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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이외의 구단은 입단 거부한다.
주니치 이외의 구단에 지명되면 계약 안하고 사회인 야구팀에 가서
드래프트 재수를 해서라도 주니치에 가겠다.
아이치 현 출생.
아이치 츠츠지가오카 초등학교
아이치 야와다 중학교
아이치 현립 토코나메 키타 고등학교.
원래 고교까지는 포수를 보던 이 선수.
2학년 가을, 팀내 투수가 부족했고, 어깨가 좋다는 이유로 투수 전향을 했다.
고교 졸업 후 아이치 현의 일본 복지 대학에 진학.
일본 복지 대학은, 프로 선수를 1명도 배출하지 못한 대학이었다.
이 선수 역시 최고 138km를 던지는, 그저 그런 투수였지만
2학년 가을에 140km를 돌파하며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고
고향 지역의 주니치 드래곤즈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4학년에는 최고 152km를 찍으며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팀을 1부 리그 승격으로 이끌고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2006년 신인 드래프트. (대졸-사회인)
* 2005년을 시작으로 고교생 / 대졸-사회인 드래프트를 분류해서 시행한 NPB였다.
이후 3년간 유지되었다가, 2008년에 폐지된 제도.
진작부터 관심을 보여온 고향팀 주니치에 더해 세이부, 야쿠르트가 이 선수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 선수는 주니치 이외의 구단은 입단 거부한다며 나를 뽑지 말아달라고 했다.
만약, 주니치 이외의 구단에 지명되면 계약 안하고 사회인 야구팀에 가서
드래프트 재수를 해서라도 주니치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미리 진행되었던 고교생 드래프트에서는
라쿠텐이 타나카 마사히로를 뽑았고
히로시마는 마에다 켄타를 뽑았으며
요미우리는 사카모토 하야토를 뽑았다.
그렇게 고교생 다 뽑고나서 2달 뒤에 시작된 대졸-사회인 드래프트.
팀에서 러브콜을 보내면, 선수가 선택하는 [희망 입단 전형]에서
키시 타카유키가 라쿠텐과 요미우리를 거르고, 세이부에 입단했다.
그리고 주니치는 토요 대학의 포수, 타나카 다이스케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국대 포수 타니시게 모토노부가 이미 만 36세, 내년이면 37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여담이지만, 타나카 다이스케는 이후 2014년까지 타니시게를 밀어내지 못했고
타니시게는 만 44세까지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주니치의 홈 플레이트를 지켰다.
희망 입단 전형에서 전부 퇴짜를 먹은 팀만이 1순위, 2순위 지명을 할 수 있었는데
라쿠텐 이외에는 지명권을 받은 팀이 없었고, 3순위 지명부터가 사실상 본 지명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 와중에 2006년 센트럴 우승팀 주니치는 12팀중 11번째 순번이었고
이 선수의 거취는 이때까지 오리무중이었다.
응~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너 뽑을거야~
주니치 앞에는, 세이부 라이온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웬걸. 키시를 얻고 기분이 풀린 라이온즈 였을까?
아니면 애당초 블러핑이었던 걸까? 세이부는 야마모토 쥰이라는 사회인 투수를 뽑았다.
* 키시는 현재까지 통산 149승 방어율 3.07, 41완투 18완봉 2037.1이닝
커리어 로우가 방어율 3.80인, 기복없는 에이스 투수가 된다.
** 야마모토 쥰은 있는듯 없는듯 프로생활을 보내다가 몇년후 다시 사회인 야구로 돌아갔다.
요시 그란도 시즌! 주니치 드래곤즈 지명 합니다.
[아사오 타쿠야, 일본 복지 대학, 투수]
그렇게 고향팀 주니치 드래곤즈에 3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고
동시에 일본 복지 대학의 1호 프로 선수가 되었다.
입단 당시 181cm 70kg. 투수로 전향한지 5년. 제대로 된 웨이트 한 번 해본적 없다는 투수.
그러나 스프링 캠프에서 공을 직접 본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은, 1군에 곧바로 쓸 수 있겠다고 판단했고
2007년 4월 10일, 한신전에서 불펜으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선발-불펜을 오가며 테스트를 받다가, 후반기에 부상으로 시즌을 일찍 마감하여
주니치 드래곤즈 일본 제패에 직접적으로 힘을 보태지는 못했다.
1군 19경기(5선발) 4승 1패 1홀드 방어율 3.53, 51이닝 40탈삼진 20사사구
2년차는 부상의 영향으로 2군에서 시작했지만 빠르게 복귀했고
140km를 넘나드는 포크를 장착하며
베이징 올림픽에 차출된, NPB 최고의 마무리 이와세 히토키를 대신하여 팀 마무리를 맡기도 했다.
주니치의 시즌 성적은 3위로, 가을야구를 갔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우츠미 테츠야, 야마구치 테츠야, 스즈키 타카노리,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알렉스 라미레즈, 아베 신노스케, 그리고 이승엽...이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패배하며, 연속 우승은 이루지 못했다.
아사오의 시즌 성적은
44경기 3승 1패 12홀드 1세이브 방어율 1.79, 50.1이닝 35탈삼진 12사사구
3년차,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게 된다.
감독 오치아이는 아사오를 선발로 쓰고 싶어했고, 투수 코치 모리 시게카즈는 불펜이 맞다고 봤다.
이 개막전 선발은 선발로 실패를 하게 한 뒤, 불펜으로 고정 시키려는 모리 투수 코치의 충격 요법이었다.
근데 눈치 없는 아사오는 이 경기에서 8이닝 무실점으로 팀에 개막전 승리를 안겨주었고
어쩔 수 없이 아사오는 몇 경기 더 선발로 던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사오에게 선발은 맞지 않는 옷이었고, 이내 불펜 필승조로 다시 돌아온다.
7월에는 센트럴 리그 신기록인 월간 11홀드를 기록하며 월간 MVP를 수상했다.
시즌 막바지에는 부진에 빠진 이와세를 대신해 마무리를 맡기도 했다.
이 해, 주니치는 2위로 가을야구를 갔지만, 상대는 또 다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아사오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3차전에서 8회 말 블론을 하며 역전을 내주었고
또 다시 주니치는 요미우리를 넘지 못했다.
시즌 성적은
67경기(7선발) 7승 9패 33홀드 6세이브 방어율 3.49, 113.1이닝 96탈삼진 30사사구
4년차, 2010년부터는 완전히 8회를 책임지는 셋업 스토퍼로 자리 잡았다.
시즌 내내 좋은 모습을 유지하며, 주니치의 우승 경쟁에 크게 일조했고
9월 12일, 후지카와 큐지의 기록을 갱신하는 21경기 연속 홀드 달성했으며
9월 25일, 47홀드를 기록하며 일본 단일시즌 최다 홀드 신기록을 썼다.
또한, 구원 72경기 등판으로 구단 신기록을 썼으며
12승 3패 47홀드 1세이브 방어율 1.68, 80.1이닝 75탈삼진 11사사구 WHIP 0.87
아사오는 최우수 중간계투 상을 받았고, 주니치는 정규시즌 8번째 우승을 했다.
가을 야구, 아사오는 클라이맥스 2차전에 이와세를 대신해 마무리로 올라와 세이브를 기록했고
드디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누르고, 3년만에 다시 일본 시리즈 진출을 했다.
일본 시리즈의 상대는, 아니 어떻게 올라온거냐? 소리를 듣던 치바 롯데 마린즈.
롯데는 0.5게임차로 겨우 가을야구 막차를 탔지만, 세이부, 소프트뱅크를 차례로 격퇴시키고 올라왔다.
주니치 패승패승패로 롯데가 앞선 6차전, 8회말 1점차에서 올라온 아사오는
사부로에게 동점 적시타를 맞으며 블론을 했지만, 연장 15회까지 양팀 무득점으로 무승부가 되었다.
죽다 살아난 주니치의 벼랑 끝 7차전, 2-1로 뒤지던 9회 말.
거짓말 같이 폴랑코의 희생 플라이로 1점을 따라 붙으며 연장으로 가지만, 투수가 없었다.
7차전이고, 어제 연장 15회까지 갔으니까.
결국 오치아이 감독의 결정은 [아사오로 끝낸다] 였고
이미 9회를 던진데 이어 10회, 11회, 12회까지 아사오로 밀고 나갔다.
11회까지는 잘 틀어막은 아사오였지만, 12회 선두 타자 이마에가 볼넷을 골라나갔고
마찬가지로 투수가 없어 대타를 낼수 없던 롯데는 투수 이토가 희생 번트, 성공이었다.
다음 타자 사토자키는 잡아냈지만 2사 2루, 오카다 요시후미에게 역전 3루타를 허용하며
일본 야구 역대 최대의 하극상, 2010 치바 롯데 마린즈 신화의 조연이 되고 말았다.
2011년. 부상으로 빠진 타카하시의 영향으로 멀티 이닝 소화가 많아졌다.
그런가 하면 만 37세의 이와세를 대신해 마무리를 맡기도 했다.
그렇잖아도 어깨 부상도 있던 아사오였는데
선발도 오가기도 하고, 순수 불펜만으로 80이닝을 던지고...
이렇게 이리저리 굴려지며 혹사를 당한 아사오는 결국...
구원 79경기, 7승 2패 45홀드 10세이브 방어율 0.41, 87.1이닝 100탈삼진 17사사구 WHIP 0.82 / 피홈런 0
제정신 아닌 기록을 써버리고 최우수 중간계투는 물론 시즌 MVP, 투수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다.
(원래 투수 수비도 잘하긴 했다.)
마무리도 아닌 중간 계투가 시즌 MVP를 수상한건 일본 역사상 처음이었으며
당연히 지금까지도 처음이자 마지막인 채로 남아있다.
* 마무리로 시즌 MVP를 수상한 선수로는 1998년 사사키 카즈히로가 있다.
1승 1패 45세이브 방어율 0.64, 56이닝 78탈삼진 14사사구, +일본 시리즈 우승
아니 잠깐, 저 성적에 왜 마무리로 안쓰고 8회 계투인가? 싶겠지만
주니치의 마무리는 통산 407세이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와세 히토키였다.
당장 이 해에도 37세이브 방어율 1.48을 기록했다.
아사오가 워낙에 미친 기록이라 그렇지, 이 기록도 어디 내놔도 꿀릴 성적이 절대 아니다.
여하튼 2011년도 주니치는 정규 시즌을 우승했고, 아사오도 활약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 7차전 끝에 패배하며,
2010년대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조연이 되고 말았다.
2012년, 국가 대표에도 선출 되며, 연봉도 2억 6000만엔이나 받게 되었다.
그러나 스프링 캠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구속 감소에 시달렸고
시즌 들어서도 나아지지 않아 21경기 등판해 6실점.
절대 나쁜 성적은 아니었지만 아사오 치고는 컨디션이 별로라 2군으로 내려갔고,
부상이 발견되어 시즌을 정상적으로 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방어율 1.50에 15홀드를 달성했다.
이 해에도 주니치는 2위를 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승승승 패패패로 역스윕을 당하며 탈락했다.
*정규 시즌 우승팀 요미우리가 1승을 가진채로 시작했다.
이쯤되면 일본 야구 잘 모르는 사람들도 느낌이 올것이다.
주니치 드래곤즈는, 역사적으로도 만년 2위팀, 콩라인이었다.
2007년 우승이 없었다면, 1954년 이후 지금까지 우승이 없는 팀이다.
그렇다고 약팀은 절대 아니었다. 1936년 창단한 원년 구단이고
그때부터 이 당시까지는 단 한번도 비밀번호를 찍은적이 없었다.
2위만 26번을 했을 뿐.
2위만 26번을 했을 뿐.
2013년, 어깨 부상에 시달리며 시즌 절반을 보냈다.
7월 12일 복귀해서 34경기 2승 3패 22홀드 1세이브 방어율 1.47, 30.2이닝을 던지며 부활 하는듯 보였다.
그러나 2014년, 방어율 6.16을 찍으며 다시 재활군으로 돌아갔고
다시 2015년, 31경기 방어율 3.19, 16홀드로 또 살아나나? 했지만
2016년, 결국 어깨가 망가져버렸다. 아사오는 아직 만 31세였다.
그래도 꾸준히 치료와 재활을 이어갔고
2017년, 554일만에 1군에 나왔지만, 곧바로 다시 내려갔다.
그러던 10월 1일, 야쿠르트 전에 나와 홀드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3번째, 통산 200홀드를 달성한다.
2018년, 간간히 1군에 얼굴을 보였으나... 더 이상 예전의 그 아사오 타쿠야가 아니었고
9월 26일, 만 33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 한다.
9월 29일, 홈 나고야 돔에서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으며 현역 생활을 끝냈다.
아사오의 현역 마지막 공을 이어받은 투수는, 언제나 아사오의 뒤를 책임졌던, 이와세였다.
이와세 또한 같은 날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통산 1002경기 407세이브, 방어율 2.23의 기록을 남겼다.
드래곤즈의 불꽃 같은 남자, 아사오 타쿠야의 통산 기록은
416경기(12선발) 38승 21패 200홀드 23세이브 방어율 2.42, 505.1이닝 460탈삼진 156사사구
MVP 1회
최우수 중간계투 2회
골든 글러브 1회
2007 일본 시리즈 우승
아사오 타쿠야가 싸인을 거절하는 모습을 본 적있는 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항상 겸손하고 예의 바른 성격으로, 팀 선배들에게 인기있는 귀여운 막내였다고 한다.
2011년 시즌 MVP를 수상했을때의 소감은
내가 요시미의 승리를 2번 날려서, 요시미가 18승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원래대로면 20승 투수 요시미가 MVP다.
또한, 시즌이 끝나면 병원이나 아동 보호 시설 등에
기부를 하며 봉사활동을 자주 다닌것도 유명하다.
* 아사오는 일본 복지 대학의, 복지 경영 학부를 졸업했다.
드래곤즈의 불꽃 같은 남자, 아사오 타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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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크…
줜나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