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호수 풍경
간밤까지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은 십일월 하순 수요일은 같은 생활권에 사는 친구와 밀양으로 트레킹을 나서기로 했다. 밀양에는 재약산을 비롯해 등정할 만한 산이 더러 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강변을 걷기로 했다. 시내를 굽이쳐 흐르는 밀양강을 그곳에서는 남천이라고 부른다. 삼문동은 휘감아 도는 강물이 하중도를 이루어 새 을(乙)자처럼 흘러 을자천이라고도 불린다.
이른 아침 밀양으로 가는 열차를 타려고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창원중앙역을 향해 걸었다. 창원대학 앞을 지날 즈음 동행하기로 한 친구의 전화가 와 트레킹 나서다가 일정을 급히 변경하게 되었다고 했다. 김장 양념을 준비하던 아내가 어딘가 문턱에 걸려 넘어져 이마를 다쳐 119로 응급실에 실려 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상처가 심하지 않기를 바라며 트레킹은 후일로 미루었다.
친구 아내의 예기치 않게 입은 상처에 마음이 무거워 산책 차림으로 나선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에 쫓겨 못다 쓴 전날 일기를 마무리 짓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둔 책을 읽으며 아침나절을 보냈다. 점심 식후에는 대출해 읽은 책을 안고 용지호수 작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니 아침에 흐렸던 날씨가 맑게 개어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녔다.
내가 정년퇴직한 후 마음속으로 정해둔 규율이 하나 있었다. 맑은 날이면 산행이나 산책을 나서고 비가 오는 날이라면 생활권에서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 책을 펼쳐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한 해 내내 비가 귀해 도서관을 찾을 겨를이 적었다. 그런 관계로 비가 오지 않은 날에도 도서관을 다녀간 경우가 더러 있기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거리에는 갈색으로 물든 메타스퀘이아 가로수에서 새의 깃털 같은 잎이 흩날렸다. 미세 먼지가 없는 쾌청한 대기에 날씨마저 선선해 야외 활동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었다. 그러함에도 나는 도서관으로 향해 빌린 책을 반납하고 서가에서 지방지를 펼쳐 기사를 몇 줄 읽었다. 펼쳤던 신문을 접어두고 책은 빌리지 않고 빈손으로 도서관을 나왔다. 이후에 용지호수를 산책할 셈이었다.
겨울이 오는 길목 용지호수는 도심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일찍 낙엽이 지는 벚나무는 나목이 되어 겨울을 접수해 놓았다. 오늘이 음력으로 시월 그믐인데 한자 문화권에서는 음력 시월을 소춘(小春)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가을에 왜 봄 춘(春)자가 들었을까 의아해하는데 낙엽 지는 나무에는 가지마다 내년 봄에 돋을 잎과 필 꽃의 맹아가 달리기 때문이다.
호숫가를 느긋하게 거니니 조경수로 군데군데 심어둔 애기동백나무가 보였다. 상록수인 애기동백은 이즈음 붉은 꽃잎을 펼쳐 화사한 기품을 드러냈다. 내가 작년까지 교직 말년을 보내다 떠나온 거제에서도 흔하게 본 애기동백꽃이었다. 인근의 진해 거리에도 애기동백나무가 많았다. 거제에서는 초본에서 한 해 마지막으로 초겨울 들머리를 노랗게 장식하던 털머위꽃도 인상적이었다.
용지호수에는 한 인부가 연못의 수초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수면에는 시든 연잎이나 연밥을 비롯해 부들이나 갈대들이 자랐다. 물에서 굴러다니는 특수 장비로 연못 가장자리 수상 부유물을 치우고 있었다. 용지호수에는 어항의 산소를 공급하는 장치처럼 호수에 맑은 물을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었는데 공원 미관을 위해 관련 부서에서는 누군가 꾸준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작년은 주남저수지에서나 볼 수 있는 큰고니가 네 마리 날아와 겨울을 보냈는데 그 녀석이 올해도 다시 찾아올지 궁금했다. 호수 가장자리로 몇 마리 물닭이 다가와 수초를 뜯어 먹는 모습이 앙증맞아 귀엽게 보였다. 물닭은 겨울 철새이기는 하나 일부는 여름에도 우리나라 하천이나 호수에 서식했다. 어떻게 호수에 들어왔는지 궁금한 거위 한 쌍은 짝을 잃어 외롭게 혼자 지냈다. 22.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