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사도행전(25) 스크랜턴 선교사(3)
스크랜턴은 시병원의 이름을 영어로 ’Universal Hospital’이라고 번역했다. 이 베풀시(施)자의 시병원은 인류애의 은덕을 널리 펴서 가난하고 병든 조선의 백성을 고쳐주고 구제해서 잘 살게 하고자 하는 스크랜턴의 마음과 그에게 그런 시혜(施惠)를 기대하는 당시의 고종 임금과 조선 조정, 그리고 조선 백성의 염원이 함께 녹아 흐르는 강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선 여성을 위하여 여성 전용 병원을 개설하다.
당시 조선에는 여성 환자가 남자 의사가 진료하는 병원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어 여성들이 거의 병원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스크랜턴 (W. B.
Scranton) 박사는 이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여성들만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병원 설립기금을 보내달라는 청원을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 선교부에 제출하였다.
이것이 승인이 되어 같은 해 10월에 미국 감리교 여의사인 하워드 (M. Howard)가 내한, 서울 정동(貞洞)에 있는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이런 의료사업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뜻으로 이 병원에 ‘보구녀관(普救女館)’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처음 10개월 동안 하워드 여의사는 1,137명을 치료하였고, 다음 해에는 1,423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이런 일들이 그녀에게 과로를 가져와서 건강을 해쳐 2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하워드의 후임이 오기까지 이 보구녀관은 스크랜턴 의사가 약 1년 동안 돌보았다.
1890년 10월에 하워드의 후임으로 셔우드 (R. Sherwood )가 내한하여 처음 10개월 동안에 무려 2,350명의 여자 환자를 치료하였고 그 밖에 82명에 대한 왕진을 실시하였으며 35명을 입원 치료하게 하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벌였다.
조선인 여성 의사를 양성
셔우드 박사는 여성 환자들을 돌보기 위한 여성 의료 인력의 현지화 사업에 착수하여 조선에서는 최초로 여성 의사의 양성을 위한 의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먼저 이화학당 학생 4명과 일본 여인 1명으로 의학훈련반(Medical Training Class)을 조직하고 이들에게 기초적인 의학훈련을 시켰다.
이런 훈련의 열매로서 이 중의 한 사람인 김 에스더(흔히 박 에스더라고도 부름)는 1896년 10월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라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The 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의학 수업을 받고 1900년에 이 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김에스더는 귀국 후 정동에 있는 보구녀관과 평양의 감리교 의료기관에서 일하면서 한국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과 여성의 지위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