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
포항
역사의
향 기
오늘 우리를 낳은 향토, 포항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지난여름부터 겨울까지 수 천 장을 촬영하였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새긴 바위그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멈춘 학도병의 녹슨 시계...... .
렌즈를 통해 내 마음이 포착한 시공간과 인간의 비밀!
Pieces of Local History
I took thousands of historical pictures of Pohang last year. Pictures carved on rock during prehistoric times, the rusted watch of a student soldier that stopped during Korean War........ The secrets of humans in space and time captured through a lens.
은방울꽃 내연산 탑산사 터
Lily of the Valley at ruins of
Tamsan Temple at Mt. Naeyeon
칠포리 바위 그림
청동기시대, 경북유형문화재249호
Chilpo-ri Rock Engraved Painting,
Bronze Age, B.C. 10 C, Provincial Heritage No.249
문성리 고인돌
청동기 시대, 세계유산
Munsung-ri Dolmen, Bronze Age, B.c. 10C,
World Heritage
냉수리 신라 비
삼국 시대, 국보264호 , 503
Naengsu-ri Monument of Silla,
Three Kingdom, 503,
National Treasure No. 264
비학산 법광사(法光寺)금당 터
석 연화 불 좌대
신라시대, 7C, 사적493호
Lotus Pedestal of Buddha's statue,
Ruins of BeomGwang Temple,
Silla Dyanasty, 7C, Historical Site No. 493
비학산(飛鶴山) 법광사터 석가불(釋迦佛) 사리탑
김균정-신무왕(청해진 장보고)-문성왕
계통 왕실 원탑(828).
동화사 비로암에는 장보고 청해진 군대와 대구에서 전쟁하다 패배하고 죽은
민애왕의 원탑(863)이 있다.
18세기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의
<법광사석가불사리탑비명병서>가
새겨진 옥돌 비석이 탑 옆에 있다.
통일 신라 시대, 828, 사적493호
Stupa, Ruins of Beomgwang Temple,
Unified Silla Dyanasty, 828,
Historical Site No. 493
법광사 배례석 연화문 돋을 새김
장기 고석사(古石寺)
석감(石龕) 마애(磨崖) 미륵불(彌勒佛)
의상(倚像)
통일 신라 시대, 8세기, 국보(예정)
Maitreya Buddha Reclined Statue
from Unified Silla Dyanasty,
Goseok temple, 8C,
National Treasure(schedual).
삼국시대 조성된 경주 남산 삼화령 미륵삼존 양식을 계승하는
고려시대 미륵불 의상(기대 앉은 상)이 법주사에 있는데,
통일신라 미륵불 의상은 이번에 최초로 포항 고석사에서 발견된 것이다.
금산사 진표 스님 계열(법주사)이 아니라
경주 중심으로 활약한 신라 태현(太賢)스님 계열의
유식법상종(唯識法相宗) 에서 신앙하고 조성한
미륵불 하생 의상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보경사(寶鏡寺)의 겨울
Winter Scenery at Bogyeong Temple,
Mt. Naeyeonsan
보경사 석탑 자물쇠
고려시대, 경북유형문화재203호
Lock on Bogyeong temple Stupa,
Goryeo Dyanasty, 10C.
Provincial heritage No. 203
보경사 원진국사 부도탑
고려 시대, 보물430호
Leader of the dynasty,
Zen Master Weonjin's stupa
from Goryeo Dyanasty, 13C,
Treasure No. 430
"高麗國 寶鏡寺 住持 大禪師 贈諡 圓眞國師 碑銘 幷 序
夫一心者 萬法之摠 六度萬行 莫不由是 而生焉...
我如來 出現於世 說三乘十二分敎... "
"고려국 보경사 주지 대선사 시호 원진국사 비명 병 서
무릇 일심이란 것은 만법을 총괄하고 6도 윤회의 만행이 이에서 비롯하여
생겨나지 않음이 없다. ...
우리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3승(성문승-4성제, 연각승-12연기, 보살승-6바라밀),
12분교(대장경의 12가지 분류)를 설하셨으니..."
원진국사(圓眞國師)비
고려 시대, 13세기, 보물252호
Great Zen Master Weonjin's Monument,
Goryeo Dynasty, 13C, Treasure No. 252
보경사 적광전(寂光殿)
비로자나불 후불도
조선 후기, 1742, 한국 대표 불화
Vairocana Platform Painting,
Hall of Peaceful Light, Bogyeong Temple,
Joseon Dynasty, 275.5 X 272.4cm,
colors on hemp, 1742,
Korean the best Thangka.
망두석
도음산(禱蔭山) 이언적(李彦迪) 묘,
조선 전기
Sculpture of Lee, Eon Jeok's grave,
Joseon Dynasty, 16C.
문인 석상
도음산 회재(晦齋) 이언적 묘,
조선 전기
Civil vassal statue at Scholar Official
Lee, Eon Jeok's Grave, Joseon Dynasty, 16C.
"知義方 敎誨其子亦
退溪 李先生 嘗狀
未盡 明誠之實 稱
然筆出而言于後者"
"(아들 전인은 시와 서를 공부하고)
"...의리를 알았으며 자식을 잘 가르쳤는데 또한 다 훌륭하다. ...
"...퇴계 이 선생은 일찌기 공의 행장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대부분 명과 성의 실제 공부를 다하지 않았고 후세에 칭하기를...
"...그러나 글로 써 내어 훌륭한 말이 후세에 전하였으니... "
전인은 시서(詩書)를 익히고 의리를 알았으며, 아들을 잘 가르쳐 또한 다 훌륭하다.
공을 장례할 때에는 미처 묘도(墓道)에 비문을 세우지 못했는데 덕업의 빛남은 자연히 가릴 수가 없었으니, 표창하는 예전(禮典)은 실로 간절히 바라는 인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하니 공의 도는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퇴계 이 선생은 일찍이 공의 행장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었으나 그 학문은 전함이 없었다. 고려 말엽으로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에는 호걸스러운 선비로서 이 도학에 뜻을 둔 이가 없지 않았고, 세상에서도 도학을 했다는 명칭을 그분들에게 돌리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를 상고해 볼 때에 대부분 명(明:明明德)ㆍ성(誠:誠意正心)의 실제 공부를 다 하지 못하였고 후세에 칭할 때에도 또 연원(淵源)의 증거가 없어서 후세의 학자들로 하여금 찾고 따르게 할 수가 없어서 오늘에 이르도록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생으로 말하면 전수받은 곳이 없이도 스스로 도학에 분발하여 속에 간직한 덕이 날로 드러나 덕이 행실에 부합하였고 밝게 글로 써 내어 훌륭한 말을 후세에 전하였으니, 동방(東方)에서 찾아보더라도 거의 그만한 분이 있지 않다.” 하였으니, 이것은 공의 도학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잘 말했다고 이를 만하다.
공의 사자(嗣子)인 송라도찰방이 또 신도비문을 퇴계 선생에게 청하자, 퇴계 선생께서는 성덕(盛德)을 칭찬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은 부당하다 하시고 마침내 나(기대승)에게 명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매우 신중히 여겼고 또한 그 사이에 서신을 교환하면서 자세히 수정한 뒤에야 확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퇴계 선생이 별세하시자 찰방이 사람을 보내와서 비석이 준비되었다고 말하므로, 마침내 더 사양할 수가 없어서 삼가 행장을 근거하고 아울러 관직을 지낸 차례를 상고하여 대강의 내용을 엮어서 위와 같이 쓰고 명문을 붙인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밝은 명을 내리사 / 帝有顯命
사람에게 본성을 부여하셨으니 / 畀人以性
본성의 사덕을 / 性之四德
실제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네 / 實性人秉
기질에 가려 / 蔽氣與質
이 때문에 본성을 잃는 것이니 / 性由以失
배워서 본성을 회복하면 / 學以反之
본성은 하나이네 / 其性則一
아 우리 공께서는 / 嗟惟我公
이 나라에 태어나사 / 生此一方
기운은 넓고 씩씩하며 / 氣寬而莊
덕은 온후하고 강하였네 / 德渾而剛
처음부터 학문을 알아 / 爰初知學
삼가서 닦고 실천하였네 / 愼修懋履
더욱 충양하여 / 亹亹充養
선을 자기 몸에 소유하셨네 / 善有諸己
들어가서는 효도를 다하고 / 入則盡孝
나가서는 충성하여 / 出而移忠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모두 적당하니 / 亦遠亦近
도는 높고 낮음에 다 포함되었네 / 道該汚隆
한때에는 비록 비방을 들었으나 / 一時之詬
만대에는 빛나네 / 萬世之光
선생의 저서를 찾아내어 칭찬하고 추증하였으며 / 搜書褒贈
묘정에 배향하여 양양히 강림하시니 / 配庭洋洋
선왕의 뜻을 / 維先王志
우리 임금님께서 받드신 것이네 / 維我后承
이것을 새겨 무궁한 세상에 보여 주노니 / 刻示無窮
우리 도는 일어나리 / 吾道候興
회재 문원공(文元公)
이 선생 신도비(神道碑)
도음산, 조선전기, 경북유형문화재367-2호
Lee, Eon Jeok's Monument in front of his Grave,
Joseon Dynasty, 16C, Provincial Heritage No.367-2
죽장 입암(立巖)과 일제당(日躋堂)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입암기>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입암가>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입암유산록>
조선 중기, 경북기념물70호
Ibam Rock & Iljae Pavilion, Joseon Dynasty, 16C,
Provincial Heritage No. 70.
오어사(吾魚寺)의 가을
혜공 원효 의상 자장 스님(신라시대),
일연 스님 (삼국유사/고려시대)
Autumn Scenery at O-eo Temple where the great
priest WonHyo & Ilyeon stayed.
흥해 초곡리 칠인정(七印亭)
조선 후기, 경북문화재자료369호
Chilin Pavilion, Joseon Dynasty, 18C,
Provicial Heritage No. 369
장기 읍성
조선 시대, 사적386호
Jang-gi Fort, Joseon Period,
Historical Site No. 386
검등골
동학(東學) 2세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선생
신광면 고향마을(기일),
거주 및 수도처(마북리 검등골)
Geomdeong valley where Teacher of
Choi, Si-Hyeong of Dong-Hak thought,
was home, meditated, 1861-1898.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
용담의 물 흘러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 되고,
검등골에 사람 있어 일편단심일러라."
-1863년 추석날 새벽에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도통을 전하며
해월에게 준 시.
비 구름속 비구름을 가니
검악(劍岳)의 억류에도 바닷달은
흐리지 않는다
땅빠딩이 따기 흘린 땀
못을 이뤄있고
감나무밑 쌓인 그랭이
편심(片心) 애오라지 정성일러라
몰래쌓인 검불은
천기(天機)를 가리우고
썩어난듯 늙은 솔은
아직 그 남은힘을 버티고 있어라
병중선주(甁中仙酒) 가활백만(可活百萬)인데
검등용골 한수(寒水)에 묻힌 몸은
천지신명(天地神明) 불렀으니
내 어찌 입을 열랴
되돌아가자 마개 막아두고
천년후 말하리라
개벽(開闢)의 이 만남을
-포덕 130(1990)년 7월 28일에 폭우 속에서 도올 김용옥 교수가
동학 사람들과 검등골을 방문하고 지은 시.
시나리오 <<天命. 開闢>>의 서문 '哀訣(슬픈 이별)'에서
해월 선생이 직접 새겨 동학농민민중항쟁 당시 사용한 '海月' 인장
공주 우금치의 패전으로 10만명의 동학군이 전사하였고,
관군과 일본군의 토벌 작전으로 30-40만의 농민군이 학살되었다.
재거를 모의하던 중 김경천의 밀고로
1894년 12월 2일 체포되어 압송되어 가는 녹두장군 전봉준.
옥중의 고문으로 두 발이 퉁퉁 부어 있다. 선생은 바로 앉을 기력도 없었다.
해월 선생이 머물며 수도하시던 검등골 화전민촌의 집터와
한 동학인이 걸어 놓은 동학기
신광면 기일, 검등골 입구에 해월 선생 순도 100주년 되는
1998년에 동학 중앙총부에서 고향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 어록비가 세워졌다.
강대근(姜大根) 선생
산남의진(山南義陳) 항일 전쟁 의병, 대한 제국 시대,
Gang, Dae-Geun, San Nam Volunteer
Korean Army Front, Kroea Empire, 1908,
Graduate Gang, Hyeong-Gu's great grand-fater
산남의진(山南義陣)
을사조약(1905) 뒤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비밀 명령을 받고 영천, 포항, 청송의 1,000여 명의 의병들이 의병부대를 창설했다(1906. 3.). 죽장면 상옥마을 겨우 17세의 강대근(姜大根)은 선봉대로 활약하였다. 의진은 57회의 치열한 항일 전쟁을 하였다. 청하, 흥해, 장기, 청송, 의성, 신령 읍성들을 수복하였다. 죽장 입암리 원촌(院村) 전투는 한국독립운동사의 대혈전이었다(1907. 9. 1). 이 전투에서 정용기(45세, 鄭鏞基) 의병장 등 많은 의병들이 전사했다. 아들의 순국 뒤에 제2대 의병장이 된 정환직(64세, 鄭煥直)도 내연산에서 체포되어 옥중에서 시 한 수를 남긴 채 영천 서세루(瑞世樓) 아래 남천(南川)에서 총살당했다(1907. 음력 11. 16).
身亡心不變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며,
義重死猶輕 대의는 무거우나 목숨은 오히려 가볍도다.
後事憑誰託 뒷일을 누구에게 맡길까,
無言坐五更 말없이 새벽까지 앉았노라.
제3대 의병장 최세한(崔世翰)은 장기에서 체포되어(1908. 7) 호송 중 형산강(兄山江)에 투신하여 자결을 시도 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단식 투쟁 끝에 순국했다(1916). 본진이 무너지고 강대근은 보현산부대원으로 활약하다가 죽장 일광리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여러 날 만에 소생하였다. 청송, 영양 산간에서 피신하다가, 해방 뒤에 고향집 상옥으로 돌아왔다. 강대근 의병의 막내 따님 강**(82세) 할머니가 생존해 있고, 증손자 강**는 우리 대동중학교의 전교 학생회장이었다(2003).
San-Nam Volunteer Army Front
After the Eeulsa Treaty of 1905, volunteers from the counties of Yeongcheon, Pohang, and Cheongsong received secret orders from Emperor Go-Jong. Gang Dae-Geun(1891-1957), only 17 years old from Sangok, had a good war record as a brave volunteer. The volunteers had a successful campaign, winning 57 battles against Japanese enemy. They restored Cheongha, Heunghae, Janggi, Cheongsong, Euisung, and Sinryeong to the emperor.
The fighting in Ibam was an important moment in the history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t this time, many volunteers like the 1st leader Jeong Yong-Gi(1862-1907), were killed. The 3rd leader, Choi Se-Han, was captured but tried to commit suicide in the Hyeongsan River and later committed suicide by starvation in the Seodaemun Prison in 1916. The 2nd leader, Jeong Hwan-Jik(1844-1907), was captured at Naeyeon Mountain and shot at the Namcheon riverside under the Seose pavilion in Yeongcheon after the 1st leader, his son. But before his death, he wrote a poem:
I am dying but my mind is forever
Justice is important but my life is light
To whom I give my duty
I sit until daybreak unless just a word
After the collapse of the main body of troops, Gang Dae-Geun took part in the Bohyeon Mountain Squad. He fought bravely but was wounded at Jookjang. Revived after a few days, he escaped into the mountains and returned to his home in Sangok after the national liberation. Gang Mal-Nam, his youngest daughter, is now 82 years old. His great-grandson, Gang Hyeong-Gu, was the student chairman at Dae Dong Middle School in 2003.
호미곶 등대
대한 제국 시대, 경북기념물39호, 1908
러일 전쟁 이후의 일제의 해양 침략(예, 독도)과 관계있다.
일본 동경수산대 해양실습선 가이요마루(快鷹丸)
조난 비(구만리)
Homi Cape Lighthouse, Korea Empire, 1908,
Provicial Heritage No. 39
대전리 3․1 운동 교회 종
Bell of Daejeon-ri church for
3․1 Independence Movement, 1919
대전리 사람들을 중심으로 청하 송라 지역 사람들이 보경사 서암(서운암?)에서
비밀 모임을 가졌고, 태극기와 회의록 등을 단지에 묻어 보관하였으며,
이 대전리 교회 종을 울려 비밀 모임의 신호로 삼았다.
청하 장날, 청하읍성의 동문에서 일제 파출소 앞을 지나 서문으로 행진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고, 군중의 호을을 유도하여 다시 청하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대전리 사람들이 만세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동해 중부선 기차 터널
우현동 일제 강점기
Railway Tunnel constructed
during Japanese
Colonialist period, 1940
일제가 식민지 수탈,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건설하다가 패전으로 중단.
저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민족 해방과
독립의 빛을 찾아서 독립 투사들은
몸과 가족과 재산을 바쳤다.
시 계
한국전쟁 학도 의용군 포항 전투 기념관
Watch used by student soldier
during the Korean War in Pohang 1950.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이 전투 중에 어머니께 보낸 편지 비
편지를 가슴에 간직한 채 전사한 이우근 학생(겨우 16세)
용흥동 학도의용군 충혼탑 가에 지난여름(2009)에 학우들이 세운
이우근 편지비.
포항여고(당시 포항여중)는 당시 학도병 훈련소가 되었다.
1950년 8월 11일 새벽 3시경의 공방전으로
서로간에 많은 전상자가 생겼다.
같은 겨레의 어린 학생, 젊은이(광복군과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지 겨우 5년 만에 세계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과 소련, 중국 무기를 들고 서로 죽이기 하였고,
600만명의 전상자, 전사가 나고, 국토가 완전히 파괴되고도
전쟁의 종식은 커녕 땅과 마음이 분단되었다는 것은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인류의 비극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식민지 쟁탈전과 1, 2차 세계대전,
다시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벌어진
중국의 국공내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라고
하는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포항은 있었다.
'나'라고 하는 실체의식을 일으키는 어리석음이 지어내는
탐욕과 성냄에서 인류는 언제나 해방되어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인 지.
흥해 서림지(西林池) 연꽃
고려 말 조선 전기, 벼농사 관개 시설
Seorim Lotus Pond constructed
for rice paddy
in late Goryeo-Early Joseon Period
후기:
2004년 여름 9박 10일 동안
정토회, '좋은 벗들(탈북동포, 북한 돕기 엔지오)'
지도법사
법륜 스님을 따라 가족이
고구려, 발해,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과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가족이 굶주림에 죽어나가는
신음소리 낭자한
북녘의 산하를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두 발로 밟는 '역사기행'을
하였다.
작은 휴대용 삼성 케녹스 디카와 니콘에 슬라이드
필름을 넣어 촬영하였다. 사진기를 전혀 만질 줄 몰랐다.
중간에 폭이 좁은 내 어깨에 걸려 있던 카메라가 떨어져
렌즈가 망가져 버리기도 하였다.
그 해 가을에 학교 축제에 사진전을 열었다.
동북공정으로 중국이 우리 역사를,
북녘의 산하를 삼키고 있던 시기였다.
그 때, 사진 기술과 예술을 배워서
앞으로는 향토, 포항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담은 사진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2009년 지난여름에 시작한 촬영 작업은
햇볕을 가리는 창 모자 차림을
겨울 오리털 잠바로 갈아 입기까지
향토사의 현장들을
두 발로 밟으며,
수천 장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가끔은 점심도 굶어가며,
하루 해가 서산에 빠질 때까지 바삐 다니며
향토사의 현장을 담았다.
향토사와 나누는 말 없는 대화가
나를 매료시켰다.
그리고 공부도 많이 하였다.
새로운 역사 유적도 찾아내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사진을 배우지 않은 채
모두 자동 모드로 촬영하였다.
시각과 시선과 빛과 렌즈가
내 눈이 놓쳐왔던
내 마음을 잘 담아 주었다.
아내 학교의 사진기를 빌려서 촬영하였다.
사진을 공유하는 것으로 은혜를 갚아야 할까보다.
케논 디에스엘알 카메라이다.
케논(Canon)은
본래 일본말 칸온(觀音)에서 온 말이다.
그렇다.
중생의 한량없는 괴로움을
일천 개의 지혜의 눈과
일천 개의 자비의 손으로 구원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이 '캐논'인 것이다.
관음보살의 지혜와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향토 역사의 그윽한 향기를 담는 작업은
기쁨과 행복, 그리고 나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더 깊이 알게 되느니.
장기읍성을 촬영하러 갔다가
성벽 아래에 묶여진 아기염소가
낭떠러지로 실족하여
목이 매인 채 숨져 있었다.
다가가서 아직 체온이 따스한 몸을
들어올리니,
'매애애애-'
하며
막혀있던 최후의 단말마 소리를 힘없이 내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염원하며
온몸을 어루만지며 살려내려는
나의 노력도 허사였다.
'아!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집을 나서서 올 것을...'
삼화령 아기 미륵삼존불 양식을 잇는
신라 태현스님 계열의 유식법상종 계열에서
조성한 통일신라 미륵불 의상이 최초로 발견되었다.
8세기에 조성되고 국보 지정이 예고된
장기 방산리 고석사
석감 마애 미륵불 의상을
촬영하러 갔다가
종범 주지 스님께서 차 한 잔을 대접하여 주셨다.
따끈한 방에서 나와 툇마루에 서서,
장기읍성에서 있었던 아기 염소의 죽음에
마음이 많이 아픈데,
어린 염소를 위하여 마음을 어떻게 내야 하는냐고
여쭈었다.
"다음생에는 좋은 몸을 받아
육도 윤회의 괴로움에서 해탈하도록 기원하십시오."
서산 마루 너머
무량광, 무량수 아미타부처님 계시는
서방 정토 연화장 세계로 안기는
저녁 해를 고석사 보광전 처마 아래 풍경 너머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첫댓글 시공간을 초월한 역사 드라마 사진 대전, 실로 장관입니다. 언어로 표현하면 수필, 렌즈(?)로 형상화시키면 사진, 회장님은 만고의 예술가이십니다.
언제나 과찬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