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罪)라는 한자어에 대한 어의(語義)연구/펌
기독교의 복음은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소식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인 지 알려면 “구원”이 무엇인 지 알아야 하고 그 구원은 “죄”가 무엇인 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인식이 필요해 진다. 그런 자각과 인식은 물론 성령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의 방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죄에 대한 인식과 자각은 우리 죄인 편에서의 죄에 대한 인식과 자각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런 노력 자체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나는 개혁되었는가>라는 시리즈글을 쓰면서, <죄가 무엇인 지를 모르는 회개가 많다>는 주제를 다루는 중에, <죄>라는 단어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죄>란 말은 히브리어(아삼, 하타,아온, 페사 등으로 표현됨)나 헬라어(하말테마, 하말티아, 마랍토마 등으로 표현됨)에 다루는 <죄>가 아니라, 바로 그런 단어들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사용된 한자어로서의 <죄>(罪)에 대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국내의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의 <죄>에 대한 글들을 보면, 헬라어 히브리어에 대한 언급은 많은데, 한자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는 것 같아서 어리둥절해 진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로서의 <죄>라는 말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가, 한글, 혹은 한자어로 번역되어지는 중에, 원래의 한자어가 가지고 있던 <죄>라고 하는 단어의 의미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며 절충되고 복합되어서 의미의 전화를 이루는 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성경의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통해서 표현된 <죄>라는 것과, 한자어로 번역되어진 <죄>라는 것이 과연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과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질문을 회피할 수는 없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죄>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런 <죄>인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면, 내가 알고 알고 있는 <구원>도, <복음>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헛다리를 짚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도 이 부분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식으로 한자어의 이 <죄>를 해석하면서 오용하고 있다. 가령, 어떤 설교자는, <罪>라는 말이 <넉 四>자와 <아닐 非>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착안해서, “네 사람이 모두 어떤 사람을 두고 아니다라고 하면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죄인이 된다”고 하든가, “세 번째까지는 나쁠 뿐이지만, 네 번째까지 반복하게 되는 나쁜 짓은 죄가 된다”고 하든가, “동서남북 사방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잘 안되도록 하는 것이 죄이다”고 한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그저 눈쌀이 먼저 찌푸려진다. 과연 저 설교자가 하는 설교가 진실할까 하는 의심마저 들게 된다. 올바르지 못한 자료에 근거해서 자기자신의 논리를 쌓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교라고 한다면, 참 슬픈 일이다.
다음과 같은 <죄>라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 설교는 어떠한가? “<罪>라는 말이 <넉 四>자와 <아닐 非>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죄는 “네 가지 아닌 것”이어서, 첫째, 법이 아닌 것(不法), 둘째, 의가 아닌 것(不義), 셋째, 선이 아닌 것(不善), 넷째, 믿음이 아닌 것(不信)이라고 한다. 성경구절을 적당하게 들이대면 교인들은 대개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그 한잣말 참 묘하다고 생각한다. 한자어가 가지고 있는 성경교리와의 연관성을 더욱 더 강조하게 되면 설교는 더욱 감치게 된다. 그런데, 설교자마다 이 네 가지 <아닌 것>들이 약간씩 다르다. 어떤 설교자는 위의 네 개 중에 어떤 것을 빼고는, <아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不行)을 첨가하기도 한다. 얼마나 절묘한 해석들인가! 회중들은 설교자의 해박한 한자실력에 감탄을 하고 <은혜>받을 준비가 되어 진다.
문제는, 어떤 근거에서 이런 한자어해석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한자어해석의 사전에서 그 출처를 삼고 있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기독교의 설교자들만 아니라, 다른 종파, 종교에서도 흔히 범해지고 있는 실수들이다. 동학계통의 어떤 사람은 죄를 사시(四時)를 어기는 것, 곧 봄,여름,가을,겨울의 때를 놓치고 농사를 짓는 것을 죄라고 해석한다. 유교계통의 어떤 사람은 충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을 범하는 것들 중에서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것(무지)을 제외한 네 가지 곧 불충, 불의, 무례, 불신 이 네 가지가 죄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아예 죄라는 것이 없다고 하니, 이런 단어연구에 관심이 없고…
이러한 잘못된 해석들을 지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사실, “죄”라는 단어를 인터넷검색을 통해서 살펴보았더니 15,000개의 자료가 뜬다. 그 중에서 2-300개 정도를 살폈더니, 위와 같은 해석들이 반복해서 이용, 혹은 오용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저 다 살펴 보면 얼마나 더 멋있고 애교가 있는 해석들이 나올까 궁금해진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시간이 있는 분은 그렇게 해보길 바란다.
그 자료들 중에서 그래도 상식과 이성에 근거해서 합당하고 여겨지는 해석이 있어서 이 글을 통해서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罪>라는 말이 <넉 四>자와 <아닐 非>라는 말의 회의(會意)문자라는 전제부터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겠다. 오히려 <넉 사> 아니고 <그물 網>에서 왔다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겠다. <망>자에 해당되는 한자어를 찾아보면 그래서 <罒(망)>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물 망(网)부의 약자이다. 이런 발견은 정말 <죄>라는 한자어의 이해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온다.
문제는, 어떻게 <그물 網>이 <罪(죄)>와 관계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자면, <아닐 非(비)>에 대해서 좀 더 살펴야 한다. <아닐 비>라고 했는데, 무엇이 아니란 말인가? 이 <비>자는 “….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원래, “잘못된 행동” 그 자체를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부정어로서의 용법만이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형용하는 명사로서 사용되는 용법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이 <비非(비)>자는, “서로 등을 지고 좌우로 벌리는 모양을 본뜬” 상형(象形)문자이다. 서로 등을 지고 있는 잘못된 상태나 사물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형태나 상태 혹은 사물”을 일컫을 때 <非(비)>라고 하는 것. 그런 형태, 상태 혹은 사물(非)에 그물(網,网,罒)을 씌워 둔 것이 바로 <죄罪>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그물(網,网,罒)과 그 사물, 혹은 상태나 형태로서의 비(非)와의 관계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한자에 정통한 사람들도 분명한 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는, 그물이 고기를 잡는 그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릇된 일을 하는 사람이 그물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罪>라고 보기도 하고, 혹은 죄수들이 머리에 덮어쓰는 형틀의 일종을 <그물(網)>이라고 보고는, 그렇게 머리에 <그물>형태의 모자 같은 것을 덮어쓰게 되는 것이 바로 <罪>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설문해자說文解字>[중국 후한(後漢) 때의 자전. 15편으로 되어 있다. 허신(許愼)이 지었으며, AD 100년에 쓴 서문이 있다. 글자형에 따라 분류된 가장 오래된 자전]라는 일종의 중국어사전을 보면 그 7편하에 罪字를 “물고기를 잡는 그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원래는 <辠(죄)>라는 글자(스스로 自+ 매울 辛)로서 “그릇됨”을 나타내었었다고 한다. 맛이 매워서 스스로 코를 비틀 정도로 그릇되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천하를 통일한 그 유명한 진시황제가 이 <辠(죄)>라는 글자가 황제를 나타내는 <황(皇)>자와 유사하게 보여서 이 <辠(죄)>자 대신에 <죄(罪)>자를 사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릇됨>을 나타내는 말로는 <매워서 자기 코를 비튼다>는 뜻을 가진 <辠(죄)>자 대신에 <그물>을 나타내는 <죄(罪>자를 사용하게 되면서, 그물과 비자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시도되어 왔다는 것이다.
언어란 이렇게 생성,발전, 소멸을 하게 되는 셈이다. 원래는 <코를 비트는 매운 맛>과 관계되었다가 BC100년 경의 진시황제때에는 <고기잡는 그물>과 연결되었다가 그 이후에는 그 <그물>이 <죄인의 머리에 잡아씌우는 형틀로서의 그물>로 그 의미가 전화(轉化)되어지고, 지금도 어쩌면 똑 같은 <죄(죄)자를 사용하고들 있지만,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 채로 사용하고 있게 되는 셈이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죄>라는 한글과 한자어의 <罪>사이에도 의미상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니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이후의 500여년 동안의 세월동안에 <죄>라는 한글조차도 그 의미가 그 시대마다 달랐을 것이다(이런 차이와 변동의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충분히 그것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연구들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해 놓고 싶다. 교회가 혹은 신학교에서 한자교육에 등한히 하지 말아야 중요한 이유는 이런 한자문화권 가운데에 기독교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는 선교의식 때문이다).
그물(網)과 그릇됨(非)의 관계를 추적하다 보니, 그런 관계형성 훨씬 이전에 있었던 <죄辠>라는 단어와 개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매워서 코를 비튼다>는 뜻에서 무언가 <잘못됨>,<그릇됨>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이 <죄辠>였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원시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곧 인간의 오감(五感)의 감각기능과 연결되어서 어떤 추상개념들을 형성하게 되던 때의 흔적을 느끼게도 된다.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발전되어 온 것일까 또한 의문을 갖게도 된다. 아담이 사용했던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바벨탑으로 언어가 혼잡하게 된 후 분화발전되어온 그 언어들의 계보는 어떻게 된 것이며, 한자어는 그 중에서 어떤 계통의 흐름을 따라서 발전되어온 것일까? 정말 기가 막힌 연구가 될 것이다. 고대근동어와 우랄 알타이어족군과의 관계들을 추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구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죄罪>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자. 그러면서, 원래의 원시적, 총체적인 죄의 개념으로서의 <매워서 코를 비틀 정도의 그릇됨>이라는 의미가, 진시황의 지시로 그릇됨을 지칭하는 단어 자체가 바꿔지게 된 이후로, 또한 <그물>의 개념도 바꿔지는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그릇됨이라는 것이 <형법적> 혹은 <법정적>인 개념으로 바꿔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릇됨>이란 개념이 그렇게 분화되어져 간 것이다. <그릇됨>이라는 개념이 총체적이고 미분화되었다는 것은, 아주 다양하고 복합적인 뜻으로 발전되어갈 수 있는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단어가 시대와 역사의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서, 혹은 사상과 철학의 오고감을 통해서(예를 들자면, 중국의 한나라시대의 불교의 흥왕과 명나라 이후의 불교와 유학의 종합으로서의 신유학의 발전 등의 과정), 이 <죄>라는 단어가 겪었을 의미상의 변화에 대해서 음미해 볼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라고 하는 단어의 개념은 원래의 개념에서 어느 정도나 멀어져 있는 것일까? 멀어져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지만, 사실,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러한 우리들이 현재 지니고 있는 <죄>라는 개념이 과연 성경적인 <죄>의 개념과 얼마나 다른가 혹은 유사한가 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정확한 답들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한자어의 <罪죄>라는 말의 사용을 살펴보는 중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그릇됨>의 의미가 외적인 행위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곧 죄의 죄됨에 대한, 곧 그릇됨에 대한 기준이 외적인 행동이고 또한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신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느끼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원래의 죄(辠)라는 단어에 스스로 自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인간 자신이 맵다고 느껴지는 것 그것이 그릇됨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辠라는 것이다. 또 다른 기준은 염두에 없다. 이런 지적은 진시황이후에 바꿨다고 하는 죄(罪)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할 수 있다. “물고기를 잡는 그물”이든, “죄수의 머리에 씌우는 형틀로서의 그물”이든 모두 외적인 것과 관계된다.
결국 한자어의 <죄(罪)>는 영어로 표현되는 <죄(sin)>와는 다른 것이고, 오히려 <죄책guilt>와 관계된다는 것이다. 영어에서 사용되는 <죄(sin)>는 <죄책(guilt)>과 <패괴함(fallenness, 혹은 depravity)>으로 구성되어 있다. <죄책>은 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받게 되는 형벌로서의 죄를 죄책이라고 한다. 법정적이다. 반면에 <패괴함>이란 어떤 사람이 그런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외적인 행동을 범하게 하는 내적인 상태와 동기를 지적할 때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그 동인으로서의 죄를 말하는 것이다.
도둑질이라는 죄가 성립되려면 그 죄에 해당하는 죄책이 있고, 어떤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게 하는 그 사람의 성질과 성향이 있다. 이 성질과 성향을 <죄의 패괴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개혁주의신학은 <죄>를 생각할 때에 언제나 이렇게 두 가지 면을 동시에 생각해 왔다. 박형룡박사의 조직신학책을 보시면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고, 그가 거의 참고했다고 할 수 있는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책에서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설명을 한국교회가, 아니, 세계교회가 잊어가고 있고,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히브리어, 헬라어를 들먹이면서 설명을 해도, 이런 죄의 패괴성을 지적하지 않는다. 죄의 죄책성만을 언급하고, 죄의 용서를 선포할 때에도 죄의 죄책에서의 해방만을 말하지, 죄의 패괴성으로부터의 자유함에 대해서는 선포하지 않는다. 아니, 선포할 줄 모른다. 어떻게 죄의 패괴성에서 죄인이 자유함을 얻는 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과 우리 죄의 패괴성의 사죄가 어떻게 연결되는 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죄를 <하말티아>라고 하면, 과녁을 명중하지 못했다라고 설명한다. 옳은 설명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옳은 것이 아니다. 왜 그 과녁을 명중하지 못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 곧 죄인이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계명의 과녁을 정통으로 맞추지 못하게 만드는 그 근원적인 원인으로서의 죄의 패괴성을 지적하지 못한다. 죄인의 죄를 지적하되, 죄의 죄책성에만 집중한다. 외적인 행위에만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용서도 죄의 저주에서의 해방이나 면죄만을 강조하지, 죄의 패괴성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자유함을 강조하지 못한다.
이것을 잊어가고 이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야말로 현대교회의 죄가 아닌 지 생각된다. 물론, 이런 한자어의 단어뜻을 제대로 안다고 해서 우리의 죄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죄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죄는 교묘한다. 자신을 감추고 있다. 숨기고 있다. 우리의 무지의 벽 뒤에 자신을 감추고는 우리로 하여금 변명거리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죄는 죄자신을 외곡시킨다. 변장한다. 죄의 본질을 죄인들로 하여금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은밀히 그런 변장과 변명을 즐긴다.
지금도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바로 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낄낄거리면서 죄는 자신의 둥지를 틀면서 더욱 그 뿌리를 깊히 내려가고 있다.
오, 님이시여, 사랑하는 님이여,
그 뿌리에 성령의 검 곧 말씀의 검을 내려치소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는 그 좌우 날선 검 앞에 벌거벗은 채로 자신을 내려놓으소서.
자유의 영이 님과 함께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