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안의 경영인’ 고 최종현 회장 생애 전편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장학사업에는 최종현 회장 때부터 최태원 회장까지 이어져온 전통이 있다. 조건 없는 지원, 유학 전 사전교육, 유학생과의 토론 등이 그것이다. 거액의 유학비용을 지원하는 조건은 ‘국가와 사회를 위한 일꾼이 되어 달라는 것’ 단 한 가지. 절대 SK로의 입사는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장학생들에게 강조해 왔다. 해외 유수 대학의 등록금에 5년간 생활비까지 지원해준다는 파격적인 지원이었던 반면, 의무 조항은 일절 없었다.
선발된 장학생들에게 강도높게 사전교육을 시키는 것도 재단의 전통이다. 최종현 회장은 “선진국 학생들은 강의계획서와 도서목록을 미리 입수해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해 왔다”면서 “우리나라에는 아직 해외 유명대학을 졸업한 선배들이 많지 않으니 재단이 이 부분을 챙겨달라”고 당부했다. 재단은 이 때부터 미국 유명 대학을 찾아가 강의계획서를 구하고 필요한 도서를 사들였다. 또 장학생 선배들이 강의계획서와 책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동안의 노력과 정성이 쌓여 높이 5m에 이르는 재단 서고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쓰여진 전문 원서 15,000여 권이 빼곡히 꽂혀 있고, 지하 정보실에도 19,000여 권의 장서가 더 보관돼 있다고 한다.
최종현 회장의 ‘인재보국’ 기치는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발현됐다. MBC가 청소년 대상 교양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장학퀴즈가 광고주를 찾지 못해 폐지 위기에 처하자 당시 선경이 나선 것이다. 선경은 1973년 2월 18일 방영 프로그램부터 단독 광고주로 나섰다. 당시 TV 프로그램 중 단독 광고주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청소년 지식 경연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장학퀴즈’는 기록인증기관인 KRI 한국기록원에 의해 ‘국내 최장수 TV 프로그램’으로 인증 받은 바 있다. 70년이 채 되지 않은 국내 TV 방송 역사를 감안할 때 장학퀴즈 46년 방송은 유례가 없는 대기록이다. 이후 장학퀴즈는 1996년 MBC에서 EBS로 무대를 옮겼고, 총 2300회 이상 방영됐다. 전국노래자랑보다도 역사가 더 길다고 한다.
2만명이 넘는 장학퀴즈 출신들은 학계, 재계,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 등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 오피니언 리더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장학퀴즈는 한국을 넘어 중국에서도 방영 중으로, 2000년 중국 베이징TV(BTV)에서 SK장웬방(壯元榜)으로 시작, 2016년 중국 전역에 방송되는 CCTV로 자리를 옮겨 SK극지소년강(SK极智少年强)으로 방영되고 있다. CCTV 프로그램 중 기업체 이름이 붙은 유일한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조림 사업[편집]
최종현 회장은 장학사업을 위해 나무를 심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벌거숭이산에 나무를 심어 30년 후 고급목재로 자라면 이를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하겠다"는 게 최 회장의 생각이었다.
1972년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세운 뒤 충남 천안 광덕산(500ha)을 시작으로 충북 충주 인등산(1,200ha), 영동 시항산(2,340ha), 경기도 오산(60ha) 등 4,100ha 황무지 임야를 사들이고 꾸준히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으로 키워냈다.
이는 ‘3000만평의 임야에 수익성 좋은 나무를 심은 뒤 30년 후부터 1년에 100만 평씩 벌목하면 회사 경영과 무관하게 장학기금을 만들 수 있다’는 최 회장의 선순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좋은 의도로 장학사업을 시작하더라도 회사 경영의 부침에 따라 중도에 흐지부지 될 수 있다고 우려한 최 회장이 수목사업을 통해 안정적인 재원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어수선하고 석유사업 진출을 위해 바쁠 때에도, 최 회장은 투자기간이 너무 길어 사업화가 어렵다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산을 개간하고 나무 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한국에는 기업 조림이라는 사례도 없을 때였다.
수종 선택도 미래를 보고 결정했다고 한다. 당시 국가에서는 녹화를 위해 상록수를 권장했으나, 산소 배출량이 많고 미관이 아름다우며 경제성이 뛰어난 활엽수 중심으로 선정해 자작나무, 가래나무, 흑호도나무 등 경제성이 높은 나무들을 심었다. 특히 흑호도나무는 한국에서 최종현 회장이 처음으로 수입해서 보급한 수종으로 기록돼 있다.
최 회장의 노력으로 황무지였던 4,100ha의 임야에는 현재 자작나무, 가래나무, 호두나무, 루브라참나무 등 고부가가치 조림수 40여종, 조경수 80여종 등 330만 그루가 들어섰다. 이는 여의도 면적(290ha)의 14배에 달한다. 활엽수 위주의 수종 선택에 따라 해당 조림지에서의 산소 배출량이나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막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림지에서 나오는 신선한 산소만도 매년 20만명이 숨쉴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최종현 회장의 30여년 나무사랑과 조림을 위한 노력은 사후 재평가를 받았다.
최 회장은 지난 2006년 산림청 주관 '제1회 대한민국 녹색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최 회장은 30여년간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림 육림 사업과 산림 자원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최종현 회장은 당시 기업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장기적이고 불확실한 대규모 경제림 조성사업에 뛰어들어 기업의 장기적인 공익 활동과 사회봉사를 몸소 실천했고, 한국의 장묘 문화 개선에도 큰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밝힌 바 있다. 상은 고인을 대신하여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수여됐다.
최 회장은 조림 및 산림자원화에 노력한 공로가 인정돼 2010년 경기도 포천시 국립수목원 내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되기도 했다. 당시 최 회장이 선정된 것은 기업인으로 최초였다. 최 회장의 '39년 조림 사업 꿈'이 임업계 최고 권위의 상을 통해 공인받은 것이다.
최 회장은 침엽수림 같은 속성수 위주의 획일적인 조림 방식을 탈피해 국내에 최초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활엽수 단지를 조성해 조림사업의 경제적 부가가치를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와 함께 임학 발전과 후학을 위해 충남대학교에 1,000ha(300만여평)의 산림을 연구림으로 무상 기증하기도 했다.
특히 최 회장은 한국의 장묘 문화로 전국의 산림이 황폐화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고민하던 중 임종을 앞두고 "내 시신은 화장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해 장묘 문화 개선에 앞장서 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에 따라 유가족들은 최 회장의 시신을 화장했으며, 500억원을 들여 충남 세종시 은하수공원에 화장시설을 조성, 2010년 1월에 무상 기증했다.
3. 별세[편집]
1998년 8월 26일, 자택 워커힐아파트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8세. 형인 최종건 회장의 사인과 같다. 유언에 따라 벽제화장터에서 화장火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당시 서울시민이었던 최 회장의 화장비용은 무료였으며, 반려자도 개장유골이라는 이유로 7천원만 냈다고 한다. (지금은 서울시립승화원 기준 서울·고양·파주시민은 12만원을, 그 외 지역주민은 최대 1백만원을 낸다. 자녀가 서울시민인 경우 일부 감면되며, 기초생활수급자와 국가보훈기본법에 따른 해당자만 면제된다.)
특히 최종현 회장의 화장 유언은 사회적 파급효과가 컸다. 기존 장례문화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화장이 국내 굴지 대기업의 회장의 유언으로 본격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살아 생전에 1980년대에 비행기를 타고가던 중 묘지가 많이 눈에 띄었는데, '좁은 국토에 이렇게 묘지가 많아서야 되겠는가'라고 생각한 것에서 화장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덕분에 오늘날 화장문화가 어느 정도 대중화가 된 데에는 최종현 회장의 공이 크다는 시각이 많다.
당시 SK 그룹에서 화장장까지 만들려고 했으나, 화장장은 각 지역 시설공단에서 관리하는 게 일반적인 공공재라는 특성과 대기업이 장묘 사업까지 하려고 하냐면서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흐지부지되었고, SK그룹은 세종시로 돌려서 세종시설관리공단에 기부하는 식으로 은하수공원을 만드는 것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와는 별개로, 원래 SK그룹이 서울에 만들려고 했던 화장장은 서울특별시 지방정부에 의해 서울추모공원으로 탄생하였다.
사망 20주기가 되는 2018년 8월 14일부터 24일까지 열흘간 SK그룹이 기념 사진전과 추모식 '최종현 회장, 그를 다시 만나다'를 개최했다. 특히 24일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SK텔레콤이 인공지능 AI기술 홀로그램을 활용해 최종현 회장을 재현해 주목 받았다. 이날 행사에서 최태원 회장은 대한민국 국가 경제와 SK그룹을 위해 헌신하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인재를 양성한 선친을 기리는 최종현학술원'의 설립 계획을 발표했고, 그해 중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 어록[편집]
섬유업체 경쟁자들이 줄곧 섬유에만 매달릴 때 나는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완성을 위해 줄곧 노력했다. 주변에서조차 믿지 않았던 것을 15년 노력 끝에 해 냈다. 플랜을 갖고 경쟁하는 것과 안 한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1991년, 울산 CLX 완공 이후)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유공 인수, 정보통신산업 진출 등 남들은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절대 운만으로 큰 사업을 할 수 없다. 새로운 성장동력원 확보를 위해 10년 이상 준비한 결과다. (1997년 12월 주간지와의 인터뷰)
석유개발은 한 두 해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한 두 번 실패했다고 중단하면 아무 성과가 없다. 실패에 관해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1984년, 아프리카 유전개발 실패 이후)
지금 2000억원을 더 주고 사지만 나중 일을 생각하면 더 싸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준비했으니 10년 이내에 1조~2조원의 이익을 낼 수 있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 인수비용이 치솟자 반대하는 임원들에게)
노사는 한솥밥을 먹는 한 식구다. 식구끼리 싸우면 집안이 어찌 되겠는가? 싸움은 밖에서 다른 경쟁업체와 해야 한다.
우리나라 시장경제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을 필수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공존관계다. 중소기업 도움 없이는 대기업이 성장할 수 없다. (1993년, 전경련 회장 취임 후 대중소기업협력위원회 구성에 나서며)
국가경쟁력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며 국민과 정부, 기업의 총체적 역량에 의해 좌우된다. 경제를 지배하는 정치논리가 아니라 경제를 도우려는 정치논리를 재정립하는 것이 국제화, 개방화를 앞둔 우리나라에 필요한 국가과제다. (1993년, 이코노미스트클럽에서 ‘국가경제력 강화를 위한 제언’ 강연 중)
향후 국제관계는 글로벌리제이션으로 갈 것이 분명하다. 진행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빠를 것이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제무대에서 비교우위에 설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1991년, 아시아소사이어티 초청 연설 중)
21세기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되고 SK는 세계 100대 기업 안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은 변방의 후진국이지만 인재양성 100년 계획을 세워 지식산업사회를 구축해 일등국가로 발전해야 한다. (1978년,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과의 대화 중)
우리는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다. (1995년, 울산대공원 조성을 약속하며)
인간은 석유와 비교도 되지 않는 중요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자원이다. 석유는 한 번 쓰면 없어지지만 인간의 능력은 사용할수록 향상되고 가치가 커진다.
회사 임원 일부가 “해외 유학생 장학금으로 연간 4만~5만 달러는 너무 많다”는 의견을 내 놓자 최종현 회장은 “이왕이면 최고 수준의 장학금으로 합시다. 돈 좀 아낀다고 뭘 하겠소. 그리고 돈 걱정 없어야 24시간 공부에 전념할 수 있지 않겠소”라고 답하더라. (고등교육재단 이사들과 장학금 관련 대화 중, 정범모 전 서울대 교수 회고)
“청소년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면 열 사람 중 한 사람만 봐도 조건 없이 지원하겠다” (1973년, 광고주를 구하지 못한 장학퀴즈 후원을 결정하면서)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