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이나 기억력이 더 쇠퇴하기 전에 내가 살아온 일들을 기록하여 남기려 한다. 지금부터 22년 전 ≪손가락 끝을 쳐다보고 살아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200부 정도 발간하여 배포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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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때는 글로만 쓰고 사진과 이미지를 게재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글과 사진을 함께 올리려고 한다. 서술 방법은 나름대로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우리 가문의 역사, 가족사를 연대순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성산(星山) 이씨 인주공파(仁州公派)에서 고령 관동을 거쳐 영천(永川)으로 온 영천파는 완산, 거곡, 대의, 용전 등지에 흩어져 살아 왔다. 그중 나의 조상님들은 약 200년 전부터 고경(古鏡)면 용전(龍田)리로 옮겨와 집성촌을 이루었고, 많을 때는 약 30호 정도까지 되어 성산 이씨 집성촌의 하나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많이 빠져나가고 타성(他姓) 가구가 많이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용전 마을에는 침수정이란 정자가 있다. 침수정(枕漱亭)은 제 조부祖父 (휘諱 한기漢基, 호號 괴은槐隱 1868~1945, 仁州公派 32世)께서 1926년에 고경면 용전리 마을 앞산 기슭에 세운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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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할아버지께서는 연세가 59세, 할머니는 60세로 창녕(昌寧) 성씨(成氏) 위 북안마을에서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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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1-5: 祖父님 일본 여행 때 모습
아버지(휘諱 종택鐘澤 1899~1970, 성산 이씨 대구 화수회장 역임)께서는 28세 때다. 그리고 한 해 전인 1925년에는 손자인 제 형님(根澈 1925~?)이 태어난 뒤라 아마도 조부께서는 회갑을 앞두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시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이 정자 건립에는 할아버지께서 기획, 감독을 하시고 아버지, 당숙 세 분 등 친척 친지 여러 분들이 두루 참여하신 것으로 전해 들었다. 정자가 건립된 후에는 영남 각지에서 명사들이 오셔서 이 정자에서 시와 풍류를 즐기셨다고 했다.
이곳 정자에서 그때 여러 분들이 지으신 시문은 모두 할아버지의 문집 괴은유고(槐隱遺稿)에 수록돼 있다. 이 정자의 이름 침수정의 유래에 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침수(枕漱)는 침석수류(枕石漱流)를 줄인 말이다. 옛날 중국에서 노장(老莊)사상이 풍미할 때 세속을 떠나 유유자적하던 고사(高士)들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枕石漱流(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한다)라고 하던 데서 근원을 따서 정자 이름을 지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이 정자 뒤편에는 청석(靑石)이 있고 정자 앞에는 개천(川)이 흐르고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한학에 능하셨고 효릉참봉(孝陵參奉) 벼슬도 하셨으며, 8.15 해방되던 해인 1945년 9월 이곳 본가에서 78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성품이 인자하시고 근검절약하셔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선비 같은 분이었다고 한다. 조선조 말엽에 효릉참봉(孝陵參奉)이란 벼슬도 하사받으셨고 실제로 효릉 현지에 부임하러 가셨다고 전한다. 참고로 효릉(孝陵)의 위치를 확인해 보니 현재 서울의 원당 지역에 있음이 확인된다. 할아버지는 당대에 부를 많이 축적하여 천석(千石)은 한다고 소문이 났다는데, 그 재산은 30여 호의 마을 유지, 관리에 상당 부분 쓰신 것으로 짐작된다.
예컨대 따님-나에게는 고모(姑母) 되시는 분(자천아지매)-의 가족들을 비롯한 정(鄭)씨네 가족들을 몇 가구나 ‘追谷마을’로 이주케 하여 성산 이씨에 버금가는 가구를 이루게 했고, 추곡마을 주민들의 생활 향상에도 힘을 많이 쓰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는 일제 말엽이라 나도 아버지를 따라 1944년 5월 대구 ‘삼덕동 집’에서 이곳 본가에 와 있었는데, 그해 9월에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타계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고, 7일상(七日喪)을 지내는 동안 동네 인척들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문상객들이 많이 오셔서 조문(弔問)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창면과 과수원
해방 후의 혼란과 격변에도 토지개혁은 진행되었다. 논란과 시비가 끊이지 않았지만 개혁의 작업은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에 따른 소문도 우리 집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께서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논밭은 하나도 팔 수 없다고 버티셨으나, 형님이 나서서 그래도 미리 조금이라도 팔 수 있는 것은 팔아서 일부라도 건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고 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 집은 할아버지 대에 천석(千石)은 된다고 소문이 날 정도라 영천 군내(郡內)에 논밭이 제법 많았다. 그러나 농지개혁이 된다고 소문이 요란한데 논밭의 매매가 제대로 될 리는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며칠씩 여러 곳을 다니며 조금씩 파셨다고 했다. 한번은 밤늦게 집에 돌아오셔서 밝은 표정으로 어디 가서 얼마를 파셨다고 하시며 돈을 내어 보이시던 일이 떠오른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께서는 밖에 나가 무슨 일을 하고 오시면 그 전말(顚末)을 반드시 어머니를 비롯한 식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자초지종을 자세히 순서대로 설명하셨던 일이다.
그래서 어린 나도 약간 집안일을 알 수 있었고 사물에 대한 이해력, 판단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일부 농지를 처분한 돈으로 무엇을 하실까 궁리한 끝에 과수원을 사기로 하셨다. 그래서 대구 근교의 동촌, 반야월 등지를 알아보았지만 마땅한 매물이 나오지 않아 고심하셨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옆집에 살던 황보 아무개 씨(그분의 아들 황보명호는 내 동무였다)가 가창면(嘉昌面) 냉천동(冷泉洞)에서 경영하던 과수원을 팔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상담에 들어가 인수키로 합의하였다.
이것이 잘된 결정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이 과수원 매입으로 하여 1971년 내가 이를 처분할 때까지 23년 동안이나 우리 집의 가장 큰 수입원이 마련된 계기가 되었다. 소재지가 대구 근교이면서도 발전에서 소외된 오지에 있어서 30리 거리나 되었고 오히려 동촌 방면이었더라면 개발에 따른 지가 상승의 혜택도 입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오래 남았다. 그렇지만 이만하기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일이든 희망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에 만족할 줄도 알아야겠다. 이 과수원을 마련하지 않았더라면 농지개혁 후 직접 경작하던 농지 외에는 위토(位土)밖에 논밭이라곤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어떻게 적잖은 우리 집의 가계 지출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6․25 때 우리 집 식구들이 이 과수원으로 피난 갔던 일도 잊지 못한다. 가창면 과수원은 삼덕동 집과 함께 아버지, 어머니의 추억으로 얼룩진 곳이다. 아래에 처음 나오는 사진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우리 3형제 사진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찍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형님이 누나와 나를 따뜻이 안고 찍은 사진인데, 아마도 내가 찍힌 최초의 사진이다. 짐작하건데 ‘삼덕동 집’에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찍힌 최초의 사진이리라.
이미지 1-6: 형님은 이때 경북중학생 시절인 것 같다
형님은 집안에서는 영철(永澈)로 불렸으나 공식적으로는 근철(根澈)이란 이름으로 통용되었던 것 같다. 1925년생이다. 그러나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누님은 집안에서는 금순이로 불렸으나 공식 이름은 광호(光浩)였다. 1931년생이다. 막내로 1939년생인 나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연(演)이로 불렸다. 내 이름은 할아버지께서 지으셨는데, 왜 하필 외자 이름으로 지으셨는지 모른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들은 다 이름이 두 자인데, 왜 나만 한 자로 불려야 했는지…? 늘 마음속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고 누님 출가 후에는 더욱 외롭게 느끼게 했다.
어려서 나는 튼튼한 편은 아니었다. 어머니 연세가 42세(어머니는 늘 43세에 낳았다고 하셨다) 때 태어난 결과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어머니 말씀으론 나를 잉태한 후 음식이 당기지 않아 거의 드시지 못한 적이 많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태어난 후에도 젖이 모자라 고생을 하신 얘기도 하셨다. 그때만 해도 층층시하에서 산모가 스스로 몸을 보살피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형님과 나는 14살이나 차이가 났고 누님과는 8년 차이다. 님은 뒤에 나오겠지만 6.25 동란 때 서울에 계시다가 실종된 후 행방불명으로 계속 안부가 불투명하여 결국 실종선고(失踪宣告)를 받게 된다. 아래 사진은 형님이 장가를 들어 먼저 밀양의 처가로 갔다가 삼덕동 집으로 왔을 때 사진이다. 가운데 갓 쓰고 계시는 분은 사장 어른이시다. 함자는 이상형(李象衡) 씨로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밀양(密陽)의 삼문동과 ‘퇴로마을’에 본가가 있다고 들었으나 나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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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형님이 박실 형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박실 아재는 앞에 할아버지를 일본에 모시고 가서 함께 찍은 사진도 있지만 우리 집과는 8촌간이다. 언제 봐도 우리 형님은 대단한 미남이다, 경북중학교에서 늘 톱을 했고 계속 반장을 했는데 통솔력이 남달랐다고 들었다. 형님은 특히 웅변을 잘하여 재학 중 전국학생웅변대회에 나가 우승을 했다. 그래서 당시 일본인 경북도지사가 우리 집에 사람을 보내어 축하 인사를 해오기도 했다.
다음으로 나올 사진은 어머님 회갑 때 친척, 가족들이 모여서 찍은 것으로 1958년으로 기억한다. 아버님 옆에 상무(相茂)가 서 있고 나는 병옥(炳玉)이를 안고 누님은 장남 기열이를 안고 계신다. 가장 왼쪽에는 나의 육촌 동생인 경호가 서 있다. 그 외의 분들은 이젠 모두 고인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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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진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좀 전에 찍은 사진인 것 같다. 내가 자동 셔터를 설치하고 찍었던 기억이 난다. 1970년인 듯하다. 평소 아주 건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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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음 사진은 그 즈음에 어머님이 영천 추곡마을에 가서 한두 달 계실 때 내가 상옥이를 데리고 가서 찍은 사진이다. 그때 본가는 저렇게 황폐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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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1-12: 앞산으로 올라와 침수정 정자에서 찍은 사진이다.
1939년 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누님과 함께 우리 식구들은 대구로 이사를 왔다. 그해 3월 나의 아버지는 나의 형님, 누님의 교육을 위하여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대구로 와서 처음에는 봉산동 134번지에서 2년간 살았다. 그러다가 새집을 건축하기 위해 아버님이 멀리 봉화(奉化)까지 가셔서 춘양목(春陽木)을 구입하여 직접 설계, 시공 지휘까지 하셔서 준공한 ‘삼덕동(三德洞) 집’에서 1941년부터 1975년까지 34년간 우리 가족이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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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1-15: 손자 상옥(相沃)이를 안고 계시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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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동 집의 주소는 대구직할시 중구 삼덕동 1가 28-12이다. 이 집에서 나는 34년 동안이나 살았다. 유년 시절,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이 집에서 다녔고 대학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치고 첫 직장인 제일모직에 다닐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그래서 이 삼덕동 집은 나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나는 1967년 아내와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이 집에서 처음 꾸려 나갔고 아들과 두 딸도 이 집에 사는 동안에 태어났다. 1975년에 나는 본사로 전근 발령을 받아 서울로 올라와야 했지만 ‘삼덕동 집’은 나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곳, 마음의 고향이다.
이미지 1-17: 상과대학 재학 중 동기생이었던 이영조 군과 함께 백운대에 올랐던 사진
이미지 1-18: 1963년 4월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졸업식에 참석해 준 두 친구들. 박순하와 배성호(군복)
이미지 1-19: 부산 거제리 병참기지사령부 구내에서 본부중대장과 의무실장 등과 함께
이미지 1-20: 통역장교로 같이 임관하여 서면 하숙집에서 함께 지내던 안충영(安忠榮) 소위
이미지 1-21: 언젠가 相茂네가 살던 서울 동숭동 집 옥상에서 어머님과 누님, 그리고 질부와 함께
아래 글과 사진은 별도 입니다.
‘삼덕동 집 카페를 개설한지 14년이 되었습니다.’라고 글을 올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사이 또 2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세월은 흐르는 물(流水)과 같다’던 옛말이 떠오르는 것은 2003년 8월 9일 아침 재미 삼아 카페를 만든 것이 어느덧 15년이나 되었다니 감회가 무량해서이다. 2002년 韓日월드컵 열기가 한창 달아올라 곳곳에서 “대-한민국!” 하는 응원 소리가 나던 무렵 ‘서울상대 17동기회’에서는 인터넷 공부 모임이 생겨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음 카페에 동기회 홈페이지가 생겼고, 나도 차츰 카페에 익숙해져 이듬해 여름에는 ‘삼덕동 집’까지 만들게 되었다.
이 ‘삼덕동 집’ 카페에 다 올라와 있지만 지난 15년 동안 내가 한 일 두 가지를 든다면 첫째는 친구들 모임인 삼목회(三木會)를 중심으로 국내외 여행을 제법 많이 했다. 외국으로는 주로 일본의 명소를 여러 곳 찾아다녔고 중국에도 몇 번 갔다.
아래 사진은 첫 번째 찾았던 대마도(對馬島) 이즈하라(嚴原)이다. 일본의 행정구역으로는 나가사키시 이즈하라(長崎市 嚴原)라고 한다. 옛날 조선통신사 일행이 처음 들렀던 곳이라 그때의 여러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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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론 서예(書藝) 공부이다. 시작은 역시 2003년으로 ‘예술의전당 서예아카데미’에 대학 동기 20명과 함께 등록하여, 처음에는 是軒 南斗基 선생반에서 7년간 배우다가, 艸民 朴龍卨 선생반으로 옮겨 올해까지 8년째 공부하고 있으니 통산하면 15년이 된다. 그러나 수준은 아직도 초보 단계에 머물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지만 나이 탓이려니 여기고 있다.
아래 현판은 내가 쓴 글씨를 6촌 동생(再從弟) 계호가 각인하여 추곡마을 본가에 붙인 현판이다. 여려(旅廬)는 내 아버님의 아호(雅號)이다. 여려(旅廬)란 ‘나그네가 머무는 오두막집’이란 뜻이다. 내가 사사(師事)하고 있는 艸民 朴龍卨 선생은 이 아호를 보더니, 즉석에서 무릎을 치며 참 좋은 아호라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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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文公은 ‘세월은 가고, 나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는다(日月逝矣 歲不我延)’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이젠 어느덧 80 고개를 넘고 보니 체력이 달리는 현상을 깨닫게 된다.
다음 사진은 작년 5월 5일 내 나이 80세(傘壽) 때 상옥이가 주선하여 가족들이 모두 모여 축하 모임을 함께한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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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기고 싶은 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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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2-15: 祖父, 祖母님 사진
이미지 2-16: 祖父님 일행 일본 여행 때 모습
3. 삼7회(삼성그룹 공채 7기 모임)
삼7회(三七會)는 三星그룹 공채 7기 입사 동기들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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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월 13일 저녁에 모입니다.
4.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해가 바뀌어 갑오(甲午)년에서 을미(乙未)년으로 넘어왔다. 새해를 맞으면 사람들은 친구, 친지들께 새해 인사를 하고 덕담을 나누곤 한다. 그러다가 어느새 일상(日常)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일상이라고 하는 것을 자세히 보면 항상 같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어제의 일상과 오늘의 일상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따지고 보면 다르기 때문이다. 항상 같은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래서 나의 모습이나 생각도 한결같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걸 스스로도 깨닫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불가(佛家)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것은 없으며 인생은 덧없고 허망하다고 하기도 한다.
금강경(金剛經) 제1 사구게(四句偈)는 ‘모든 상(相)이란 다 허망(虛妄)한 것이니 만약 제상(諸相)이 상 아님(非相)을 알면 여래(如來)를 보리라(凡所有相皆是虛忘 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고 했다. 여기서 여래를 본다는 것은 진리(眞理)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의 경우 어떻게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삼성(三星)에 닿아 1965년 늦가을 공채 7기로 입사, 첫 일터를 제일모직 대구 공장에서 찾은 후, 32년간 그룹의 울타리 안에서 일했다. 그러는 동안 제일모직에서 제일합섬으로, 제일합섬에서 신세계로, 다음은 삼성생명, 제일기획, 삼성카드의 순으로 전전하다 마지막에는 삼성석유화학에서 여정을 마쳤다. 이렇게 7개 회사에서 근무하다 나왔지만 지금 삼성그룹의 테두리 안에 그대로 있는 회사는 이들 7개 회사 중 3개만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과장에서 부장까지 7년간 일했던 제일합섬은 이름도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처음 이사가 되어 3년간 일했던 신세계는 그룹에서 분리돼 나갔고, 마지막 근무처 삼성석유화학은 작년 초에 이름이 종합화학으로 변경됐다고 하더니 지난 연말에는 한화그룹으로 매각됐다고 한다. 첫 일터였던 제일모직은 이젠 이름만 남았을 뿐 형체나 내용이 완전히 바뀐 다른 회사로 변해 있는 것을 감지(感知)하게 한다.
이렇게 살다 보니 나는 현역 28년, 자문역과 고문 4년 등 통산하면 32년간 三星 생활을 했다. 이렇게 사람이나 기업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현상계의 모든 것은 변화를 피할 수가 없다. 1980년대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불과 30여 년 사이에 이렇게 세상을 바꾸어 놓을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모바일로, 모바일에서 웨어러블로, 이젠 사물인터넷(IoT)이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라고 야단들이다. 그런가 하면 은행을 통하지 않고도 스마트폰으로 카카오을 통해 송금을 하는 등 핀테크(Fin-tech)가 금융 관행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런 급속한 변화의 끝은 어디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사견(私見)으로는 아무리 변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상계의 변화일 뿐 본질적인 변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건강 증진과 수명 연장을 시킨다고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어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인간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순응하며 집착을 버리고, 평상심을 유지하고 늘 마음을 비운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요사이 젊은 세대들처럼 잠시라도 스마트폰만 놓으면 불안해하지 말고 느긋하고 여유 있는 자세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러면 구체적으로 여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까? 먼저 어니 J 젤린스키의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인용한 다음 몇 구절을 읽으시기 바란다.
• 주변 환경을 바라보는 당신 자신의 눈을 바꾸면 인생의 질을 높일 수 있다.
• 아무리 우울한 일이라 하더라도 긍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 하루해가 저물 무렵엔 하루를 얼마나 잘 보냈느냐는 것만큼이나 얼마나 많이 긴장을 풀고, 웃고 즐겼는지로 판단하자.
• 세상과 더불어 행복하고 느긋하며 평온한 기분을 느끼려면, 팔짱 끼고 뒤로 물러앉아 삶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도록 관망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을 좀 더 배우자.
• 때로는 뭔가 일이 되도록 애쓰지 말고, 차라리 일이 되는 대로 일어나도록 놔둬 보는 것도 좋다.
이렇게 느리게, 느긋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것이다. 끝으로 내가 12년째 운영해 오고 있는 다음 카페 ‘삼덕동 집’에 작년에 편집해 올린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을 소개하면서 이 졸문(拙文)을 마감하려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
1. 긍정적으로 세상을 본다.
2.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3. 재미있게,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4.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생각한다.
5. 즐겨 베풀고,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한다.
6. 일부러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다.
7. 누구라도 험담을 하지 않고 칭찬한다.
8. 매일 30~40분 걷는다. 60%는 햇볕을 쪼이면서….
5. 삼목회(三木會)1
해외에 나가 있는 안정준, 도흥열 회원과 이영식, 김영기 회원이 사정상 참석하지 못했지만, 참석한 9명은 담소하며 가는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함께 나눴다. 토끼띠가 많은 우리 회원들은 辛卯年 토끼해를 보내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대구의 김상한 동문이 가고 어제는 서울의 이영우 동문이 타계했기에 먼저 간 친구들을 애도하며 그나마 살아남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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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스폰서는 순서에 따라 김봉헌 동문이 맡았다. 모임을 마치고 사정이 허락한 회원들은 한강을 건너 순천향병원 영안실로 가서 이젠 고인이 된 이영우 동문의 영전에 하직 인사를 하며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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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다수 39동문들이 먼저 와서 문상을 마치고 음복을 함께 들며 담소하고 있다. 신묘년은 가지만 다가오는 2012년 任辰年은 60년만에 오는 ‘黑龍의 해’라니 기대를 건다.
6. 삼목회(三木會)2
오늘도 이달(6월) 삼목회(三木會) 모임을 이곳 ‘고향집’에서 하고 있다. 고향집이란 이름의 식당은 많지만 우리가 모이는 삼목회는 강남구 논현동의 오래된 한식당이다. 이곳에서 39동기 몇 사람이 점심 모임을 시작한 지는 어느덧 20년이 가까워 온다.
처음 시작은 1998년 8월 故李源達 동문의 병고를 위로하러 몇몇 그와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모여 점심을 같이 하던 곳이 이곳 고향집이었고 2000년 12월 원달형이 먼저 떠나자 그때 모였던 친구들이 계속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계속한 것이 매월 세 번째 목요일이어서 三木會란 이름이 생겼다. 처음에는 김담구, 이영식, 박기룡, 유경현, 김영기, 안정준, 이영호, 이연 등이 주로 모였으나 서성영, 김상식, 도흥열, 정성진, 이광학, 김봉헌, 강원조 등으로 차츰 회원이 늘어 15명이 됐다. 그러나 이원달이 떠난 후 이영호, 작년에는 유경현, 김담구가 타계하더니 며칠 전에는 도흥열까지 떠나가 어느덧 5명이나 他界하여 남은 10명 회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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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냥 모여서 밥 같이 먹으며 얘기를 나누었으나 차츰 나들이도 하고 국내외 여행도 하며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갔다. 해외여행을 처음 한 곳은 대마도(對馬島)였다. 13년 전 이곳에 가기는 요즘같이 쉽지 않았지만, 2박 3일간의 일정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 후 우리들은 20여 회 국내외 여행을 통해 39동문들 간의 결속을 다지고 견문도 넓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가는 세월 막을 힘은 우리들에게는 진정 없는 것인가? 하나둘 떠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 자신도 떠날 준비를 할 때가 왔음을 상기하며 나날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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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7. 정귀호(鄭貴鎬) 형의 명복을 빌며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며칠 사이 갑자기 타계하는 친구들 소식에는 허망하다는 느낌이 자꾸만 엄습할 뿐입니다. 이영우, 김도생에 이어 정귀호 마저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망연자실했습니다.
매달 한 번씩 만나는 모임에 정 동문이 두어 달 나오지 않아 몸이 약간 좋지 않은 정도로 생각했는데 느닷없는 그의 부음에 접하고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정신을 가다듬어 정귀호 동문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를 처음 만났던 국민학교 4, 5학년 때부터 그에 얽힌 기억들이 하나둘씩 생생하게 살아 떠오릅니다. 그는 우리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습니다. 물론 김담구나 이성호 같은 친구들도 공부를 잘했지만 그는 단연 뛰어나서 담임 이계조 선생의 칭찬을 독차지했고 반 동무들에게도 그는 정이 많고 차분하고 언제나 침착했습니다.
그때는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지만 그의 복장은 단정했고, 늘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중학교에 와서도 그는 빼어난 두뇌를 지녔음에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보였지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3년 동안 그는 사대부고에 다녔기에 만남이 뜸해졌지만 대학에 와서는 비록 단과대학은 달랐어도 가끔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울 법대생들은 어딘가 돋보이려는 기색을 나타내곤 했지만 그는 예나 다름없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사회에 나와서는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1984년 가을, 제가 살고 있는 개포동 경남아파트에 분양받아 입주했더니 그는 나와 같은 동, 같은 줄의 맨 위층에 먼저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 참 잘됐다고 했는데, 2년 후에 그는 어느 날 딴 곳으로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가 전세를 살고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부인께서는 두 따님의 음악 공부 뒷바라지에 전념한다는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 몇 해 뒤의 일로 기억하는데 제가 삼성생명에 근무할 때 그와 한 번 둘이서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그가 슬쩍 서울대에서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됐다는 말을 했습니다. 서울대의 박사 학위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받기 힘든 것인데 현역 법관으로 40대 후반의 나이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에 내심 크게 놀랐습니다.
‘야, 대단한 일이네!’ 했지만 그는 담담했고 며칠이 지나도 언론에는 그 소식 한 줄도 나지 않았습니다. 딴 사람들과 굳이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관직에 있으면서 대학에서 박사 학위라도 받으면 대개의 경우 언론에 노출하여 은근히 자랑하고들 했지만 그는 그런 일에는 전연 무관심하고 담담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그는 대법관이 됐습니다. 법관의 꿈은 대법관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가 대법관이 될 즈음에 언론에는 그에 관한 기사가 제법 많이 나왔었지요. 정귀호 판사는 아직 전셋집에 사는 ‘청렴 법관’이란 내용이 주류였지만. 뒤에 들리는 얘기로는 그는 ‘전세를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극구 해명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법관 재임 중에는 대법원장 물망에 올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시의 임명권자의 의중에 드는 인물일 수는 없었던 것은 웬만한 동문들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에 대한 동문들의 기억 중 가장 큰 것은 아마도 음악가로 성장한 두 따님에 대한 끝없는 父性愛일 것입니다. 스스로도 애프터서비스는 끝이 없다고 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바쁜 일과에도 여행을 무척 하고 싶어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작년 5월 삼목회, 북창회원 일동과 일본의 요나고(米子) 지방 여행 중에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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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호 정귀호의 저 은은한 미소를 이젠 더 볼 수 없다니…
아, 무정한 세상, 허망한 인생이여!
부디 천당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2011. 12. 26. 저녁
8. 고경과 삼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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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옛 ‘삼덕동 집’입니다. 너무나도 변한 모습에 놀라 그 후로는 대구에 갈 일이 있어도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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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6회(商6會)의 어제와 오늘
상6회는 경북중고 제39회(경고 6회) 출신들의 친목 모임이다. 이 모임이 처음 생긴 것은 내 기억으로는 31년 전인 것 같은데, 처음 모임을 제안한 사람은 오준희(吳準熙) 동문으로 기억한다.
잠시 그와 나와 인연을 회상해 보니 그와는 대구국민학교 때부터 동기생이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와서야 처음 한 반에 있게 되었다. 그때 그는 우리 반에서 반장을 했다. 2학년 10반에는 이수정, 박창규, 이재섭 등 출중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그가 반장을 맡아 반원 통솔을 원만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어느 모임에서 商6회 모임을 갖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처음 모임을 가졌을 때 회원은 25명이었다. 그러나 모임이 결성된지 얼마 안 되어 이중희(李中熙)와 박영택(朴永澤) 회원이 먼저 他界하여 23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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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차츰 별세하는 회원이 늘어났고 몇 해 전 허병하(許丙夏) 동문이 타계한 후로는 급격히 줄어들어 그의 姪인 許相寧 동문이 나를 보더니 “어이, 어떻게 서울상대 출신들은 그렇게 빨리 가나…?”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상6회 모임은 꾸준히 지속되었고 작년 12월 모임에는 모두 12명이 참석하여 가는 한 해를 아쉬워했는데 오늘 모임에는 모두 8명이 참석했다. 작년 말에 나왔던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을 비롯하여 석학진, 박양규, 김용진 4명이 사정이 생겨 오늘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오준희 동문의 노고가 컸지만, 상6회의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사공일(司空一) 박사를 빼고는 얘기가 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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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청와대 경제수석, 재무부장관을 역임한 그의 화려한 경력이 말해주듯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통이자 동시에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사공박사는 상6회의 모임에도 자주 나와 스폰서를 하고 경제 특강을 하여 명쾌한 정치경제관련 해설을 하여 회원들의 관심사를 일깨워 주곤 한다.
오늘 모임에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 오준희, 이일쇄, 박치규, 서원호 그리고 양재수, 임종홍, 이명기(李命基) 그리고 나 등 8명이 참석했다. 이 중 이명기가 현재 회장직을 맡아 수고를 하고 있다.
잠시 면면을 소개하면 이 중 최연장자는 단연 박치규(1937년생)로 그는 경북 군위 출신인데 군위에서도 우보면 출신으로 司空一과 동향이다. 최근 牛步에 대구 비행장이 이전해 온다는 소문이 있어 오늘도 잠시 화제가 됐다. 朴治圭는 최연장자이지만 사진에서 보듯 건강 서열은 단연 1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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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좌로부터 양재수, 나, 임종홍 그리고 이명기가 앉았다. 하여간 앞으로는 참석자가 늘어 모임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하면서 졸필을 마친다.
2019. 6. 12.
10. 선친(先親) 40주기(周忌)를 맞으며
오는 12월 14일은 음력으로 11월 9일로 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40년이 되는 날이다. 1899년 5월 7일생이신 아버지는 1970년 12월 7일(음력으론 11월 9일)에 대구시 중구 삼덕동 28의 12번지에 있던 ‘삼덕동 집’에서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32살의 나이였는데 40년이 지난 오늘 나는 72살이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연세가 72세였으니 이 날을 맞는 나의 감회는 자못 남다른 데가 있다.
40년 전 오늘 나는 제일모직 대구공장 경리과의 사원이었다. 집안 형편상 대구 지역에서 근무하는 직장을 찾다 보니 제일모직의 대구공장이 떠올랐고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를 했지만 대구공장 근무를 자원하여 대구로 내려온 지 5년이 경과한 때였다. 대구공장은 그래도 법적으로는 본사였기 때문에 경리 업무 중 중요한 세무 업무는 공장에서 담당했고 원가 계산 업무도 하기 때문에 상경 계통 출신으로 제대로 회사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코스이기도 했다.
당시에 나는 경리과의 주무사원으로 세무 담당이어서 회사 일이 많은 편이기도 했지만,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평소 건강하셔서 부모님의 건강에 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미지 10-1: 돌아가시던 해(1970년) 봄철 ‘삼덕동 집'에서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치과에 다녀오셨는데 의사가 어금니를 뽑아야 한다고 해서 이빨 하나를 뽑았다고 하셨다. 그 후 통증이 심하다고 하시면서 외부 출입도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 나으려니 하고 무관심하게 지냈다. 돌아가시던 날 아침 아버지께서 거처하시던 사랑방 문을 열어보니 누워계셨지만 기척을 하시기에 다녀오겠다는 인사 말씀을 드리고 문을 닫고 나와 출근하였다.
그랬더니 오후 3시경에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어머니 말씀이 “아버지께서 이상하시다”라고 하면서 빨리 집으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급히 차를 타고 집으로 가서 사랑방에 들어갔더니 아버지께서 나를 보시고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려 하시면서 무언가 말씀을 하시려고 애를 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끝내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못하고 내 손을 놓으면서 그대로 자리에 누워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운명하셨다.
모두들 망연자실하는 순간이었다. 급히 돌아가셨기에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어머니, 아내 그리고 집안일 도와주던 가정부 그리고 나뿐이었다. 나중에 아내 말을 들으니 그날 점심 때부터 아버지 표정이 이상해지면서 장조카인 상무(相茂)를 찾으시더라는 것이다. 상무는 그때 서울대 농대 4학년 재학 중으로 수원에 가 있어 당시의 통신 수단으로는 바로 불러올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갈 수가 있느냐고 탄식을 되풀이하셨다.
그 뒤 절차에 따라 장례를 진행했는데, 집안 어른들께서 시키는 대로 굴건제복(屈巾祭服)하고 5일장을 치렀다. 장지는 영천군 고경면 고도의 선영계하에 모셨다. 장의 행렬이 영천 마을에 도착하자 친척, 친지 여러분들이 나와 눈물로 영접하였고 상여는 수십 명이 자진 참여해 주어 상주로 상여를 따라가면서 마음 든든함을 느꼈다. 반혼(返魂)한 후에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朔望)을 지내기를 1년 동안 하였다.
이미지 10-2: 그 즈음에 찍었던 사진. 손자인 상옥(相沃)이를 안고 계시는 모습이다. 그때 생후 2년 6개월 남짓하던 상옥이는 어느덧 44살이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일생을 자유인으로 사셨다. 한 번도 조직에 얽매인 생활을 하신 적이 없고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나, 한학과 일어에 능통하셔서 영천에 사실 때는 고경면에서 면의원도 하셨고, 1939년 3월 형님과 누님의 학교 교육을 위해 대구로 나오신 후에는 약종상 시험에 응시하여 면허를 취득하여 집 가까이서 약방을 운영하시기도 했다.
8.15 해방 후에는 가창면에 있는 과수원을 매입하여 직접 경영하셨고, 성산 이씨(星山 李氏) 대구화수회(大邱花樹會)의 회장으로 선출돼 몇 해 동안 맡아 수고하시기도 했다. 생시에 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 한 가지는 인인성사(人因成事)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으로 인해 일어나는 법이니 평소 사람 사귀고 관리하는 일을 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나는 명심하여 제대로 실천하지를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 18년을 더 사셨다. 88올림픽으로 나라가 떠들썩하던 1988년 8월 하순 91세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개포동 집에서 타계하셨다. 내가 대구에 살던 동안은 아버지, 할아버지 제사를 내가 맡아서 지냈으나 장조카인 상무가 결혼을 한 후에는 조상님 제사를 맡아서 지내오고 있다. 제사 때는 조카 집에 가서 참사만 하면 돼 나와 아내가 한결 부담을 덜게 됐다.
끝으로 평소에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왜 갑자기 돌아가셨을까 하는 의문을 늘 가지고 있었는데, 최근에 아내와의 대화에서 그 원인을 나름대로 찾아보았다. 아내 의견은 아무래도 패혈증(敗血症)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치과에 가셔서 어금니를 빼고 나서 적잖은 출혈이 있었는데, 당시의 의료 환경으로는 적당히 지혈 조치를 했을 것이라 세균 감염의 가능성이 크고, 그로 인해 패혈증으로 발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이다.
지금 생각하면 치과에 다녀오신 후에는 이도 아프지만 자꾸 춥다고 하셨는데, 추위를 느끼는 것은 열이 많이 나서 그랬을 텐데 빨리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자세한 증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는다. 요사이도 큰 병원에서 수술받고 나서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지만 40년 전의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는 더욱더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2010. 12. 11.
11. 서울상대 17회 동기 모임
오늘 7월 15일 역삼동 ‘가연’에서 개최한 1.7 향상회에는 14명의 회원이 참석했다. 참석한 회원들의 면모는 아래와 같다. 핵심 맴버 몇 사람이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활발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곽수일 교수 외에 모처럼 박정수 회원(교수)가 참석하여 화제의 꽃을 피웠다.
이미지 11-1~5
끝으로 오늘 스폰서를 했던 제가 한 말씀 드렸더니 반응이 좋아, 일부 회원들이 홈페이지에 꼭 올리라고 해서 아래에 기록합니다.
1. Meme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2.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3.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이상으로 제가 찍은 사진과 글을 마칩니다.
12. 이상무의 촌스러운 명상록
괴은(槐隱)과 퇴수재(退修齋) 그리고 여려(旅廬)
6월 27일은 저의 증조부 괴은(槐隱) 이 한기(漢基) 선생의 탄신일입니다. 그분은 1868년, 고종 5년, 일본의 메이지 원년에 태어나서 1945년에 일제의 패망을 보시고 10월에 별세하셨습니다. 괴은 할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77년 동안을 제 고향 경상북도 영천의 고경면 용전리 추곡 마을에서 사신 셈이지요. 금호강의 지류 고촌천 유역에 ‘달련들’이라는 조그만 평야를 앞에 둔 이 마을은 용이 마을 동쪽 못가의 밭에 앉았다가 승천했다는 전설로 인해 ‘용전리’가 되었답니다.
용전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만고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생가와 그분을 모신 영천 유림의 본거지, 임고서원이 있습니다. 괴은 할아버지는 일찍이 경상도 유림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한 대계(大溪) 이 승희(承熙)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셨고, 1903년 인종(仁宗)릉인 효릉(孝陵)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임고서원을 중심으로 평생을 초야의 선비로 보내셨지요. 집안을 자수성가하시면서 1924년에는 13대조 처야당 재실 중건, 1931년에는 9대조 송남공 문집 간행 등 선조를 현창하는데도 주력하셨습니다. 맏손자인 저의 아버지가 출생한 1925년에 고택을 지어 1936년에 지금 모습으로 중건, 환갑인 1928년에는 마을 건너편 산록에 침수정(枕漱亭)을 지었습니다. 정자 이름은 옛날 중국 죽림칠현의 ‘침석수류(枕石漱流,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로 양치함)’처럼 산림에 은거하는 깨끗한 삶을 뜻하되, 진(晉)나라 손초(孫楚)의 ‘침류수석(枕流漱石, 흐르는 물에 귀를 씻고 돌에 이빨을 간다)’의 고사를 빗대어 일제하에 뒤집힌 세상을 은유하기도 하였답니다. 이런 일들은 저의 할아버지 여려(旅廬) 이 종택(鍾澤) 선생이 어른을 극진히 모시면서 함께 진행하셨지요. 부자(父子)분의 성심 합력하신 일화가 지금까지도 마을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저의 외가는 경남 밀양의 부북면 퇴로리 여주 이씨 집안인데, 제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퇴수재(退修齋) 이 병곤(炳鯤) 선생입니다. 손주들의 가연으로 사돈이 된 괴은과 퇴수재, 두 분은 경상도 유림에서 꽤 알려져 있었지만 막상 혼인은 괴은 할아버지 별세 2년 후여서 직접 만나지는 못하셨답니다. 퇴수재 할아버지는 1882년에 출생,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보시고 10월에 67세로 서거하셨습니다. 저의 외가는 유가(儒家)이지만 방계선조인 성호(星湖) 이 익(瀷) 선생의 실학전통을 이어서 일찍부터 신학문 도입에 적극적이었습니다. 특히 퇴수재 할아버지는 영남유림 항일운동의 구심점이던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과 가깝게 지내시면서 서울에서는 위암 장지연, 육당 최남선 선생들과도 교유하셨습니다.
그분은 1909년에 퇴로 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신활자 인쇄소인 동문사(同文社)에서 ‘성호집’ 등의 실학 고전을 간행하는 한편, 사립보통학교로 역시 문중에서 설립한 ‘정진(正進)학교’ 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1930년대 말 이후에는 ‘비협조 불복종’ 운동의 지도자로 일제의 감시와 사찰을 받다가 1944년에 경남 경찰 고등과에 체포 구금되어 40여일 고초를 겪기도 하셨지요. 해방 후에는 밀양유도회(儒道會)회장과 밀양향교의 전교(典敎)로 추대되셨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광복 3년 만에 타계하셨습니다. 이분도 부친 용재(庸齋) 이 명구(命九) 선생과 함께 퇴로 뒷산 중턱에 삼은정(三隱亭)을 짓고, 정자 앞에는 연못을, 후원에는 진귀한 수목과 화초를 가꾸어 인근에 명성이 자자하게 만드셨다지요.
저의 할아버지는 1899년, 19세기의 말년에 태어나서 1970년 12월 제가 대학교 졸업시험을 칠 때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일생을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일관하셨고, 조상 모시고 손님 대접하는, 선비집안의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에 한 치도 소홀함이 없으셨습니다. 부친의 문집 ‘괴은유고(槐隱遺稿)’를 간행하고 영천 성산이씨 종중의 어른으로 사시는 한편, 자손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장남인 저의 아버지가 영남의 명문 경북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대구시 중구 삼덕동 1가 28의 12에 새로 집을 짓고 거처를 옮기셨지요. 고모님과 숙부님도 그 집에서 학교를 다녔고 저도 그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고향을 떠나 살게 되면서 스스로 호를 ‘나그네의 집’이란 뜻인 ‘여려(旅廬)’로 지으셨는데, 이태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나오는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夫天地者 萬物之逆旅)”이라는 구절과 도연명의 “사람 가운데 집을 지어도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이 없네(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라는 싯귀에서 한 자씩 따오셨답니다.
여려 할아버지는 지금도 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면서도 제일 무서운 분입니다. 저를 끔찍이 사랑해주셨지만 훈육에는 추상과 같이 엄하셨지요. 사람의 도리와 세상을 사는 이치를 가르쳐주시면서, 시대에 맞추어 살되 고루하거나 옹졸하지 않게, 여유 있고 의연한 선비의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작년에 제가 고향집에 내려와 살면서 얼마 전 고택 안채에 올해 8순이 되신 저의 숙부님의 친필로 ‘여려(旅廬)’ 현판을 거는 행사를 했는데 할아버지께 뭔가 조금 해드린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괴은과 퇴수재, 그리운 여려 할아버지! 저를 세상에 있게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없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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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전)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전)세계식량농업기구(FAO)한국협회 회장
전)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전)한국농어촌공사 사장
13. 대구 영천 방문기
지난주 오랜만에 대구, 영천을 다녀왔다. 동대구역에 내리니 김정의, 송대완 두 친구가 마중 나왔기에 바로 진골목으로 가자고 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시인 이상화(李相和)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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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13-10: 앞줄에서 가운데 분이 이상화 선생이다
이상화 고택 옆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徐相燉) 선생의 고택이 있다. 이어서 발길은 진골목으로 향했다. 진골목도 많이 변해 옛 모습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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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구 최초의 2층 양옥 정소아과의원 건물만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거나 변해 있었는데 厚堂 서정균이 살던 집은 빌딩으로 변했다. 아래 표시판의 ‘(구)서병기 저택 집터’라는 글씨만이 옛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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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저물어가고 배도 출출하여 발길은 미도 다방으로 향했다. 미도 다방도 옛 건물에서 옮겨 새 건물에서 영업하고 있었는데, 매스컴을 통해 봐서 꼭 한번 들리고 싶었던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담이 나와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인숙 마담은 나를 반긴 것이 아니라 晩翠 김정의를 반긴 것이었다. 정 마담은 노인 돕기를 비롯하여 선행을 많이 하여 평판이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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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13-21: 한담 도중 만취가 찍어 카톡으로 보내온 스냅
그러나 진골목 구경은 이 정도에서 그치고 저녁 모임이 있는 범어동의 한식당 江村으로 향해야 했다. 우리 일행이 늦어져 친구들은 미리 와 있어 미안했지만, 그럴듯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날 모임에 참석해준 친구들은 지홍원, 최희장, 박창규, 오세용 그리고 송대완, 김정의 등 6명이었다. 하지만 화기애애하고 훈훈한 분위기는 나로 하여금 인증 샷을 찍는 것을 잊어버리게 했다.
14. 영천 고경 추곡마을 본가 방문기
이튿날 아침 나는 再從弟의 도움을 받아 永川으로 향했다. 사촌이 없는 나에게 그는 나와 매우 가까운 사이이고 영천 일에 관련해서는 유력한 조력자다. 그의 차에 편승하여 영천시 고경면 용전리 추곡 마을로 가서 어머니와 할머니 산소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昌寧 曺氏로 영천 신령군 구일에서 고경면 용전리로 시집와서 추곡 본가에서 사시다가 1939년 3월에 대구로 집안이 이사를 왔는데 2년 후에는 아버지께서 삼덕동에 새집을 지으셔서 우리 식구들은 오랫동안 삼덕동 집에서 살았다. 1976년 3월에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서울로 이사를 왔고 ‘88서울올림픽’을 앞둔 8월에 타계하셨다. 享年 91세. 아버님은 1970년 12월 대구에서 먼저 돌아가셨으니 아버지보다 18년을 더 사셨다. 어머니 장례는 아버지 때와 같이 喪主인 내가 선대에서 정해준 이 장소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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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할머니는 昌寧 成氏로 우리 가문으로 출가해 오셔서 추곡 본가에서 오래 사시다가 대구로 함께 나오셨고 1951년 삼덕동 집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84세로 할아버지보다 6년을 더 사셨다. 산소 위치는 위에 계시는 할머니 묘소를 먼저 썼고 그 아래에 어머니 묘소를 쓴 것이다. 우리 집 선대에서는 이곳 추곡 산소에는 할머니 산소 아래 어머니 산소를 쓰고, 좀 떨어져 있는 古道 산소에는 할아버지 묘소 아래 아버지 묘소를 두고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떨어져 산소를 썼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당시의 사정이나 풍습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믿고 있다.
이젠 산소를 관리하던 사람들도 사라진 지 오래고 자손들이 모두 서울에 올라와 살고 있으니 묘소 관리가 부실해졌다. 그래도 장조카인 相茂가 농협에 의뢰하여 제초 작업은 했으나 오늘 와보니 봉분의 흙이 떨어져 나가고 손을 써야할 곳이 많이 눈에 띄어 마음을 상하게 한다. 하여간 두 분 묘소에 엎드려 절하고 앞으로는 이렇게 오기도 힘들 것 같은 생각을 하며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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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진들은 추곡 마을 앞산 기슬에 있는 정자 침수정(枕漱亭)이다. 이 정자는 1924년에 할아버지께서 세우셨는데 아버지를 비롯한 친척 여러분들이 수고하여 건립했다. 침수정의 한자 침수(枕漱)는 침석수유(枕石漱流)의 준말이다. 뜻은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한다’는 의미로, 옛날 중국 高士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을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침수정의 경우에도 정자 뒤에는 산에 靑石이 있고 앞에는 내(川)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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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침수정에서 찍은 추곡마을 전경이다. 예전에는 우리 一家 20여 호가 살아 ‘星山李氏 집성촌’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젠 대부분 도시를 비롯한 他地로 나가버려 많이 줄었다. 멀리 정면에 本家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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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발길은 古道리 선산에 있는 할아버지, 아버지 산소를 향했다. 이 산에 오르면 먼저 아버지 묘소가 나를 반기며 맞아주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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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1899년생, 성산 이씨 인주공파 33세로 호는 旅廬이다. 추곡 본가에서 1939년 내 형님과 누님의 학업을 위하여 대구로 나오셨다. 비문 글은 고령 관동의 한학자 李憲柱 님이 쓰고 글씨는 나의 외사촌형 曺奎伯(당시 영천중고교 한문교사)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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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묘소에서 약 50m 위쪽에 할아버지 묘소가 있다. 할아버지는 1868년생으로 호는 槐隱, 仁州公派 32세로 호릉참봉(孝陵參奉)을 지내셨다. 8.15 해방이 된 것을 보시고 그해(1945년) 9월 추곡 본가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78세. 앞서 소개한 침수정을 세우셨고 槐隱遺稿 문집을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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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父와 祖父 두 분의 묘소 참배를 마치고 下山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현대인의 故鄕喪失, 인간의 自己疎外란 말을 자주 들으며 살아왔는데 요사이도 스마트 폰에 정신이 팔려 잠시도 자판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살 것 같은 男女老小를 볼 때마다 自我상실, 고향喪失에 관해 생각을 하게 된다. 佛家에서는 참나(眞我)를 찾아야 한다고 설법을 하고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참선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참선을 통한 깨달음이란 凡夫들에게는 실현이 어렵다고 생각된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지만 대개는 잊고 지낸다. 어릴 적 노닐던 즐거웠던 추억을 누구나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다행히 나에게는 대구의 삼덕동 집과 영천의 추곡마을과 부모님이 잠들어 계시는 이곳에 산소가 있기에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이곳에 오면 나는 언제나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을 수 있기에.
2014. 10. 20.
15. 본가 현판식
일시: 2018년 5월 12일 토요일 15시
장소: 경북 영천시 고경면 용전리(추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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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커버 여는 순간 큰 빗줄기가 생성되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께서 번영 축복 내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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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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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수정에서 바라본 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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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ROTC 이야기
1963년 3월 8일 ROTC 17 통역장교 100명이 현역 소집돼 영천 부관학교에 입교했다. 임관된 ROTC 3000명 중 영어 시험을 쳐서 100명을 선발했는데, 이때 서울상대 출신 5명은 병참병과 통역장교로 선발돼, 나를 비롯하여 송병락, 배정운, 박병윤 등 5명은 부산 병참기기사령부로 발령받아 같이 내려가 상령관에게 신고했더니, 나는 사령관실, 송병락은 수석고문관실, 배정운은 8기지창, 박병윤은 대전의 9기지창에 각각 배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충영은 병참보급단(QSMA)에 배치됐다.
다음은 55년 전 ROTC 1기 통역장교반(1963년 3월 8일 입교)의 졸업 앨범 사진입니다. 화면이 선명하지 못한 점 양해하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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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16-2: 보병 병과만 찍은 사진
이미지 16-3~5: 내무반 별로 따로 찍은 사진
이미지 16-6: 그리운(?) 그 얼굴, 강옥열 중위
1963년 3월 8일 ROTC 1기 임관 통역장교 100명은 영천 부관학교 통역장교반에 입교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50년이 지나 꽃다운 청춘은 가버리고 이제 70대 중반의 늙은이 모습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그날의 기개는 아직 살아 있다. 3월 8일 오후 6시 사당역 13번 출구 ‘샤르르 샤브샤브’에서 모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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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에 이산가족 상봉 시 살아 계시리라고 예상치 못한 친형님을 얼떨결에 만났던 권동열 소위의 아픈 마음을 위로할 목적으로 미국에 있는 채희경 소위가 주선하여 5월 8일에 통역장교의 모임을 갖게 되었지만 정작 이 모임을 주선한 채 박사는 개인의 부득이한 가족 사정으로 일시 귀국을 못하여 우리끼리 만남을 가졌고 생사를 몰라서 까마득히 잊고 있던 형님을 갑자기 만나게 된 동기를 권 소위로부터 얘기 듣고 채 박사가 보내주신 돈으로 칼국수의 전통 명품 한성칼국수를 푸짐하게 먹었습니다. 식사 도중에 채 박사가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전화 통화를 해주어 외국에서 이곳까지 초대해 놓고도 못 오는 심정을 오히려 위로해 주었답니다.
권 소위 위로하려고 모인 기회였지만, 때마침 우리 통역장교의 일원이고 삼덕동 카페의 주인장이신 이연 소위의 생신 축하를 겹치는 행사를 하게 되어 이번 모임은 더욱 뜻있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우리 삼팔회의 회장이신 남성우 박사께서 생일축하 케이크를 준비해 오셔서 식후 일미를 가했습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권동열 소위 폰카와 저의 폰카로 찍은 사진들인데, 이연 카페지기님의 작가솜씨로 촬영한 사진에 비할 수 없어 조금 송구스럽지만 이날의 스냅을 몇 장 올려봅니다.
이미지 16-7: 좌로부터 김만기, 안충영, 신동배, 김승곤, 석융관, 윤인호, 심용, 백승기, 이연, 남성우, 권동열 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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