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先親) 40주기(周忌)를 맞으며 (2010.12.11. 11:06)
오는 12월 14일은 음력으로 11월 9일로 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40년이 되는 날이다.
1899년 5월 7일생이신 아버지는 1970년 12월 7일(음력으론 11월 9일)에 대구시 중구
삼덕동 28의 12번지에 있던 ‘삼덕동 집’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는 32살의 나이였는데 40년이 지난 오늘 나는 72살이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연세가 72세였으니 이 날을 맞는 나의 감회는 자못 남다른 데가 있다.
40년 전 오늘 나는 제일모직 대구공장 경리과의 사원이었다.
집안 형편상 대구지역에서 근무하는 직장을 찾다보니 제일모직의 대구공장이 떠올랐고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를 했지만 대구공장 근무를 자원하여 대구로 내려온 지 5년이 경과한
때였다. 대구공장은 그래도 법적으로는 본사였기 때문에 경리업무 중 중요한 세무업무는
공장에서 담당했고 원가계산 업무도 하기 때문에 상경계통 출신으로 제대로 회사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코스이기도 했다.
당시에 나는 경리과의 주무사원으로 세무담당이어서 회사 일이 많은 편이기도 했지만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평소 건강하셔서 부모님의 건강에 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0D3E364D02DC2F23)
돌아가시던 해(1970년) 봄 철 '삼덕동집'에서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치과에 다녀오셨는데 의사가 어금니를
뽑아야 한다고 해서 이빨 하나를 뽑았다고 하셨다. 그 후 통증이 심하다고 하시면서
외부 출입도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 나으려니 하고 무관심하게 지냈다.
돌아가시던 날 아침 나는 아버지께서 거처하시던 사랑방을 문을 열어보니 누워계셨지만
기척을 하시기에 다녀오겠다는 인사 말씀을 드리고 문을 닫고 나와 출근하였다.
그랬더니 오후 3시경에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어머니 말씀이 “아버지께서 이상하시다”
라고 하면서 빨리 집으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급히 차를 타고 집으로 가서 사랑방에 들어갔더니
아버지께서는 나를 보시고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려 하시면서 무언가 말씀을 하시려고 애를
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끝내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못하고 내 손을 놓으면서 그대로
자리에 누워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운명하셨다.
모두들 망연자실하는 순간이었다. 급히 돌아가셨기에 임종을 한 사람은 어머니, 아내,
그리고 집안 일 도와주던 가정부, 그리고 나뿐이었다. 나중에 아내 말을 들으니 그 날
점심 때부터 아버지 표정이 이상해지면서 장조카인 상무(相茂)를 찾으시더라는 것이다.
상무는 그 때 서울대 농대 4학년 재학중으로 수원에 가 있어 당시의 통신수단으로는
바로 불러올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갈 수가 있느냐?..’고 탄식을 되풀이 하셨다.
그 뒤 절차에 따라 장례를 진행했는데, 집안 어른들께서 시키는 대로 굴건제복(屈巾祭服)하고
5일장을 치루었다. 장지는 영천군 고경면 고도의 선영계하에 모셨다.
장의행렬이 영천 마을에 도착하자 친척, 친지 여러분들이 나와 눈물로 영접하였고
상여는 수십 명이 자진 참여해주어 상주로 상여를 따라가면서 마음 든든함을 느꼈다.
반혼(返魂)한 후에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朔望)을 지내기를 1년 동안 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1672344D02DC5C16)
그 즈음에 찍었던 사진. 손자인 상옥(相沃)이를 안고 계시는 모습이다.
그 때 생후 2년 6개월 남짓하던 상옥이는 어느덧 44살이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일생을 자유인으로 사셨다. 한 번도 조직에 얽매인 생활을 하신 적이 없고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나 한학과 일어에 능통하셔서 영천에 사실 때는 고경면에서
면의원도 하셨고, 1939년 3월 형님과 누님의 학교 교육을 위해 대구로 나오신 후에는
약종상 시험에 응시하여 면허를 취득하여 집 가까이서 약방을 운영하시기도 했다.
8.15 해방 후에는 가창면에 있는 과수원을 매입하여 직접 경영하셨고, 성산이씨(星山李氏)
대구화수회(大邱花樹會)의 회장으로 선출돼 몇 해 동안 맡아 수고하시기도 했다.
생시에 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 한 가지는 인인성사(人因成事)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으로 인해 일어나는 법이니 평소 사람 사귀고 관리하는 일을
잘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나는 명심하여 제대로 실천하지를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신후 18년을 더 사셨다. 88올림픽으로 나라가 떠들썩하던
1988년 8월 하순 91세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개포동집에서 타계하셨다.
내가 대구에 살던 동안은 아버지, 할아버지 제사를 내가 맡아서 지냈으나 장조카인
상무가 결혼을 한 후에는 조상님 제사를 맡아서 지내오고 있다.
제사 때는 조카 집에 가서 참사만 하면 돼 나와 아내가 한결 부담을 들게 됐다.
끝으로 평소에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왜 갑자기 돌아가셨을까 하는 의문을 늘 가지고
있었는데, 최근에 아내와의 대화에서 그 원인을 나름대로 찾아보았다.
아내 의견은 아무래도 패혈증(敗血症)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치과에 가셔서 어금니를 빼고 나서 적잖은 출혈이 있었는데, 당시의 의료 환경
으로는 적당히 지혈 조치를 했을 것이라 세균 감염의 가능성이 크고 그로 인해 패혈증으로
발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이다.
지금 생각하면 치과에 다녀오신 후에는 이도 아프지만 자꾸 춥다고 하셨는데, 추위를
느끼는 것은 열이 많이 나서 그랬을 텐데 빨리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자세한 증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는다.
요사이도 큰 병원에서 수술 받고 나서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지만·
40년 전의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는 더욱 더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2010. 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