 차립니다.
나중에 건설과 조선 사업까지 이루며
한국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그는 이거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뒤로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오직 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며 살 수 있는 상황었어요.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에게 찾아온 위기는
기회가 됩니다.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혈루증 여인도
고난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갔던 것 아닙니까?
그때 그녀는 예수님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당시 유출병 환자는 타인과 접촉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 틈바우니를
비집고 갔습니다.
여기저기 밀치고 당기고 꼬집기까지
하지 않았을까요?
서울에서 살 때 출퇴근 시간이면
지하철이 사람으로 가득 찼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 발자국도 떼기 어려운 시간이었어요.
이 여인도 수많은 사람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아갔습니다.
이건 목숨을 건 행위였어요.
그러나 그녀에겐
“예수님 아니면 안 된다”는 간절함이 있었어요.
이 갈급함이 그녀를 바꿔 놓았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갈급함이 있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데
그런 간절함과 목마름이 있습니까?
영화 <명량>을 보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했던 일들이 등장합니다.
이순신은 일본군이 쳐들어온다는
헛소문 때문에 두려워하던
군인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실제로 난중일기에 보면 명량해전을 14일 앞두고
바로 아래 장수였던 배설이 도망을 쳤습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이순신은
자신의 진지에 불을 지릅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 떨고 있던 군인들에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배는 나오는데 아무런 기대도 없이
나오고 있진 않나요?
간절함, 목마름은
어디에 두고 오진 않았나요?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 함께 시편과 잠언 말씀을 읽겠습니다.
시편 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사모하는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사모하는 마음, 갈급한 심령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오늘 그 마음에 예수님께서
찾아와 주시길 축복합니다.
3) 믿음은 순종이다.
마지막은 순종입니다.
우리 본문 27절과 29절을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27, 29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기서 여인은 무리 가운데로 끼어들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생각과 갈급함이
이제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랬더니 병이 곧 치유되었죠.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cf) 다이어트를 해본 적 있습니까?
해보면 압니다.
살 빼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작심삼일로 끝나는 걸까요?
우리도 살 빼고 싶은 목마름이 있습니다.
여름에 멋진 바닷가에서 폼나게
놀아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예전에 사둔 옷도 입어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살을 빼기로 작정하고
살 빠진 나를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에서 끝난다면 살이 빠지나요?
그렇지 않죠.
실제로 적게 먹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된다는 생각이 중요하지만
예수님께 나아가는 게 더 중요합니다.
설령 그 자리에 장애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지금 이 여인에게 장애물은 무엇이었나요?
사람이죠.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사람이 장애물이었습니다.
교회에도 이럴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김 집사님의 말 한마디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면 괴롭죠.
예배가 은혜가 안 됩니다.
속상해서 우는데
사람들은 은혜받은 줄 압니다.
이래서는 안 돼요.
우리의 장애가 때로는
나를 살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걸 뚫고서라도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진짜 예수님이 나의 아픔과 상처를
만지실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분께만 집중하게 됩니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지,
가족이 핍박을 해도
예수님을 만나뵈러 갑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더라도
예수님께 손을 대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회복의 역사를 경험할 줄
믿습니다.
이번주 말씀을 묵상하며
떠오른 찬양이 있습니다.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어도 걸어가야 합니다.
믿음 위에 서서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 자는 반드시 주님을 만납니다.
34절을 읽어봅시다.
마가복음 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부르시는
호칭에 주목해 보십시오.
‘딸아’
이건 친근감의 표현입니다.
이전엔 병으로 죽어가던 그녀였지만,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갔더니
병도 고침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녀에게 평안을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평안하길 원하십니다.
다시는 질병의 아픔 속에 살지 않길 원하시죠.
오늘 우리는 이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 나아가는 길에는
장애가 존재합니다.
먼저는 내 자신입니다.
나의 마음의 질병, 육신의 질병이 장애죠.
두 번째는 사람입니다.
가까운 가족들이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이야기가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나를 두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는
모든 장애물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갈급함으로 주님을 만나고
치유 받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