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율 사바 신부
연중 제14주일
이사야 66,10-14ㄷ 갈라티아 6,14-18 루카 10,1-12.17-20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예언자 이사야가 보고 듣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언자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을 예언자는
보고 또 듣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이제 겨우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할 무렵, 여전히 이스라엘의 미래는 깜깜한 어두운 밤과 같은 상황이었을 그때,
예언자는 희망에 가득 찬 예루살렘의 미래를 내다보며, 기뻐하라고 오늘 1독서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예언자는 보고 있는 것, 어쩌면 예언자마저도 뚜렷하게 보지를 못하고
희미하게 보고 있는 것, 왜냐하면 먼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서 제대로 바라보기 어려운 것,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복구와 이스라엘 나라의 재건을 두고 기뻐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즐거움이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다스림,’ 곧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라고 당신 제자들을 사방으로 보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방해하거나 거부하는 모든 것을 물리칠 수 있는 권한과 힘을 제자들에게 부어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힘입어 자신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다음,
돌아와서는 기쁨에 들떠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는 가운데 경험한 수많은 기적들로 인해 기뻐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곧 예수님께서 밝혀주신 ‘참행복’(마태 5,3-12)을 맛보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일흔두 제자와 바오로 사도가 맛보았던 기쁨과 참행복이,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일꾼들에게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하느님의 선물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우리 삶과 인격 더 깊은 곳에까지 미칠 수 있는 더 나은 길은 무엇일까요?
마산교구 이학율 사바 신부
2022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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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마티아 신부
연중 제14주일
이사야 66,10-14ㄷ 갈라티아 6,14-18 루카 10,1-12.17-20
부끄러운 자랑
지인들이나 동료 신부님들과 대화를 할 때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국에 대한 이야기나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 군 생활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가 오갈 때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제생활하면서 참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동기 신부들도 저에게 다양한 사목 경험을 한 신부라고
이야기해 주기도 합니다.
사제 생활을 한 지 이제 20년이 막 지났습니다. 군종 사목을 하면서 남들은 잘 해볼 수 없었던
이라크 파병 생활도 해 보았고, 성전 건축을 하면서 여러 성당에 모금활동을 다녔던 경험,
중국 교포사목을 하면서 지냈던 생활들, 그 모든 생활과 경험들이 저에게는 하나의 자랑거리로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본당신부가 아닌 2대리구 사무국장으로서 또 하나의 경험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들을 자랑거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기도 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라고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그저 묵묵히 응답하며 살아가는 많은 신부님들과 수도자,
평신도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흔두 명의 제자들이 세상으로 파견되어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와 기뻐하는 모습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했고, 보았고, 이루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방법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고 거기에서 기쁨을 얻어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진정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들께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갈라 6,16)
대구대교구 김재호 마티아 신부
2022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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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채 대건 안드레아 신부
연중 제14주일
이사야 66,10-14ㄷ 갈라티아 6,14-18 루카 10,1-12.17-20
예수님의 낙인
저는 사회복지 관련 본당 외 사목에 파견된 지 여섯 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사제가 아닌 사회복지사나 원장으로서 클라이언트이건, 보호자이건, 직원이건, 공무원이건
신자가 아닌 사회의 많은 이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파견하십니다.
열두 사도가 교회 주교들의 활동을 예시한다면 일흔두 제자는 사제들을 나타냅니다.
열두 사도와 일흔두 제자들을 합친 수(84)는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는 12라는 숫자와
완전성을 의미하는 7이라는 숫자가 곱해진 수와 같습니다.
따라서 84는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을 상징합니다.
곧 오늘 당부하시는 모든 말씀들은 성직자들에게만이 아닌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문득 복음 선포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지금의 복음 선포자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성직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 온 세상은 코로나-19로 인해 황당한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말들인 사회적 거리두기, 영업 제한, 온라인 수업,
코호트 격리 등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지난 2년 반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는 지쳤습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다 보니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두게 되고,
결국 하느님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 선포를 이야기하기보다는 먼저 스스로 복음을 읽고, 듣고, 느끼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복음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가까워지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2독서에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갈라 6,17)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참으로 와 닿습니다.
원래 낙인이라는 단어는 옛날 희랍어인 스티그마(Στίγμα)에서 유래된 것으로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인두로 가축의 몸에 찍은 도장을 의미합니다.
조금은 무섭고 부정적인 단어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심리학에서 낙인효과(stigma effect)라는 말은
한번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면 다른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을 낙인으로 찍고 살아간다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현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 안에 모시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낙인을 뛰어넘어 예수님 자체를 몸에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신자인 것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부끄러워서 식당에서 성호경을 긋지 않고 밥을 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주 성호경을 긋고, 성경을 읽고, 좋은 일도 하다 보면 우리는 계속해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보다는 예수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낙인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 삶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을 직접 말로 전하지 않아도 행동과 느낌으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와도 예수님의 낙인을 지니고 있다면 별로 힘들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더욱 복음을 살아가고 성령이 역동하시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고 그분의 지체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것입니다.
인천교구 정동채 대건 안드레아 신부
2022년 7월 3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