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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익산의 역사와 문화
디카 황 추천 0 조회 113 18.05.02 11: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益山의 歷史와 文化

 


이 석 한

 

Ⅰ. 益山의 自然 環境


 

1. 韓半島 最大의 平野인 湖南平野의 北半部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역인 호남평야의 핵심부로서 호남평야는 좌우로 군산시와 완주군, 아래로는 김제시

 

와 정읍시 및 부안군으로 이어짐. 옛부터 익산시 중심지역은 沃野라 일컬음. 산지는 24% 이므로 약 80%가

 

평야임. 농경지 중 논밭의 비율은 약 85:15임. 김제, 옥구와 함께 한국 최대의 대표적 논농사 지역.


 

2. 江

 

◇ 금   강: 부곡천(낭산천): 용안, 용동, 낭산, 망성면 일대

            

               함열천:성당,용안,함라, 함열읍 일대

           

               여산천:여산면일대 기타:웅포면

 

◇ 만경강: 서-오산천 탑천 :오산, 황등, 함라, 삼기, 팔봉동일대

               

                남-목천천 이리천:시내 남부지역, 춘포면일대

               

                동-익산천(옥룡천,우북천):금마, 왕궁면 일대

 

 


3. 山

 

◇ 노령산맥 : 천호산( 500M ) 미륵산( 430M )

 

◇ 함라산 (240M ) 능선

 

※호남평야: 미륵산과 황등제. 모악산과 벽골제. 두승산과 눌제


 

Ⅱ. 익산의 歷史


 

1. 선사 및 청동기시대


A. 구석기 시대

B. 신석기 시대

C. 청동기 시대


 

 

2. 삼한시대

 

◇ 馬韓 54개국 辰韓 12개국 弁韓 12개국 총 78개국

 

◇ 익산 지방에 있던 나라: 乾馬國(금마) 如來卑離國(여산) 感奚國(함라) 兒林國(낭산) 不斯 邪國(봉동,왕궁)

 

◇ 三國志 魏志 韓傳

 

고조선의 말왕인 準王이 燕나라에서 들어온 위만의 침공을 받아,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바닷길로 달아나

 

韓의 땅에 와서 스스로 韓王이라 칭하였다.

 

◇ 帝王韻紀. 東國通鑑

 

箕準王이 이미 위만에게 침탈당하고 그 좌우궁인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닷길로 한땅금마군에 가 살면서 자

 

신이 한왕이라 했다.

 

◇ 新增東國輿地勝覽. 金馬志

 

후조선의 준왕은 기자의 41대 손으로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타고 남쪽 한지에와서 나라를 개국하고

 

마한이라 이름했다.

 

◇ 應制時註. 我邦疆域考

 

준왕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금마군에 이르러 마한을 개국하고 소국 52개국을 거느렸다. 目支

 

國은 익산이라.

 

◇ 海東歷史

 

마한 54국은 지금의 경기도 이남에서 충청 전라의 땅으로 그 총왕은 辰王이라 칭했는데, 지금의 익산군이

 

다.


 

 

3. 삼국시대( 백제 )

 

A. 金馬渚:백제의 마한지역 정복후

 

기타 只良肖縣(여산)甘勿阿縣(함라)所力只縣(이리)閼也山縣(낭산)于召渚縣(봉동.왕궁)


B. 武王과 善化公主

 

◇三國遺事 武王條: 무왕의 이름은 장인데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관계를 맺어 무왕을 낳았다. 아이때 이름은 薯童이다. 그는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또 그는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서동이라 이름하였다.

 

◇薯童謠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얼려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武王의 익산 遷都說

 

서거정:益山題詠『濟國遺墟空老樹』김정호:大同地志『今益山 武王置 別都於此』

 

중국 육조시대의 觀世音應驗記『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新營精舍以貞觀13年』

 

미륵사 창건. 미륵사탑. 왕궁평. 대관사.제석사지


 

4. 통일신라 시대

 

◇報德國(674-684) 안승과 고구려 부흥운동 금마저→금마군

 

◇9주5소경-완산주아래 금마군. 沃野縣(이리). 野山현(낭산). 紆州현(왕궁,봉동)

 

※礪良현(여산)은 德殷군에 속. 咸悅현은 臨陂군에 속

 

◇후백제(900-935)와 견훤

 

고려사 태조 19년조『黃山군에 이르러 炭嶺을 넘어 馬城에 주둔했다』

 

 

 

 

5. 고려시대

 

◇5도 양계 12목. 전라도의 全州牧에 속

 

금마군.朗山현.옥야현.우주현.여량현.함열현.※풍제현(월경지=비입지)

 

◇우주현,풍제현은 고려초 전주목에 예속, 옥야현은 1200년경 전주목에 예속된 것으로 추정

 

◇충숙왕 8년(1320) 함열현의 道乃山銀所 출신 伯顔夫介가 공을 세워 龍安현이 됨. 공양왕3년(1391)풍제현

 

병합.

 

◇금마군→익주로 승격(충혜왕 1344년)

 

國子典酒인 李行儉의 딸이 기자헌에게 출가. 기자헌의 둘째딸이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의 황후가 됨. 기

 

씨 일가가 세도하고 기황후의 외가라 하여 익주로 승격. 이행검은 三韓王으로 봉함.

 

◇왜구의 침략

 

우왕 2년(1376) 6월 낭산, 용안에 침입. 우왕 3년(1377) 10월 함열현에 침입

우왕 4년(1378) 9월, 10월 익주에 침입. 우왕 6년(1380) 8월 鎭浦싸움. 최무선

우왕 10년(1384) 2월, 14년(1388) 5월 진포 침입


6. 조선시대

 

◇ 태종13년(1413): 익산군(←익주)

 

礪山현(여량현+낭산현+공촌部曲+피제部曲)

 

세종18년(1436) 원경왕후의 외향으로 여산군으로 승격하여 충청도에 편입. 숙종 25년(1699)단종비 정순왕

 

후의 본관이라하여 여산부가 됨. 고종32년(1895)에 다시 여산군 함열현 용안현

 

※우주현은 전주부에 소속되어 廢縣, 옥야현은 전주부의 속현이다가 폐현,

 

◇ 임진왜란(1592-1598)시의 의병

 

▷이보. 소행진

▷오응정. 오욱. 오동량. 오직. 오방언- 삼세오충렬사

▷탁상

 

◇ 익산민란(1862, 1893)

 

◇ 한말 의병투쟁 (1905-1910) 이규홍. 조재영. 김용국. 송태식. 김근배. 정동식


◇ 고종32년(1895):23부제 실시 全州府에 익산군, 함열군, 여산군, 용안군이 속하게 됨.

 

◇ 고종33년(1896)전라도를 전라남북도로 나눔.

 

◇ 고종36년(1899)전주부 소속이던 옥야지역이 익산군에 편입되고 우주지역의 우북면(현 왕궁면의 동부)

 

도 편입


◎ 漕倉

 

고려

   

 ◇ 鎭城倉 - 임피군(성산면 창오리)

      ※왜구침입으로 만경강가의 옥야창(배산 남쪽 옥창산), 이성창(현 김제군 청하면 신창)이 생김

 

조선

  

◇ 德城倉-용안현(현 용안면 용두리,창리) →세종(1428)함열현 피포(현 웅포면 고창리)→성종(1482)  득성

 

               창(용안  용두리,창리)     ※조운선 63척

  

 ◇ 군산창-중종 7년(1512) 군산노인성창. 현재의 전라북도 군산시 경암동에 있었다. 1512년(중종 7) 영산

 

                  창(榮山倉)을 혁파하면서 용안(龍安)의 덕성창(德成倉)을 옮겨 설치했다. 덕성창 소관지역과

 

                  법성포창 소관 일부지역의 세곡저장과 수송을 맡았다

 

 ◇  羅巖倉-인조때 여산에 설치(현 망성면 화산리 나암) 군산창과 함께 운영되다가 성당창으로 이관

 

 ◇  성당창-  1662년(현종3)   함열현 진포에 설치(현 성당면 성당리 성포)    

   

용안에 있는 덕성창을 함열의 피포로 옮겼는데, 이는 토사가 퇴적하면서 물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러

 

함열의 피포 역시 포구로서 적합하지 않아 1482년(성종 13) 다시 용안으로 옮기고 이름을 득성창이라 했

 

다. 17세기 중엽에는 함열에 성당창을 새로 설치했다


 

성당창(聖堂倉)

성당창에 대한 기록은『조선왕조실록』영조 1년(1725년) 4월에 남원 유생 박시도가 성당창에 세납하는 괴로움을 말하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성당창의 위치는『여지도서』에 “성당창이 함열현에서 북 20리에 있다.” 고 기록되어 현재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를 지칭함을 알 수 있다. 성당창은 금강의 지류인 난포천을 사이에 두고 과거 용안읍성 득성창의 포구였던 난포보다 약간 더 금강과 가까운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성당창은 군산창과 함께 조창운영에 대한 관리상의 문제로 두 조창 통합의 논의가 지속되다가 고종 32년(1895)까지 운영된 후 폐지된다.

 

 

 

◎ 烽燧

 

순천(돌산도)----부안(계화도)-옥구(花山)-임피(五聖山)-임피(佛智山)-함열(所方山)-용안(廣頭院山)-은

 

진(강경대)-----서울(목멱산)



◎ 옥야현

 

◇동일면(익산시내 동부, 춘포면). 남일면(익산시내 중심부). 남이면(오산면 남부 부근). 서일면(오산면 중

 

            심지). 북일면.

 

◇고려중기이래 전주목에 예속, 조선태종(1413)이래 전주부의 속현이었다가 폐현.

 

◇고종(1899) 전주부 소속에서 익산군에 편입.

 

◇ 裡里-솜리. 속마을. 남일면 소속의 마을. 구릉을 따라 散村(구시장-주현동-갈산동)

 

◇1899년 군산 개항이후 전주와 군산을 왕래하는 휴게소 및 숙박지. 화물과 여행자 증가. 일본인들의 진    출 (만경강 유역의 개척)

 

▷1903 익산금융조합

▷1908 동척 이리지점

▷1909 임익 수리조합 창설 이리 사무소(전북농조의 효시)

▷농장(1900-1910): 眞田농장(오산) 細川농장,今村농장,田坂농장(대장촌) 大橋농장(이리) 森谷농장,片桐농장(황등)


 

 

7. 일제 침략 시대

 

◇1911 익산 군청이 군내면에서 남일면의 이리로 이전 이리 번영조합:이리 건설 시작 ▷1912 강경-이리 이리-군산 이리-김제 철도개통

 

◇1914 익산군 여산군 함열군 용안군이 병합: 익산군( 지금의 익산시 영역이 이루어짐) 면 폐합에 따라 옥야지역은 익산면(이리,동산리,마동리,목천리,석탄리,대장촌리,금강리,신흥리).오산면.북일면등3개면이 됨.

이리-전주 우편철도 개통

 

▷1918 조선식산은행 이리지점

▷1920 대아 저수지 착공 益沃수리조합 발족(全益+臨益+臨沃+臨益남부)

▷1922 대아저수지 완공. 우리나라 최초의 경지정리 사업

▷1924 만경강의 직선 개수공사 시작 1976년 완공

▷1926 익옥 수리조합 공사가 거액투자로 수리문제 해결(오늘의 익산시의 모습이 이루어 짐) 

▷1931 익산면이 읍으로승격, 동년11월 이리읍으로 명칭변경 당시 이리읍인구 약1만 5천

▷1938 상수도 시설. 이리방송국(J.B.F.K)개국→1945 H.L.K.F→1959전주방송국으로 이전

 

◇ 교육기관

 

▷1912 이리 공립 소학교(중앙초등학교)

▷1913 이리 공립 보통학교(이리초등학교)

▷1922 이리 공립 농업학교(이리농고, 익산대)

▷1924 이리 공립 고등여학교(이리여중고)

 

◇ 3.1독립 만세운동(1919)


 

 

8. 해방이후

 

◇ 1947. 4 . 1.이리읍→이리부

◇ 1949. 8.15 이리시로 승격. 익산군으로부터 완전 분리

◇ 1948 도립이리농과대학→1952전북대 농과대학으로 이관→1963전주로 이전

◇ 1951 국립 전북대 공과대학 →1974 전주로 이전

◇ 1951 중앙대학교 이리분교 (문리대, 상경대, 정치대) →1954 본교로 통합

◇ 1953 원광대학 설립

◇ 1961 기독교 이리방송 개국

◇ 1963 황하면이 충남으로 편입

◇ 1970 용안면에 용동 출장소 설치→1986 용동면 승격

◇ 1974 이리공단 완공(수출자유지역, 귀금속단지)

◇ 1977 이리역 폭발사고

◇ 1979 함열면이 읍으로 승격. 군 청사를 함열읍으로 이전

◇ 1995. 5. 10 도농 복합 형태의 익산시 탄생


 

Ⅲ. 익산의 文化


 

1. 익산의 文化財 一覽

 

국가지정 문화재

★전라북도 지정 문화재


 

2. 익산의 儒學과 宗敎

 

◇여산동헌: 척화비

◇향교: 익산향교(금마) 여산향교(여산) 함열향교(함라) 용안향교(용안)

◇서원: 화산서원(금마) 화암서원(금마) 죽림서원(강경읍 황산동)동산서원(동산동)

◇사원: 50여사원. 숭림사 보광전(웅포면).

◇천주교:16개교당. 화산천주교회(김대건 신부와 나바위 성당)1897.

◇개신교: 400여교당

◇원불교: 22개교당. 소태산과 총부 및 원광대학교.


 

3. 익산의 名勝古蹟

 

◇ 杯山

※ 배산의 7가지 별명

 

상봉

 

첫째, 봉우리가 마치 면류관 덮개가 비틀거리는 모습 같아서 어떻게 보면, 구슬끈이 갈라진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連해 있어 마치 구슬을 꿰 놓은 것 같다하여 聯珠山.

 

둘째, 산의 푸른 비취색이 하늘에 이어져서 사시절 그 색이 변하지 않는고로 柏山

 

셋째, 산의 암석들이 천질, 백질 층층이 쌓여 있어 마치 곡식 가마니를 쌓아 놓은 것 같다 하여 尺山.

 

넷째, 옥야현때 이 산의 주봉이 되었다 하여 沃城山.

 

다섯째, 산이 평야지의 한가운데 솟아 있어서 마치 옥배가 금반위에 있는 것 같다하여 杯山

 

하봉

 

첫째, 중국의 하우씨때 9년간의 대 가뭄이 있어 이곳을 근거로 치수를 다스렸다하여 禹靈臺.

 

둘째, 산의 반석이 평평하여 가히 만인이 같이 놀수 있다 하여 樂巖

 

◇彌勒山

 

천호산의 일지역이 서쪽으로 뻗어 龍華山과 미륵산을 형성하였는데, 본래는 이두산은 합쳐 용화산이라 부

 

르다가 지금은 구분하여 부른다. 북쪽으로는 황산벌이요, 남으로는 멀리 호남평야를 바라보고 있고, 이곳

 

에서 발원하는 여러 하천이 만경강의 상류를 이룬다. 이산의 최고봉은 雲祭峰이라 하고 조금낮은 앞산은

 

장군봉이라 하는데 장군이 투구를 쓴 것 같다고 하여 巖(투구바위)이라도 한다. 뒷쪽 봉우리는 高峰이라하

 

여 중계탑이 있는 곳이다. 이산의 상부 동기슭에 미륵산성(기준성, 금마저성)이 있고, 미륵사지, 사자암, 심

 

곡사등이 있다.


 

◇雙陵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 고적조에 「쌍릉은 오금사 봉우리 서쪽 수백보 되는 거리에 있다. 고려사에 후조선

 

무강왕과 왕비의 능이라 하였는데, 속칭 말통대왕의 능이라 한다.일설에는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

 

동(마동)인데 말통은 마동이 변한것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능은 고려 충숙왕 16년 3월 왜구의

 

노략질로 도굴된바 있고, 일제시대에 목관은 서울로 이송되었다. 북쪽능은 대묘(대왕묘) 남쪽것은 소묘(소

 

왕묘)라 하는데 주민들은 이곳 을 앵뫼(왕묘)라 부른다. 현재 이능은 고조선 준왕의 남천설과 결부되어 청

 

주한씨들이 그들 의 조상의 능으로 받들고 석물을 갗추고 묘역을 꾸며 매년 시제를 지내고 있다. 바로 오른

 

 

편의 연동마을에 서동의 어머니가 집을 짓고 살면서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서동을 낳았다는 그 연못인 마

 

룡지와 서동이 마시고 살았다는 용샘이 있다.




◇황등제(腰橋湖)


일명 허리다리로 불리우며 옛 삼국시대에 황등산과 도치산을 막은 1300 m 의 제방으로 제 구실을 하였을

 

때는 황등에서 망산리까지 요교호라 불린 큰 호수가 있었으며 나룻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고 한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의하면


( 김제의 벽골제 고부의 눌제 익산의 황등제는 모두 큰 저수지로써 나라의 한 지방에 큰 이익을 주는 저수

 

지로 엣날 나라에서 온힘을 다하여 쌓은 것이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으나… 이 세 저수지를 다시 쌓아 놓으

 

면 노령 이북은 영원히 흉년이 없고 만물이 소생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또 노령이북이 영원히 흉년이 없게

 

되면 온나라 만세에 큰 이익이 되는 것이다. 이나라 조세의 거반이 호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4. 익산의 民俗


 

 

◇이리 우도 농악


호남의 우도 농악에 속하며 1950년대에 송학동의 이수남, 김형순씨등이 각동을 돌면서 뜻을 같이한 20여명

 

의 농악 동호인을 모아 계를 조직하여 시작되었다.정식으로 이리 농악대를 조직하고 정월 걸립굿으로 1년

 

간의 농악단 운영비를 마련하였다. 1981년부터 김형순이 단장을 맡아 전북 농악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

 

1983년 전국 농악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1985년에 다시 대통령상을 받아 그해 중요 무형문화

 

재로 지정 되었다. 이리 농악은 가락이 비교적 느리고 감칠맛이 있으며 쇠가락과 춤이 구성져서 호남 우도

 

농악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김형순씨가 농악, 설장고의 기능보유자로 활동하며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향제 줄 풍류


익산지방에 전승되는 絃樂 靈山會想의 별칭으로 기악 편성이 형악기 중심으로 이루어진 풍류를 말한다. 풍

 

류는 잔 가락이나 잔 기교가 없이 스스로의 흥을 돋우는 연주이기 때문에 그 분위기가 엄숙하고 딱딱하여

 

배우는 사람들 조차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였다. 가곡, 가사, 가야금, 풍류에 능한 강낙승씨가 1968년

 

에 익산 정악원을 창립하고 풍류를 더욱 발전 시켰다. 향제 줄 풍류 가야금 부문 기능보유자는 강낙승씨고,

 

장고기능 보유자로 이보한씨등 이 있어 그 맥을 잇고 있다.




◇삼기 목발의 노래


삼기면 오룡리 검지마을에 전해 오는 노래로, 농사를 지을 때 일꾼들이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풀고, 농

 

사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흥을 돋구는데 부른 농요의 하나이다. 이 노래는 주로 초동들이 산에 올라 벌초를

 

할 때 무덤 둘레에서 놀았던 것으로 민요춤을 동반하는데 그 노는 시기는 겨울과 이른 봄에 행하여졌다.

 

발 농요는 풍물에 맟추어 부르는 자진방아 타령, 만두레 타령, 타작노래, 방아타령, 작대 기에 맟추어 부르

 

는 산 타령, 지게 목발의 노래, 작대기 타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타령은 대개 메김소리와 받음소리로 구

 

성되는데 이러한 구성을 통하여 노동의 일을 덜어주고, 노동의 작업을 노동작업의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는

 

데 활용되는 놀이이다. 박갑근의 노력으로 재현되어 1972년 전국 민속 경연대회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

 

하고 1977년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익산 旗歲拜 놀이


금마 지역에 전승되는 민속놀이로 다른말로 農旗歲拜라고도 부른다. 정월 대보름에 여러 마을의 농기들이

 

모여 상호간에 세배를 교환하고 후에는 한 무리가 되어 농악과 기놀이, 무용등을 하면서 마냔 즐기는 행사

 

이다. 대개 12개마을이 참가하였으며 전날밤, 마을 당산에 농기를 세워 놓고,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12개마을은 형제의 서열이 관례에 따라 정해지며 맏형 마을의 小洞旗가 11개 아우마을을 돌면서 맏형마을

 

로 인도한다. 광장에 모인 11개 아우마을 소동기들은 先上마을(맏형에 대하여 정중한 세배를 교환하고 즐

 

거운 농악놀이와 기교적인 놀이로써 형제간의 우의를 다지는 의례행사이다. 즉, 12개 마을이 합동으로 진

 

행되어 지역사회의 협동심과 친목을 굳게 결의하는 崇農행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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