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주일 주일설교.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시니라 (마가복음 10장 13-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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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올 해가 어린이 날이 제정 된지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합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매 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어린이 주일을 지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어린이 날 하면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어린이날 노래가 떠오릅니다. 지금도 불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이날 동요의 작사가는 고, 윤석중(1911-2003) 아동문학가입니다. 이분의 대표적인 동시로는,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퐁당퐁당),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잘다”(기찻길 옆), “나란히/나란히/나란히/밥상위에 젓가락이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나란히 나란히),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똑 같아요), “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할머니는 건넛마을 아저씨 댁에”(집보는 아기), 너무나도 익숙한 동시들이 전부 이분 작품입니다. 생전에 무려 1,300여편의 동시를 썼고, 그 중에 800여편이 동요로 작곡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이날 동요의 작곡가는 고, 윤극영(1903-1988) 아동문학가입니다. 이 분이 작곡한 대표적인 동요로는,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고기잡이),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반달), “까치 가치 설날은 어저깨고요”(설날).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고드름),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따오기), 이 분 곡들도 너무나도 익숙한 곡들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에게 더 좋은 동시와 동요들이 후대에 유산으로 물려지기를 바라봅니다.
여러분들의 어린이날은 어떠했습니까? 제 기억에는 어린이 날이 매우 특별하다는 그런 기억의 파편들이 거의 없습니다. 어린이 날이라고 해서 도시에서 처럼 무슨 음식을 먹었다든진, 선물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저 어린이날에도 똑 같이 개울가에서 놀고, 농사 짓는 어른들 잔 심부름 해 준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도 저에게는 매일 매일이 어린이날 이었습니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어린이날 노래는 이러한데, 정말로 이 시대의 어린이들이 우리들 세상을 마음껏 외치는 그런 세상일까요? 외국 야구 경기를 보면 파울볼이나 홈런볼이 관중석으로 넘어 가면 그 볼을 잡은 어른들은 여지 없이 주변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그 공을 건네 줍니다. 어린이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보면 아직은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반면에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저지른 흉악 범죄들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최근 사건 중에 ‘정인이 사건’이 가장 충격적인 사건 이었을 겁니다. 정인이의 부검을 맡은 의사의 소견으로는, 어떻게 했으면 이 어린 아이의 장기가 이정도까지 되었는지 라고 하면서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정인이는 하소연이나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극심한 고통속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그 양부모는 자칭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공개적으로 자랑하고 다녔던 사람들이고, 그들의 부모님들은 전부 현역 목회자들 이었습니다. 보도된 내용을 보면 평소 보여 주었던 삶의 겉 모습들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위선적이었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저는 그들을 비난할 마음도 없고 그럴 만한 자격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서 정인이의 입양과 돌봄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자행 했다는 것이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연약한 한 인간이기 이전에, 누구보다도 책임감을 지닌 목사라는 신분을 빌어서 정인이의 죽음 앞에 고통 당하고 상처 받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깊은 애도와 함께 어린 영혼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합니다.
세상에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정말 수고하시고 애쓰시는 분들이 분명히 많이 있으십니다. 그 분들의 노고와 헌신이 빛을 바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 시대의 모든 어른들이 반성하고 마음을 새롭게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어린이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요? 무려 2천년 전의 시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오천명이라는 숫자는 남성 어른 숫자만 그렇다는 것이고, 여자와 어린 아이들은 아예 대상에서 빠져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 당시에 여자와 어린아이는 사람의 숫자에 포함 시키지 않을 만큼 하찮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어딜 가나 그저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었고 출입이나 왕래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보다 약 천 오백년 정도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출애굽 당시에 숫자를 셀 때도 장정만 60만명 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당시에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계수 대상에서 조차 빠져 있습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전수 인구 조사를 할 때에도 여자들과 20세 이하의 청소년과 어린이들, 그리고 전쟁에 나가지 못하는 노인들은 숫자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예수님 시대 까지 약 2천여년 동안 어린아이들은 그저 잊혀진 존재들일 뿐이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레위기 18장 21절에,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몰렉은 암몬 족속이 신으로 섬기는 우상으로, 어린아이들을 불로 지나가게 하거나 불에 달군 기둥 위로 걷게 하는 잔인한 인신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20장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라”(20:2)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결단코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자들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엄중히 경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왕하 17:17). 남 유다의 12번째 왕인 아하스(히스기야 왕의 아버지)와 14번째 왕인 므낫세(히스기야 왕의 아들)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왕하 16:3, 21:6).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의 12개 지파 전체에서 어린 자녀들을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들이 서슴없이 자행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불에 던져지는 제물이 될 정도이니, 어린이들에 대한 인식이나 대우가 어떠 했는지 짐작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세대 에서는 어린이들의 인격권은 전혀 보장 받지 못했습니다. 여성들도 거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하에 우리 예수님이 사역을 하셨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접촉을 기피하던 대상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 주셨고, 남자들의 소유물 취급을 받던 여자들을 만나 주셨고, 저주 받아서 장애를 겪고 있다고 여겼던 병자들을 만나 주셨고, 민족을 팔아 먹는 배신자들 이라고 불렸던 세리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시면서, 소외된 자들을 일부러 찾아 다니셨습니다. 이런 사역을 하셨기에, 예수님이 보호 받지 못하고 대우도 받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본문 13절을 읽어 드립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아멘.
“만져 주심을 바라고” 라는 말씀을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에서는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마 19:13) 라고 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축복기도 받기를 원했던 겁니다.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에게 최고로 해 줄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 자녀들을 예수님 앞으로 매일같이 데리고 나아가셔야 합니다. 어루 만져 주시도록, 축복해 죽시도록 내 자녀를 예수님께 올려 드려야 합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일평생 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열심을 내시면 자식 농사 다 지으신 겁니다. 반면에, 이것 하나를 제대로 못하시면 자식농사 계속 하셔야 합니다.
제가 바울의 기도를 이용하여 잠자기 전에 아이들 축복해 주시라고 권면해 드렸습니다. 잘 하시고 계시나요? 하고 계신 분과 안하고 계신 분, 계속 하실 분과 중간에 멈추실 분들의 차이는 분명히 나타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녀를 위해 심는 기도에 대해서는 반드시 열매를 맺도록 역사 하십니다. 자녀의 미래는 부모의 기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부모님들 잊지 마십시오.
우리 자녀들을 예수님과 만나도록 안내 해 주어야 겠다는 열심은 좀 극성 스러워도 됩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말고, 우리 자녀들이 일생에 단 한번 만이라도 제대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해 달라고 극성을 피우시는 부모님들이 되십시오. 우리 교회의 어린이들, 청소년들, 청년들 까지 얼마나 소중한 자산입니까? 우리 기성 세대가 이들을 위해서 할 일은 오직 기도, 오직 사랑으로 안아 주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지도 방법 이셨습니다.
자, 본문에서 “데리고 왔다”(헬, 프로스페로)는 표현을 원어의 문법적으로 보면, 계속 해서 데리고 왔다는 뜻입니다. 당시 랍비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아이들을 데려와서 축복받게 하는 것은 관례였기 때문에, 능력이 엄청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예수님에게 특히 많은 어린이들이 몰려 왔던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몰려오자 제자들이 이를 꾸짖으며 제지하고 나섭니다. 이 행동도계속 해서 꾸짖었다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몰려오고 계속해서 꾸짖으며 제지하고 당시 현장은 시끌벅적 했을 겁니다.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제지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이지만, 그 밑 바탕에는 습관적으로 몸에 배인 어린아이에 대해 경시풍조가 깔려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보고 계시지 않았다면 엄마들과 어린 아이들은 혼쭐이 나고 전부 돌려 보내졌을 겁니다.
예수님이 반응 하십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아멘.
예수님이 노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화가 나신 것일까요? 영어 성경을 보면 “매우 불쾌해 하셨다”(much displeased, KJV), “분개 하셨다”(indignant, NIV) 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위를 건드렸다, 화나게 하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의 의미도 매우 화가났다(헬, 에가낙테센)는 뜻입니다. 노하셨다는 한글 번역 보다는 훨씬 강도가 쎄게 화가 나신 상태 였습니다.
분노하셨다는 단어의 다른 뜻도 있는데, 탄식하다, 슬퍼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에 화를 내신 것인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영적 무지함과 약한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매우 슬퍼 하셨습니다. 그 동안 그토록 사랑과 긍휼에 대해 몸소 실천하고 가르쳐 주었는데도 제자들의 배움은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못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화가 많이 나셔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맣씀 하시고, 곧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라는 말을 덧 붙이셨습니다. 이 상황에 왜 갑자기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 했을 까요? ‘이런자들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런 자들은 또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의문이 듭니다.
이런자들은 문장 구조상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어린 아이들을 지칭하는 것은 분명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하나님 나라)은 이렇게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나아오고, 나아오기를 계속하려는 어린 아이들 같은 자들의 것(소유)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직역으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막아서고, 막아서고, 막아서기를 계속 했습니다. 제자들은 나름 대로 열심을 내려고 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하는 매우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잘못된 행동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들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15절 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아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화가 단단히 나셔서 이렇게 단호학 말씀 하신 것도 있지만, 이 말씀에는 매우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하시겠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시며 말씀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진실로, 결단코 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로 실현 될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고 있다는 것일까요? 어린 아이들과 같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추가적인 설명이 없으셔서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학자들의 해석을 보면 각양 각색입니다.
대개는 어린아들의 품성, 연약함, 순진함 이런 것들과 연결해서 각자 해석들을 합니다.
저는 많은 전문가들의 해석들을 읽어보고 이해는 되지만 공감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참고만 하면서 다 접어 두고, 15절 말씀 속에서서 우리 교회에 주실 특별한 가르침의 은혜가 무엇인지 이 내용을 깊이 묵상 하는 가운데 세 가지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첫째, 어린아이와 같이 부모님께 붙들려서 예수님께 나오시면 됩니다.
누가복음에는 ‘어린 아기들’(눅 18:15)이 에수님께 나왔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기는 물론이고, 어린 아이들이 자신들의 이성적인 판단이나, 의지로 예수님께 나올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의 강권적인 의지에 편승해서 그저 동행한 것 뿐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나오시면 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끌려 나오셔야 합니다. 그 부모님들의 역할을 이제는 성령님이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 하십시오. “주님, 제가 날마다 성령님께 이끌려서 아무 저항 없이, 아무 핑계 없이, 무조건 예수님께 붙들려서 나오도록 인도 하옵소서. 주님,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지내는 불쌍한 내 가족, 내 이웃 들이 성령님께 꽉 붙들려서 꼼짝 없이 예수님께 붙들려 나오도록 일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눈 저희들의 이성은 마비 시키시고, 오직 성령님의 강권적인 붙드심과 이끄심만 내 인생 가운데 역사 하옵소서.” 아멘. 이 말씀이 첫 번째 주신 감동입니다.
둘째, 어린아이와 같이 한가지만 바라며 예수님께 나오시면 됩니다.
어린아들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배고프면 먹을 것 주면 울음을 그칩니다. 투정 부리다가도 장난감 하나 주면 잘 놉니다. 졸릴 때 안아 주면 금방 잠이 듭니다. 요구하는 것 잘 한 가지만 해결해 주면 아이들은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을 ‘말씀’으로 치환 하면 아주 시원해 집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말씀 하나만을 요구하고, 말씀 하나 만을 듣고, 말씀 하나 만으로 대 만족을 누리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행복한 상태로 지낼 수 있어야 합니나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단 하나의 목표가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생명 양식을 배불리 먹기 위하려는 단 한 가지만 바란다면, 그 마음이 바로 천국을 소유하는 어린아이들 같은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 하십시오. “주님, 제 인생에 말씀 한가지 만으로 만족하며, 자족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도록 동하 주옵소서. 저는 말씀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멘. 이 말씀이 두 번째 주신 감동입니다.
셋째, 어린아이와 같이 눌러 앉아 놀려고 예수님께 나오시면 됩니다.
아이들은 부모님 곁에만 있으면 세상 평안 합니다. 부모님이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 하고 경기를 일으키며 울어 제낍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부모는 절대 의존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대상이자 자신의 삶을 보호해 줄 최고의 가림막이 됩니다. 어린아이들 입장에서는 항상 눈에 보이는 부모님 곁에서 눌러 앉아 마냥 즐겁게 노는 것이 바로 천국 그 자체입니다.
부모님 곁에 눌러 앉아 있는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상황은 곧 우리들이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 신랑 되시는 예수님 곁에서 평안을 누리며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과 흡사합니다. 예수님 곁에 눌러 앉아 지내면 범사에 감사하며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지키지 못하고 자꾸 예수님을 벗어나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망하는 겁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 곁에 눌러 앉은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실천할 때, 하나님 나라를 매일 같이 경험하며 살아 갈수가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이 보이는 거리에서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이 세 번째 주신 감동입니다.
이 세가지의 감동은 성령님이 저를 통해 00교회에 선포하도록 하셨기 때문에오직 우리 교회에만 내려 주신 특별하신 은혜의 말씀입니다. 어느 주석, 어느 설교를 다 검색해봐도 이러한 해석은 없습니다. 전 세계에 우리 교회만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이 말씀 대로 우리 교회 모든 성도가 예수님께로 나아갔던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6절 말씀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아멘.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소망 그대로가 다 이루어 졌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① 성령으로 붙들려서 나아오고, ② 오직 말씀 한 가지만 바라며 나아오고, ③ 예수님 곁에 눌러 앉아 몰려고 나아오는, 모두를 품에 안으시고 안수와 축복의 기도를 해 주십니다. 예수님 품에 안겨 축복 받는 것, 그것이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향해 천국이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미리 보여 주시고, 그들도 어린아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내게로 나아오기를 멈추지 않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천국을 소유하게 허락 할 것이고, 내게로 나아오기를 거부하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이 말씀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막아서고, 제지하고, 쫓아 내려고 하여도, 극성을 부리면서, 나아오고, 나아오고, 나아오기를 멈추지 아니하였더니 예수님 품에 안겨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역사가 이루어 졌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 부모님들은, 어린이날에 가장 큰 선물로 내 자녀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나가셔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미래는 여러분, 기성세대, 부모님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손을 이끌어서 예수님에게까지 데리고 나아가는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어린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힘써 기도해 주십시오. 자녀들의 미래의 비전과 꿈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00교회 모든 사랑하는 어린이들이 예수님에게로 날마다 예수님 품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경험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능력과 지혜를 공급 받아, 복음으로 미래를 선도해 나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주역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어린아이들과 같이 날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셔서 주님 하늘 평안과 참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는 복된 가정의 달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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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주님께 나아가오니, 모든 자녀들을 품에 안아 주시고, 안수하여 주시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복에 복을 내려 주옵소서. 우리 모두의 삶이 날마다 심령 천국의 삶이 되게 하시고, 주님 한 분만으로 참 만족을 누리며 기쁨과 평안속에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