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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침탈의 실상 스크랩 한국사傳, 역사의 진실은 말한다.[이승만 2부작]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144 14.08.22 01: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참으로 유익한 역사 스페셜 시사프로그램이 이번 개편으로 다시 볼 수 없다는 서글픔이 크다. 역사 거꾸로 쓰기가 진행되는 현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아서인지? 혹은 역사적인 실체에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영어몰입이 강요되고 한국어가 사장되고 있는 이 서슬픈 대한민국에서, 역사의 뿌리마저 뒤흔들리고 있는 이 시대의 불량은 개탄스럽고 통탄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진실을 파헤친 kbs 시사교양프로그램, 한국사傳을 아끼고 사랑했던 마음에 한국사傳 프로그램을 뒤져서 검색하고, 기록하는 작은 발걸음을 하고자 한다. 2007,6,16일 첫방영을 한지 1년 4개월만에

우리들의 곁을 낙엽처럼 떠났다.

 

진실은 궁하면 통한다고 한다.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최소한의 눈이 이제는 암흑속으로 들어가지만 하나하나의 지성이 모이면 이 또한 역사의 순수한 대한민국 역사가 아닐까?

 

너무나 아쉽고 배반의 아픔을 절절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만추와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는 계절이, 역사와 함께 낙루처럼 눈물이 되는구나!

 

 


[제54회] <이승만 2부작>
               이승만 제 1부


▣방송 : 2008. 8. 30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 PD
▣글.구성 : 정영미 작가
 

조국의 주권회복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친 독립투사 .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조직의 분열도 마다하지 않는 야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에 관한 진실은 무엇일까?


최초 공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유물들.

이화장에서 소장지를 옮긴 뒤, 지금껏 한 번도 공개된 적 없었던 우남관의 유물들. 한성감옥소 시절 이승만의 성경책. 감옥에서 편찬한 이승만의 영한사전을 비롯 이승만과 그의 시대를 보여주는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2만여 장과 A4용지 15만 쪽 분량의 방 대한 기록들! 그 속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초 대 대통령 이승만에 관한 진실! 한국사 傳 에 담았다.


 ▲ 최초로 공개되는 우남관


 ▲이승만이 옥중에서 사용했던 영어성경                ▲이승만이 옥중에서 편찬한 영한사전     


단독 입수! 하와이 한인사회와 이승만에 관한 진실!

하와이 독립운동가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 그녀는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기억 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담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이승만 때문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 노선의 차이로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사람들. 한인사회의 갈등, 그 가운데 자리하는 이승만에 관한 생생한 증언.
하와이가 기억하는 이승만의 두 모습. 과연 하와이의 이승만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하와이 한인사회의 산 증언을 담은 테잎을 <한국사 傳>에서 단독 입수했다.

◀ 로베르타 장의 촬영 테잎

 

사형수 청년-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다.

1898년 11월 독립협회 간부들이 경무청에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승만은 만민공동회를 열어 이 사건을 규탄하다가 투 옥되어 사형을 선고 받는다. 옥중에서도 이승만은 학교를 여는 등 자신 의 큰 꿈을 포기 하지 않는다. 갇혀 있는 가 운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는 이상재 신 흥우 박용만 같은 동지들을 만난다. 1904년 석방되자, 이승만은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 른다.


 ▲ 미국으로 출발하기전 찍은 가족사진


이즈모호 사건, 그 가운데 선 이승만!

독립운동가 박용만. 그는 이승만의 옥중동지였다. 하와이에 온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세워 무력으로 국권을 되찾고자 한다.
1918년. 박용만의 국민군단이 호놀룰루 항에 정박한 일본군함 이즈모호를 폭파시키려 한다는 제보가 입수된다. 관계자들은 체포되고, 박용만은 법정에 서게 된다.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이승만은 하와이의 독립운동 세력 전체를 장악한다. 하와이 독립운동 세력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이즈모호 사건.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


 ▲ 출운호 사건이 실린 신한민보                            ▲이승만 관련 법정기록들


워싱턴에서 전하는 이승만의 음성,
                                  식민지 조선의 신화가 되다!

1942년.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시작 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목소리가 단파 라디오를 통해 조선에 전해진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이천삼백만의 생명의 소식이오,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학무도한 왜적의 철망 속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일제는 이승만의 목소리를 들은 수신자들 검거. 경성 방송국 관계자를 포함한 300여명이 투옥시킨다. 그러나 이 단파방송 사건은 지식층 사이에 이승만의 이름을 신화로 남겨 놓는다.

◀ 1940년대 단파라디오


 

제2부....

 


[제55회] <이승만 2부작>
                 이승만 제 2부


▣방송 : 2008. 9. 6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 PD
▣글.구성 : 정영미 작가
 

미국의 선택인가,
이승만의 선택인가?

혼란스러운 해방정국.
일흔 넷의 나이로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
그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로 남았나!


맥아더 기념관에 남아 있는 이승만의 흔적!

미국 버지니아에 위치한 맥아더 기념관. 세계 2차 대전 전후 시기, 맥아더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승만의 편지와 전보. 맥아더가 이승만을 한국의 임시 대통령이라고 표기한 메모까지 소장하고있다.
최초로 공개되는 맥아더 기념관, 이승만의 흔적! 이승만은 어떻게 맥아더를 만날 수 있었나? 맥아더와 이승만이 만나 함께 그린 한국의 미래는 무엇일까?


 ▲맥아더 기념관 The MacArthur Memorial        ▲맥아더의 메모장 (appointment book)에는
                                                           이승만을 한국의 임시 대통령이라고 표기해 놓고 있다.


임시정부에 불어 닥친 대통령 논란!

1919년 임시정부 국무총리직과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에 임명된 이승만. 그는 국무총리나 집정관 총재는 미국식으로 해석하면 'president'라고 주장, 이 호칭을 사용한다. 이에 임정 지도자들은 반발을 제기, 전보를 보낸다.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5일 안창호의 전보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
- 1919년 8월 26일 이승만의 전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그는 왜 탄핵되었나?

1919년 9월 6일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 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그러나 1923년 대통 령직에서 탄핵된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상해 를 떠난다면 대통령 직에서 탄핵 될 수도 있음 을 경고한 상태. 그러나 결국 이승만은 상해를 떠난다. 임시정부 대통령의 의무를 저버리면 서까지 미국으로 향하는 이승만. 그가 미국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 이승만의 탄핵 기사가 실린 독립신문


같은 꿈, 다른 길-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노선차이

1908년 샌프란시스코. 한반도 일본통치에 동조한 미국인 스티븐슨이 장인환에 의해 숨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한인들은 이승만에게 장인환의 법정 통역을 부탁하지만 이승만은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이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열 투쟁 때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던 이승만. 그는 이런 행위는 ‘무법한 개인행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장인환 전명운의 사진이 실린 공립신보            ▲의열투쟁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실린
                                                                   이승만의 자서전


혼란한 해방정국, 고국으로 향하는 이승만의 행보

미국에서 교육과 외교활동을 펼쳤던 이승만. 그의 나이 일흔 네 살. 조국 해방을 맞이한다. 미군정의 대대적인 이승만 환영식이 있던 날. 미군 중장 하지는 이승만이 연설하는 내내 부동자세로 서서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임정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던 때. 미군의 환대를 받으며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 그는 어떻게 미군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 이후 이승만의 행보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자유신문에 실린 존 하지와 이승만            ▲이승만의 사설정보기관(KDRK) 보고문서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승만 분단을 선택하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된다. 6월 4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단독정부에 관한 발언을 남긴다.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6월 4일>

1948년 남한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단독 정부를 수립. 이후 한반도는 분단의 역사를 걷게 된다.


이승만, 그는 그 어떤 논리로도 독재자를 미화 시키지는 못하리라!

 

이승만, 그 어떤 조작과 미화로도 정권욕에 사로잡힌 반민족적, 반통일적인 인사였다는 것을 뒤집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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