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재를 넘어
십일월 셋째 월요일은 평소와 다른 행선지로 발길을 나섰다. 낙동강 중하류에 해당하는 창원 동읍 본포에서 낙동강을 건너 창녕 부곡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날이 덜 밝아온 이른 아침 배낭에 도시락을 챙겨 담아 반송 소하천을 따라 나가 원이대로에서 본포로 가는 30번 버스를 탔다. 충혼탑을 둘러 명곡교차로에서 도계동 만남의 광장을 지나 용강고개를 넘으니 안개가 자욱했다.
본포를 거쳐 북면 온천장으로 가는 버스는 주남저수지를 돌아가는데 차창 밖은 짙은 안개로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다. 주남삼거리에서 대산 산업단지로 가는 방향이 아니었지만 여러 승객이 타고 내리다 보니 운행 시간은 지체되었다. 주남저수지를 빙글 돌아 봉강마을을 앞둔 요양원 앞엔 출근하는 부녀들이 다수 내렸다. 북면 종점을 얼마간 앞두고 나는 본포 마을회관에서 내렸다.
강가 민물횟집을 지나 강둑으로 오르니 안개로 인해 사위는 어둠이 짙어 밤과 같았다. 이전에 여러 차례 들렸던 곳이라 방향 감각과 지형지물은 익숙해 나아갈 길은 염려되지 않았다. 강심에 가로 놓인 본포교로 나갔다. 본포교는 길이가 1킬로미터나 되는 창녕 학포에 이르는 다리였다. 동녘에 이미 떴을 해는 보이질 않고 교량 위를 질주하는 차들은 짙은 안개로 전조등을 켜고 달렸다.
다리를 건너 밀양 무안과 창녕 부곡으로 가는 자동찻길에는 승용차와 공사 현장 트럭들이 많이 다녀 혼잡했다. 아스팔트 포장도로엔 인도가 확보되지 않아 대형 트럭이 지날 때는 갓길로 잠시 비켜 서주기도 했다. 본포교 건너 첫 동네는 학포로 의령 남씨 집성촌으로 알려졌다. 내가 가려는 곳이 부곡 온천인데 학포도 행정 구역은 창녕 부곡면으로 밀양 초동면과 청도천이 경계였다.
학포에서 부곡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강변의 벼랑을 따라 임해진에서 청암을 거쳐 가는 길과 인교에서 수다를 거쳐 가는 길이 있다. 나는 두 갈래 다 걸어서 다녀봤고 그 말고도 비봉재를 넘어 부곡으로 가 보기도 했다. 이번에도 비봉재를 넘기 위해 학포에서 구산으로 나아갔다. 구산은 학포와 이웃한 보건진료소가 있는 동네로 그곳 역시 의령 남씨들이 대성을 이루고 살았다.
마을을 에워싼 산이 거북 형상이라 구산(龜山)인데 거북의 목에 해당하는 혈에 조선 왕녀 무덤이 자리했다. 남씨 문중에서 경기도 평택과 안성에 있던 정선공주와 부마 남휘 무덤을 40여 년 전 옮겨왔다. 정선공주는 태종의 넷째 딸로 세종대왕과는 남매간으로 남이 장군의 할머니이기도 했다. 지나는 길에 후손들이 기리는 정선공주 무덤과 남이 장군의 사당을 비롯한 기념관을 둘러봤다.
남이 장군을 기리는 사당에서 이웃 마을 비봉리로 갔다. 비봉리는 오래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태풍이 휩쓸고 가면서 배수장 둑이 무너진 흙더미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되어 현장을 전시관으로 보존하고 있다. 5천 년 전으로 추정되는 목선을 비롯해 동물의 뼈를 이용한 생활 도구들이 나왔는데 월요일은 휴관이라 들리지 못했다.
비봉리 안동네까지 깊숙이 들어가 뒷산으로 오르는 임도를 따라 걸었다. 본포에서 출발해 걸은 지 두 시간이 더 지나는 즈음인데 그제야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임도를 따라 고갯마루에 오르니 정오가 되어 배낭의 도시락을 꺼내 비웠다. 고개를 넘어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 닿은 마을은 청암이었다. 청암에서 자동찻길 따라 온정리로 가니 부곡의 온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본포에서 부곡으로 향해 걸어감은 온천수에 몸을 담그기 위해서였다. 학포에서 임해진이나 인교의 찻길을 따라 걸었으면 세 시간이면 될 텐데 비봉리에서 고개를 넘어가니 다섯 시간이 걸렸다. 부곡 온천장의 여러 대중탕 가운데 내가 몇 차례 찾아갔던 화왕산호텔 사우나로 들었다. 텅 빈 온천수에 몸을 담가 산과 들을 누비면서 묻은 먼지를 씻어내고 발바닥의 굳은살을 벗겨냈다. 22.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