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김씨(靈光金氏).
한국의 성씨 가문들의 족보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의 흐름이.,정리된다.
아울러, 기록 상, 멸실된 역사도 밝힐 수 있다.
영광김씨 시조.,김신언.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현손.
..............경순왕 가계도.............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김부(金傅).
경주 지역 시림(始林) 또는 계림(鷄林)의
금 궤짝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신라 탈해왕이
김(金)이라 성을 지어 준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
김부는 신라의 왕족이었으나 이종 6촌 형 경애왕이
암살되면서 즉위하여 9년만에 고려에 평화적으로 합병.
고려 태조 왕건은 자신의 사촌 누이 신성왕후와 결혼을 주선.
경순왕은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정승공에 봉해졌으며,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 등 왕건의 딸 2명을 배필로 맞이.
고려태조 '왕건의 정비'인 신성왕후는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인 김억겸의 딸.
왕건과 신성왕후 사이 두 딸을 경순왕에게 시집보냈으니
왕건은 경순왕의 조카사위이면서 또한 장인이 되는 관계.
고려 왕실 근친혼은 왕실의 분열을 막아 왕권강화를 위함.
경주김씨 김알지 후손인 경순왕(敬順王)에게는
9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망국의 한을 안고 입산.
둘째는 나주 김씨, 셋째는 경주 김씨 영분공파(永芬公派),
넷째는 경주 김씨 은열공파(殷說公派), 다섯째는 의성 김씨,
6남 강릉 김씨, 7남 언양 김씨, 8남 삼척 김씨, 9남 울산 김씨.
'경순왕의 7남' 김선의 어머니는
'왕건의 딸' 효목왕후 (낙랑공주)
경순왕의 능은 신라의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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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김씨는 전남 영광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 김심언(金審言)은 고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1014년(현종 5)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으로 승진.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진 염의 셋째 아들로서
석학 최섬(崔暹)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고려 성종 때 문과급제 후, 우보궐(右補闕) 겸 기거주(起居注).
990년(성종 9) <봉사이조(封事二條)>를 상소하여
성종의 정책 수행에 유일한 지침이 되게 하였으며
육정육사론(六正六邪論), 자사육조(刺史六條)를 저술.
후세의 정치사상과 제도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승진
예부상서(禮部尙書) 관직을 거치고
내중시랑평장사(內中侍郞平章事)에 이르러
오성군(筽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後孫)들이
관향(貫鄕)을 전라남도 영광(靈光)으로 하게 되었다.
1018년(현종 9) 세상을 떠나자
왕은 그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문안(文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시조 심언(審言)의 아들 윤보(允輔)가
'삼중대광'으로 '판소부시사'를 역임했고,
현손(玄孫) 극검(克儉)은 숙종조(肅宗朝)에
태자 소사(太子少師)를, 6세손 영부(永夫)는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역임.
그러나, 영광 김씨는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등이
난을 일으켜 많은 문신들이 화를 당할 때
무신들의 처절한 정치 보복으로 멸문 위기.
간신히 살아남은 극소수의 생존자들이
전국각지 산골에 흩어져 혈맥을 이었다.
그로 인하여 영광 김씨는
중간계대(中間系代)가 실전(失傳)되어
시조 심언(審言)의 맏아들 윤보(允輔)의 후손.
경파(京派 : 정보)·
장흥파(長興派 :태용)·
영광파(靈光派 : 연)·
무장파(茂長派 :효민)·
양사파(良士派 : 광찬)·
용강파(龍岡派 : 중보)·
삼화파(三和派 : 무수)
등으로 계대(系代)한다.
단, 강계파(江界派) 만은
차남 문경(文卿) 후손으로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영광 김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2명을 배출.
영광(靈光)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서부(北西部)
해안에 인접한 지명으로 백제 때 무호이군(武戶伊郡).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무령군으로 고쳤다가
고려에 와서 영광(靈光) 또는 정주(靜州)라 하였다.
분파.
경파 : 김정부
영광파 : 김연
장흥파 : 김태용
무장파 : 김효민
양사파 : 김광찬
강계파 : 김교경
용강파 : 김중보
용강서정파
집성촌
전남 장흥군 장흥읍, 용산면 일원
충남 태안군 남면 원청리
전남 장흥군 부산면 내안리
울산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범서면 척과리
전남 영광군 영광읍 월평리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석천리
인구.
1985년 6,689가구 28,443명
2000년 9,974가구 32,412명
여수.,봉소당(鳳巢堂).
여수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봉강동의 중심지.
영광김씨 고택 봉소당(鳳巢堂)이 자리잡고 있다.
대지 5000평에 한옥으로 된 사랑채· 행랑채· 본채.
몇년전 '가문의 영광' 영화에도 등장.
이 저택이 건립된 시기는 구한말이다.
현재 12대 후손 김재호(66)의 소유이다.
그의 증조부 김한영이
구한말에 장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지은 집이다.
당시 순천에선 김종익이 8만 석 부자였고,
여수에는 김한영이 1만2000석 부자로 유명.
영광김씨 가훈 - '식객에게 주특기를 묻는다.'
김한영은 장사로 돈을 벌었지만,
그러나, 그는 잘난 척하지 않았고
가난한 과객의 대접에 후했다 한다.
김한영은 과객이 오면 반드시 주특기를 물어보았다.
덕석을 짜는 것이 특기인 과객에게는 덕석을 짜게했고
이걸 시장에 내다 팔게해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도와줬다.
이 집은 평소 소작인들에게도 후하게 대했다.
자식이 8~9명 되는 소작인들은 자식 키우느라
소작료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 처지가 딱하다고 해서 그냥 눈감아 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왜 그 집만 봐주느냐"고 항의.
그리하여 자식 많은 소작인에게는 수백 가마 쌀을
화양면 고진이라는 곳에서 여수항까지 배에 쌀을 싣고
내리며 운반하는 하역작업 하는 일을 맡겼다고 전해온다.
이 대가로 소작료를 면제해 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보기에도.,공평.
평소에 쌓아둔 이런 적선이
난리때마다 그 효력을 발휘했다.
'여순반란사건' 때 여수에서 가장 부잣집인
봉소당 주인이 제일 먼저 좌익에게 잡혀갔다.
공교롭게도 당시 좌익의 지도부 인물 가운데 하나가
평소 이 집의 혜택을 보았던 그 소작인의 아들이었다.
좌익을 하긴 하였지만, 평소에 많은 신세를 졌던 '봉소당'.
그는 자신의 옛주인을 죽일 수는 없었기에
결국 봉소당 주인이 몰래 탈출할 수 있도록
눈감아 줌으로써 옛 은혜에 보답했다고 한다.
난리가 나면 평소 개인감정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6·25 전인 1948년 발생한 '여순반란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좌'와 '우'라는 이데올로기 문제였지만 속으로는
양반과 상놈, 지주와 소작인 간에 쌓여 있던 개인감정의 분출.
1만2000석 대지주 여수 봉소당 11대 후손.,김성환(1915~1975)
당시 33세 김성환이 반란군에게 끌려갔던 장소는 여천군청 2층.
여기에는 소작인 아들로서 반란군의 책임자급으로 있었던 인물.
두 사람은 책상과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김성환이 끌려오니까 이 책임자는 옆에 있던
2명의 호위병들에게 "너희는 밖에 나가 있어라!"
그가 명령을 내린 이후에도
김성환을 의자에 앉도록 한 다음,
아무 말도 없이 신문만 보고 있었다.
자신의 의자를 벽 쪽으로 돌려놓고
신문만 들여다보는 이런 침묵 상태로
끌려온지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끌고 왔으면 신문을 해야지
그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을 향해서 신문만 보고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김성환은
30분쯤이 지날 무렵 이유를 알았다.
'아!~ 나보고 도망가라는 뜻이구나!'
김성환은 군청의 창문을 살며시 연 다음에
홈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야산으로 도주.
이 소작인의 아들은 반란군의 책임자였으므로
"너 도망가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
그렇다고 자기 조부 때부터
은혜를 입은 봉소당 아들을
죽일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여순사건때 12대손 김재호(1942~ )는 초등학교 1학년.
봉소당 머슴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이는 17세였다.
머슴의 아들은 반란군에 가담해 팔에 완장을 차고 있었다.
완장을 찬 머슴 아들이 봉소당 대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여섯 살 먹은, 어린 김재호는 무심코 손에 들고 있던 밤을
"형! 이 밤 좀 먹어 봐" 말하자 이 밤을 받아 든 머슴 아들은
한참 동안 주인집 아들 재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고 한다.
김재호는 "지나고 보니까
그때 무심코 내가 내밀었던
밤이 내 목숨을 살렸다".,회고.
'논리(論理) 위에
정리(情理)가 있다.'
이렇게 해서 이 집은 난리통에도
사람이 죽거나 집이 불타지 않고
봉소당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집은 현재도 여전히 여수의 부자다.
백성을 사랑하기로 유명한.,윤효정 家.
윤선도 4대 조부 어초은(漁樵隱) 종택.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을 못내어
옥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을 들은
윤효정이 '관아에 찾아가 백성의 세금을 대신
내어주고 풀어준 일을 세 번이나 있었다.'고 하여
해남윤씨 고택은 '삼개옥문적선지가'라고 불리웠다.
한국의 명문가문들이
수백년간 유지된 배경에는
그들 집안에서 대물림되고 있는
정신적 가치, 가훈이 있었기에 가능.
......최부자집 6훈(六訓)........
첫째, 흉년에 땅을 사지 않는다.
둘째, 파장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
셋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
넷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여섯째,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만 입어라.
......................운조루.,가훈...................
구례 토지면 오미리 문화류씨 10대 종가 운조루.
'타인능해’(他人能解) -아무나 뒤주를 열 수 있다.
조선 영조 52년(1776년) 낙안군수 류이주 99 고택.
일제강점기, 6.25 등을 겪어야 했던.,지리산 자락.
그곳 운조루에 쌀 3가마가 들어가는 쌀 뒤주가 있다.
200여년 된 뒤주 아래 마개에는.,'타인능해’(他人能解)
즉,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뒤주를 열어 쌀을 퍼갈 수 있다.
운조루 주인이 주변 이웃에게 베푼 쌀은
한해 수확량의 20%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동네에서 배를 곯는 사람이 없도록 만든 것.
경주 최부자집. 구례 운조루(雲鳥樓),
논산 명재고택 등 명문가를 포함하여
여수 '영광김씨 고택' 봉소당(鳳巢堂).
덧 말.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0대 중반부터
유기상(鍮器商) 점원을 하였던 남강 이승훈.
밑바닥 인생에서 출발하여 장사로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세운 학교가 그 유명한 오산학교이었다.
함경북도 명천 출신의 보부상(褓負商)이었던 이용익.
출신은 보따리장수였지만 나중에 보성학원을 세웠다.
그 보성학원을 인수해 고려대학으로 키운.,인촌 김성수.
고려대학에는 인촌과 뜻을 같이했던
호남 대지주들의 돈도 들어가 있었다.
'조선어학회사건' 주도자인 서도장씨(西道張氏)
장현식이 김제·만경의 들판을 소유했던 대지주였고,
장씨들 돈의 상당 액수가 고려대학 인수에 들어갔다.
인촌의 고려대학 인수에 자극받아
전라남도 암태도(岩泰島)의 지주였던
문씨 집안도 목포 문태고등학교를 설립.
순천의 만석꾼이었던 우석 김종익은
'8대 정승이 나온다'는 명당 터를 입수하여
'나만 잘될 것이 아니라, 여러 인재가 나와야 한다'
이 터에 순천고등학교를 세웠고
현재 순천대학도 김종익이 세웠다.
여수의 만석꾼 후손인 봉소당(鳳巢堂).
김재호는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1970년대 진성여고와 한영고를 설립.
현대그룹 현정은 조부인 무송 현준호는
전남대학의 초석을 다졌다.
대원군의 스폰서였던 전주의 '백(白)부자'는
싸전으로 번 돈으로 이리 남성고등학교를 설립.
평소 인촌 집안과 교류가 있었던
경주 최부자 가문의 문파 최준은
해방 후에 대부분의 재산을 투입해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를 설립.
진주 지수면 허씨 집안의 만석꾼 효주 허만정은
1924년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진주여고)를 설립.
일
제는 이 학교를 강제로 빼앗아 공립학교로 전환.
허만정의 아들인 허완구(許完九)는
1995년 120억원을 진주여고에 투입해
공립 진주여교 학교 건물을 새로 지었다.
선친의 유지 계승이
효도라고 여겼기 때문에
돈을 생각하지 않았던.,결과.
한국이 보유한 미래자산은 사람.
해방 후에 이만큼 발전한 배경에는
교육 사업의 영향이 컸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