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 (托鉢) 수도회(修道會)
김광한
탁발 (托鉢) 수도회(修道會)
승려가 마을을 다니면서 음식을 구걸하는 것을 탁발(托鉢)이라고 한다. 이를 걸식(乞食)으로 번역하며 지발·봉발(蓬勃)이라고도 했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탁발로 통했다. 탁발은 인도에서 일반화되어 있던 수행자의 풍습이 불교에 도입된 것인데, 중국·한국의 불교에서, 특히 선종(禪宗)에서는 수행의 일환으로도 간주된다. 본래의 취지는 수행자의 간소한 생활을 권장하기 위한 한 방법이기도 했다.
소승(小乘)불교국인 태국 라오스 등 동남아에서는 의무적으로 몇개월동안 승려생활을 하면서 탁발을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음식이나 물건을 공양한다.우리나라의 경우 최대 종단인 조계종에서는 이 탁발을 승려의 품위문제로 금지시켰고 특별한 경우에는 종단의 허가를 받게 되어있다.목탁을 두들기면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탁발하는 승려의 대부분이 가짜이고 생계를 위해 승려노릇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과거 종교를 삶의 최상위로 생각할 때는 감히 가짜 승려란 생각도 못했으나 승려나 종교를 생계수단 정도로 생각하고있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가짜 승려 가짜 목사, 가짜 신부(정구사)들이 늘어나 안탂움을 더해준다.탁발은 불교에서만 있던 일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있었다.
중세 당시 진정하고 참된 그리스도교적 소망이 제국적인 교회의 현실과 상충하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삶의 방식을 못마땅히 여겨, 복음을 배반하고,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청빈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고발하며 항의했다. 이런 운동들은 주교들의 직무에 반기를 들고, 자신들만의 “가 교계제도”를 세웠다.이른바 탁발 수도회였다.주교나 사제가 세속화 되어서 수도원이나 성당이 기복 신앙의 매체가 되고 주교와 사제의 설교를 통해 물질적인 욕구를 취하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탁발 수도회를 만들었다.탁발은 수도의 또 다른 방식이었다. 한국의 정구사 신부들처럼 정치적으로 편향이 된 종북세력을 옹호하기 위한 형태가 아닌 순수한 복음의 방법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탁발수도회로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카르멜 수도회, 삼위일체 수도회, 속량회, 성모마리아 하복회, 미니모회, 하느님의 성 요한네스 구호 기사단, 튜튼 기사단 등을 들 수 있다. 탁발수도회를 창설한 위대한 두 사람은 1216년 도미니쿠스 수도회를 창설한 성 도미니쿠스(1170경~1221)와 1210년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창설한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1182~1226)이다. 그들이 죽은 지 한 세대도 채 안 되어 이 두 수도회는 유럽 전역과 아시아로 퍼져나갔고, 수사들의 수는 늘어나 수만 명에 달했다. 서유럽의 모든 대도시 곳곳에 탁발수도회가 세워졌으며, 대학에서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들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들이 신학을 가르쳤다.
이 두 수도회에 이어 13세기에는 카르멜 수도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성모마리아 하복회 같은 큰 탁발수도회가 생겨났다.청빈사상은 성 프란키스쿠스의 근본 사상으로, 성 도미니쿠스와 다른 탁발수도회 창설자들도 성 프란키스쿠스의 청빈사상을 모방한 것이 거의 분명하지만, 논란이 되기도 한다. 성 프란키스쿠스는 걸식과 자선금이 수사들의 생계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수사들이 손수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노동으로 생계비를 마련할 수 없을 때만 구걸에 나서라고 했다. 그러나 수사들은 얼마 안 가서 거의 다 영적 사역에 전념하는 성직자들이 되었고, 수도회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그들이 손수 노동하여 생계를 마련한다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그리하여 성 프란키스쿠스가 애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구걸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수사들이 최대한 청빈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하며, 토지나 고정 자산, 고정 수입원을 갖지 말고 최소한의 소지품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유지하는 것이 실제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도미니쿠스 수도회에서는 그러한 이상이 완화되거나 폐기되기도 했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으며, 계속된 개혁과 새로운 출발에 의해 그 원칙이 되살아나곤 했지만 성공은 잠시일 뿐, 얼마 안 가서 냉혹한 현실 때문에 원칙이 포기되는 것이 상례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갈라져 나간 카푸친회는 성 프란키스쿠스의 이상을 가장 성공적으로 지켜나갔으나 그들 가운데서도 일정한 정도의 완화조치는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 대사전 인용>
옛날 신부들은 자신의 신앙생활과 곁들여서 복음 전파라는 사명 때문에 결코 바깥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교회는 하느님의 집이고 이 집은 동시에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5년 정도에 한번씩 이동하는 사제들은 어디를 가건 그곳이 하느님의 집이라고 여겨 감사의 마음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생활했다.청빈의 삶을 실천하고자 애썼다.신자들로부터 어떤 반대급부적인 것을 생각도 하지 않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성전을 청결, 간소 엄숙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기도 생활로 일관한 많은 신부들,사제관을 엄격히 통제하여 여신자들의 출입을 막았고 텅빈 성전의 전기 요금을 아끼기 위해서 일일히 돌아다니면서 소등을 하고 사제관의 보일러를 마다하고 연탄을 사용하다가 개스 중독으로 고생을 한 신부님,새벽에 일어나 성무일도를 한후 성당 마당을 돌면서 묵주기도를 하던 노 신부님,가난한 교우의 집을 방문해 성서책을 나눠주던 분,당신의 못으로 남겨진 헌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몫으로 돌려준 분,그래서 강론 시간이 기다려졌고 그 분의 강론을 일일히 적어 다시 읽는 즐거움을 가졌던 시간들이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있을뿐이다.
성서(聖書)보다 인격과 거룩함이 더 좋았던 엣날 신부님들은 이제 보이지를 않는다.그 대신 나라에 무슨 큰일이 잇을 때마다 선량한 신자들을 선동해서 반역자로 만들고 자신과 같은 북괴 추종자가 되어 길거리에서 성가(聖歌)대신 핏발선 눈으로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사드 반대 해군기지 반대, 송전탑 건설 반대 길거리 투쟁을 일삼는 요즘의 꽤 많은 숫자의 검은 의복 입은 사람들, 저 사람들이 신부가 맞느냐고 물으면 다들 가짜라고 손가락질을 해대는데 자신만은 신부라고 우겨대는 가짜들, 신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집을 더럽히는 가짜 신부 주교들,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들리지 않는가?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예수께서 성전 뜰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사고 팔고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또 물건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다.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하고 나물하셨다."
<마태오 21.12>
聖殿의 강론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오래동안 고뇌하면서 묵상한 사제들의 말씀의 장(場)이어야하는데 하느님에게 너무나 오만하고 건방진 주교나 신부들의 반역질을 하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비둘기 장수나 환전 꾼과 한통속이기 때문에 몽둥이로 쫓아내야한다.북한의 민족 역사상 ㄱ장 악질적인 악마 김정은 밑에 신음하는 동포의 참담한 삶을 외면하고 기도한번 하지 않는 신부들이 그 악마를 추종하면서 거룩한 성전에 똬리틀고 있는 살찐 자들,잡상인만도 못한 자들을 하느님께서는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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