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의 어의리 섬
이두백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양어장을 건져 올리려다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염전과 농토를 건져 올리려다
집 논 밭 다 팔아 파도 밑 언막이에 밀어 넣고
8남매 자식들 학비까지 다 집어넣었으나
파도는 끝내 언막이 *절강공사를 허용치 않은 채
내 청춘과 꿈을 송두리째 삼켜버리고야 말았다.
세찬 갯바람에 인부들에게 멱살 잡히고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빚쟁이들에게 수십 년 시달렸어도
나에겐 김촌 강촌이 부촌 되고
내 자식들이 파도를 넘어서는 꿈을
칠산바다에서 어의리섬 까지 펼칠 것을 믿고 있기에
오늘도 내 넋은 즐거운 마음으로
제2고향 어의리 방파제를 서성거린다.
오늘도 내 외로운 혼은
나의 분신 어의리 파도 소리를 벗삼는다.
*절강공사: 최종물막이공사
생명을 키워가는 전주의 숲들
월백 이두백
밀림 숲이 나무와 풀, 동물과 곤충 등
뭇 생명들을 키우고 포근히 품어 안 듯이
전주에 있는 다양한 숲들 또한
다양한 생명체들 품어 안고
키우고 용틀임하게 한다.
배달민족의 전통 삶의 공간을 잇는
한옥 숲들은
수백 년 선조들의 역사와 이야기들을
집집마다 골목마다 다양하고
재미있게 풀어놓아간다.
서천교, 숲정이, 전동성당, 초록바위,
치명자산, 풍남문 등 천주교 성지 숲들은
스스로 배워오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세계적으로 모범이 된 신앙의 역사로
순례 객들을 지속하여 부르고
순례객들의 심혼을 영원의 장으로 이어준다.
글을 좋아하고 글을 즐겁게 쓰고
글을 다양하게 발표하고
교류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문학의 숲은
글을 통해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과도경쟁사회의
후유증을 극복하게 하고
인간성의 회복을 촉진시키고
메말라가는 가슴을 단꿈으로 채색해 준다.
전북과 전주에 대한 좋은 추억 이어가기
이두백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건물 남쪽은 전남이요 북쪽은 전북이었다. 또한 초등학교 인근 내가 살던 마을도 전남 쪽은 반월마을로, 전북 쪽은 월성마을로 불렸다. 그러나 이어진 마을이어서 두 마을 민들은 생활공간을 많이 공유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어느 날 행정구역을 따라 동기동창생들 몇이 전북 고창 쪽의 초등학교로 옮겨갔다. 그 이유가 의아했고 멀리 떨어지게 되어 섭섭했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엔 전북 쪽 초등학교로 옮겨간 친구들과 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혹은 명절 때 어울리며 우정을 즐겁게 나누곤 했다.
광주광역시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는 우연히 이리여고에 다니는 여학생과 펜팔친구가 되었다.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기에 즐거운 꿈과 정서를 편지로 많이 교환했다. 전주 성심여고로 전학 가서도, 편지를 즐겁게 많이 교환했고 크리스마스 때 선물이나 내 고교졸업 때 여러 선물을 보내줘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게 했다. 고교 졸업 후 서울철도국 산하 역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할 때, 용기를 내어 그 여학생 주소를 기억하여 찾아가 만나보기도 했다. 기차를 무료로 승차할 수 있었기에 김제군 백구면에 소재한 어느 기차역에서 가까운 마을이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간 셈이었지만 펜팔여학생 부친하고 마주 앉아 점심까지 배려해 주었다. 그래서 2008년 첫 수필집을 냈을 때, 고교시절 즐겁게 편지 나누던 즐거운 추억에 관한 글도 게재되었기에, 그때의 주소를 기억하여 2권을 보내주었다. 한권은 결혼하여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을 따님에게 보내주시라는 쪽지와 함께.
대학생활 중에는 유네스코학생회 동아리활동을 하였는데, 전남북 대학들 연합모임을 갖곤 했다. 거기서 만난 전북대 여학생의 세련되고 멋진 모습에 호감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전북과 관련된 좋은 추억들은 쌓여져 왔다.
30여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서울 어떤 문학단체 모임에 전주에서 참여한 분이 있었다. 매우 반가웠다. 얼마쯤 지나서 전주에 갈 기회가 생겼다. 형제자매 및 자녀들 모임에 참석한 둘째딸이, 모임이 끝나자 전주한옥마을에 가보기를 청했다. 그래서 시간이 되는 몇몇과 처음으로 전주한옥마을을 가봤다. 전주에서 교사로 일하는 둘째딸 친구의 안내를 받으며 처음으로 고풍스러운 전주한옥마을을 거닐어 보니 매우 넓고 다양해서 좋았다. 특히 몇 백 년 전의 역사여행을 한 듯이 좋았다.
그 다음에 문우들과 같이 참석할 문학행사가 있어 전주에 또 갔다. 끝나고는 전주대 은행나무길을 찾아갔다. 전북대에 다니던 여동생의 둘째아들을 만나 자취생활하며 지내는 대학생활의 애환과 진로에 대해 여러 얘기도 나눴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 몇 년 전 서울의 문학단체 모임에서 만났던 그 여자 분에게 연락을 했고 반갑게 만났다. 환담하며 커피도 한잔 같이 마셨다. 그것이 ‘문학의 숲’ 카페 참여로 자연스럽게 또 즐겁게 이어졌다. 그리고 2017년 향교에서의 시화전과 시집<시인의 숲>, 2018년 시선집<시인의 마을>발간에 동참하게 되었고 2020년10월 24일 최명희문학관에서의 행사에도 즐겁게 참여하며 좋은 교류를 잇고 좋은 추억들을 쌓아가고 있다.
문학의 숲 행사에 참석하면서 뵙는 분들과의 환담도 즐거웠다. 고 정기환 고문님과 환담 나눌 시로 기억된다. 완주군 구이면에서 오셨다기에 모악산에 대해 이것저것 여쭤봤던 것 같다. 6.25가 나기 전인 1949년에, 내가 겨우 두 살 된 영아로 엄마 등에 업혀와서 모악한 기슭에서 피난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내 부친께서는 6개월 더 전에 이미 피난을 와 계셨다는데 어지러운 세월에 대한 궁금증이 간혹 증폭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