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라 진출 이전의 공간구조
이부곡토성은 상주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된 토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대 토성은 국가의 발생, 지방 지배 등을 말해줄 수 있기때문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국 고대 국가의 형성 논의에서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는 ' 城邑國 家'論역시 城을 전제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백 182 ) 은 성읍국가를 " 나지막한 구릉 위에 토성을 쌓고 살면서성 밖의 평야 지대에서 농경에 종사하는 농민들을 지배해나가는 정도의 것"이라고 하였다.
즉 삼한의 '國'들을 성읍국가로 파악한 것이다 183 ). 이부곡토성의 축조 연대는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만으로단정하기는 어렵지만 4세기 이후 신라에 의해 축조되고, 신라의 지방 지배와 관련 있다고 판단된다. 다만,유구·유물의 출토상이 빈약하지만 이부곡토성내.외부를비롯하여 엄암리 토광묘,병성동수혈주거지와 추정 공방지 를 비롯하여 복룡동과 화개동그리고 성동동에서도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는 유구·유물이확인되었다.
즉, 당시 이 일대에 철기문화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재지세력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따라서 이를 전후한 시기에 자연지리적인경게184 ) 에 바탕을둔 상주분지 내에 복수의 쥐락으로 구성된 '지역 정치체' 185 )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186) 이를 바탕으로 보면 신라 진출 이전, 엄암리 토광묘를 축조했던집단을 중심으로 지역 정치체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파악되며,당시의 공간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같다.
< 그림 2 > 에서 지형적으로 이부곡토성이 위치한 성안산 ( 171. 4 m ) 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릉성 산지와 북쪽의 산수골을 지나 토광묘유적이 위치한 엄정마을 주변으로형성된 해발 120 m 의 구릉성 산지 일대로 구분되고, 모두 동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구릉 말단부까지 이어지고 경작지 ( 사벌들. 넓은 충적평야 )가 형성되어 있다.이 일대는 북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는 모습으로 방어에 유리한 요충지이면서 주요 교통로를통제할수 있고, 그 지역을 동제할 수 있는 중심지에 해당한다. 또한 이 일대에 삼국시대 이전 유물 ( 후기무문토기, 와질토기.와질토기. ) 이 城 아래쪽, 구릉 하단부에 넓게 집중적으로분포하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지역 사회. 지역 民 의 주거 공간이 現 이부곡토성 아래, 그 인근에 분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오 늘날에도 이곳은 자마을이 입지하며,주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반면. 서쪽으로는 바로 산 정상부에서부터 급경사를 이루는 곳이 많으며, 구릉 말단부는 동천과 바로 인접해 있다. 그리고 북천, 병성천, 동천유역에 의해 형성된 평야를 한 눈에 바라 볼 수있는 곳이다. 따라서 상주분지의 중앙, 이부곡토성이 위치한 성안산(171.4 m)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릉성 산지는 하천변의 나지막한 구릉지로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충적지를 향해 열려 있고, 주변 일 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당시' 지역 정치체'의 중심지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이해 된다. 즉, ' 城' 의 존재 유무를 떠나 이곳은 입지적으로 생업 활동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방어 하기에 유리한 지역이고, 이부곡토성 내부에서도 당시 유구·유물들이 확인됨으로지배자 집단의 생활공간으로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분묘공간은 토광묘가 확인된 복동쪽 속칭'바람밭고개' 일대, 피지배자 집단의 주거공간은 다수의 유물이 산포하고. 경작지와 분묘 공간 인근에 해당하는 평지가 아닌 산기슭, 구릉 말단부 일대로 공간구조를 파악하고자 한다. 한편, 당시의 교통로에 대해서는문헌기록 187 )과 이 시기 상주지역의 고고학 자료를 통해 살펴 보면다음 과 같다 .
앞서 살펴본 엄암리 토광묘에서 무문 토기 와 주머니호 등 이 수습되었고, 병성동 고분군내 B - 1 호 수혈유구에서 원형점토대토기 , 조합식우각형 파수부호 , 주머니호 등이 출토되었다. 영남지방에 국한된 특징적양상으로서 원삼국토기 한 유형인 와질토기의 분가드 중부지역에서 확인된 곳은 진천188) 과 청주189)로 ,토광묘 의 형태나 유물상으로 보아 영남지방의영향을 받았음 은 분명한 것같
다 . 이는 상주지역의 금강수계 루트를 통해 영향을 받았던 것 으로 볼 수 있다 .
따라서 와질토기 문화 의 중원 지역 확산 경로는 낙동강 수계 의 상주분지에서 금강수계 의 화령분지 - 보은 - 청주 - 진천 간 동서로 연결 되는 문화통로 를 상정할 수 있겠다.
< 그림 14 > ① 진천 송두리 유적 출토 유물 ②청주 테크노 폴리스 유적 V - 2 지구 2 호
그리고 상주 양범리 유적 190) 과 그 인근의 문경 신기동유적 191)에서 확인 된 주거지의 형태나 유물상 으로 보아 중부지방의 영향 을 받았음은 분명한 것 같다 . 이는 상주 지역 의 남 한강 수계루트를 통해 영향 을 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따라서 중도 유형문화의 상주 지역 확산 경로는 남한강수계의 충주에서 계립령 을 넘어 문경-점촌.함창 분지-상주 분지간 남-북으로 연결 되는 문화통로
를 상정할 수 있겠다.
< 그림 14 > ① 상주 양범리 134 유적 ( 대동 2009 ). ② 문경 신기동 740 유적 ( 대동 2015 )
이러한 상주지역의 문화교류양상은 소백산맥 鞍部의 고갯길을 통해 선사시대부터활발하게이루어지고 있었으며 192 ), 삼국시대로 이어지면서 그 중심에 있는 상주지역은신라가호서지방 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다. 즉, 역사지리적으로 상주지역은 영남과호서를좌우 로 구분하는데, 각기 大嶺 을 통과하는 관문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양측 세력의 接點地帶 가 될 수 밖에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2. 신라 진출 이후의 공간구조
신라는 자연지리적 경계에바탕을 둔 각 지역 據點 을 확보하면서 點狀 의 영역 확장과 방어.거주민에 대한 통치기능을수행하는 治所城(군사와 행정을총괄 )을 체계적으로 축조하였다.그 렇지만 이때 거점의 형태가 반드시 산성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낮은 구릉의 토성과 같이 주 변 지역을 제압할 정도면 충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신라의 초기 토성 으로 경산 임당토성 193 ), 대구 달성 194 ), 대구 화토성 195 ), 양산 순지리 토성 156 )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城 은 일부 석재가활용는 경우가 있지만, 주재료로 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은 土城 이다. 각각의 고고학적 조사가 충분하지 않아 성벽의 축조법과 변화 양상 그에 따른 축성 시기(특히 초축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상충하고 있다. 그러나 성의 위치와 대략적인 성벽 축조 기법,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적어도 5세기 무렵에는 초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축성 입지를 살펴보면, 넓은 평야 중심에 비교적 큰 하천을 주위에 두고 比高는 크지 않으나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을이루는구릉상에 위치한다.
따라서 성에서는 일원 아우르는 조망이 탁월하고,성을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충적지를 관리하기에 유리하다. 성 주변의 구릉 말단부와 충적지는전통시대이래로 주거지 또는 경작지로 활용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경주 월성 (둘레1.8 km)을 제외하고는 성벽 둘레가 약 1~1.3 km 내외로 유사한 양상이다.이러한 입지 선택과 축성 규모, 그리고 토축 성벽의 축조는 신라 초기의 보편적인 축성 양상으로 파악 된다. 그리고 이 성들은 해당 지역을 방어하는 군사 거점임과 동시에 지배의거점으로 기능한것으로여겨진다197),
< 표 2 > 신라 지방 ( 영남지역 ) 의 주요 초기 토성
연번 입지 둘레 ( m ) 비고 성벽 구조 축조연대 1 2 3 대구 화원토성 대구 달성 경산 임당토성 상주 이부곡토성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 ( 171.4 m )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 ( 75.2 m )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 ( 69.8 m )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 ( 80 m ) 양산 순지리토성 낮은 산지 ( 213 m ) 약 960 약 1,000 약 1,300 약 950 약 1,239 100 m 내외 50 m 내외 30 m 내외 30 m 내외 100 m 내외 성토 다짐. 영정주 간격 130 cm 성토 + 판축 혼용?, 영정주 간격 80 cm 성토 다짐, 석축 ( 계단식, 붕괴방지 ) 성토 다짐, 석축 ( 계단식, 붕괴방지 ) 성토 + 판축 혼용?, 영정주 간격 100 cm 5 세기 무렵 5 세기 이전 4 세기 중엽 4 세기 중엽 5 세기 무렵따라서 이부곡토성은5세기무
렵 신라의 상주 사벌지역 진출에 따른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治所城(군사와 행정을총괄)으로 파악되고, 신라의 영역 확장과 방어, 거주민에 대한 통치기능을 수행하는 지방 지배와 관련 있다고 판단된다.
이는 신 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으로 주변국을 복속해 나가는 일련의 「 三國史記 」 기록과 일치하며 198 ), 상주분지내초기정치집단과 지배 - 피지배 관계에 놓이면서주요교통로를 장악하고, 그 지역의 중심부에所城 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신라 진출 이전과 비교하였을 때, 당시의 공간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사벌지역 일대의 고고학적 환경은 그 지역을 통제할 수 있 는 중심부에 이부곡토성이위치하고, 城 에서 남동쪽으로 약 2 km 떨어진 곳에 화달리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 구릉 말단부 일대에 삼국 ~ 조선시대에해당하는 유물산포지가 넓게 확인되었다. 특히, 이부곡토성 남쪽의 흔곡마을 남쪽 일대에는통일신라시대 사지 및 인화문토기편이 수습되는 등 부분적으로 공간구조의변화가 확인된다.따라서 신라는5세기 무렵 사벌지역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기존 재지세력의 중심부에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는 이부곡토성 (治所)을 축성함으로서 통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이곳은 입지적으로 사벌지역 중앙에 위치하여 일대를 아우르는 조망이 탁월하고,외부로부터 방어하기에 유리한지역으로 지배자 집단의 통치 공간. 지배 거점으로 활용되었음을짐작할 수 있다. 이후 城 밖으로 새로운 분모공간 (학달리고분군)이 조영되는 등 이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자리잡은것으로 판단된다.그리고 피지배자 집단의 주거공간은 당시 유물이 넓게분포 하는 경작지 (천변 평지)와 분묘공간 인근에 해당하는 구릉 말단부 일대로 이곳은 현재까지 주거공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어느 시점부터는 화달리고분군이 위치한 두리봉산 (117.1m)남쪽 평지 (화달리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흔곡마을 남쪽구릉지(낙상동 사지및 패탑)등에 종교시설이 들어서는 형태의 공간구조가 상정된다.
한편, 이부곡토성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병풍산성은 입지상 상주분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 는 곳으로 내륙간 수운과 육상 교통로가 교차하는 곳에 있어 이들을 감시하고, 관측할 수 있 는 군사적 요충지에 신라에 의해 전략적으로 축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벽은 곡부를 포함 하여 성내 수원을확보하며,북쪽과 남쪽에 성문을 조성하였다. 성문 양쪽과 성벽 회절부 등 우취약 지점에는 토석혼축 (혹은 석축)의 협축으로 높고 두텁게 축조하여 견고성을 높였고,돌출부들 조성하여감시성을높었다.
그리고 두 봉우리 사이 중간지점은 유수가 집중되므로 집수 지를 만들어 성벽을 보호하고,성벽 통과식 수구 통해 배수 등제반 시설은 기본적인 구조를 갖춘 것으로 추정해 본다.이러한 축성은 5세기 후반199)신라 석축산성의 기본적인구조와 동릴하다. 즉, 5세기 후반 삼국은 접경지 200 ) 를 중심으로 대치하게 되면서 방어력이향상된 군사 거점이 요구되었고, 이는 석축산성의 축조로이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南進 대응 및 北進策 의 일환으로 상주지역 인근 소백 산맥 내외 변경 거점지역을 중심으로석축산성(北 - 문경 고모산성, 北西 - 상주 견훤산성, 西-보은 삼년산성, 南西 - 옥천 이성산성)을 축성하였다. 특히 자비~소지마립간 시기 (5세기 후반 )에는 소백산맥의 고갯길 넘어 三年山郡 ( 보은 ). 古同郡(영동), 答達 ヒ 郡 (상주화령). 古尸山郡 (옥천) 沙伐州 관내 변경지역에많은城 들이 집중적으로 축성되었다 < 표 1 의 3 ~ 6 >.
이러한 산성들은 5세기 말 신라의 (서북부지역) 국경 방어선으 으로 금강 상류역으로의본격적인 진출이라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沙伐州 관내 변경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거점 구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상대(고구려 ·백제)지역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로 중요하게 인지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성들은신라가금강•남한강 유역권으로 진출하는 6세기 중엽까지 201) 전진기지의 역할을 하였던것으로 파악 된다.
이후 변경지역 배후의거점지역 즉, 이미 확보한 안정화된 영역 에서도 군사적 방어 및 행정적운영 체계의 재편 등에 따른 축성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202 ). 따라서 병풍산성은 이러한배경으로 축성되었으며, 그 시기는 5 세기 후반 沙伐州 관내 변경지역의 방어체계가 완성되는시점이후, 6 세기 전반 203 ) 으로 추정하고자 한다.
다만, 아주 배제할 수는 없지만 병풍산성을治所城 으로 이용하였는가에는 의문점이 남는다. 병풍산성의 경우 비고가200m이상으로 성내외의 접근성은 이부곡토성에 비해 불리한 편이고, 가파른 내부 경사지로 인하여 공간적 활용에 제한을 가진 산성으로 일반적인 생활 공간보다는군사적목적이 더 크게 고려된 것으로판단된다. 즉, 상주분지의 치소성으로이부곡토성을 그대로 계속유지하면서 배후에 병풍산성을 둠으로써 군사적 기능 강화 및 유사시 ' 입보' 개념의 이원적인 구조로 이해 하고자 한다. 종합하면, 이부곡토성과 병풍산성은 신라에 의해 축성되어 상주사벌지역의중심지로 기능 하였음은분명해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사벌지역의중앙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양호한 이부곡토성은 행정적 기능이, 그 배후에 해당하는 상주분지 동쪽 경계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병풍산성은군사적기능이 좀 더 우세한 城 으로,양자가보완 관계를 이루며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사벌지역의 운영 · 관리의 중심으로 역할을한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州治 는 대외 정세 변화에 따라 사벌주에서 감문주, 다시 일선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통일 후 685 년 (신문왕5) 에 지방행정구역을 9 주 5 소경으로 정비하고, 687년(신 문왕7) 에 광역행정구역으로 사벌주가 재설치 되었다. 그리고 기존 州治 였던 산성(이부곡토성·병풍산성)이 아닌 평지( 분지형 입지조건을 갖춘 현 상주시 중심부 ) 에 里坊區劃된핵심구역 (중앙부에 동서폭120m 인 변형구획을두고,동·서로각기 일변 150m씩기본단위로하여 4 방 배치 →9×9坊)과 주변부.그 배후에 자산산성이 어우러진 신도시를 조성하였다.
이는 이상적인 도시건설을추구하였던 신문왕의 계획에 따라 기존 시설에 거의 제약이 없이 신도시를 건설함으고써 삼국을 통일한신라의 정치적 권위 발산과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위해서 하나의 체계적인 공간구조가 구현되었을 것이다 204).
IV. 맺음말
본고는 상주분지에 위치하는 이부곡토성과 병풍산성 그리고 주변의 고고유적의 기 연구성과룰 통해 지역 정치체의 형성과 변천에 따른 공간구조의 변화를 검토하였다.그 결과, 상주분지에 해당하는 사벌지역은 고대로부터 이일대의 중심지로 이용되었는데, 엄 암리토광묘를 축조했던 집단을 중심으로 지역 정치체가형성되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당시의 중심지는'城'의 존재 유무를 떠나 이부곡토성이위치한 나지막한 구릉지로추정하였다.이곳은 사벌지역 중앙에 위치하여 일대를 아우르는 조망이 탁월하고, 외부로부터 방어하기에 유리한 곳으로 지배자 집단의공간으로 활용되었고, 분묘공간은 속칭 ' 바람발고개' 일대,피지배자 집단의 주거공간은경작지와 분묘공간 인근에 해당하는 평지가 아닌 산기슭 (구릉말단부) 일대로 공간구조를 파악하였다.
한편, 당시의 교통로에 대해서는 와질토기문화의 중원지역확 산과 중도유형문화의 영남지방 확산을 통해 상주지역의 금강수계루트 ( 동 - 서 문화통로 )와남한강수계루트 ( 남 - 북 문화통로)를 상정하였다. 이러한 문화교류 양상은 상주지역이관문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양측 세력의 接點地帶 가 될 수 밖에 없는지정학적 위치에 있다는것이다. 이후 5세기 무렵 신라가 상주 사벌지역을 재편하는과정에서 기존 재지세력의 중심부에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는 이부곡토성을 축성함으로서 지자 집단의 통치공간 · 지배거점으로 활용하였고, 새로운 분묘공간을 조영하는 등 이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城 의 축조는 신라가 영역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새로운 지역애 진출하면서 군사 거점을 구축, 다시 새로운 지으로의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으며, 사방의 교통로를 따라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정한 영역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5 세기 후반 접경
지를 중심으로 강력한 적과 대치하기 위해 방어력이 향상된 군사 거점이 요구되었고,이는 석산성의 축조로 이어졌다.
또한 이미 확보한 안정화된 영역에서도 군사적 방어 및 운영 체계의 재편 등에 따른 축성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이는 병풍산성의 축성배경으로 판단하였다. 다만, 병풍산성은 비고가 200 m 이상으로 성 내외의 접근성이 불리하고, 가파른 내부 경사로 인하여 공간적 활용에 제한이 있는 산성으로 일반적인 생활공간 보다는사적 목족이 더 크게 고려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상주분지의 治所城 으로 이부곡토성을그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배후에 병풍산성을 둠으로써 군사적기능강화 및 유사시'입보' 개념의 이원적인 구조로 이해하였다.
한편, 이곳은 신라의 삼국통일후 기존 州治였던 산성(이부걱토성•병풍산성)이아닌 평지(분지형 입지조건을 갖춘 현 상주시 중심부)에 里坊區된 핵심구역과 주변부,그 배후에 자산산성이 어루러진공간구조로 변화하였다.그 시기는687년(신문왕7)무렵으로, 이는 상주의 도시공간구조 근간을 형성한 시기로 이해된다.즉, 지역의 성산구조는 정치체의 형성과 변천에 따라 어느 시점부터 파괴되고, 각 시대의 공간구조장식이 구현되었을것이다.
아직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매우미진하기에현재까지의 조사 연구된내용만으로 공산구조를 명확하게 제시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실정이다.결국 명확한 고소자료를 제시하지못하였고, ?불확실한 정보와 판단에 기초한 부분이 있다. 향후 이 지역에 대한 좀 더 많은정밀한 발굴조사가 진행된다면보다 실증적으로 그 실페에 대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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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李盛周, 2004, 「 技術, 埋葬儀禮, 그리고 土器様式 」 「 韓國考古學報 」52.p.124.
181).김진형,2012,「상주지역~ 6 세기 분묘의 축조 추이 」 「 5 ~ 6 세기 고분문화와 古代尙州」상주박물관.
182) 李基白, 李基東, 1982, 「 韓國史講座 」 I . 一潮閣, p. 40 ~ 41.
183)박성현, 2007. 「 4 세기 전후 신라의 토성 축조와 그 목적 - 영남지역초기 토성의성격-」「한국사연구」139.p.2.184 ) 상주는 자연지리적으로 볼 때. 상주분지와 소백산맥의 지맥에 의해 구분되는 북쪽 함창분지. 백두대간을 경계로 서쪽 화령 · 중모분지로 구분되며. 신라는 통일기 이후 상주분지는 沙伐州一尙州, 함창분지는 古冬攬那一古寧郡, 화령분지는 答達ヒ郡 → 化寧郡 중모분지는 刀良縣 → 道安縣 으로 각각 편제된다.
185 ) ' 지역 정치체 라는 의미는 일정한 지리적 범위 안에서 상호 작용을 한 복수의 단위들의 존재를 전제로 그 단위 들은 대외적으로는 자치적이면서 내부적으로는 일정한 정치적중심지를 가진 복합적 단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일컫는다 ( 李熙濬. 2000. 「 대구 지역 古代 政治體의 형성과 변천 」「 嶺南考古學」 26. p. 86.
186)대체로 振·弁韓 에서 소국의 성립시기는 서기전 2 세기 말에서 1세기 초 이후로 보고 있다 ( 李熙濬, 2000.「 삼한 소국 형성 과정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의 틀 - 취락분포정형을 중심으로 ~」 「 韓國考古學報 」第 43 輯, p. 117 ).
187 ) 영남 - 호서지방 간 교통로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특은 계립령 개설 기사와 죽령로 개설 기사가 있다 ( 156 년 4 월 서리가 내리고 계립령의 길을 열다 < 「三國史記 」 券 第二 新羅本紀 第二阿達羅 尼師今三年 夏四月 隕霜 開雞立嶺路>: 158 년 3 월 죽령을 열고, 왜인이 예방하다 <「 三國史記 卷 第二 新羅本紀 第二阿達羅 尼師今 五年 春三月 開竹嶺 倭人来聘 >).
188)忠北大學校博物館(車勇杰•趙祥紀).1991.「鎭川松斗里遺蹟發堀調査報告書」
189)(재) 호서문화유산연구원,2015, 7г청주 태크노플리스 조성사업부지 내 유적(v지구)발굴조사 완료 약보고서」.
190 ) (재)大東文化財究院,2009, г尙州 良凡里134遺蹟」.
191)(財)大東文化財究院, 2015.「聞慶 新機洞 740遺蹟」.
192)상주 복룡동 256번지 유적에서청동기시대 전기 장방형계주거지 3동과 후기 원형주거지(동천동식)2동이 확인되었다(영남
문화재언구원, 2008.「尚州 伏龍洞 256 番地遺蹟 」
193)嶺南文化財硏究院. 「慶山林堂洞遺蹟 1 - F, H 地區및土城-」
194)대동문화재연구원.2016.3.「달성토성정비•활용시범사업부지 내 유적 시굴조사약보고서」.
195 ) 서라별문화재면구원, 2018.6.「 대구 낙동가람 수변 역사누림길 조성사업부지 내 유적발(시)굴조사 약보고서」.
196) 東亞大學校博物館, 1983. 「 梁山蓴池里土城 」.
197) 박성현, 2007, 앞의 논문 : 최관호, 2022. 「 대구 팔거산성 축성의 특징과 - 의의성」.「신라의 지방거점 대구 팔거산성」
198)상주분지에 위치한 산성들은 남북방향으로는 3번 국도가 이어지는 쪽으로양호한감시권을 보인다. 남북방향으로는 감문국으로 비정된 김천지역에서 상주분지로, 동서방향으로는소문국으로 비정된 의성지역과 일선군의 선산지역에서 상주분지로 진출한 것으로 파악된다(박달석,2020,앞의 논문).
199)「삼국사기」의 축성기사를 바탕으로 신라의 축성사를 6기로 구분하고, 각 시기별양상을 살핀 연구에서 5세기 후반에 신라 석축 성곽의 典型이성립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여기에서 살핀 5세기 후반 신라석축성의 구조는 그 이전과 이후의변화를 이해하는 기준이된다. 특히6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는 성벽 규모가 축소되는 변화를 보인다고 지적되었다.(車勇杰2008.「신라 석축산성의 특징」.「石堂論嶪」.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0)이곳은 신리 입장에서는변경 방어와 중요 거점이다. 동시에 향후 한강과 금강유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되는 요충지이다.
201 ) 신라는 관산성 전투 승리로 대전과 금산지역까지진출하였고 (「 三國史記 」 百濟本記 」 第四 聖王 三十二年 ,「 三國史記 」 新羅本紀 第 四眞興王十五年)남한강유역진출은「三國史記」新羅本紀 第四眞興王條'十八年 以國原爲小京(557년 충주를 소경으로삼
았다)'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202)6세기 이후 신라 석축산성 성벽 구조가 변화하는 근본 원인은 신라의 급격한 영토 확장으로 신속한 축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성벽 규모가축소되었다. 그러나 동일 구조의 산성이 다수 축성된다는 점에서 산성본연의 기능과 목적은 충족한 것으로 이해된다 (최관호, 2022. 앞의 논문 ).조
203)이 시기 병풍산 일대 고분군의 출토유물이 청리나신흥리에 비해 두드러진 현상은 경주나 의성지역으로부터 고배,대부장경호 등 以東様式의 주요 기종이 많은 양 수입되어 매장의례에 사용되고 (이성주, 2004, 앞의 논문).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신라계의 단각고배로 거의 통일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현상은 전체 상주지역고분군에서 동시에 확인되는 것으로 이 시기에 상주의 각 지역 고분군 묘형이 통일되는 것으로 생각된다.(김진형. 2012. 앞의논문). 또한,「 三國史記 」에 의하면, 상주를 중심으로 525 년(법흥왕12)上州가 설치되고,軍主라는 지방관이 파견 되었伐州다고 한다. 즉, 6 세기 전반은 신라의 상주지역에 대한간접지배단계에서 직점차 직적지배로전환되는 시점으로 이해할 수있다.
2004)朴達錫,2012. 「 統一新羅時代 沙 沙伐州 伏龍洞聚洛과 地方都市構造 硏究 」,釜山大學校 大學院 石士學位論文.박달석,2020, 앞의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