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은 동방과도 많은 교역을 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발굴되는 바이킹 무덤의 부장품에 8세기경 인도 동북부에서 제작된 불상,
알라 볼가강을 따라
카스피해를 지나서 지금의
이란![]([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data:image/svg+xml;base64,PHN2ZyB3aWR0aD0iNzUwIiBoZWlnaHQ9IjU0MCIgeG1sbnM9Imh0dHA6Ly93d3cudzMub3JnLzIwMDAvc3ZnIj48L3N2Z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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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는 모르지만 뿔투구를 쓰고 다닌다는 인식이 박혀있는데,
[13] 이러한 투구들이 바이킹들의 무덤에서 간간이 발견되기는 하나(참고:
#[14] 실제 전투를 묘사한 당시의 그림들에서는 이런 뿔투구의 모습은 볼 수 없고, 보통은 위가 뚫린 골무 모양의 노르만 투구나 원뿔 모양의 투구에 덧붙여 찰갑과 눈이나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 모양의 얼굴 보호구가 달린 투구를 많이 썼다. 위 그림에서 초창기 바이킹들의 투구 양식을 볼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토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킹들은 뿔투구가 아닌 그냥 투구를 썼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양날도끼와도 연관이 많다고 여겨지지만, 바이킹들은 던지기 좋은 가벼운 손도끼를 좋아했고, 양날도끼는 제의 의식에나 사용했다는 것이 당대의 성상화나 조각품들에서 드러나고 있다.
[15]우리가 아는 스테리오 타입 바이킹은 1870년대 니벨룽에 반지의 오페라에서 복장 디자이너인 Carl Emil Doepler 바이킹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쓰게 했다. 이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스테리오 타입이 등장했다꽤 독특한 유물도 있는데 뼈를 갈아 짤막하게 만든 스케이트화도 있다. 다만 지금같이 얼음을 미끄러져 가는 것이 아니라 짧은 스키와 비슷한 용도로 본다. 이러한 물건은 긴 스키가 비로서 등장하는 근대까지도 쓰여졌다. 물건들에 장식을 많이 했는데 높은 신분의 물건 뿐만 아니라 낚시줄을 감아놓는 막대나 빨래 펴는 판에도 장식이 가득 새겨져 있다. 주로 선호된 장식은 노끈이 기하학적으로 겹쳐져 매듭처럼 얽힌 무늬.
바이킹의 놀이는 흔히 생각하는 음주와 싸움 무훈자랑에서 사냥이나 노래,
타블룻이라는
고누와 비슷한
장기가옥은 청동기 유적이나 울릉도 초갓집에서 볼법한 일체형 주택인데 목적은 앞의 둘과 같이 보온의 이유가 가장 커보인다. 이런 폐쇄적인 형태는 안이 어둡고 습하고 냄새가 난다는 점에서 큰 단점이 있다. 아이슬란드와 같이 나무가 모자란 동네에서는 돌로 벽을 쌓고 서까래같이 틀만을 나무로 만들고 그 위로 흙을 덮었다. 그래서 가옥 유적을 보면 마치 고래등같은 집 위로 이끼가 잔뜩 뒤덮은 것 같이 보인다. 나무마저도 구하지 못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은 밧줄같은 걸로 서까래를 지었다고 한다.
왠지 지저분했을 것 같다는 편견과는 달리, 세계적으로도 위생을 무척 중시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바이킹들의 거주지가 있던 곳에서는
빗과 귀이개, 족집개, 면도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원시적인 형태의 비누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16] 바이킹들의 노략질에 시달렸던 잉글랜드 측의 기록에도 바이킹들은
굉장히 깨끗하게 정리정돈을 하며 산다고 적혀 있다. 또한 오늘날의 사우나처럼 온천의 증기로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게다가 바이킹 하면 흔히 헝클어진 장발과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야만적인 남성을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머리를 짧게 잘랐으며 면도를 했다. 머리에 양쪽 귀를 두르는 선을 기준으로 그 밑에 머리는 다 짧게 자른 머리 모양
[18] 술집에서는 서로에게 모욕을 주는 욕설 배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현대의 랩배틀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또한 의외의 사실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 의하면 당대의 바이킹들은
코미인[19]마초적인 이미지와 달리, 나름대로 여권도 강한 축에 속했다. 일부 여성들은 '방패 처녀
[20] # 뿐만 아니라 바이킹 여성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다만 이혼을 하려면 결혼 당시에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지참금을 다시 돌려줘야 했다. 바이킹 여성들이 이처럼 권리가 강했던 까닭은, 남성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면서 집을 비우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 기간 동안 아내가 집을 관리하고 재산과 농토를 지키는 등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1]바이킹들의 장례식은 지역의 관습
[22]베오울프 아랍인인 이븐 파들란(Ibn Fadlan)이 남긴 목격담에 따르면, 러시아 바이킹
[23]들의 경우에는 부유한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마찬가지로 그의 시신을 배에 실은 후, 망자가 거느리던 노예들 중 지원자
[24] 한 사람을 받아 그를 죽여서 마찬가지로 망자의 시신 옆에 눕히고, 최후에는 배에 불을 질러서 화장을 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순장의 일종인 셈이다. 이때 순장에 처해질 노예의 심장에 칼을 박아 확인사살을 하는 일은 덩치 좋고 힘이 센 노파가 맡았는데, 이들은 일명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라 불리웠다.
척박한 지방에서 살아서 약탈을 주된 생활사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반농 쪽에 가까웠다. 거기서 재배할 수 있는 곡식과 야채를 재배하였고, 낙농업도 어느정도는 시행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중국의 흉노 등의 외부 민족들의 생활사와 유사하다.
첫댓글 흥미 있는 사진들이 전부 배꼽처리 됨
스페인에 서북쪽
한국사람들이 성지 순레자주 오는 싼티아고 꼰포스텔라 근처 인데 이곳에 강이 있는데...
그 강바닥에 바이킹이 타고 온 배가??? 전시 되어 있습니다.
믿기 힘이 드시지만..
내가 직접 보았지요.
바이킹이 바다를 통하여 육지 40키로 내 까지 강을 따라서 올라 왔다는 군요.
집사람이 바이킹의 영화 수십편의 씨리즈를 스페인말로 보았는데...
엄청 흥미로웠답니다.
나는 그 장편 극을 보지 않았지만
그 역사 배경을 쭈우우욱... 설명을 해 주니... 내가 몰랐던 줄거리도 이야기 해주더 군요.
각 대륙마다 숭배하는 샤머니즘이 다르니. 하나님은 하나지만 자연신은 다르다
북유럽이 믿는 전설은 오딘
북유럽의 전설 오딘도...
그리이스 신화 전설 못지 않게 엄청남니다.
수메르 전설 바빌론의 전설도 엄청난데...
이탈리아 전설도 있지요. 늑대 이야기
뭐 이리 따지면
멕시코 전설은 옥수수 신 인디언 갓머리
한국의 전설은 곰과 호랑이? 박혁거세 알?
중국의 전설은 복희와 여와(이 그림 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데..)
일본의 신화 전설은 알았는데 기억이 잘 안남.
어느 나라나 신화 창조가 있고 전설이 있기에..
이런 것들을 짚신 전설이라고 평가 절하 하면 안됨니다.
반만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나라 인데... 반만년이상 역사 가진 나라 별반 없습니다.
미국은 300년 스페인은? 한국의 반반토막도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