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0. 주일오전예배 설교
호 4:6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여러분,
지난 시간에 우리교회가 속한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이 나오게 된 배경까지를 들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돌아가시면서 이런 생각을 하신 분들이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합동측이 개혁주의교회라고? 개혁주의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우리교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데, 개혁주의 교회라고? 또 혹 우리교회 카페의 지난 주 설교를 읽은 다른 교회 성도들도 말도 안돼? 무슨 합동측이 개혁주의교회야? 라고 화를 내신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지난 주일 설교는 개신교 기독교가 나오게 된 배경과 그 안에 교회들이 여러 종파 교단으로 나뉘게 된 배경, 그리고 그 여러 종파 중에 개혁주의 교회로서 역할을 하는 교단이 어딘가? 하는 정도를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속한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의미가 무엇이고, 합동측이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는지는 알아야겠지요. 지난 주 설교는 그 정도 설교라고 보면 됩니다.
사실 우리교회는 합동측에 속해 있지만, 여느 합동측 교회와는 다릅니다. 왜 우리교회는 다른가? 꼭 달라야 할 이유가 있나? 왜 다른 길을 가는가? 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교회를 선택하고 다닙니다.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은 구원만 받으면 되지 뭐가 문제 될 게 있어? 이런 식 사고입니다. 이것은 실제로는 그냥 살기만 하면 되지 어떻게 살든 뭐가 문제야? 라는 식과 같습니다. 길거리 노숙자도 살아 있고, 감옥에 있는 범죄자들도 살아있습니다. 중요한 건 살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도 살기만 하면 그만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구원만 받으면 되지? 무슨 교단이 중요하고 무슨 교회냐가 중요해? 나만 잘 믿고 나만 구원받으면 되지? 그런 식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아주 많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제가 개혁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관심도 없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다같은 교회지 무슨 개혁교회만 바른교회야? 다 같은 하나님 믿고 다 같은 성경을 믿는데, 우리만 왜 맞다고 하는 것이야? 이런 반감을 가지고 매일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합니다. 그냥 목사가 떠드는 소리 정도이지 나의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한 우리의 신앙선배과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우리의 선배들은 이 개혁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고, 유럽에서 머나먼 신대륙으로 이주했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삶의 터전을 다 버리고 개혁신앙을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개혁신앙과 개혁교회를 하는 교회에 속했으면서도 이런 간절함과 자부심이 없이, 다른 교회와 다 같은 교회지? 다른 교회는 구원이 없나 하면서 이런 반론을 제기할까요? 제가 오늘은 그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복음주의
우리는 지난주에 개혁주의 교회는 크게 보면 두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대륙의 개혁교회와 섬나라 영국의 장로교회가 그것입니다. 이 두 개혁주의 교회의 특징은 교회의 신앙고백서가 있다는 점입니다. 신앙고백서는 무엇을 믿는가?하는 점을 나타낸 것입니다. 왜 이 신앙고백서가 필요한가 할 때, 한 성경을 보지만 전혀 다르게 해석해서 다르게 적용하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해서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의 특징은 신앙고백의 교회입니다. 다시 확인합시다. 대륙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는 몇가지입니까? 크게 보면 3가지입니다. 물론 그 밖에도 제네바 신앙고백서, 프랑스 신앙고백서 등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만, 우리교회는 교회가 연합하기 위한 3가지 신앙고백서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로 받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가 그것입니다. 섬나라 영국도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자 이제 우리의 시선을 우리나라 교회들 먼저 우리교단 소속의 교회로 돌려봅시다. 교회 홈페이지를 살펴봅시다. 우리교단에서 유명한 서울의 모교회를 보시면 여기는 장로교라는 영어 단어 presbyterian이라는 단어도 아예 없습니다. 거기다 어디를 찾아봐도 이 교회의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없습니다. 단지 많은 부분은 목사에 관한 내용과 선교에 관한 내용,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입니다. 고작 있는 내용이 공통체 고백문 정도입니다. 분당의 또 다른 교회는 교회의 4대 비젼이라는 내용은 있지만 신앙고백문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우리 교단이 아닌 감리교회나 다른 교단으로 가서 홈페이지를 봅시다. 여의도에 있는 모교회 홈페이지를 보았습니다. 이 교회도 메인에 목사님 설교나 교회 프로그램이 나옵니다. 교회소개에는 목사님과 섬기는 분들, 그리고 교회 비젼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신앙고백문은 없습니다. 이 교회는 독특하게 신앙고백같은데 순복음 신앙이라고 해서 몇가지 써 놨는데, 장로교회의 비젼과 크게 다를바는 없습니다. 서울의 감리교회의 홈페이지를 보았습니다. 제가 감리교회는 어디가 대 표적인지 몰라서 그냥 인터넷 검색란에 감리교회를 치니 서울의 한 감리교회가 떳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비젼을 사명이라고 이름만 바꾼 정도입니다. 세상을 기름지게하고, 주님이 주인되는 교회, 믿음이 자라가는 교회, 은총의 숲을 이루는 교회라고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이 교회도 신앙고백서는 없습니다. 이 교회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명확한 문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들의 홈페이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국의 교회들은 신앙고백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중심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목사입니다. 특히 그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교회의 비젼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 교회의 비젼이 아니라, 담임목사의 목회철학과 비젼입니다. 그러니 그 담임목사가 바뀌면 그 비젼도 사명도 다 바뀝니다. 담임목사가 바뀌면 그 수하에 있던 부교역자들이 바뀌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이것은 마치 정치권과 같습니다. 정권을 잡은 대통령의 철학과 비젼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부동산정책이나 복지정책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면 그 수하의 장관들도 다 바뀝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목사가 교회를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사실 우리교회도 제가 개혁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으니 개혁교회를 지향하지, 다른 목사가 오면 또 다시 바뀔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런 식이 되면 교회가 아니라, 사람의 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불변인데, 계속 그 말씀의 해석이 목사 한 사람이 바뀔 때마다 해석의 방향이 바뀐다면 어떻게 성경이 변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 교회들의 홈페이지를 보시면 자신 교단만의 색깔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장로교든, 감리교든, 성결교든, 기장이든, 통합이든, 합동이든 교회이름만 다를 뿐 이 교회가 어느 교단소속인지 교회 소개란에 나오지만, 교회의 특징은 다 같습니다. 다들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세상에 소망주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청년과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는 교회 뭐 다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성도들이 개혁주의 교회라는 장로교회 합동이나 기장이나 통합이나, 아니 더 나아가 알미니안 계통의 감리교회나 성결교회나 오순절이나, 재세례파 계통인 침례교나 별반 차이가 거의 없으니 어느 교회 다니든 무슨 상관이냐?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신앙고백이 흐릿하니 교리가 없어지고 목사의 철학과 비젼만 남았는데, 그것은 어느 교단이나 거의 비슷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 신앙고백 때문에 목숨과 삶의 터전을 버렸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주의교회 또는 복음주의를 알아야 합니다. 이 복음주의를 알기위해서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합니다.
지난 시간에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을 사람의 이성으로 재단한 것입니다. 이성으로 판단하고 성경을 하나님이 쓰신 책이 아니라, 그 당시의 문학이나 사회상에서 나온 산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예수님의 행적중에서도 기적이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만든, 즉 종교를 형성하려면 의례 그런 식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 뿐입니다. 마치 단군신화처럼 단군을 신적존재로 만들려니 마늘을 먹었다는 둥, 곰이 사람이 됐다는 둥 하듯이 성경도, 예수도 그런 식이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신화화해야 한다고 합니다. 좀 어려운 말이지요. 비신화화. 예수님에게 있는 신화적인 것은 다 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에 살았던 한 인간일 뿐인데, 신적 존재로 만들기 위해 신화화했다는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빼내자는 것이 비신화화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낮아지신 것입니다. 여기서 진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Geschichte)는 낮아지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낮은 곳을 보는 목회, 낮고 천한 사람을 돌보는 교회, 이것이 바로 성신육적 목회고, 성육신적 교회다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실제 부활했다는 역사적 사실(history)로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바로 역경, 내가 도저히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다.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 부활의 의미다.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낮아지셨듯이, 여러분들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성육신입니다. 또는 여러분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벗어나서 새롭게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지금 이 시대에 다시 경험하는 것입니다. 는 식 설교말입니다. 이런 설교들이 다 자유주의자들의 설교입니다.
어찌됐든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해서 나온 것이 근본주의입니다. 근본주의가 무엇을 핵심으로 하는 지를 말씀드리면 그것이 자유주의의 반대로 나온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크게 다섯가지를 핵심으로 하는데, 성경무오(축자영감),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의 부활, 예수님의 재림이 그것입니다. 다 자유주의자들이 이성으로 재단해 버린 기적이나 성경의 축자영감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를 양 극단이라고 하면서 중용을 지키자 하면서 나온 것이 바로 복음주의입니다. 복음주의는 교리와 신앙고백이 아니라, 그것은 메마르고 분당을 일으키는 것이니, 그것을 이제 그만두고 개인의 영성과 경건과 회심, 그리고 복음전도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리가 만든 양극단을 피하고 경건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가 정확히 가운데 중용은 아닐지라도 양 극단을 피하자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C.S. 루이스가 그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도 밝혔듯이 중용은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의 책 내용 악마가 그의 수하에 있는 환자에 하는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환자에게 만사에 중용을 지키라고 말해 주거라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해 놓으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란 우리한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무교보다 훨씬 더 즐겁지
여러분들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적당히 믿어야지. 교회는 내가 직장에서 일하듯이 죽을똥 살똥 믿지 말고 여가생활정도로 단지 주일에 가는 종교 활동일 뿐이야. 적당히 믿어. 뭐든지 적당히 해. 이런 식입니다. 우리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은 모든 중심이 교회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대화의 90%이상이 교회이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는 대화의 90%는 정치와 아이들 공부와 직장에서 돈과 자신의 여가 활동입니다. 교회는 나머지 10%도 되지 않습니다. 사실 적당히 믿으라고 하지만, 적당히도 믿지 않습니다. 교회에 관심이 없고, 설교에, 성경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집에서 읽습니까? 기도하십니까? 이번주에 배운 말씀을 다시 생각하고 그러한가 생각하십니까?
어찌 됐든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켰습니다. 그들의 핵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1) 믿음과 실천의 유일하고 최고의 규범으로서 성경이 가지는 완전한 권위,
(2) 성령으로 거듭남의 필요성,
(3)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한 구원을 믿음
(4)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할 책임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제가 복음주의의 특징을 말씀하니 아주 좋은 것이네 할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다, 거듭남 회심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 복음 전파 아주 좋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숨은 함정을 잘 보아야 합니다. 중용은 무교보다도 더 나쁜 것입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은 교리나 신앙고백서 말고 성경만 보자는 것입니다. 교단과 교파로 나눠진 것이 교리나 신앙고백이니 그런 것은 다 버리고 성경만 보자는 것입니다. 참 그럴싸합니다. 성령의 거듭남 회심이라는 것도 참 좋은 말같습니다. 그런데 회심을 무엇으로 증명하냐고 할 때 그들은 주관적 체험입니다. 체험을 강조합니다. 회심은 성령께서 해 주시는 것이지 언제 선택하고 예정되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회심한 그 시간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속죄사역도 그 속죄 사역의 범위 즉 그 속죄 사역이 적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예정이 아니라, 사람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말과 행동으로서 복음전파는 어떤식으로 복음을 전할 것인가?하는 것이 빠지고 일단 복음전파라는 목표만 남았습니다.
여기서 보듯이 복음주의에서 빠진 것이 많습니다. 구원론이 빠졌습니다. 선택과 예정문제가 없습니다. 교회론도 없습니다. 어떤 정치체제가 맞는가? 성례론도 없습니다. 언약의 표로서 유아세례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재림에 대한 논의도 없습니다. 전천년설인가 후천년설인가 무천년설인가? 등의 문제도 없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뺀 것은 이것이 논쟁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논란이 되는 문제는 다 뺐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관적 경험과 체험 그리고 경건, 어떤 식으로든 회심과 믿음과 전도입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이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교회들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믿는 개혁파, 아르미니우스파, 침례파, 루터파, 영국 국교회파, 세대주의파, 만인 구제파, 은사파, 오순절파뿐 아니라 이런 전통들이 혼합된 많은 독립 교파들입니다. 지난 주에 배운 개혁주의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거나 분리된 교회들이 다 같이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찬송을 무슨 찬송을 하든, 예배당에 무슨 악기를 놓든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서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연예인이 강단에 서든, 강단에서 무슨 말을 하든 좋은 말을 해서 듣는 사람이 감동해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도 교리나 신앙고백이 아니라, 자신이 성경을 읽고 깨달은 내용이 복음적이고 좋은 말이면 됩니다. 성경해석은 교리문답이나 교리나 신학에 의한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나의 주관적 깨달음입니다. 그러니 그 교회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성경과 그 교회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목사의 철학과 비젼, 목사의 신학적 지향입니다. 장로교회라도 목사가 복음송을 좋아하고 방언등 은사를 좋아하면 그 교회는 그런 교회를 지향합니다. 그 목사가 나가고 다른 목사는 전도를 중시하면 그 교회는 전도가 목표가 됩니다. 객관적이고 항구적인 교회의 고백이 없고 교리가 없으니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교회가 아니라 목사가 다스리는 목사의 철학과 비젼을 펼치는 장일 뿐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가든 나만 구원받으면 됩니다. 개인주의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설교나 프로그램, 음악을 통해서 어찌하든지 믿게하고 회심하게만 하면 됩니다. 교회는 교리나 신앙고백이 중요하지 않으니 진리의 판단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어느것이 얼마나 더 효과적이고 실용적이냐에 달렸습니다. 전도집회에 연예인을 세우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연예인으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고 잠시라고\도 설교를 듣게 한다면, 연예인 없이 목사가 설교한답시고 아무도 오지 않는 것 보다 훨씬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도가 되었으니까 그러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교리나 신앙고백을 통한 옳고 그름의 문제로 논쟁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교회의 분열을 일으킬 뿐입니다. 교리나 신앙고백같은 객관적 증거가 없어도 얼마든지 나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선택이든 예정이든 그것은 내가 몰라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경건하게 생활하고 체험하고 믿고 있느냐입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그런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 신앙과 내 구원에 뭔 상관이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실제로는 하나님 말씀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축소시킵니다. 복음주의는 경험과 체험중심이다 보니 반지성주의입니다. 그래서 복음주의교회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교리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교리보다 삶이 우선입니다.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순종만 하면 되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교리나 신앙고백이 없으니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체험과 경험, 감정과 활동입니다.
한국 교회의 홈페이지를 보면 왜 세상과 이웃에 빛이 되는 교회, 땅끝까지 선교하는 교회, 섬기는 교회라는 식으로 되어 있는지 이제 이해 하실 것입니다. 어느 교단이나 교회나 다 같습니다. 메인은 목사의 설교고 나머지는 교회의 비젼이나 사명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교회의 비젼이나 사명이 아니라 목사의 비젼이나 사명입니다. 목사의 목회철학정도입니다. 그 목사가 바뀌면 그 홈페이지도 다 바뀌고 철학도 비젼도 바뀌고 부교역자도 다 바뀝니다. 객관성이 없습니다. 객관적 영구한 신앙 고백이 중심이 아닙니다. 복음주의의 특징입니다. 복음주의는 복음을 축소시키고 소비자 중심으로 바꿨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주의 교회이니 복음성가를 부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왜 한국의 모든 교회가 복음성가를 부를까 의아했습니다. 이제 그 답을 찾았습니다. 한국의 교회들은 다 복음주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교회이니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무슨 찬송을 부르든 그게 나의 구원과 무슨 관계입니까? 내가 그 찬송을 불러서 기분이 좋고 감정이 고양되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만 아닙니까?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에서는 장로교든 감리교든 오순절이든 다 같습니다. 다 같이 복음성가를 부르는 복음주의교회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 안수가 그리 뭐가 중요합니까? 그게 내 구원과 관련됩니까? WCC에 들어가는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게 내 구원과 관련됩니까? 그런 소리 열 번 하는 것 보다 나가서 전도 한번 더 하라고 소리치는 목사도 있을 것입니다. 사탄의 계략은 성공했습니다. 교회의 색깔을 없애버렸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를 없애 버렸습니다. 믿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냐 아니냐라는 내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지만 진리의 말씀이 진리가 되는 것은 나에게 그것이 적용되고 체험되고 경험되느냐입니다. 핵심은 나입니다.
왜 우리는 개혁주의의 개혁교회로 가는가?
성도여러분, 복음주의의 특징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만 보자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주장인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이 말과
” 한 여자가 여기 있습니다“ 라는 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전자는 하나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후자는 한 여자하면, 우리의 생각에서 제외되는 것이 있습니다. 동식물이 아니라는 것과 남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여기 있는 한 여자는 다른 의미로 해석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아내로, 엄마로, 딸로, 며느리로, 작은 엄마로, 큰 엄마로, 직장 상사로, 부하직원으로, 범죄자로, 또 많은 사람에게는 전혀 모르는 의미없는 한 사람일 뿐으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여기 있는 한 여자를 대할 수 있습니다. 여기 있는 한 여자를 보면 그것이 다 보입니까? 아니지요. 여기 있는 한 여자 자체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대하는 사람, 그 여자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여자를 다양하게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여자 자체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해석과 의미부여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설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그 설교하는 사람의 해석, 의미부여를 듣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칼빈주의로, 또는 개혁주의 해석방법으로 성경을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자신은 그런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과거의 산물이니 자신은 성경만 보고 해석한다고 합니다. 사실 그 말은 성경을 내 맘대로 해석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목사들이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는 이미 신학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의 신학적 배경과 지식으로 이미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지, 그런 것이 전혀 없이 성경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성경만 중요하다고 하면서 왜 신학을 공부하고 외국에까지 가서 공부했다고 자랑합니까? 다 설교하지 왜 목사만 설교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칼빈주의로 해석하자, 개혁주의로 해석하자, 신조를 바탕으로 해석하자 하면 아주 잘못인 양 두드러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나는 개혁주의니 뭐니 칼빈주의니 뭐니 그런 것 아무 필요없이 성경말씀으로만 해석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서재에는 아무 것도 없어야지요. 오직 성경만으로 설교한다고 하니. 성경만 있어야 하는데 온갖 책들은 다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나 개혁주의 해석은 잘못이고 그 책들을 참조하는 것은 올바른 것입니까? 이것이 다 무엇이냐면 개혁교회를 모르고 제 마음대로 좋은게 좋다는 식의 복음주의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개혁주의나 칼빈주의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합니까? 첫째는 성경을 해석할 때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계시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설교자에게 이 설교 본문은 이런 내용이다라고 직접 계시를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럼 설교자는 그것을 해석할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 여러 도구들 중에 가장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가장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하나님나라 중심적이고 언약적이며 구속사적인 설교가 개혁주의 설교방식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왜 장로교회 목사들이 목사임직서약을 할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서를 받겠다고 서약하는 이유가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방식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서약만 하고 실제로는 전혀 그 교리대로 설교도 하지 않고 교회를 세우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장로교회인데도 장로교회가 아닌 오순절 순복음이 되고 감리교가 되기도 하고 성결교회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제가 참 듣기 거북한 말씀이 잘나간다는 목사들이 신학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미국에서 박사학위 다 받아왔다고 자랑하면서 신학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성경해석은 개혁주의니 뭐니 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지식이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학위자랑을 합니다.
우리는 목사에 의해 좌우되는 교회를 세우면 안됩니다. 내가 이 교회를 떠나도, 이 교회는 신앙고백안에서 변함없이 전진하고 그 고백안에서 설교하기에 저와 다른 설교가 아니라, 저와 같은 연장선장의 설교가 들려져야 합니다. 목사의 목회철학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설교되어지고 세워지는 교회여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호를 맞추고 무식하게 만들어도 내 체험과 경험이 있고 활동만 있으면 좋은 신앙이라고 추켜세우는 교회를 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인 장로교회이고, 또 개혁교회이니 그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른 장로교회라는 교회들이 복음주의교회로서 방향을 틀고 교회의 신앙고백서는 뒷전으로 한 채 목사의 철학과 비젼을 마치 대단한 것인 양 떠들고 큰 무리의 교회로 나간다해도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서도 부러워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개혁주의 개혁교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축소하고 자신의 기호에 맞추는 복음주의 교회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그런 말을 드린 적이 있지요. 저는 주변의 교회같은 교회를 세우려고 했으면 처음부터 신학교를 가지 않았다고요. 저는 처음에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었어도 교회를 신앙고백의 터 위해서 세운다는 의미를 전혀 몰랐습니다. 개혁주의 개혁주의 했지 실상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개혁주의에서 떠나지 않았고, 주님께서 조금씩 조금씩 더 밝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설교만 개혁주의 설교한다고 개혁주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순서도, 찬송도 기도도 그리고 우리의 생활도 다 개혁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결혼도, 가정도, 학교에서의 생활도 다 개혁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따로 찬송따로 기도따로가 아닙니다. 힘든 여정입니다. 그러나 우리시대에 다 못했다고 낙망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바른 길을 반듯하게라도 그어 놓으면 됩니다.
복음주의교회는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과 삶의 터전을 버리면서까지 지켰던 신앙고백과 복음의 정체성을 버리거나 최소한으로 축소시켰습니다. 복음주의 교회의 사람들은 이것이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성공적이냐를 따집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결국 사탄에게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의 신앙고백으로 정죄된 무리들을 정통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사탄은 더 이상 피흘리지 않고도 강단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숨바쳐 외쳤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은 이제 박물관에 소장된 골동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여전히 그 골동품을 끄집어 내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복음주의 교회가 아니라 개혁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인 개혁교회야 말로 바른 교회이며, 하나님을 온전히 증거하고 섬기는 교회입니다. 이 시대는 더욱더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그 터 위의 신앙으로 바르게 분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