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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묵상글 들 ( 공현 후 토요일-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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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공현 후 토요일-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어제 나눔에서 공현이란 등장과 같은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등장하시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는 작자가
우리 구역에서 세례를 주는데 저거 그냥 둬도 되냐고 따지지요.
이에 세례자 요한이 자기는 누구이고, 예수라는 양반은 누군지
증언하는데 이것이 어제와 오늘의 같은 맥락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치유를 해주시고 함구하라고 하시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자신을 누구라고 얘기하지 않으심은 물론
치유를 받은 사람에게도 당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잘 알듯이 그들이 나가서 주님을 퍼트리고 공현하지요.
오늘도 세례자 요한도 주님에 대해 증언을 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내일 주님의 세례 축일을 앞두고 우리의 전례는 의도적으로
이 복음을 배치하는 것인데 자기의 세례 운동은 작아지고,
주님의 세례가 이제는 커져야 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이해해도 되고,
자기는 사라지고 주님은 점점 나타나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겸손한 자기 인식 때문에 요한이 쭈그러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 감탄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라고 요한이 얘기하는데 특히,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는
표현이 너무도 멋지고 부럽습니다.
자기의 애인이었는데 그 애인이 친구의 아내가 되었어도
자기의 애인을 뺏겼다고 생각지도 않고,
친구의 여자가 된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본래 나의 애인이 아니라 그의 여자였다고 할 정도로 가난과 정결이
높은 경지이고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 기쁜데 그 기쁨이 충만할 정도랍니다.
완전한 자기 비움이며 동시에 완전한 충만함의 모범이고,
자기를 완전히 비울 때 완전히 충만해진다는 증명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주님을 완전하게 증거 하게 됩니다.
언젠가 프란치스코와 함께 길을 가던 동료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당신을? 왜 당신을? 왜 당신을?"
당신은 그리 잘생기지도, 유식하지도, 가문이 좋지도 않은데
왜 수많은 사람이 당신을 따르냐는 뜻이었지요.
이때 프란치스코는 환희에 차서 대답을 하는데
환희에 찬 이유가 자신이 잘생기지도, 유식하지도,
가문이 좋지도 않다고 동료가 얘기한 것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자기의 무성無性과 작음을 진정 기뻐하는 경지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기뻐하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자기에게 하느님께서
엄청난 은총을 주셨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큰 은총을 강도에게 주셨다면 강도는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을 주님께 드렸을 거라고 얘기함으로써
자기는 쭈그러들고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고 공현합니다.
하느님은 거저 주시는 분이고 인간은 누구나
그 은총을 주시는 대로 받는 존재라는 건데
이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다음 말과 맥을 같이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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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충만한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적인 보람과 만족감이 아닌,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이 무엇인지 세례자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 알려 줍니다. 전에는 자신을 따라다녔지만 지금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동향을 제자들에게서 전해 들은 세례자 요한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경쟁하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자신은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고만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기쁨은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혼인 잔치의 신부인 당신 백성을 만나러 오시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기쁨이고,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 더 크게 기뻐하는 신랑 친구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 무엇보다 큰 기쁨입니다. 구세사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목격한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이 보람을 느낄 만도 하지만, 그는 보람이 아닌 충만한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에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대로 응답하고 실천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답변입니다.
우리는 가끔 어떤 일을 마치고, 그 일에 보람을 느끼고 만족하려고만 하지는 않습니까? 그 일이 하느님의 일이었음에도 세례자 요한과 같은 기쁨을 찾기보다, 누가 쉽게 공을 빼앗아 가면 허탈해하고 낙담하는, 보람만을 찾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독서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모든 일은 세례자 요한과 같이 기쁨과 희망의 삶일 수 있습니다.
- 신우식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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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주님 공현 후 토요일.<끝이 아름다워야 한다>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 봅니다. 어떤 이는 정치인이 되려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소신도 없어야 하고요’,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 고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헌신과 희생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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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22-30: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우리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름답고 겸손한 자세를 볼 수 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 요한에게 불평한다. 그러나 요한의 답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답변으로써 3가지를 설명한다.
우선은 세례자 요한은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하느님의 단순한 전달자며 앞으로 오실 더 크신 분을 위한 선구자요 예비자로 보냄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다.
둘째로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새로이 나타난 선생이 더 많은 제자와 더 많은 개심자들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요한에게서 사람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자기들과 하느님은 너무나 밀접한 인연으로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 관계를 신랑 신부의 혼인 관계 인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표현했고, 이러한 인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신을 따를 때는 마치 정혼한 여인이 혼인한 계약을 위반하여 부정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탈출 34,15; 신명 31,16; 시편 73,27 등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랑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신부라는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락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참된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된 삶을 본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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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 29)
기쁨의 속성은
나눔이다.
나눔과 공동체
기쁨과
하느님은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의 기쁨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찾는 기쁨이
하느님 자녀들의
참된 기쁨이다.
충만한
기쁨의
원천은 오직
하느님께 있다.
기쁨은
하느님께
연결되어 있다.
사랑의 관계가
충만한 기쁨이다.
하느님의
기쁨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다.
하느님안에
머무를수록
더욱 커지는
기쁨이다.
하느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주시는
참기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기쁨이
되신다.
기쁨의 힘은
사랑으로
비롯된다.
생명의
방향은
기쁨의
방향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기쁘게
사는 것이다.
광야도 십자가도
풍랑도 어둔 밤도
하느님의 뜻안에
있기에 모든 것은
충만한 기쁨이
된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기쁨을 믿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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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일본 NHK에서 제작하였고, KBS에서 방영했던 ‘경이로운 지구’를 유튜브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총 6부작입니다. 40억년 지구의 역사를 다양한 영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구의 역사도 수없이 많은 ‘도전과 응전’으로 여기까지 왔음을 보여줍니다. 지구는 소행성의 충돌로 지금의 크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소행성의 충돌은 지구의 환경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습니다. 지구는 수백만 년 동안 또는 수천만 년 동안 얼음으로 뒤덮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화산의 분출과 지각의 융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아름다운 지구는 수십억 년 동안의 도전과 그에 대한 응전의 결과라고 합니다.
지구에서 살고 있는 생명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5번의 커다란 멸종의 사건들이 있었지만 생명은 멸종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양한 생명으로 진화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출현은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생각할 때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이라고 합니다. 바다에서 살던 생명이 육지로 올라오기까지 30억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4억 년 전에 바다에서 살던 생명은 강을 통해서 육지로 올라왔고, 지느러미는 손과 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지라는 새로운 신세계에 생명은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잣대와 기준으로 지구를 보기보다는 기나긴 시간을 살아온 지구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기준으로 청하지 말고 하느님의 시간과 기준으로 청하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와 같으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옹기장이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질그릇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예전에 어느 공소회장님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공소회장님은 다 쓰러져가는 공소를 다시 세울 수 있도록 매일 기도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우연히 주교님께서 공소회장님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공소회장의 기도를 들었던 주교님은 공소를 다시 지을 수 있도록 남모르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주교님이 공소를 방문했습니다. 작지만 아담한 공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소회장은 공소에 사제를 보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공소회장의 기도를 들었던 주교님은 사제를 파견하였습니다. 공소회장은 자신의 시간과 기준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업적이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면 당연히 신부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기뻐하며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귀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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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새벽을 열며.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빠다킹 신부님.
아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책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루이스 캐럴의 작품으로 1865년에 소개된 환상의 세계에서 모험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저 역시, 어렸을 때 텔레비전을 통해 봤던 기억을 통해서 이 책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줄거리만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을 뿐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 책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겨우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이렇지 않을까요? 인류 역사를 통해 하느님이 얼마나 많이 알려졌습니까? 그래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하느님을 더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인 기도도, 주님께 올리는 제사라 할 수 있는 미사도,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도…. 우리는 충실하게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느님을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많이 알수록 더 가깝고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종’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커지길 원합니다. 즉,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게 되면 감히 커지려고도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갈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바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종이 아닌 주인 행사만 합니다.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면서 종의 말이 아닌, 주인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받은 것에 만족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 안에서 자기 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때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욕심보다는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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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린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야 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열린 마음은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자산이 된다(마틴 부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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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모른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죽는 순간까지 공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연구하는 모습을 본 제자들이 묻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데, 어째서 배움을 멈추지 않으십니까?”
이에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을 ‘원’이라고 한다면 ‘원’ 밖은 모르는 부분이 됩니다. ‘원’이 커지면 ‘원’의 둘레도 점점 늘어나 접촉할 수 있는 미지의 부분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지금 저의 ‘원’은 여러분들 것보다 크다고 하겠지만 제가 접촉할 미지의 부분이 여러분보다 더 넓고 많습니다. 그건 결국 모르는 게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알려는 노력을 멈춘다면 어떨까요? 그만큼 하느님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분이 되고 맙니다.
아는 만큼 모르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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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주님 공현 후 토)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립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에서 세례를 베푸셨다’(요한 3,22 참조)는 보고로 시작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4장 2절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베푼 것으로 소개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분”으로, 계시를 통해 오신 분이심을 밝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이어서, 자신과 예수님을 동시에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과 ‘신부’는 성경적 표상입니다. 곧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신부를 표상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내줍니다. 구약성경의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부인 교회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의 동반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나,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5,15 참조),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몸소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입니다.”(요한 3,29)
주님!
당신만이 저의 신랑입니다.
당신 마음을 듣게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제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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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공현 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공현 ⓺ 경배의 문화: 기쁨으로 하느님을 닮기
한처음에 사람을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지어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창세 1,27),
사람들이 당신을 닮지 못한 채 세상의 죄악에 물들어가는 것을 보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갈라 4,4-5. 입당송).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느님을 닮을 때 행복할 수 있고 이를 구원이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설계하신 인간 존재입니다.
생명의 존귀함이라든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는 바로 이러한 계시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닮는 길에 먼저 초대된 사람들이고
그래서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닮아감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행복과 구원을 담고 있어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부활의 은총이며,
사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가기 때문에 ‘큰 바위 얼굴’ 효과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본기도).
자녀가 부모를 닮아 태어나는 것은 부모가 지닌 유전자 정보가 자녀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체적 특징에 더해서 부모의 기질이나 성격 또는 정서적 지향이나 가치관까지 전달되는 과정은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삶을 함께 공유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문화적 요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은 신체적 차원의 일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일이며, 무엇보다도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문화적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아서 얻게 되는 은총이 행복이요 구원이라면,
하느님을 닮을 수 있게 되는 계기 또는 원인은 기쁨입니다.
자녀가 부모와 함께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는 가운데 기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모를 정서적으로 닮게 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기쁨이라는 에너지가 없으면 이 닮음의 과정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영적으로 닮아가는
과정 또한 이와 마찬가지여서 이를 우리는 전체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문화라고 부릅니다.
이 문화 속에는 기쁨을 알고 나누며 전하기 위한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교리와 성사, 전례와 실천, 개인들의 삶과 함께 하는 공동체 등이 그러합니다.
토착화나 선교의 활동도 이 기쁨의 문화를 진정성 있게 공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사람들에게
그분의 길을 준비하려고 온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요한 3,28).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 황송해 했던 것이고,
그분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시자 더 없이 기뻐했습니다.
자신의 존재이유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요한 3,30).
그가 와서 세례운동을 전개하면서 사람들에게 촉구했던 회개는 도덕성을 회복하고, 정의를 구현하며,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나자는 호소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을 예비하는 전제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공동선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함으로써 사회악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일은 선교 활동의 전제입니다.
그리고 겨레의 아픔과 희망을 공유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함양하고
민족의 화해를 지향하는 노력 또한 그렇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담긴 진정성과 여기서
느끼는 기쁨이 아직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초대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이 메시아 공현을 실현시키는 경배의 문화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격적으로 신앙을 뿌리내리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앙적 확신을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지향으로 예수님께 청하면 그 청은 반드시 들어진다는 것입니다(1요한 5,14-15).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세상의 시류에 휩쓸려 본의 아니게 죄를 짓고 사는 형제들이 행복과
구원의 길로 들어서도록 초대하려는 청원 기도를 예수님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습니다(1요한 5,16).
다른 무엇보다도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로 인도하겠다는 데
그들이 거부할 리가 없으며 게다가 성령께서도 악마가
더 이상 사악한 간계를 부리지 못하게 강력하게 보호하실 것입니다(1요한 5,18).
문제는 우리의 진정성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 온전한지, 그리고 그 기쁨을 순수한 마음으로
나누고자 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이해력이 열리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1요한 5,20).
그렇게 되면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시편 149,5. 화답송).
신앙의 흐름은 바다의 흐름과도 비슷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바다는 바람에 밀려 수평으로 움직이는 표층 해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온도와 염도의 차이로 수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심층 해류에 의해 끊임없이 그리고 더 크게 움직입니다.
온도와 염도가 높은 물은 더 낮은 물로 삼투해 들어가서
동일한 온도와 염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힘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이 움직임이 결국 바다를 더 크게 움직입니다.
이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던 아나빔들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에게 큰 빛을 비추는”(마태 4,16. 복음환호송) 경배의 문화도 그렇습니다.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공현의 기쁨을 삼투시켜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아서 모두가 행복하고 또 구원되도록 움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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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
- 자기인식의 지혜와 겸손 -
어느 유명 동화 작가(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저자 황선미)가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한 인터뷰 기사중 다음 말마디들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제가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뉴스에서 스치듯 지나간 한 소녀였어요. 꿈이 뭐냐는 질문에 소녀는 ‘학교에 가서 급식 먹는 거’라고 답했어요. 세상에, 그런 당연한게 꿈이라니 기가 막혔어요. 도대체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건가 싶더라구요.그 짧은 인터뷰가 저를 쓰게 만들었어요.”
"1년동안 온라인 수업을 했는데도 실제로 학생을 만나면 알아보지 못하더라구요. 옆모습도 못보고 1년을 보낸 것이예요. 만나지 않으면 알수 없는 게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수업은 비대면으로도 가능하지만, 친구를 사귀는 것 신체 접촉이 필요하더라구요. 나눠 먹고, 같이 쓰고, 엉겨 붙고 그러면서 친구가 되잖아요. 아이를 아이답게 만드는 건 놀이고요. 학교는 그저 공부를 가르치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있음’ 그 자체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공간이었던거예요.”
평범한 기사지만 깊은 깨우침을 주는 내용입니다. 비대면 시대에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꿈을 펼쳐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또 만남의 관계를 통해 실현되는 꿈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중요한 게 꿈입니다. 사람만이 꿈을 꾸고 희망을 지닙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견딜 힘도 생기고 고귀한 품위도 지킬수 있고 타락하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인간다운 고귀함은 멋지고 아름다운 꿈에, 희망에 있습니다. 참으로 꿈을, 희망을 심어주는 관계가, 교육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문득 오래전에 써놓은 별꿈이라 시가 생각납니다. 아침성무일도 찬미가중 ‘그빛살 고운맵시 뛰어난 별, 태양의 바퀴보다 뛰어난 별’로 묘사된 탄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성전 앞 설치된 예수님 탄생하신 오두막에 빛나는 별이 상징하는 바 역시 예수님입니다. 별꿈이란 짧은 시입니다.
“풀잎들 밤새/별꿈꾸며 잠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자리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이슬방울들”-2000.10.1
제 경우에는 날마다 밤새 뒤척이며 별꿈꾼후 자리에 맺힌 영롱히 빛나는 매일강론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꿈중의 꿈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말마디가 참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만날 때 참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에 영원한 생명이란 꿈의 성취입니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축복입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만남이 없이는 자기가 누군지 모릅니다. ‘너 자신을 알라.’ 참으로 쉬운게 남판단하는 것이고 참 어려운게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만남을 통해,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참 나를 알게 되고 진짜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됩니다만 이것은 평생과정입니다.
예수님 없는 사도요한, 예수님 없는 사도 바오로, 예수님 없는 세례자 요한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자 운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관계가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역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예표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름다운 겸손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좋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인 으뜸 덕목이 겸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스승에게 라이벌이 등장한 듯 예수님의 출현에 긴장과 더불어 질투심을 드러내며 흥분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한말씀으로 이를 말끔히 정리합니다. 참으로 두분간의 멋지고 아름다운 관계를 짐작케하는 세례자 요한의 귀한 고백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영원한 생명이자 참 꿈인 예수님을 주님이자 친구로 고백하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참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실현되는 영원한 생명의 꿈이요 충만한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여기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의 신원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 고유의 사명을 지니고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세례자 요한의 고백이 참으로 우리의 고백이 될 때 진정 지혜요 겸손이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사도 요한 역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꿈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실현되는 영원한 생명의 꿈입니다. 사도 요한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고백에 버금가는 참 멋지고 아름다운, 영원한 생명을 확신케 하는 고백입니다. 세례자 요한, 사도 요한 영원한 생명의 꿈을 성취했으니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하여 ‘수도자들 고백성사 보나 마나’란 말이 떠도는가 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주교님들 선물 하나마나’, ‘사제들 피정 하나마나’란 유머러스하나 진실이 담긴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사도 요한의 요한1서 마지막 부분의 고백이 오늘 말씀의 백미이자 절정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우상뿐 아니라 온갖 만연되어 우리를 유혹하고 혼란케 하는 세상의 악마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참하느님이시자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우정의 사랑 관계를 날로 깊이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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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성탄 시기 막바지 즈음에 이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 세례 축일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요한 3,22)
오늘 복음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세례를 베푸는 이는 세례자 요한이었지요. 그는 자신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백성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 주변으로 모여들어 그를 추종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출현에 불안감을 느꼈나 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준 이가 바로 자기들의 스승이니,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이 경쟁심을 부추긴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세례는 예수님께서 직접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준 것인데도 말입니다.(요한 4,2 참조)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이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입장을 담백하게 밝힙니다. 그동안 자신이 선포한 가르침과 베푼 세례가 그에게 기득권이 되어서는 안 됨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주님의 선구자일 뿐이니까요. 그가 길을 준비한 분이 드러나신 이상 이제 그는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도 괜찮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요한 3,29)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그분의 신부입니다. 요한은 신랑 곁에서 기쁨을 나누는 친구 역할이지요. 그는 신부를 제 것으로 가로챌 수 없습니다. 신부를 보고 기뻐하는 신랑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고 아낌없이 축하를 보내어 혼인잔치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친구의 몫입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러하다."(요한 3,29)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절제와 금욕의 고행으로 다져진 그의 정신도, 다가오신 인류의 신랑, 예수님 앞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만류하지 못합니다. 이 기쁨은 주님을 알아보는 인간이 누리는 영적이고 신비적인 희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이제 그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드러나시고 요한은 물러서야 할 때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는 진정한 말씀의 등장으로 아스라히 묻혀갈 것입니다. 소리의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요한의 담담한 저물어감, 겸손한 퇴장이 참 아름답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세례를 받은 우리의 신원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1요한 5,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남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는 죄에서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지요.
원죄의 상처와 본성적 나약함, 불완전함은 언제라도 죄에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세례받은 우리는 그때의 순백색 영혼을 회복하기 위해 언제라도 하느님 자비 안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1요한 5,20)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실 겁니다. 죄 없으신 그분에게 세례는 필요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은 죄인인 모든 인류를 대신해 피조물인 강물에 자신을 담그십니다. 주님 세례의 순간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세대를 포함한 온 인류가 그분 안에 있습니다. 이로써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길로 들어서십니다. 그리고 성탄 시기는 막을 내리지요.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 물로 씻김을 받으셨고, 우리도 그 물로 깨끗해졌습니다. 번잡스럽고 혹독한 삶이 때때로 우리에게 죄의 상흔을 남기지만 우리는 지치지 않고 세례 때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려 주님께 달려갑니다. 우리는 이 세례의 은총을 소중히 간직한 채 일상으로 달려갑니다. 이것이 주님 세례 축일 이후 이어지는 연중 시기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난 성탄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너나할것 없이 코로나19의 위협과 어려워진 경제사정, 이기심과 분열로 혼돈의 때를 지나온 것은 맞습니다만, 절박한 가운데 각자의 영혼 안에 임하신 주님과의 내밀한 동행은 더 각별하지 않았을까 기대해 봅니다. 오늘과 내일, 말씀 안에 머물러 성탄 시기를 잘 마무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성탄의 은총은 여전히 진행형이랍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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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28.30)
이는 예수님께 대한 '세례자 요한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뜻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나무에 달려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충만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앞 다투어서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곳,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죽으려고 하는 곳,
서로가 서로를 위해 낮아지려고 하는 곳,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의 신앙고백이 선포되는 곳, 바로 그곳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1요한5,14)
지금 여기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우리의 청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이 뜻 안에서 우리의 소망들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이 되게 하려고 나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그래서 자꾸 몸을 움추리게 하지만,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우리 안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이 춥지 않고 참으로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를 새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하느님의 은총으로, 저희가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하소서."(본기도)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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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어디를 향하는 길이 될 것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함께 주고 있을 때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고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로 가기 위한 준비단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두 세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요한이 질투를 할 것 같아서 그리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요한은 신부가 신랑에게로 향하는 ‘길’과 같은 존재란 뜻입니다. 길은 두 갈라진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고 싶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길은 그래서 돋보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길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되고 목적지로 빨리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신랑의 친구,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려면 바로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가기 위해 밟고 지나가는 그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록 지금은 작아질지언정 영원한 분으로부터 영원히 사랑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들을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검은 돌들이 사는 산동네가 있었습니다. 이 돌들은 로마 시대에 길을 만드는 데 쓰였습니다. 두 친구 돌들도 서로 미래에 어느 길이 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멋지게 생긴 돌이 친구 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황제가 다니는 길이 될 거야. 비록 돌에 불과하지만, 황제가 다니는 길은 인간들도 부러워한다고. 너는?”
“나는 잘 모르겠어. 뭐 필요한 데 쓰이겠지. 너야 평평하고 단단하니까 임금이 다니는 길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울퉁불퉁 못 생겨서 황제의 마차가 다니기에 적합하지 않거든.”
드디어 인부들이 와서 두 돌을 파냈습니다. 역시 황제가 다니는 길에 친구 돌이 먼저 박혔습니다. 서로 헤어지며 둘은 슬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황제를 ‘네로’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마차가 자신의 머리 위로 지나갈 때는 조금 고생스럽기는 해도 사람들의 함성과 꽃이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차가 지나갈 땐 머리가 좀 아팠지만 그래도 영광을 받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울퉁불퉁한 돌은 사람이 밟고 지나다니는 시골길에 박혔습니다. 그런데 그 길 위로는 죄수들이 피를 흘리며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처형되는 사람들이 끌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돌이 평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족쇄를 찬 사람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지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바오로라고 부르는 죄수가 또 그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돌에 그 사람의 피가 떨어졌습니다. 돌은 고개를 들어 바오로라는 죄수의 목이 세 번 튕긴 자리에서 샘이 솟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황제의 길로 사용되었던 친구 돌은 마차 바퀴에 갈려져서 더는 쓸 수 없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위에 흙을 덮고 새로운 돌들로 새로운 길을 만들었습니다. 잠깐 황제의 길이 되었던 친구는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형장의 길이 되었던 돌은 사형 집행이 더는 이뤄지지 않았기에 시골에 가난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로 아직도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둘레에 줄을 쳐서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에서 기도하고 찬미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자신에게 뿌려졌던 바오로의 피가 성인의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 박힌 돌은 2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보면 어떤 길들은 ‘비아 아우렐리아’처럼 그 길을 만든 황제의 이름으로 여전히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비아 그리스도’입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죽었지만 여전히 그 황제가 기억되는 곳에서는 그 황제가 만든 길이 그 황제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로부터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향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밟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그 길을 간 그분의 신부가 영원히 그 길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아 영원히 사는 방식입니다.
나를 거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세속-육신-마귀의 자신을 죽이고 샘이 솟게 하는 바오로의 삶을 살게 됩니까, 아니면 세속-육신-마귀를 쫓는 네로 황제의 삶을 살게 됩니까? 우리가 세례자 요한과 같아지려면 어떠한 길이 되어야 하는지 명명백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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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부여하신...>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의 핵심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무대가 차려진 후, 서막(序幕)에서 열연했던 세례자 요한이 무대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주인공으로 등장하시는 예수님과 스쳐 지나가듯이 살짝 마주치는데, 이른바 ‘세례 원조 논쟁’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선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120 퍼센트 완수한 세례자 요한이 무대 밑으로 내려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순간, 예수님께서 등장하셔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상황 앞에 분기탱천하는 동시에 큰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는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세례! 하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세례 갱신 운동을 시작한 독보적인 존재, 세례의 특허권자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 역시 자부심이 남달랐습니다.
그간 스승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모습은 제자들에게 있어 자부심을 가질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스승님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 강을 찾아왔습니다.
평범하고 가난한 백성들뿐만 아니라 유다 고관대작들, 사제들과 지도층 인사들도 모두 찾아와서 스승님 앞에 순한 양처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 모습 앞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혼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라는 ‘갑툭튀’가 나타나 스승님의 전유물이자 특허인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스승 세례자 요한에게 쏠렸던 시선이나 환호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스승님 가게는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사람들은 모두 저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슬쩍 가서 분위기를 보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세례와 관련해서는 원조라는 자부심에 어깨 펴고 살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마음은 심하게 불편해진 것입니다. 분노가 폭발한 제자들이 이럴 수는 없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는 마음에 스승을 찾아와 다그치듯이 외칩니다.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3장 26절)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분명 스승님께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분노하시고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리라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 담판을 지으리라 희망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전혀 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중인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복음 28절, 30절)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신원의식이 유난히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때, 세례자 요한이 직면한 현실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큰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한때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는데, 한때 세상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한몸에 받았었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무대 밑으로 내려서야 한다는 것, 사실 수용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핵심과 본질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나서야 할 때, 그리고 물러서야 할 때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탁월하고도 명철한 식별력의 소유자였는데, 그것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려고 노력한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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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0109.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요한 서간의 저자는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주님은 하느님과 같으셔서 어떤 일이든 청하면 들어주시는 분이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며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악마의 손에서 구해주십니다.
물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악마가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우리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께서 참되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가난하던 시절 희생과 함께 부모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지요.
생활이 여유도 없고 구차한 가운데에서도 부모님은 자식에게 무엇이든 형편이 자라는 데까지 다 해주시려 했지요.
비단 부모 사랑 뿐 아니라 연인 사이의 사랑의 특징에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수한 사랑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는 이장희 작곡, 노래가 떠오릅니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모두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
그런데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요한 서간의 글에서도 지극한 정성과 희생을 가슴에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요한 5,14-15)
아울러 서간의 저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구분이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당신 자신은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사랑을 생명과 함께 온전히 주시려 하십니다.
사회심리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프롬 (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이 ‘사랑의 기술’에서 주장하는 사랑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성숙한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과 겸손, 용기, 신념, 끊임없는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가 합니다.
사랑은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를 포괄하면서도 사랑하는 대상에게 존중과 관심, 책임감을 가지면서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주면서 자아성장과 확장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로소 완전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세례성사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 아침에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유대인들이 지켜온 정결례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세례자 요한의 역사적 배경과 이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미크바(מִקְוָה Miqva)’는 유대교에서 정결예식을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데,
지금 우리에게는 목욕을 위한 욕조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는 필히 이 ‘미크바기 설치하여 불결한 이들을 정화시켰던 것입니다.
불결함 속한 대표적인 사람은 사람이나 동물의 사체를 접촉한자를 말합니다. 악성 피부병을 앓는 사람, 월경과 유출병을 앓는 사람이었는데 이들이 미크바 예식을 치룬 후 희생제물을 바쳐서 이를 증명하여야 했습니다.
후대에는 유대교로 개종하는 예식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미크바에 담은 물에 잠그는 것은 정화와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외에서 샘물이나 우물물을 받아서 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이런 규제에서 자유롭게 요르단 강물에서 정화예식을 하였는데, 그 의미가 불결에서 더 나아가 회개를 거쳐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기에 유대인들과의 차이 때문에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요한 3,25)기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 제자와 유대인 사이에 누구의 정결예식이 더 정통적인가를 두고 말다툼을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이번에는 자기와 같이 강물에서 세례를 주시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예수님에 대해서 스승께 질문을 합니다.
본문이 풍기는 분위기는 이제까지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새롭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니 될 말이냐?’는 의미의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기대하지 못했던 대답을 스승께서 거침없이 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요한 3,27-28)
스승인 세례자 요한은 역시 제자들이 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잔치집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쁘다는 말과 함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스승인 세례자는 제자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인 예수님을 높이는 겸손의 모습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대답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는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문득 사제서품을 앞둔 대품 피정 중에 한 교수 신부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하려 노력했습니다.
‘자신이 인간적으로 밉고 또 시기의 대상이 되더라도 그 상대가 능력이 있으면 그것 자체를 인정하고 대접해야 한다. 만일 그것을 죽여 버린다면 하느님 앞에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제자들이 경쟁의 대상으로 부추기려 했지만 그분은 주님을 아셨던 것이지요. 바로 하느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그리고 ‘크신 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한결 같이 자신은 메시아가 아님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오시기로 예고된 이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 더 크시다는 사실을 한결 같이 고백하며 메시아에 대한 고백하며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시지만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의 세례를 주실 것을 예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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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9일 토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매일미사
_홍승국 이사야 신부 집전
https://youtu.be/KLfAUIvCIhQ (32:32)
•2021. 1. 9.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홍승국 이사야 신부 (도미니코 수도회) 집전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 신부님 강론 9분 39초부터 16분 23초까지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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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김 로마노 형제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요한3,22-30) 제1독서<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1요한5,14-21) 사랑하는 여러분, 14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20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화답송 시편 149,1ㄴㄷ-2.3-4.5-6ㄱ과 9ㄴ(◎ 4ㄱ) ◎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충실한 이들의 모임에서 찬양 노래 불러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고, 시온의 아들들은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 ○ 춤추며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손북 치고 비파 타며 찬미 노래 드려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 ○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에게 영광이어라. ◎ 복음<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요한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누구든지 제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6~17) 요한 1서의 맺음말(5,13~27)도 요한 복음처럼 이 글을 쓰는 목적을 다시 밝힌다. 요한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집필 목적이었는데(요한20,31), 여기서는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 집필 목적이라고 말한다(1요한 5,13).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1요한 1,1) 이렇게 머리말이 생명의 말씀으로 시작된 요한 1서의 가르침이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1요한5,20)라는 신앙 고백으로 끝을 맺는다. 오늘 말씀에서 특이한 것은 '죽을죄'(1요한 5,16)에 관한 언급이다. '누구든지 제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죽을죄'와 '죽을죄가 아닌 죄'가 무엇인가? 구약에서는 '살인, 간음, 배교'를 죽을죄<대죄(大罪)=중죄(重罪)=사죄(死罪)>라고 했다. 신약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교회는 하느님의 천주성(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혜인 '생명의 은총'(성화은총=초성은혜=상존성총)을 잃어버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죽을죄'(대죄)와 '죽을죄가 아닌 죄'(소죄)로 구분된다. 윤리신학에서나 교리에서는 '대죄'와 '소죄'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우리 인간은 생각과 말과 행위로 대죄를 짓는다. 대죄가 성립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계명과 지성의 인식 행위와 자유 의지의 동의이다. 우리가 무슨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할 때,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줄 분명히 지성으로 알면서도 자유 의지로 좋아서 동의할 때 대죄가 성립되고, '생명의 은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의 은총'은 세례성사때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해방)사업의 공로로 주어진 것인데, 대죄를 지음으로 잃게 된다. 오늘 독서에서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생명(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간구(청)하라고 가르친다(1요한 5,16). ********************************************* (1요한 5,13-21) 13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인데~ 요한17,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세상 죄인들이 십자가의 대속으로 용서, 구원(생명)을 받게 되었다는 진실 그 진리를 알고, 믿는 이 그 사람 안에 믿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14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 어제 묵상 했듯이 기도란 하느님의 뜻을 청했을 때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 구원을 위한 것은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6ㄱ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구원(용서)을 받을 수 있는 죽을죄입니다. 16ㄴ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용서)을 받을수 없는 죽을 죄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 본문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말씀으로 풀어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태12,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32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성령 모독죄입니다.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죽을죄입니다. 요한15,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구원의 진리라 증언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16,8-10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십자가의 대속을 용서의 참된길로 증언하시는 그 사ᅟᅥᆼ령의 증언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그러니 성령의 증언을 믿지 못하는 이들, 아니 성령을 받았다 착각하시는 이들을 위해서 서영을 받을 수 있도록 먼저 기도하는 ~ 곧 하늘의 진리인 대속의 십자가가 아닌 땅(법)에 의한, 자신의 의로움을 위한 종교 행위에 열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유언 기도입니다. 요한17, 9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세상을 위한, 그 세상 것을 위한 그 세상 방식에 의한 육의 만족, 그 뜻을 위한 그 죽을죄를 위해서 오늘 사도는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3,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 누구나 하늘의 물과 성령으로 새로워지도록 기도 해야지요 그러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됩니다.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 그 하느님의 말씀, 성령안에 사는 사람 그 안에는 죄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그 피의 값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있을 죄에까지 다 유효합니다. 그것이 신의 죽음 그 사랑의 힘이니까요 1요한3,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20ㄱ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 성령의 가르침입니다.(요한14,6) 20ㄴ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 어제도 묵상 했듯이 믿는 대상이 잘못된 것이 우상이며 믿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 죽을죄 미신입니다. 주님 공현 후 토요일 복음(요한3,22~30)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6~27)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 세례자 요한 보다 늦게 등장하였으며,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던 예수님께서 자신의 스승보다 더 인기와 명성이 있게 되자, 이것을 시기하여 예수님을 폄하하는 호칭을 쓰고 있다.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이라는 호칭 속에는 존경의 의미가 보이지 않으며, 동시에 스승님이신 세례자 요한에게 의존하는 자라는 뉘앙스를 주고 있다. 여기서 '증언하신던'에 해당하는 '메마르튀레카스'(memartyrekas)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희랍어에서 완료형은 과거 행하여진 동작의 영향이 현재에까지 미치는 것을 나타내므로, 이러한 표현은 그들이 예수님을 아직 세례자 요한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에 해당하는 '이데'(ide; behold)는 '보라'라는 뜻으로 '에이돈'(eidon)의 명령형인데, 말하는 사람이 어떤 것에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할 때 쓰는 말로서, 이것을 통해 당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인기에 시기와 불안을 느끼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들의 지도자인 세례자 요한이 영향력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현실에만 쏠려 있어서, 군중들이 세례자 요한을 외면하고 예수님에게로 몰려드는 것이 세례자 요한에게는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본다. 여기서 '가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에르콘타이'(erchontai)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세례자 요한을 만나고자 찾아오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몰려갔으며, 이런 현상이 계속 진행중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요한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의 말을 빌어서 이제 세례자 요한의 시대가 가고 예수님의 시대가 새롭게 열리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세례자 요한의 하느님 중심 주의적 신앙과 겸손이 잘 배어있는 구절이다. 그는 자신의 몫과 예수님의 몫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과 이것을 정해 주신 분이 '하늘', 곧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 사이를 마치 경쟁 상대(라이벌)라고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께 대하여 시기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여기서 '아무 것도'로 번역한 '우데 헨'(oude hen; not even one)은 '하나도 ~아니다' 라는 뜻인데, 앞에 나오는 '없다'로 번역된 부사 '우'(ou)를 강조해 준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중 부정을 통해 하늘에서 주어진 것만 사람이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에 해당하는 '에크 투 우라누'(ek tou ouranou; from heaven)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뿐이다(only what is given him from heaven).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사심없는 하느님의 일꾼이며 종이었고,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신본주의자(神本主義者)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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