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학의 탐구 11장 서학(西學)의 폭풍 속으로 - 도학(道學)의 척사론(斥邪論)과 서학의 신앙운동
조선사회의 도학적 정통이념이 이단으로 규정하여 가장 격렬하게 부딪쳤던 두 가지 대표적 사상은 ‘불교’와 ‘서학’이었다. 조선시대 도학은 전반기에 ‘불교’를 비판하면서 통치이념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시켜 갔으며, 후반기에 들어가자 새로운 사상조류로서 ‘서학’의 도전을 받고 이를 배척하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재확인하였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부터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17세기 이후로 서양문물의 유입이 점차 증대되어 갔으며, 18세기에 들어가자 서학의 이해가 심화되면서 서학의 새로운 세계관은 도학적 세계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당시 유교 지식인들은 서학에 대한 비판적 견제와 긍정적 수용이라는 대립을 보여 주고 있다. 수용의 태도는 개방적 의식을 지닌 실학파의 지식인들이었고, 비판의 태도는 도학파의 지식인들이었으나 그 두 가지 태도가 뒤섞인 복합적 양상을 보여 주면서 도학과 서학 사이에 상호교류와 갈등이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서학’이라는 외래문화는 조선 후반기의 사상사에 매우 독특한 국면을 열어 주는 중요한 요소로서 조선 후기 유교사상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서학의 문제는 조선사회가 최초로 서양 문제와 본격적으로 만난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상황과 연결되고 있는 중요한 시대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교전통이 서양문물과 만나는 초기의 과정과 양상을 성찰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동서양의 교류 속에서 찾아가야 할 방향과 위상을 인식하는 데 의미 있는 과제가 될 것이다.
사실상 조선 후기 사회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유교전통과 서양문물이라는 두 문명의 만남에서 국가체제나 지식인들이 개방적 수용을 통해 사회변혁에 적극적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배척이나 견제를 통해 전통의 유지에 적극적 관심을 보이기도 하며, 혹은 두 상반된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 긴장을 유지하거나 충돌하는 상황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학과 서학이라는 두 이질적 사상의 교류 속에서 도학이념의 조선사회가 지닌 체질과 성격을 더욱 잘 엿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학의 초기 전래과정은 17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되기 시작되면서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천주교의 신앙운동이 일어나는 단계로까지 확산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서학이 단편적 지식의 소개에 따라 새로운 문물로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편차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17세기 초기의 우리 사회에서 천주교 신앙에 관한 지식이 처음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소개하면서 허균(許筠)을 최초의 천주교도로 지목하였다.
그 후 점점 교류가 많아지고 지식의 양이 축적되면서 ‘서학’의 두 가지 기본 양상으로서,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과 서양의 종교로서 천주교에 대한 지식이 계속 축적되어 왔다. 그 가운데서 초기의 관심은 대체로 과학기술의 지식에 집중되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 선교를 했던 예수회 신부들은 천주교의 선교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서양과학지식의 보급을 병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점차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서양문물의 도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7세기 초부터 주로 당시 북경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 서양문물이 수입되었다.
이광정(李光庭)은 마테오 리치가 간행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는 세계지도를 1603년 처음 도입하였고, 정두원(鄭斗源)은 1631년 북경에서 로드리께즈(Rodriquez, 육약한 陸若漢)를 만나 천리경(千里鏡, 망원경) · 자명종(自鳴鐘, 시계)을 비롯하여 천문학 역법(曆法)에 관한 한역(漢譯) 서양과학 서적을 구해 왔다. 또한 당시 사신을 동행하던 역관들에게 서양과학의 지식을 연구시켰는데, 그 결과로 효종 때인 1635년에는 아담 샬(Adam Schall, 탕약망 湯若望)이 체계화시킨 시헌력(時憲曆)이라는 역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서양의 지식이 계속해서 들어왔으나 이 시기의 서학문물의 수용은 여전히 특수한 계층에 속한 소수 인물들의 지적 호기심 속에서 들어오는 것이었다.
예수교 선교사 애유략(艾儒略, Aleni)이 편찬한 『직방외기(職方外紀)』에 수록된 유
럽지도
그 다음 한 단계 넘어와 서학에 대한 전체적 인식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계기를 열어 준 인물은 이익(李瀷, 성호 星湖)이다. 이익은 서양과학은 물론이요 서양의 종교와 윤리적인 문제까지 명확한 인식을 보여 주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서양종교(천주교)의 교리에 대한 비판적 토론이 벌어지면서 한편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한 적극적 수용태도를 보이는 신서파(信西派)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도학자들의 입장을 보면 소수의 지적인 호기심에 따라 소개하는 인물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도학자들은 무관심 속에서 논의조차 없었으며,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을 때 소수의 학자들 사이에 비판적 입장이 각성되기 시작하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출처] 한국유학의 탐구 11-1 서학 전래의 초기과정과 유교사회의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