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위대한 예표, 다윗
다윗은 구약 성경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아니 성경 전체에서 그 축을 이루는 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윗은 역사적으로도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룬 왕이며 하나님의 언약의 정점을 찍은 인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아들”이라 불릴 만큼 다윗은 그리스도의 계보에서도 중요하고, 그리스도의 예표로도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위대한 교리를 발견하고, 그의 글에서 매우 중요한 예언들을 발견하며, 그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한다. 또한 그의 생애는 모든 성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교훈과 지침과 방향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는 다윗의 열심을 배울 수 있다. 고통 가운데 지친 사람은 다윗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주 안에서 싸우고자 하는 자도 다윗에게서 힘을 얻을 수 있다. 찬양하고자 하는 자,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고 싶은 자, 가치 있는 삶을 찾기 원하는 자, 그 외에 어떤 자라도 다윗 안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임과 동시에 성도들의 예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계보에 따르면 다윗은 예수님의 조상이며 위대한 왕이지만 처음부터 그리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14대손이며 이새의 8번째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는 그냥 평범한 목동이었다. 그 평범한 소년 목동이 어떻게 해서 인생을 역전하여 왕이 되었는가? 그것도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말이다.
1. 다윗의 등장, 배경
성경에서 다윗의 이름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곳은 룻기의 맨 끝 절인 4:22인데, 거기에선 룻이라는 여인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조상이 된다는, 계보의 중요성만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갈 뿐, 다윗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사무엘상 16장에서 시작된다.
사무엘상하는 “사무엘”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책이지만 사실 사무엘은 저자도 아니고 이 책 전체의 주인공도 아니다. 이 책의 시작은 사무엘이 주인공이지만 곧 사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얼마 안 되어 주인공은 다윗으로 교체되어 끝까지 간다. 사무엘상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골고루 등장하지만 사무엘하에서는 다윗이 홀로 주인공이 된다. 다시 말해서 사무엘의 책은 그 내용상 “다윗의 책”이 되는 것이다. 사무엘상 15장까지는 다윗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여주고, 그것은 다윗이 등장해야 하는 당위성을 보여주는 배경이 된다.
다윗이 나타나기 전 이스라엘의 영적, 정치적 상황은 암울했다. 정치적으로는 재판관 삼손 때부터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해양 민족 필리스티아(블레셋)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고통을 당했다. 삼손이 필리스티아와 싸워 이겼다고는 하나, 발달된 철기 문명으로 무장한 그 이민족은 지속적으로 바다를 건너와 정착했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다. 사무엘상 4-5장에서는 필리스티아와 싸우다가 언약궤를 빼앗기기도 했으며, 사무엘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을 재판하기 시작할 때에도 필리스티아와 큰 싸움이 있었다. 사울 왕 역시 필리스티아와 싸우느라 많은 힘을 쏟고 있었으며, 다윗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필리스티아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크게 지배했을 것이다.
영적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삼손 직전의 이스라엘의 재판관이었던 엘리 제사장은, 그 영적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들이 성막에서 제물들과 여인들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거나 징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임하여 엘리에게 달려갔을 때, 엘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아채지 못했다. 엘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당시에는 주의 말씀이 귀하여, 환상은 나타나지 않았더라.』(삼상 3:1)고 말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무엘은 재판관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일생을 신실하게 하나님과 백성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백성들의 요구로 사울에게 기름을 붓게 되나, 그는 곧 죄악을 범하므로 그가 불법적인 왕임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이제 막 “왕국”으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들의 시작은 매우 불안한 출발이 된 것이다. 이처럼 다윗 이전의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하시어 이 모든 것들을 바로잡게 하시고, 그 왕국의 출발을 제대로 시작하게 하신 것이다.
2. 다윗의 생애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상 16장에서 시작된다. 그는 사무엘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이지만 사무엘처럼 출생에 대한 기록이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윗이 처음 등장하는 사무엘상 16장은 그가 왕으로 기름 부음 받는 장면이다. 성경은 그를 “왕”이라는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은 새 왕을 선임하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아 왔고,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왕으로 선임되어 기름 부음을 받는다.
그러나 이 기름 부음 의식은 왕궁의 규례에 따른 공식적 행사가 아니었다. 사울 몰래 행해졌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양을 치는 목동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울이 악령으로 인해 고통당하자 하프를 들고 사울 앞에서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 찬송이 울려 퍼질 때마다 악령은 물러갔고, 사울은 일시적으로나 치유 받게 되었다. 다윗은 사울의 부름을 받아 종종 왕궁을 출입한다. 그것이 다윗의 왕궁 생활의 시작이었다.
얼마 후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이 일어난다. 우연히 참가하게 된 그 전쟁터에서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거인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것을 보고 의분을 터뜨린다. 그는 용기 있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으로써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때부터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대장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울의 미움을 사게 된다. 여러 번에 걸쳐 사울의 손에 죽을 위협을 받았으며, 사울에게서 도망쳐 긴 세월을 유다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백성들은 그에게 모였고, 다윗은 그들을 이끄는 대장이 되었다. 결국 사울은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하고, 다윗은 자기를 따르던 유다 지파 가운데서 왕이 된다. 아직 왕국의 북쪽 대부분 지파들은 사울의 아들을 왕으로 삼아 분리되어 있었지만, 곧 북쪽 지파들도 다윗을 왕으로 삼게 된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를 7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통합 이스라엘을 33년 동안 다스렸다.
왕이 된 다윗은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세운 전쟁영웅이었다. 필리스티아, 암몬과 모압, 시리아 등지를 정복하고 제압했으며, 이스라엘이 당시 그 지역에서 초강대국이 되는 기초를 마련했다. 동시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오는 등,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보여 찬양과 경배의 규례를 수립하고, 영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역대의 모범이 되는 업적을 이룩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이기에 흠이 있었다. 성경은 그의 죄를 크게 두 가지로 언급한다. 하나는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통치 말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 인구조사를 행한 것이다. 부하의 아내와 간음을 하고, 아이가 잉태되자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 남편을 의도적으로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 것은 살인을 넘어서 비겁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승승장구하던 다윗의 영적·정치적·문화적 행진은 멈춰지게 된다. 대신 그의 집안에선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압살롬이라는 아들에게 권좌를 내어주고 쫓겨나게 된다. 그 반역은 곧 진압되고 권좌는 회복되었지만 이 피난 생활은 그의 통치 말년에 그에게 커다란 수치를 가져다 주었다. 또한 인구조사로 인해 전염병의 재앙이 이르러 7만 명이나 죽임을 당했으니 이 죄 또한 가볍다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으며, 그의 의로움은 역대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찬양과 경배의 규례를 세움으로써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했던 그의 열심은 하나님께 깊이 받아들여졌으며, 젊은 시절 목동으로 있을 때부터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했던 그의 믿음은 그를 믿음의 용사로 기록되게 했다.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럼에도 겸손했던 사람이고, 그의 용기와 겸손은 하나님을 신뢰한 결과였다. 다윗의 인격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용기와 겸손, 그리고 신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다윗의 인격 : 용기와 겸손과 신뢰
(1) 인정받지 못했던 막내가 기름부음을 받다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실 왕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들 중에 있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름을 준비하여 베들레헴으로 가서, 성읍의 장로들과 함께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희생제에 초대했다. 그 아들들 중 하나에게 하나님의 기름부음 지시가 있을 것이다.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았다. 출중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거절하셨다.
둘째 아들 아비나답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셨다.
셋째 아들 삼마를 보았다. 역시 거절하셨다.
아들 일곱을 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모두 거절하셨다. 사무엘은 그 중에서 왕의 자질이 있을 만한 용모를 보았으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기준에는 모두가 미달이었다.
사무엘은 당황했을 것이다. 이새의 아들들 중에 왕이 있을 것이라 하셨는데, 모인 아들들 중에 하나님께서 선정해 주시지 않으니 대체 어찌된 일인가? 사무엘은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여기 오지 않은 아들이 있냐고.
이새는 그제서야 막내아들에 대해 얘기한다. 아직 들판에서 양을 치는 아들이 있음을 이제야 실토한다. 그는 왜 막내를 희생제 자리에 부르지 않은 것일까? 양을 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으면 이 중요한 자리에 아들을 부르지 않은 것일까? 혹 이새는 막내 다윗은 왕의 자질이 없는 아들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일까? 만약 이새가 이 자리가 왕을 뽑는 자리라는 것을 몰랐다 하더라고, 사무엘이 다른 가족과 달리 이새의 가족만 특별히 초대했는데 그 중요성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이새는 다윗을 간과했었다.
왜 그랬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다윗은 형제들 사이에서 그리 대우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단지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귀염 받는 막내라면 아비의 손을 잡고 제일 먼저 그 자리에 와 있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형제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존재였다. 들판의 양들이야 서둘러 외양간에 넣고 오면 될 것을, 그들은 양들을 놔두고 다윗에게 지키게 했다. 아니면 일곱 형제들이 서로 연락하는 동안 다윗만 실수로 빼 놓은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다윗은 형제들 가운데서 존재감도 없는 막내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취급받았다 해도 다윗은 제 역할을 묵묵히 감당한 청년이었다. 양치기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양들을 먹이는 것과, 맹수들에게서 양들을 지키는 것인데, 그는 그 일들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었다. 그 일에 그는 강하고 용맹한 싸움꾼이기까지 했다. 후일 그는 사울왕 앞에서 자신의 임무완수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자와 곰이 와서 양무리에서 새끼 양을 잡아가면, 내가 그를 따라가서 그를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으며, 그가 나를 향하여 일어나면 내가 그 수염을 잡아 쳐서 죽였나이다.” (삼상 17:34-35)
다윗에 대한 이미지는 보통 골리앗과 비교되어 나약한 소년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 그는 사자와 곰도 때려눕힐 수 있을만한 장사였던 것이다. 용맹스럽고 강인하면서도 아버지의 양떼를 지킬 만큼 신실한 목동, 형제들 사이에서는 중요하게 취급되지도 않고, 기름 붓는 자리에 초대되지도 않았으나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했던 청년 다윗, 그는 비록 사람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는 인정받는 예비 된 자였다.
다윗은 그렇게 기름 부음을 받았다. 사무엘의 요구로 다윗은 즉시 들판에서 불려왔고, 하나님의 명에 따라 사무엘은 기름 뿔을 들어 다윗에게 붓는다.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즉시로 그 증거가 나타났다. 성령께서 다윗에게 임하셨던 것이다(삼상 16:13). 구약 시대에 성령께서 임하셨다는 것은 신약 시대처럼 단순하게 성도의 마음속에 내주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함께 하시는 증거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다윗에게는 성령님께서 눈에 보이도록 함께 하셨다.
동시에 사울에게는 성령께서 떠나가셨다. 말하자면 사울에게서 떠난 성령께서 다윗에게 임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울에게는 악령이 찾아왔다(삼상 16:15). 성령이 떠난 자리에는 악령이 찾아오는 법이다. 사울에게 찾아 온 악령은 사울을 미치게 만들었다. 두려워했고, 불안했고, 분노 조절이 안됐고, 발작적으로 광폭했고, 매우 괴로워하고 아파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때 다윗이 하프를 들고 사울을 찾아온다. 다윗은 미쳐있는 사울 왕 앞에서 손에 하프를 들고 연주했고, 그럴 때면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의 활동이 잠잠해졌다. 사울은 놀랍도록 안정을 찾았고 평안해 했다. 다윗이 하프를 타며 노래한 것은 아마도 양들을 치며 들판에서 노래했던 찬양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찬양으로 악령을 물리쳤다. 다윗 안에 있는 성령께서 사울 안에 있는 악령을 이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찬양으로 영광받으시며, 또 찬양 가운데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여리코 성도 나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버렸다. 바울과 실라를 가둔 감옥 문도 그들의 기도와 찬양 소리에 열려 버렸다. 찬양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고, 마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다. 동시에 마음의 위안과 평안을 가져다 주며, 새 힘을 솟게 한다. 그래서 찬송은 성도들이 수행하는 영적 전쟁의 군가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며 이 모든 일들을 이뤄주신다. 다윗은 평생 이러한 찬양과 함께 했던 사람이다. 들판에서 양을 칠 때도, 사울에게 쫓겨 도망할 때도, 죄를 지었을 때도,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을 때도, 그는 항상 찬양했고 그 찬양들은 시편에 잘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등장했을 때 신하들은 사울에게 다윗을 “하프를 타는 데 기교가 있는 힘세고 용맹한 사람이요, 전사며, 매사에 총명하고 잘생긴 사람”(삼상 16:18)으로 소개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다윗은 완벽한 사람이다. 용맹과 지혜와 외모까지 갖추고, 거기에다 예술적이기까지 하다. 무엇하나 빠질 것 없는 다윗이지만 그렇다고 교만하거나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았다. 아마도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성경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일 것이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첫 번째 대면이었다. 첫째 대면에서 다윗은 “하프 타는 자”로 등장한다. 이 일로 다윗은 사울에게 크게 신임을 얻어 사울의 “병기 든 자”가 된다(삼상 16:21). 왕의 병기를 맡는다는 것은 보통의 신임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병기 든 자가 왕을 죽일 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에 이스라엘은 아직 청동검을 쓰던 시대였다. 반면 필리스티아는 발달된 철기 문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이나 왕자 정도만 강철검을 갖고 있는 정도였다(삼상 13:19-22). 이스라엘은 철제 농기구도 필리스티아인들에게 가서 구하고 보수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의 병기를 맡았다는 것은 대단한 신임이다.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곧바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예수님도 어릴 때 “하나님과 사람의 총애 속에서 자라 가시더라.”(눅 2:52)고 기록되어 있다.
(2) 용맹한 사람 다윗: 용기와 신뢰
그런가 하면 다윗은 꽤 용맹한 사람이었다. 그는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곰과도 싸울 정도로 용맹한 청년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힘자랑하기 위해 짐승들을 제압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기 위한 목동의 신실함이 그의 용기의 근원이었다. 또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계략을 세워 필리스티아인들의 포피 100개를 가져오라 했을 때, 다윗은 200명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것은 아내를 얻기 위한 용기였다. 왕이 된 후에는 필리스티아, 에돔, 암몬, 시리아 등을 제압했는데, 이는 정복 왕으로서의 용맹이다. 그것은 과거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정복 전쟁을 끝마쳤다는 의의가 있다.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임무가 다윗에게서 완성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다윗의 용맹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은 아무래도 골리앗을 죽인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의분을 내는 성도로서의 용기였다.
다윗과 사울의 두 번째 대면은 전쟁터에서 있었다. 사무엘상 17장은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때 다윗은 어찌된 일인지 사울과 함께 있지 않고 다시 아버지의 양을 치고 있었다. 아마도 다윗은 항상 사울 옆에 머문 것이 아니라 수시로 불려가서 사울을 위해 하프를 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다윗의 장성한 형 셋이 전쟁터에 나가 있었고,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먹을 것들을 준비해 다윗의 손을 통해 세 아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다윗이 전쟁터에 도착했을 때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필리스티아의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말로 소리지르며 이스라엘 군의 사기를 꺾고 있는 것이다.
필리스티아 군대의 숫자와 그들이 가진 철제 무기와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거친 폭언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사기가 꺾였고, 군사 중 일부는 도망가기까지 했다. 사울은 골리앗을 죽이는 자를 사위로 삼고 재물과 신분상승의 기회까지 약속했으나, 아무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스라엘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이때 전쟁터에 들어 온 다윗은 골리앗의 모독적 발언과 이스라엘의 겁쟁이 같은 모습에 분개하고 나섰다.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는 아버지의 심부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무엇보다 이 필리스티아인이 하나님과 그분의 군대를 모독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에는 의분이 차올라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필리스티아인을 죽이고 이스라엘로부터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주어지느냐? 이 할례받지 않은 필리스티아인이 누구기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하느냐?”(삼상 17:26)
이때 맏형 엘리압이 나타나 다윗을 꾸짖는다.
“어찌하여 네가 여기에 왔느냐? 광야에 있는 그 양 몇 마리는 누구에게 남겨 두었느냐? 내가 네 교만과 네 마음의 방자함을 아노니, 이는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내려왔음이라.”(삼하 17:28)
엘리압은 엉뚱하게 아버지의 양떼에 대해 다윗을 꾸짖는다. 그가 참으로 양떼를 걱정했을까? 아니면 이 위험한 전쟁터에 온 막내의 목숨을 염려해서 빨리 돌아가라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들의 벌벌 떠는 모습을 다윗에게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다윗의 형들은 다윗의 용맹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윗이 필리스티아 거인 앞에서 분노하는 것을 보고는 당장이라도 저 거인에게 달려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윗은 자기들을 제쳐놓고 기름 부음을 받았다. 아마도 다윗의 형들은 다윗을 몹시 시기했을 것이다. 다윗은 사자와 곰도 때려잡은 사람이다. 전쟁에 참여해도 될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엘리압은 양떼에 대한 책망이나 하고 있다. 이것은 위대한 동생에게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보잘 것 없는 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인 것이다.
다윗으로 인해 이스라엘 진영은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다윗은 곧바로 사울에게 불려간다.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담대히 말했으며, 양을 칠 때에도 사자와 곰을 때려잡았다는 용맹한 경험담을 말함으로 그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나를 구해 주신 주께서 이 필리스티아인의 손에서도 나를 구해 주시리이다.”(삼상 17:37)
이 말을 듣고 사울은 다윗을 전장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윗의 담대한 말로 인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다기 보다는, 다윗 외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더나 이 전투에 자원하는 사람은 다윗 하나밖에 없었다.
사울은 여전히 우려를 하며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을 입히려 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신뢰는 사울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그는 사울의 갑옷을 거절했다. 물론 체형이 맞지 않은 것도 있었다. 사울은 보통 사람보다 그 머리 하나 만큼 더 큰 사람이었다. 그러나 갑옷을 입으려고만 했다면 다른 병사나 장수의 갑옷을 빌려 입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윗은 그리하지 않았다. 그가 준비한 것은 오직 막대기와 물맷돌 다섯 개 뿐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용기는 때로 사람들에게 무모함으로 비쳐질 때도 있다. 다윗이 아무리 건장한 청년이라 한들 “여섯 큐빗과 한 뼘”(약 3m)이나 되는 골리앗을 상대하러 가는데 물맷돌이라니.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상황에서 다윗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가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신뢰한 것은 물맷돌과 막대기가 아니었다. 과거 사자와 곰을 상대할 때도 막대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했듯이, 이번에도 그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나아갔다. 그는 골리앗에게 “내 물매가 네 창을 이길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은 오직 이것이었다.
“너는 칼과 창과 방패를 가지고 내게 오지만, 나는 만군의 주의 이름, 즉 네가 모독한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분노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는 것이 견딜 수 없어, 그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응징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생애에서 가장 많이 드러난 성품인 “용기와 신뢰”라는 것이다.
결국 다윗은 이겼다. 골리앗은 죽었고, 필리스티아인들은 도망쳤으며, 이스라엘은 사기를 얻어 그 전쟁에서 승리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의 지위는 파격적으로 진급되었다. 그는 “전사들을 다스리는 자”(삼상 18:5)가 된 것이다. 그는 군 지휘관 중 하나가 되었고, 요나단 왕자와도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온 이스라엘에게서는 칭송을 받았다. 목동에서 왕의 악사와 병기든 자로, 그리고 장군이 되기까지 그의 신분은 순조롭게 상승되었다. 그의 삶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로 인해 형통하였다.
(3) 겸손하고 자애로운 인격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인해 용맹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의 겸양된 모습은 특히 광야 도피 생활 중에 드러났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름 부음을 받은 후 빨리 무슨 일을 이루려고 했겠지만 다윗은 달랐다. 그는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상당히 오랜 시간 후에, 적어도 20년 정도 이후에야 왕이 되었다. 그동안 그는 고난의 생활을 이어갔다. 과거 모세 역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적이 있다. 그는 이전에 이집트에서 히브리인들의 지도자가 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한 이집트인을 죽이고 히브리인들을 도우려다가 그 일을 실패하고 광야로 도피했다. 그리고 40년을 장인의 양만 쳤다. 하나님의 일이라고는 한 것이 없다. 히브리인들을 도우려는 것과 연관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어떻게든 자신의 동족 히브리인들을 도우려 했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아마 좌절과 낙심만 있었을 것이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름 부음 받은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지금 쫓겨다니고 있고, 사울의 눈에는 일종의 산적 두목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골리앗도 죽였고, 이스라엘에 큰 승리도 가져다 주었으며, 군대 지휘관들을 거느리는 사령관의 역할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소용없게 되었다. 광야로 내몰린 다윗은 그저 떠돌이들의 지도자가 되었을 뿐이다.
다윗의 성품에 겸손이라는 것은 그 이전부터도 있었지만, 이 광야 생활은 그를 더욱 겸손케 했을 것이다. 인생의 역경 속에서 분노를 내는 사람과 겸양케 되는 사람이 있는데, 다윗은 역경을 겪을수록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린 사람이다.
그는 사울에게 분노하지 않았다. 분노했더라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은 엔게디 광야에서 사울이 잠시 들어 온 굴이 마침 다윗의 무리가 숨어 있는 굴이었다. 사울이 그 일을 알지 못하고 쉬고 있었을 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살짝 베고 말았다(삼상 24장). 또 한 번은 하킬라 산에서 사울이 추격해 오다 밤이 되어 야전에서 잠을 잘 때, 다윗은 잠에 빠져 있는 사울 앞에서 그를 죽이지 않고 그의 창과 물병만 갖고 돌아왔다(삼상 26장).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이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 두 번 적을 살려 보내면 세 번째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전쟁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옛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어서였을까? 아니다. 다윗의 자세는 오직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고 다윗에게 기름을 다시 부으셨다고는 하나, 한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이에 대한 존중을 다윗은 보이고 있었다. 다윗도 사울이 미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전쟁 등의 일로 직접 죽여주시기를 바랐다(삼상 26:10).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심판을 행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울에 대한 권위를 존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라는 권위를 존중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 앞에 겸손했다. 사울은 분명히 심판받아야 할 사람이다. 다윗도 그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심판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한번 쓰셨던 종에 대한 심판은 신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지만, 그 심판의 도구로 쓰였던 바빌론 역시 더 큰 심판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교훈이다.
다윗의 겸손과 자애로운 인격은 왕이 된 후에도 그의 성품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는 한 번도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수의 권속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는 사울과 요나단이 전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도했으며, 자기가 사울을 죽였다고 거짓말한 아말렉인을 죽여 버렸다(삼하 1장). 사울이 죽은 후 북쪽 지역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어 있었는데, 그 신하들이 이스보셋을 암살하고 다윗에게 오자 다윗은 그들을 죽임으로써 이스보셋을 애도했다(삼하 4장). 그뿐 아니라 요나단의 아들 므피보셋에게 친절을 베풀어 사울에게 속했던 재산을 모두 돌려주었다(삼하 9장).
죄를 지었을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통회했다(시 51편).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한 후 선지자 나단이 꾸짖었을 때, 다윗은 왕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죄를 합리화시키지 않았다. 누구라도 죄를 지면 통회하고 자백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더욱이 권세 있는 왕이라면 자기의 권위를 내세워 그 꾸짖는 선지자를 박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죄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리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나 백성이 일반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현실에서 이 말은 참으로 지켜지기 어려운 말이다. 오늘날은 특히 더 그렇다.
다윗에게서는 권력을 탐하는 모습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도 그렇다. 압살롬의 반군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모르지만,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오자 다윗은 서둘러 성읍을 등지고 피했다. 요압의 군대가 압살롬의 군대와 싸울 때에는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했고, 압살롬이 죽자 아비의 심정으로 “압살롬아, 압살롬아” 하면서 슬피 울었다. 심지어 그는 압살롬 대신 자신이 죽었으면 하고 절규하기까지 했다(삼하 18:33). 권력 앞에서는 형제도, 부자도 없지 않은가? 일반 백성들에게 부모자식 간의 칼부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왕들만은 예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이라는 것은 부자간에도 칼끝을 겨누게 한다. 아들이라도 권력을 탐하면 반역자가 되어 아비의 손에 죽게 된다. 하지만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 압살롬은 아비에게 칼을 겨누었지만, 다윗은 아들에게 칼을 겨누지 않았다. 그는 고대의 모든 왕들에 비해 전혀 왕답지 않은 왕이었다. 가장 용맹한 왕이요 가장 위대한 정복 군주였지만, 권력과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겸손한 백성이요, 백성 앞에서는 항상 양 무리의 본이 되는 목자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필리스티아인들과 전쟁하고 있을 때였는데, 다윗은 성문 곁에 있는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은 전쟁에 승리하여 베들레헴을 차지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충성스런 용사들 셋이 적진을 뚫고 들어가 우물물을 떠다 다윗에게 바쳤다. 그들의 충성은 가상했지만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주 앞에 쏟아드렸다. 그 물이 그들의 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삼하 23:15-17). 고대의 모든 독재자들과 비교해 보라. 그들은 군사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그들의 목숨을 자기 권력의 기반으로만 삼았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다.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군사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물론 이 용사들은 명령을 받고 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동은 존경심으로 인한 자발적 충성이었다. 이러한 왕이니 누군들 충성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에게 있어 권력은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백성들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백성의 하나로 취급한 훌륭한 왕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리더가 필요하다.
4.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열심
백성 앞에서는 위대한 왕이었지만, 다윗의 모든 생각은 하나님께 맞춰져 있었다.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었으며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했던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그 모습을 잃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열심은 매우 특별했다. 먼저 그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
당시 언약궤는 성막 안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었다. 엘리 제사장 때에 홉니와 피느하스가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하러 나갔다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긴 후로, 언약궤는 이스라엘 진영으로 되찾아 왔지만 성막 안에 두지 않았었다. 다윗 당시에 성막은 기브온에, 언약궤는 기브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다. 다윗은 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자 했다. 원칙으로 말하자면 언약궤를 성막으로 가져다 놓아야 했겠지만, 그보다 다윗은 자신 곁에 두기 원했다. 이는 하나님과 가까이에 있고 싶었던 다윗의 마음이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윗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을 생각까지 했다. 그러니까 다윗의 본 마음은 예루살렘 성전에 언약궤를 두려는 것이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오려는 시도는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왔다. 온갖 악기를 연주하고 찬양하며 기쁨으로 언약궤를 옮겼지만,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흔들릴 때 웃사가 손을 내밀어 언약궤를 붙잡았다가 즉사해 버렸다(삼하 6:7). 이때 다윗은 언약궤 옆에 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 생각하고 언약궤 가져오는 것을 보류했다. 물론 언약궤 곁에 있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죄를 품은 죄인이 하나님 곁에 있으면 얼마나 두렵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곁에 있으면 행복하다.
사실 문제는 웃사가 언약궤에 손을 댄 것이 아니었다. 다윗은 율법에 따라 언약궤를 옮기지 않았다. 율법에 따르면 언약궤는 채에 꿰어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은 수레를 통해 운반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필리스티아인들이 빼앗은 언약궤를 반환할 때 취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암소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벧세메스로 운반했었다(삼상 6:10-12). 다윗을 포함하여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방인의 방법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불쾌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좋으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지 않으신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이방의 관습과 문화대로 행하는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일이다.
그 후 다윗은 두 번째로 언약궤 가져오기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율법에 따라 레위인 제사장들을 통해 채에 꿰어 어깨에 메고 왔다(대상 15:14-15). 번제도 드려졌고 찬양도 드려졌다. 여러 악기들의 오케스트라가 연주되었고 합창단도 웅장하게 노래했다. 다윗은 주 앞에서 힘써 춤까지 추었다. 형식적인 춤도 아니고, 육신적인 춤도 아니다. 하나님의 궤가 들어온다는 그 엄청난 사실 앞에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리는 순수하고도 열정적인 춤이었다. 다윗의 아내였던 사울의 딸 미칼은 그 광경을 보고 경멸했지만, 다윗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것은 주 앞에서였으니 그분은 네 아비와 네 아비의 온 집 앞에서 나를 택하시어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나를 지명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주 앞에서 뛰놀리라. 또 내가 이보다 더 천하여져서 내 자신이 보기에 낮아져도 네가 말한 여종들에게는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미칼은 무릇 왕이란 자기 아버지 사울처럼 권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 앞에서 기뻐 뛰어노는 것은 천한 백성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것이 천한 짓이라면 기꺼이 천하게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왕도 똑같은 백성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윗은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이 있기를 원했다.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다. 즉 “말씀”이 있는 것이다. 그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고 통치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통치자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누구에게라도 필요한 자세이다. 율법에서도 말씀을 눈 사이에, 손목에 두라고 했다. 그만큼 말씀을 손에서 떼지 말고 항상 읽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만 그분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고, 그래야 올바른 삶을 살며 또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다. 말씀은 인생의 지침이며, 사역의 교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향해 열정을 품는다면 반드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말씀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또 하나의 열심은 찬양이다. 다윗은 언약궤를 위해 별도의 성막을 만들었고, 그 앞에서 찬양드릴 찬양대를 조직했다. 역대기상 25장에 따르면 그의 찬양대는 288명이었다. 찬양대의 악장들은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에단)이며, 이들은 직접 노래들을 지어 찬양대로 함께 부르거나 다윗이 지은 노래들을 받아 찬양대에게 부르게 했다. 이들이 교대로 찬양하여 언약궤 앞에서는 찬양이 끊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서 항상 찬양을 받으셨다.
다윗의 찬양들은 시편에 잘 기록되어 있다. 시편은 총 150편 중 절반이 다윗의 시다. 다윗의 시가 74개 편이고, 아삽이 12개 편, 헤만과 에단과 모세가 각각 1개 편씩이며, 61개 편이 작자 미상이다. 그런데 아삽과 헤만과 에단은 모두 다윗이 임명한 찬양대장들로서 다윗과 함께 했던 자들이다. 한편 “악장에게”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시가 55개인데(저자가 명시되어 있는 시 41개 편, 명시되어 있지 않은 시 14개 편), 이 ‘악장’은 다윗이 임명한 찬양대장들이다. 따라서 저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14편의 “악장” 시편들도 다윗과 연관된 사람들의 시편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저작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74개 편이지만 다윗과 연된된 사람들의 시까지 포함하면 총 102개 편으로, 시편의 2/3가 넘는다. 이것은 시편을 “다윗의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된다.
그는 목자로 있을 때부터 찬양했다(시 23편 등). 고난 가운데 있을 때도 찬양했다(시 18편 등). 영광을 받은 후에도 찬양했다(시 24편 등), 심지어 죄 가운데서 통회할 때도 회개의 찬양을 드렸다(시 51편). 히브리서 저자는 찬양을 “영적 제물”이며 “입술의 열매”라고 말했는데(히 13:15), 다윗은 이것을 매우 잘 실천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열망을 가졌다(삼하 7장). 그는 언약궤를 위해 성막을 만들고 그 앞에 찬양대까지 배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송했다.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천막에 거하게 한다는 것이 영 불편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전 짓기를 희망하며 선지자 나단에게 그 뜻을 비쳤다. 하지만 나단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응답은 “거절”이었다. 후일 다윗은 자신이 거절당한 이유를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추억했지만(대상 22:8; 28:3), 하나님께로부터 처음 이 말씀이 내려진 사무엘하 7장이나 역대기상 16장에는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셔서 이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축복의 말씀만 있다. 더욱이 이 거절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에게 이 귀한 임무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들에게 위대한 임무를 맡기시겠다는 말씀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아들을 위대하게 만들어주겠다는데 그것을 기뻐하지 않을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말씀은 귀하고 복된 약속인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성전 건축에만 한정시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과 함께 “영원한 왕국”에 대한 약속까지 주셨다.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세워지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세워지리라”(삼하 7:16).
다윗의 아들을 통해 영원한 왕국을 세우는 것, 이것은 사실 솔로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종종 “다윗의 아들”로 불리셨다. 따라서 이것은 솔로몬의 성전건축 약속뿐 아니라, 메시아 왕국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선한 열심은 메시아 왕국의 예언이라는 축복까지 받게 해 주었다.
또한 다윗은 비록 성전을 짓지는 못했지만, 성전건축을 미리 다 준비해 놓았다. 마치 모세가 성막에 대해 계시를 받았듯이 다윗도 성전에 대해 계시를 받았다(대상 28:11-19). 이에 따라 다윗은 성전 자재를 준비해 놓았고, 솔로몬에게도 이 내용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솔로몬은 부왕 다윗이 준비해 놓은 것에 따라 실행한 것뿐이다.
5. 다윗의 연약함
다윗은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예표하는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인간인지라 종종 연약함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싸움에는 용사요 하나님을 위한 열심에는 그 누구보다 적극적인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여느 인간과 똑같은 죄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울로부터 도망다니던 시절, 두 번이나 필리스티아인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모습을 보였다. 필리스티아인들이 누군가? 당대에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원수였고, 삼손 이래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적국이었다. 다윗의 첫 싸움 상대가 그들에게 속한 골리앗이었고, 다윗은 평생 동안 그 민족을 멸절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필리스티아인에게 숨었다. 그것도 두 번 씩이나.
첫 번째는 사울에게서 도망치던 초기에 가드 왕에게 피한 것이다(삼상 21:10-15). 가드는 필리스티아의 주요 도시국가였다. 즉 사울의 원수였다. 물론 다윗에게도 원수였지만 지금 다윗은 사울의 원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다윗과 가드 왕은 사울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인간적 판단으로 실수한 이유이다. 그는 필리스티아가 사울의 원수인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빈번히 일어난다. 장수가 제 섬기는 군주를 배반하고(혹은 버림받고) 전에 자기가 싸웠던 원수를 새로운 군주로 섬기는 것이다. 이 경우 그 새로운 군주는 이 장수의 능력과 영향력을 얻게 되니 좋고, 이 장수는 새 군주 아래서 자기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으니 좋다. 즉 정치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신 새 군주가 옛 군주의 원수인 경우, 이 장수는 옛 군주와 싸워야 한다. 그럴 각오가 없으면 원수를 새 군주로 모실 수 없다.
지금 다윗이 가드 왕에게 자신을 의탁했다는 것은 가드 왕 편에 서서 사울과 싸우겠다는 의미이다. 비록 다윗이 직접적으로 그 뜻을 밝힌 적은 없고 또 그럴 마음까지는 없었다 해도, 적어도 가드 왕은 그런 기대를 갖고 다윗을 받아들였다. 가드 왕 편에서 보면, 적어도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원수 하나가 없어진 것이며, 사울을 멸할 수 있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도시국가들의 반대를 받게 된다. 그들은 다윗이 골리앗을 멸하고 자기들과 싸웠던 과거를 기억하며 다윗의 귀순을 반대했다. 오히려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가드 왕을 설득했다. 당시 필리스티아는 중앙집권화된 통일국가가 아니라 여러 도시국가들이 연합해 있는 일종의 연맹체였다. 그 중 가드 왕은 필리스티아의 대표 세력이었지만 다른 도시의 왕들에게 명령을 내릴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드 왕은 다윗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윗은 사울의 위협을 피해 필리스티아로 들어갔지만 거기서도 죽음의 위협을 당한다. 이때 다윗이 취한 행동은 “미친 체” 하는 것이었다. 침을 흘리고 수업을 벅벅 긁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위대한 적장의 추한 꼴을 비웃으로 쫓아버린다. 다윗은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으나, 원수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하나님의 위대한 장수가 이방인 앞에서 수치를 당한 것이다.
성도가 동료 성도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세상에게 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은 결코 성도의 보호자가 되어 주지 못하며, 오히려 성도에게 새로운 위협을 제공할 것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위기를 모면한다 해도, 세상에게 수치를 당하는 것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다윗이 바로 그랬다. 그는 목숨을 보존한 것만을 감사하며 나와야 했다.
그런데 다윗은 한 번 더 가드 왕에게 피했다. 이번에는 그의 피난 시절 끝무렵이다(삼상 27장). 이때 다윗은 가드 왕에게 충성을 서약한다. 가드 왕은 다윗을 믿었고, 다른 필리스티아 군주들을 설득하여 다윗을 곁에 두기로 했다. 심지어 다윗을 데리고 대 이스라엘 전투에 참여하고자 했다. 이 전투는 사울과 요나단이 최후를 맞는 길보아산 전투였다.
다윗은 가드 왕에게 자신도 이 전투에 참여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다윗은 왜 이러한 요청을 했을까? 사울이 너무나 미웠기 때문에 정말로 사울과 싸우려고? 아니면 적들을 속이고 싸움에 출전하여 필리스티아를 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전투가 사울이 죽는 전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원수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 왕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가 직접 사울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사울을 죽이는 전쟁에 참여하게 된 이상 그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조금이라도 죽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사울의 군사라고는 하나 결국은 동족이다. 그렇다면 향후 다윗이 왕이 될 때 이스라엘 지파들로부터 거절될 것이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섭리적으로 다윗을 막아주셨다. 필리스티아 군주들이 비록 가드 왕에게 설득당해서 다윗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다윗을 이 전쟁에 참여시키는 것만큼은 반대했던 것이다. 결국 가드 왕은 다윗을 이 전투에서 배제시켰다. 다윗은 하마터면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오점을 남길 뻔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도우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성도가 죄를 지으려 할 때 섭리적으로 막아주시곤 한다. 의도적으로 죄를 계획할 때나 혹은 죄짓는 상황으로 이끌림을 받을 때 그렇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다면 큰 죄를 지어 인생을 완전히 망칠 수도 있는 일,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가끔 막아주신다. 이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지만 성도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다윗은 두 번이나 필리스티아인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향후 왕이 되었을 때 그들을 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도를 죄로부터 막아주시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경우에 막아주시기도 하지만 보통의 경우는 성도가 죄 지은 후에 징계하신다. 다윗도 모든 죄들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큰 죄를 지었고 그 일에 징계를 받게 된다. 바로 밧세바 사건이다(삼하 11-12장).
이 일은 다윗이 왕이 된 후 한참 정복전쟁에서 승리하던 상황에서 발생했다. 다윗은 요압을 통해 모압을 치고 있었고, 자신은 왕궁에 있었다. 그때 마침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건너편에 있는 집에서 한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다윗은 그 여인을 궁으로 불러들였고 동침을 한다. 그런데 그 여인은 다윗의 충직한 신하 우리야의 아내였고, 그 여인이 임신을 하자 다윗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한참 전쟁중이던 우리야를 불러들여 아내와 동침케 한다. 그러나 우리야는 동료들이 싸우는데 편히 잘 수 없다고 집으로 가지 않고 병사들과 잔다. 다윗의 은폐 시도는 실패했고, 초조해진 다윗은 결국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게 하는 계략을 세우고 만다.
여기서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전쟁터에 있어야 할 왕이 궁에서 나태하게 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태하다고 말하는 것은 억측이다. 왕이 항상 전장에 나가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전략을 세우기 위해 궁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한가롭게 지붕 위나 거닐고 있었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다윗은 이 전쟁으로 인해 생각이 복잡하여 지붕 위를 거닐었을 것이다. 다윗이 궁에 있었다는 것 자체는 하등의 잘못이 없다. 어쨌든 그에게는 유능한 장수 요압이 있었다.
문제는 죄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항상 죄의 유혹은 있다. 그리고 유혹을 받은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내가 가만있는데 사탄이 와서 키질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문제는 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다윗은 여인을 통해 유혹한 사탄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다윗이 그 여인을 본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불러서 동침한 것도 왕으로서 잘못이라 말할 수 없다. 후궁을 삼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여인이 부하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알고도 동침했다는 것이다(삼하 11:3-4). 만일 몰랐다 해도 후궁 삼는 일은 지금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전시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윗은 부하들이 전쟁하는 것에 온 마음이 쏠렸을 것이다. 부하들이 전쟁하는데 편히 먹고 놀고 있을 다윗이 아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다윗은 이 기간 중 자기 아내들과도 동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매일 이 전쟁을 승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죄의 유혹이 오자 그 모든 경건함이 사라져 버렸다. 유혹에 넘어졌고, 기도는 사라져 버렸다. 부하들과 전쟁에 대한 마음도 잠시 마음 한편에 접어놓아 버렸다. 죄는 그런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이 부하의 아내인 것을 알면서도 왕궁으로 불러들여 동침했다. 이미 다윗의 마음에 침투한 죄의 이끌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향후 어떻게 될 지는 생각되지도 않았다. 치밀한 계획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그 순간은 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죄는 그의 모든 생각을 마비시켜 버렸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것을 세상은 “사랑”이라 표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라 말씀하신다.
그때부터 다윗은 두마음을 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해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이 죄를 어떻게 무마할 것인지 생각했다. 유혹에 넘어간 날부터 살인이 이루어진 날까지 이 두 마음은 계속 다윗을 괴롭혔고, 다윗은 죄 가운데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결말을 맞게 된다.
나단을 통한 징계의 말씀이 선포된다(삼하 12:10-14).
첫째, 죄로 인해 생긴 그 아이가 죽을 것이다.
둘째, 그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다른 사람이 다윗의 아내와 동침할 것이다.
이 선언대로 그 아이는 죽었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들은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보좌를 찬탈했으며, 후에 솔로몬이 등극하는 상황에서는 아도니야가 반역을 일으키려다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비로서 자식들의 칼부림을 보는 것보다 마음 아픈 일은 없을 터, 하나님께서도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는 것을 보며 자식들의 칼부림을 보는 아픔을 느끼셨을 것이다. 또한 압살롬이 반역 당시 다윗의 첩들과 동침한 것으로 셋째 예언도 성취되었다(삼하 16:22).
다윗의 범죄는 통치 전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압살롬의 반역은 후기에 있었다고 보인다. 다윗은 청년시절부터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고생을 했으며, 늙어서는 아들에게 잠시나마 쫓겨나는 고생을 했다. 그는 인생의 시작과 끝을 고난으로 보낸 사람이었다.
다윗의 어리석음은 통치 말엽에 한 번 더 나타나는데, 그것은 온 왕국에 인구조사를 명령한 것이다. 인구조사는 9개월 20일 동안 행해졌고,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그의 백성은 이스라엘에서 80만, 유다에서 50만, 합해서 130만 명이었다. 그런데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징계하시어 이스라엘을 전염병으로 7만 명이나 죽이셨다.
인구조사를 한 것이 대체 왜 죄가 되었을까? 여호수아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백성을 계수하라 명하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이 일로 다윗만 징계를 받았다. 왜 그랬을까?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했을 때 요압이 반대했던 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백성이 얼마가 되든지 주 왕의 하나님께서 일백 배나 그들을 더하시기를 원하며, 또 내 주 왕의 눈이 그것을 보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는 이 일을 기뻐하시나이까?”(삼하 24:3)
이 말을 보면, 다윗은 자기 백성이 얼마나 많은지 계수하여, 그의 치세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왕조를 세웠고, 정복전쟁들에 승리하여 영토를 넓혔고, 백성들을 안정되게 다스렸다. 그의 치세는 충분히 자랑할 만했다. 하지만 그것이 우쭐대기 위한 것이라면 곤란하다. 그는 일개 양치기였는데 하나님께서 대장으로 세우고 왕을 삼으셨다. 이것은 감사할 일이며,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을 자기에게 돌리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분명히 죄이다.
그런데 이 일은 단순히 우쭐대고 교만한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다윗은 군사의 수를 의지하려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윗이 계수한 130만 명은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칼을 뺄 수 있는 용사”의 수였다. 즉 20세 이상의 남자들을 말하는데, 이는 군사적 목적으로 계수한 것이다. 여호수아도 그런 목적으로 군인들만 계수했다. 문제는 지금이 전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압의 말을 통해 보건대, 다윗은 자기가 얼마나 많은 군사들을 거느렸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한 군인들의 점호가 아니었다. 그는 군사의 숫자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사울의 잘못이기도 했다. 사울은 필리스티아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사울이 기다리라 명한 것을 어기고 스스로 희생제를 드렸다. 그가 그렇게 행한 것은 군사들이 점점 이탈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군사의 수를 의지했던 사울은 군사들이 이탈하자 초조한 마음에 빨리 희생제를 드리고 전투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삼상 13장).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 특히 전쟁에서 군사의 수를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사울은 그 일로 버림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다윗이 지금 그 일을 한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냥 심판하시지 않고, 징계의 방법을 선택케 하셨다.
첫째, 온 나라에 7년간 기근이 있는 것
둘째, 원수 앞에 3개월간 쫓겨다니는 것
셋째, 온 나라에 3일 동안 전염병이 있는 것
이에 다윗은 “3번”을 골랐다. 첫 번째는 너무 길고, 두 번째는 다윗이 지겹도록 경험한 것이었다. 젊을 때는 사울에게 오랜 세월을 쫓겨다녔고, 얼마 전에는 압살롬에게 잠시나마 쫓겨다녔다. 더 이상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주의 손”에 떨어지길 바랐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 7만명을 전염병으로 죽이셨다. 다윗이 자랑한 군사들 중 상당수가 죽었다. 인간이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는 것을 다윗은 깨달았을 것이다.
다윗은 여기서 진심을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간음과 살인을 했을 때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 이번에는 갓 선지자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죽게 된 백성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간구한다.
“백성을 계수하라고 명한 것은 내가 아니니이까? 실로 죄를 짓고 악을 행한 자는 바로 나니이다. 그러나 이 양들로 말하면 그들이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청하오니,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은 치지 마시어 그들이 재앙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대상 21:17).
이것은 자기 양떼를 아끼는 목자의 모습이다. 다윗은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에 가서 희생제를 드리며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멈추사 다윗을 용서하시고 백성을 구원하셨다.
다윗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참된 회개를 드린 왕이었다. 이 죄들이 비록 크긴 하지만, 성경은 그의 전 생애 동안 단 두 개의 죄들만 기록함으로써 자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열왕기상 15:5에서는 “이는 다윗이 주의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고, 힛인 우리야의 일 외에는 주께서 그에게 명하신 일에서 평생 동안 벗어나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다윗의 죄를 더 축소시켜주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다윗을 “의로운 왕”으로 기억한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다 해도 말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다윗
다윗은 역대 왕들의 모범이 되었다. 성경은 후대 왕들을 평가할 때 그들을 종종 다윗과 비교하여 말하곤 했다(왕상 15:3, 왕하 14:3; 16:2; 18:3; 22:2 등). 선한 왕이든 악한 왕이든 다윗과 비교가 되었다. 다윗은 후대 왕들의 기준점이요 척도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인물이다. 그 자신의 인물됨만 갖고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인물이나, 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가치가 훨씬 크다.
무엇보다, 그는 “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왕”이라 불리셨는데, 그것은 다윗의 계보에 따른 “다윗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정복 왕이었다. 왕조를 세우고 정복전쟁을 수행하며 승리를 거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재림 때 아마겟돈 전쟁으로 오셔서 원수들을 멸하시며 정복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시는 왕이 되실 것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다. 예수님께서도 재림 때 예루살렘 보좌에 앉으시어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초림 때는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거절당하셨으나, 재림 때는 거절당하지 않으신다. 거절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멸망당할 것이다. 다윗에게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윗은 “선지자”이기도 했다. 선지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예언하는 사람이다. 다윗은 기본적으로 왕이었고 다윗 앞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다윗 자신도 선지자였다. 왜냐하면 다윗도 예언을 했기 때문이다. 시편의 수많은 다윗의 시들은 그 자체가 예언들이다. 경건한 찬송시들도 많지만, 그 시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많이 있다. 시편 22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다루는 대표적인 예언이다.
또 다윗은 “제사장”의 역할도 했다. 물론 공식 직분으로는 제사장이 아니다. 제사장은 레위인이어야 하는데 다윗은 유다 지파 출신이다. 그러나 그는 인구조사의 죄를 짓고 회개할 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사서 직접 희생제를 드렸다. 앞서 사울은 직접 희생제사를 드렸다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지만, 다윗은 오히려 그 행위로 인해 용서받았다. 그는 희생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 백성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계인 전염병을 멈추게 했다. 또한 일찍이 젊은 시절 사울에게 쫓겨다녔을 때,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성막에 차려놓은 빵)을 먹기도 했다(삼상 21장). 후일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언급하며 다윗의 행위를 정당하다 하셨다(마 12:3-4). 한편 히브리서 7:14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유다 지파인 다윗의 계보에 따랐음을 강조한다. 이 모든 것들은 다윗이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도 예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별히 왕, 선지자, 제사장, 이 세 직분은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는 직분들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이심을 보여주는 직분이다.
그런가 하면 다윗은 “목자”였다. 양들이 사자와 곰의 공격을 받았을 때 도망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싸워 양들을 지켜내었다. 이로써 그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예표가 되었다.
한편 다윗은 총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았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처음으로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고, 사무엘하 3장에서 유다 지파에게 기름부음 받아 유다의 왕이 되고, 사무엘하 5장에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이 왕이 되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세 직분을 취하신 분이다. 그렇다고 다윗의 세 번의 기름부음이 각각 왕, 제사장, 선지자의 기름부음인 것은 아니다. 다윗은 세 번 모두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다. 또한 예수님도 세 번 기름부음 받지는 않으셨다. 예수님은 침례받으셨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같은 모습으로 임하셨는데, 이를 예수님이 받으신 성령의 기름부음이라 말할 수 있다(히 1:9). 하지만 예수님을 그 이후 또 다른 기름부음 받는 행위를 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한번의 기름부음으로 모든 직분의 사역을 취하시게 된다. 다만 다윗이 세 번 기름부음 받은 것과 예수님이 세 직분을 상징하는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을 연관해서, 이것도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다윗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뿐이다.
위대한 왕이자 이스라엘의 신실한 목자 다윗, 신실함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 있어서 모든 성도들의 모범이 되는 이, 위대한 찬양시로 모든 시인들과 음악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이, 그 다윗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고, 하나님을 위해 용기를 내라고, 그리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라고. 무엇보다 그가 예표가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이신 그분을 기다리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