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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국에세이과 영국희곡의 두 갈래 오솔길
몽테뉴 스타일의 비문학적 성격에서 비켜난 에세이의 울창한 상향길,
세익스피어 작품의 범위와 질을 극복하지 못한 희곡의 하향길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희곡과는 달리 에세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그러나 프랑스 몽테뉴의 『수상록』을 에세이의 원조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영국 에세이의 원조는 그보다 17년 늦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수상록』을 꼽는데, 사실상 에세이는 진화해왔다고 할 수 있다. 몽테뉴의 에세이는 일반산문으로 출발해서 몽테뉴 이후 베이컨에서 문학적 산문으로, 다시 베이컨 이후 태어난 찰스 램에서 현대적 의미의 완전한 문학장르로서의 에세이로 진화 변형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몽테뉴에서 베이컨까지만 하더라도 에세이는 하나의 완전한 장르를 형성하기까지 문학과 비문학의 모호한 자리, 경계선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영국에세이는 C.램 이후, W.해즐릿, L.헌트, T.드 퀸시 등의 유명한 에세이스트가 배출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램의 『엘리아 에세이집』(1823)은 생활인의 여유와 철학이 깃들어 있으며 신변적, 개성적 표현이면서도 인생의 참된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영국적 유머와 애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인생은 갈등의 연속이다. 그 갈등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의 갈등도 끊이질 않는다. 동서고금의 모든 예술작품은 바로 ‘갈등’이라는 ‘관계’의 표현이다. 그것이 충돌하면서 생성되는 장르가 에세이고 연극이다. 에세이가 문자로 표현한 관계의 예술이라면, 희곡은 연극이라는 동작을 통해서 표현한 관계의 예술이다. 한마디로 희곡을 정의 한다면 ‘관계의 갈등을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 호소하고 싶은 것을 배우들을 통해서 구체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극’이란 '갈등'이라는 긴장과 대립의 요소를 가지고 존재하며 달려 나가는 이야기 매체이다. ‘극’ 개념에 관한 논란은 에세이에 비하면 없는 편이다.
그러나 영어의 에세이는 사실개념으로서, 우리말의 ‘수필’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에세이뿐만 아니라 소논문, 비평가의 평론, 신문이나 잡지의 사설과 칼럼에서 인문서적의 제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에세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의 몽테뉴로, 1580년에 『수상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사실 몽테뉴식 에세이는 오늘날 가치개념으로 보면 비문학적 산문에 가깝다. 영국에서는 1597년에 베이컨이 주로 명예, 진리, 부 등의 주제를 다룬 금언적인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수필집』(The Essays)>을 내면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에세이가 문학양식으로 변모한 것은 사실상 베이컨식 에세이로 변모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이 베이컨식 에세이 또한 현대적 수필시학의 관점에서 완전한 문학장르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몽테뉴의 에세이는 ‘사실적 소재’에 대한 ‘사실적 토의’에 그침으로써 비문학적 에세이를 지향하고, 베이컨식 수필은 ‘사실적 소재’에 따른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으로 변용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어쨌든 별다른 구분 없이 시작한 두 가지 다른 양식으로서의 에세이는 17세기 영국에서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성의 시대라 할 수 있는 18세기에는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의 급성장으로 새로운 에세이 형식이 확립되었다. 특히, 애디슨과 스틸은 1711년에 일간지 『스펙테이터』를 공동으로 발간하여 많은 에세이를 발표하였다. 이 당시의 에세이의 소재는 대부분 당시의 사회적 관심사였으나 작가의 개성을 반영하는 주관적 특성은 간직하고 있었다. 낭만주의 시대는 보편성보다 개성을, 합리성보다는 환상적인 것을 강조하여, 개인적인 문학양식인 에세이가 인기 있는 장르였다. 영문학의 진수를 에세이에서 찾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문학에세이 작법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 만들기에 있다고 하겠다. 본격수필의 작법이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 창작에 있는 이유는 시나 소설과 달리 에세이는 태생부터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의 문학으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태생적 특징은 에세이가 문학적 에세이로 진화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는 ‘사실의 소재’에 대한 ‘사실적 토의’를 하는 데 그치지만 베이컨식 에세이는 ‘사실의 소재’에 대한 창조적 구성작업, 즉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으로 변용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문제는 베이컨식 에세이가 몽테뉴식 에세이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지 이 또한 협의적 관점에서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희곡도 에세이도 문학이다. 문학이란 ‘한 편의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본질적 대답이며 또한 문학의 존재 이유가 된다. 문예작법의 핵심은 하나의 창조적 의미를 형상화하기 위한 모든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희곡이나 에세이나 마찬가지다. 세계를 자아화하는 서정에세이와 세계와 자아를 대결 구도로 몰고 가는 희곡의 장르가 다를 뿐이다. 과학적 차원에서 보면, 토끼는 토끼일 뿐이고, 사자는 사자일 뿐이다. 그러나 예술은 그 같은 과학적 사물존재가 아니다. 예술은 그 존재하는 양상 자체가 창조적이다. 그래서 도올은 ‘작가’에서 ‘작’의 의미는 ‘creative'라 하였고, 김지하는 문학을 ’어불성설‘이라 하였다. 따라서 문학에세이는 동양시학의 ’언불진의, 입상진의‘, 즉, 개념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형상적으로 체험하는 편이 보다 우수한 창조성을 가진 작품이 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필자는 ’이것‘을 ’저것‘으로 하는 치환원리가 제대로 적용되고 있고, ’세계의 자아화‘란 서정원리가 시학으로 작동되고 있는 에세이인 영국에세이의 진수를 파헤쳐보고, 곁들여 영국희곡의 위치도 같이 점검해 보고자 한다.
II. 영문학의 진수 -영국에세이
프랑스의 비평가 알베레스는 “에세이는 그 자체가 원래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로 되어진 문학”이라고 하였다. 이 알베레스의 말에는 지성을 기반으로 한 것은 몽테뉴의 비문학적 속성, 그리고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는 찰스 램의 문학적 속성이 다 포함되어 있다. 영문학의 진수가 에세이에 있다고 하는 이유는 영국수필이 정확히 알베레스의 지적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에세이스트는 찰스 램을 위시하여 해즐릿, 헌트, 드 퀸시, 콜리지 등이었다. 특히 찰스 램은 1820년에 『런던 매거진』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성적이며 유머 넘치는 서정에세이를 싣기 시작한 에세이스트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작가다. 그는 자신의 필명을 따서 『엘리아 에세이집』(Essays of Elia)>이라는 이름으로 1823년에 제1집을, 그리고 1833년에 제2집을 출판하였다. 영국의 에세이스트 H. 리드는 그의 <영국산문론>에서 "에세이란 심중에 잠재되어 있는 관념이나, 기분 정서를 표현해 보는 일종의 시도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영국에세이의 서정성에 방점을 찍는 언술이라 하겠다.
19세기 초기에는 새로운 문예 비평지들이 출현하여 문학적 에세이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특히, 잡지의 출현으로 이전에 정기간행물에서 문제가 되었던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좀더 길고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격변의 빅토리아 시대는 민주주의의 발달과 함께 급속한 경제성장과 불황, 극심한 빈부의 격차로 몸살을 앓았으며 과학의 발달은 새로운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에세이를 통해 당대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대표 주자로 카알라일, 러스킨, 아놀드, 페이터 등이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형식의 에세이가 등장하였다. 독자들은 과학 및 통신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지식과 정보의 홍수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따라서 급격한 사회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전문화된 신문과 잡지의 칼럼이었다. 이 시대에 대표적인 에세이스트로는 정기간행물을 중심으로 활약한 가디너, 밀른, 린드 그리고 소설가인 스티븐슨, 체스터톤, 로렌스, 헉슬리, 철학자인 러셀 등을 들 수 있겠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 – 1626)은 영국 에세이의 아버지라 불리워진다. 몽떼뉴로부터 ‘essay’란 이름을 빌려와 『에세이집』(The Essays, 1597, 1612, 1625)>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불완전하지만 에세이를 하나의 문학형식으로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치밀하고 간결한 글 가운데 주도면밀한 처세의 요체를 담은 에세이는 영문학에서 전무후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베이컨의 『에세이집』은 판을 거듭함에 따라 관심을 달리하고 있는데 베이컨의 에세이를 통하여 한 인간의 인생경로를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초판에서 <학문론>을 들고 나와 청년들에게 출세의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하면, 제2판에서는 점차 정치적 사교적인 문제가 중심 테마가 되었고, 제3판에서는 베이컨이 노년에 이르러 부귀를 누리게 되어서인지 은퇴생활의 안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학문>, <야심>, <사랑>, <여행>에서 그의 체취를 맡아 볼 수 있다.
몽테뉴가 명상적이고 관념적인데 비해 베이컨은 경구적이며 객관성을 띠고 있다. <학문>에서는 학문의 효용성에 대해 논리 정연하게 설파하면서, ‘나(I)’라는 말이 한 번도 쓰지 않는다. 이는 객관성을 견지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런 식으로 마음의 모든 결함에는 거기에 알맞는 처방이 있게 마련이다.’라는 결말처리나, 발단부의 ‘학문은 이야기할 때 장식품이 되며,’ 등의 언술은 에세이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흔히 에세이의 문학성을 서정성에 두고 있으나, 베이컨의 에세이는 지적이거나 논리적이다. 그렇다고 문학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떤 작품들은 인간의 문제가 담기면서 공감을 준다. <야심>이란 수필의 문학성은 발단부 진술부터 예약되어 있다. 이 에세이는 베이컨 스타일이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에 있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이 문학성에 근접해 있다고 하겠다. “야심은 담즙과 같다. 이것은 그 체액의 흐름이 막히지만 않는다면 사람을 활동적이고 열성적이고 민첩하며 부지런하게 한다. 그러나 막혀서 제대로 흐르지 못하면, 바싹 말라 해로운 독성을 띠게 된다.”는 진술은 이 에세이의 백미다. “사랑은 열어 놓은 가슴 속으로만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감시가 허술하면 단단한 방책으로 둘러싸인 가슴의 문도 열고 들어서는 것이다.”란 표현은 영국 에세이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조셉 에디슨(1672-1719)은 스틸이 발행하는 『태틀러』지에 기고하다가, 후에 그와 둘이 일간지 『스펙테이터』를 창간하여, 계몽적인 논설과 함께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에세이를 발표하였다. 그의 에세이는 교도의 의미가 있었지만 당시 세상의 모순을 소재로 한 경쾌한 풍자문이 많았다. 『스펙테이터』 제7호에 실렸던 <민간의 미신>을 번역하여 싣는다. <민간의 미신>에서는 사람들이 미신을 믿음으로써 일어나는 폐해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이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당한 어처구니없는 사례를 소개하고, 자신의 확고한 신앙생활을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다.
리처드 스틸(1672 - 1729)>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영국의 시민계급이 형성되는 시기여서 이들의 지적욕구를 채워줄 것에 착안하여 『태틀러』를 창간하였다. 이 신문이 제271호로 폐간되자, 다시 에디슨과 함께 일간지 『스펙테이터』를 창간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의 신문은 오늘과는 달리, 뉴스도 실었지만, 계몽하는 논설이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그 논설은 오늘날의 사설과는 달리, 에세이 같은 필법으로 글을 썼으므로, 영국의 에세이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태틀러』지 제181호에서 실렸던 에세이다.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장점을 설명하고 있지만, 한 줄 한 줄 정신차려 읽지 않으면 작가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그리 쉽지 않은 작품이다.
찰스 램(1777-1834년)은 런던에서 출생하여 가장 런던을 사랑한 에세이스트이자 시인이다. 동창인 콜리지는 찰스 램의 평생 동안 문학적 동지로서나 친구로서 절대적 존재였다. 콜리지가 세상을 뜬 다음해 찰스 램도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가정적으로는 매우 불행하였는데, 특히 1796년 누이인 메리가 정신병의 발작으로 어머니를 살해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40년간 누이를 간호하며 살았다. 물론 앤 시몬스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나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실의에 빠져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다. 1820년부터 『런던 매거진』에 '엘리아'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에세이들을 모았다. 짙은 문학적 향기와 세밀한 관찰을 통해 유머와 페이소스를 버무린 문장으로,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인간에 대한 너그러움이 애잔하게 흐르면서 유머와 위트가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문에서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1820년에 창간된 『런던 매거진』지에 엘리아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에세이다. 그의 문체는 이 인물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기능 속에서 다분히 개인적이고 상투적인 것이 되었으며 작법은 단순하기는 하지만 결코 평이하지는 않다.
찰스 램의 대표적 에세이 중의 하나인 <옛 도자기>에도 그의 숨결이 담뿍 배어 있다. 누이와 함께 차를 마시며, 찻잔에 있는 그림에 대해 말하고 아울러 지난날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하는 이야기가 가슴을 훈훈하게 해준다. 우리들 마음 속의 잔잔한 물결까지도 놓치지 않고 묘사해내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에세이의 진수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찰스 램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누이를 간호하였다. 찰스 램이 중국산 옛 도자기의 찻잔에 있는 그림을 묘사하는 수법도 감탄할 만하다. 에세이가 단순한 신변잡기라 하더라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 에세이가 될 수도 있고 잡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할까. 그러나 이러한 끝없는 상상력이 찰스 램의 에세이에 깊은 맛을 더해 주고 있다.
해즐릿(1778-1830)의 <여행길 떠나기>는 『New Monthly Magazine』에 처음 발표되고, 뒤에 에세이집 『Table Talk』에 수록된 것이다. 이 에세이는 스티븐슨으로 하여금 <도보여행>을 쓰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해즐릿은 찰스 램 남매와 친교를 맺어 램 집에서 가졌던 모임에도 자주 출석하였다. 그는 정열적이고 과격하여 다른 사람과 융화하지 못하였으나, 1812년부터 런던에 정착하면서 문학, 연극, 미술비평, 문학 강연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해즐릿의 ‘여행길 떠나기’는 혼자 즐기는 국내여행을 예찬한 글이다. 한줄 한줄이 시를 쓰듯 써져 있어서, 흘깃 읽고 지나칠 수 있는 가벼운 문장이 아니다. 좋은 수필은 조곤조곤 시행을 음미하듯 조용한 자리에서 읽고 묵상할 만한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스티븐슨(1850 – 1894)은 『보물섬』, 1882)과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1886)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와 에세이를 모은 『소년소녀를 위하여』에 실려 있는 <도보여행>은 해즐릿의 <여행 길 떠나기>를 읽고 쓴 것으로 평생을 유랑하면서 기행문도 많이 썼지만, 특히 도보여행을 예찬하고 있다. 스티븐슨은 해즐릿의 에세이를 읽고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에세이에서도 해즐릿의 <여행길 떠나기>를 극찬하여, ‘너무도 훌륭하여, 이 글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마땅히 세금을 부과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해즐릿의 에세이집 한 권은 여행길 호주머니 책으로서는 최고라고 격찬하고 있다. 해즐릿은 ‘산보하면서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시골에 가면 시골처럼 느긋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바로 이 말이야말로 도보여행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가디너(1865-1946)는 에세이스트로서 그의 필명은 ‘Alpha of the Plough’이다. 인물평을 모은 『예언자, 사제 그리고 왕』, 1908, 등을 비롯하여 『해변가의 조약돌』, 1927, 『바람 속의 잎사귀들』, 1918, 등 여러 권의 수필집이 있다. 그의 에세이는 ‘깊은 교양과 건전한 사상에서 우러나온 유머와 기지를 특징으로 하고 있고, 사상이나 교훈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룰 때에도 일화를 들어가며 재미있게 표현함으로서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그의 에세이는 경쾌하고 교묘하면서도 치밀하고 위트에 넘치는 것이 특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품에 <우산의 도덕에 관하여>, <동승자> 등의 에세이가 있다. 가디너의 에세이에서는 신변잡기이면서도 그 안에 청량제가 들어 있어서 읽는 사람에게 잔잔한 미소와 강요하지 않는 깨달음을 느낄 수 있다.
<우산 도덕>에 관한 글은 우산, 책, 기차표 그리고 모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양심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 심성을 잘 지적하고 있다. <호주머니와 잡다한 것들>에서는 호주머니를 싫어하고, 하이힐을 신고 뒤뚱거리며, 등 뒤에 단추를 달아 남들의 도움없이 옷을 입거나 벗을 수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가디너의 에세이는 읽고 나서 미소를 금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일상생활의 지혜도 번득인다. 깊은 지적 쾌락을 주는 에세이 못지않게 값진 작품이 아닐까. 특히 세상살이가 복잡하여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 스티븐슨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가벼운 산보 길에 나서면서 손에 들고 가는 가디너의 에세이집은, 노인들 지팡이 못지않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로렌스 (1885-1930)와 체스터턴 (1874-1936)는 소설가다. 수필 <알맞는 여성상을 부여하세요, 1929)>에서 로렌스는 ‘현대 남자들은 여성을 진정한 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기를 실패한 바보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의 찬미자라는 그에 대한 선입견과는 달리 여성을 한 인격체로 보고 있다. 체스터턴은 영국 런던에서 출생한 소설가로, 약 80권의 책을 썼으며, 수백 편의 시, 200여 편의 단편소설은 물론 에세이도 4,000여 편에 이른다. 체스터턴의 에세이는 기발한 착상, 풍자와 역설로 유명하며, 다루는 소재도 어린이, 전쟁, 자동차 등 다양하다. <독서에 관하여>에서는 “어떤 새로운 사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결국 이미 옛날 있었던 사상들의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헌트(1784 - 1589)와 드퀸시(1785-1859), 낭만주의 시인들과 함께 어울렸던 두 사람의 작품을 통해 당시의 산문(헌트의 수필과 드퀸시의 비평)의 냄새를 맡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헌트는 소설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특히, 평론과 에세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추운 날 아침의 기상>에서는 겨울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 갖은 궁리를 다 해대는 애교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추운 날 침대 속에서 꾸물거리는 것을 미덕으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갖가지 이야기들이 우리들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올려놓기에 충분하다.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인 드퀸시는 맨체스터의 상인 아들로 태어났다. 1821년 『런던 매거진』에 발표한 <어느 아편 중독자의 고백 , 1822>은 그의 출세작으로 아편중독자인 자신의 경험을 엮어 아편이 주는 쾌락과 남용에 따른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매우 시적일 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한 산문으로 손꼽히고 있다. 문학비평가로서 드퀸시는 〈‘맥베스’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 1823〉라는 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런던 매거진』에 실린 이 글은 문학비평을 에세이식으로 썼으며, 심리적 통찰이 뛰어난 작품으로 셰익스피어 비평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III. 현대 영국희곡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는 영국의 세익스피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세익스피어에 대한 소개는 구태의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와 동시대의 극작가 Ben Jonson은 세익스피어에게 받친 헌시에서 세익스피어를 ‘한 시대의 작가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인물이었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영국희곡의 변천사를 1) Shaw까지, 2) Shaw 이후 1950년대까지, 3) 1950년대 이후로 삼 단계로 나누고, 그 전개과정과 특성을 세익스피어와 관련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6세기 르네상스의 영향 아래 세익스피어를 정점으로 한 영국극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 질에 있어 점차 하향추세를 보여 왔다. 그러나 하향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19세기말 근대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이 극에 있어 중요한 표현수단이 되기까지 약 3세기 동안 ‘거실 희극’이라 불리는 영국 특유의 극 전통을 형성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익스피어가 지닌 그 엄청난 힘에 비해 볼 때 그 밖의 여러 잡다한 조류나 추세는 질적으로 떨어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더구나 18세기 말, 19세기 빅토리아시대에 들어 영국극장은 전유럽에서 퍼져오는 멜로드라마의 물결로 뒤덮였다. 이러한 성향은 예술성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하락할 대로 하락한 무대의 실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극의 표현수법에 대한 추구로 눈을 돌리게 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소위 모던 리얼리즘이라 부를 수 있는 극 표현방식인 것이다. 이같이 극과 공연에 있어 새로운 양상이 대두된 것은 18세기말 19세기에 유행했던 로맨틱한 성격의 극에 대한 의식적 반발이었고 하겠다.
한편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중산층을 상대로 극작을 하게 된 극작가들은 그 관심을 사회문제, 사회개혁에로 돌리게 되었다. 진지한 극작가들의 손으로 씌어진 그러한 극들은 사회여론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려는 작가적 의도와 함께 실질적으로 사회개혁에 한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유럽극작가들의 사회참여가 영국극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하여 T.W. Robertson은 1870년대에 일련의 사회극을 썼는데, 그것은 사회의 실제 문제뿐만 아니라, 뒤를 잇는 A.W. Pinero, Henry Arthur Jones, Bernard Shaw, 심지어 Oscar Wilde 등의 작가들에까지도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그 같은 ibsen적 분위기가 그대로 자리잡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Shaw야 말로 극을 사회에 대해 설교하는 데 가장 효과적 매개체라고 생각한 극작가였다. Ibsen이 시대정신의 변화에 민감했던 만큼 Shaw도 19세기말 모든 사상을 섭렵했던 전형이었다. 폭넓은 영향력의 수용과 그것의 독창적 소화를 거쳐 나온 비판능력과 방대하고 장기간에 걸친 작품활동 등을 감안할 때 Shaw를 영국 근대 사실주의 작가의 선봉으로 가장 높고 큰 봉우리로 꼽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실상 20세기 초 영국극은 극 이외 다른 장르와 비교해 볼 때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뚜렷하게 떨어지고 있다. 더구나 유럽대륙 혹은 미국과 비교해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유럽에서는 Ibsen 이후 Chekhov, Strindberg, Pirandello, Brecht, Jarry 등 기라성 같은 극작가들이 속출, 그들 나름대로의 든든한 극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미국의 극은 Eugene O’Neill, Tennessee Williams, Arthur Miller 등에 힘입어 끊이지 않고 주요한 극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기껏해야 G. B. Shaw를 A급으로 꼽은 후에는, 시인이자 비평가를 겸한 Eliot, 그런대로 영국적 색채가 강한 Noel Coward 등 불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뿐이다.
London에서는 거의 매일 같이 극이 상연되었고, 대부분의 연출가, 배우들의 열망에 찬 눈초리는 London을 향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것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묵은 것에의 향수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London의 극장이 Shakespeare의 덕을 많이 보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극장뿐 아니라 극작에 있어서도 20세기에 들어서면서까지 Shakespeare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거나 깨뜨릴 수 없었던 Shakespeare 후광 때문에 영국 극작가들은 Shakespeare 식으로 극작을 하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그 중 하나가 시극을 쓰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사실주의극에 ‘시’가 정착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시극이 그 방향을 Eliot나 Yeats 식으로 돌렸을 때 현대의 시극은 어느 정도까지 제자리를 잡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극이 항상 성공할 강력한 시적 영상과 고양된 감흥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산문으로 씌어지긴 했지만, 섣부르게 만든 운문극보다 훨씬 더 시적이라 부를 수 있는 극은 아일랜드 극작가들의 손에 의해 씌어졌다. 실상 지역별로 따지자면, 근대연극의 기운이 진정으로 활성화된 곳은 London이 아니고 Ireland였다. Ireland에서의 근대연극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불과 10년간을 사이로 활성화되었다. W. B. Yeats를 정점으로 해서 그 주위에 모여든 대표적 극작가를 든다면 J. M. Synge과 Sean O’Casey를 꼽을 수밖에 없다.
20세기에 들어 50년대에 이르기까지 실상 영국극계는 획기적 주목을 받을만한 사건이 거의 없었다. 다라서 Shaw가 장수한 덕분으로, 그의 마지막 후광을 받아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영국 연극사의 종선을 긋는 작업을 할 때는 19세기 말부터 극작을 시작한 Shaw로부터 거의 반세기를 뛰어 넘어 1950년대로까지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또 30년대에는 순수하긴 하나 대중성이 강한 극을 쓴 극작가들이 있었다. 그 중 Somerset Maugham과 Noel Coward등을 그 대표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유머 감각을 moralist의 입장에 서서 발휘, 희극 속에서 날카롭게 사회풍자를 하는 데 성공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연극성이 강한 희극, 혹은 예술성은 높으나 행동이 극히 억제되 있어서 때로 무대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 시극 이외의 특기할 만한 일은 1955년, 56년에 가서야 일어나게 된다. 2차 대전 후 짧은 시기이긴 하나 유럽극계는 지나치게 실험적 양상을 띄게 되었다. 표현주의, 상징주의에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과 같은 극단적인 예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몸부림을 보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시대성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2차 대전이 준 파괴적 영향이 너무나도 커서 쉽게 그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없었음을 뜻한다. 이때 영국극계에 그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이 John Osborne의 ‘Look Back in Anger’였다. 이 극은 주로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반항극이었으며, 따라서 당시 저널리스트들이 즐겼던 ‘Angry Young Man’이란 딱지를 붙이게 되었다. 극장이 젊은 층의 관객으로 하여금 열정적으로 무대를 향해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일군의 젊은 작가들을 유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John Osborne과 함께 Arnold Wesker, John Arden, Harold Pinter 등을 20세기 중엽 영국극이 부활했던 시기의 중요한 극작가로 꼽을 수 있다. 가장 새로운 면모와 창의성을 지닌 작가를 든다면 당연히 Harold Pinter를 들 수밖에 없다. Pinter는 리얼리즘극이 지닌 논리와 형식을 깨고 새로운 극을 쓰고자 하였다. 부조리 연극의 대표작가인 대륙적 성격을 지닌 Becket, Ionesco와 Pinter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 보면,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행된 소위 anti-play(반극) 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부조리극은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생의 ‘무의미와 공허’를 전후 세대에게 전달하는 데 매우 적합한 표현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anti-play의 기수는 루마니아 출신의 극작가가 Ionesco이다. 그의 극의 의미는 바로 부재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Pinter의 극은 드러내는 극이 아니다. Becket와 Ionesco가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은 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 불안이 그의 극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Pinter는 Becket와 Ionesco처럼 웃음과 공포를 결합하고 있긴 하나, 언어적인 면에 있어 더 예민한 귀를 지닌 그는 그들보다 더 훌륭하게 목적을 성취하고 있다고 Norris Houghton은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IV. 로그아웃
모든 문학작품의 의미는 그 구조에서 나온다. 독자를 감정이입의 세계로 인도하는 미적 울림도 기본적으로는 작품구조가 만들어내는 예술적인 공감의 힘이다. 이러한 구조의 힘은 평면층에서는 단어와 문장들의 결합방식에서 창조되지만, 입체적으로는 이야기 요소들의 예술적 결합에 의해 생성된다. 따라서 작가가 작품의 미적 구조에 대하여 무관심할 경우, 에세이작품은 허약한 울림구조 속에 갇히게 된다. 영국의 문학적 에세이들 특히 베이컨식 에세이는 에세이 본래의 특징을 가지면서 비평적인 요소, 우리의 서정에세이와는 좀 다른 지적인 성격을, 그리고 찰스 램 스타일의 에세이는 지적인 성격과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를 두루 갖추어 영문학의 진수로 평가받고 있다. 서양의 에세이사로 볼 때, 제대로 된 문학적 에세이로 진화 변형되기까지 몽테뉴 사후로 52년이 경과되었던 것이다. 또한 영국 연극사의 종선을 긋는 작업을 할 때는 19세기 말부터 극작을 시작한 Shaw로부터 거의 반세기를 뛰어 넘어 1950년대로까지 갈 수밖에 없다. 멜로에서 사실주의극, 이어 시극으로 변화를 거듭하다가 20세기 이후 반리얼리즘적인 저항극이 나왔지만, 이 또한 16세기 세익스피어 작품의 질을 뛰어 넘을 수 없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에세이는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다. 에세이의 기원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영국에세이도 예외밖에 존재할 수 없다.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 작법과 ‘문학적 에세이’ 작법은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서 갈라지게 된다. 몽테뉴의 에세이라면 소재에서 어떤 주제를 끌어내든 그 주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사유 또는 토의를 하게 될 것이다. 한국문학통사를 썼고, 국문학 이론을 이끌고 있는 조동일 교수는 에세이장르를 ‘교술’이라고 정의하고, 이런 몽테뉴와 베이컨식 스타일의 ‘이슈를 겨냥하는’ 에세이가 좋은 작품이라고 했지만,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스타일의 에세이는 개념적 사고와 논리적 문장을 통하여 주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얻고자하기 때문에 비문학적이다. 그러나 에세이는 예술이다. 찰스 램 이후 에세이스트들은 주제를 개념적,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런 차원에서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와 찰스 램을 필두로 시작된 영국에세이, 즉 문학적 에세이는 다른 것이다.
참고문헌
김미애, <현대영국희곡>, 『영어영문학의 이해를 위하여』(김진만), 법문사, (1986)
김철교, <영국수필문학의 진수>, 『창조문예』 1월호~12월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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