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영암사지는 어떤 절이었나?
이 절 이름은 주민들 사이에서 ‘영암사’로 구전되어 오고 있습니다. 황매산 남쪽 기슭에서 동-서축으로 배치된 남향의 산지형가람으로 누가 보아도 상당히 큰 대찰이었음을 알 수 있는 사찰입니다. 크게 보면 3곳의 축대가 남아 있습니다. 석축은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쌓은 가구식 모양입니다. 금당 터 앞의 축대는 한 가운데를 성벽의 치(雉)처럼 전면으로 튀어나와 있고, 그 위에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이 놓여 있습니다. 이 축대 좌우에는 금당에 이르는 돌계단이 있는데, 통돌을 밖으로 휘어지게 깎은 무지개 다리 모양이며, 6단을 파냈습니다. 금당지보다 한 단 낮은 마당에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보물)이 있습니다.
금당지의 기단은 화강석, 지대석, 면석, 갑석을 비교적 잘 갖춘 양호한 모양으로 사방에 계단이 한 개씩 남아 있다. 정면 계단의 소맷돌에는 용, 좌우측면 계단 소맷돌에는 가릉빈가를 조각하였으며, 뒷면을 제외한 삼면의 기단 면석에는 계단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사자상을 조각하였습니다. 나머지 기단 면석에는 안상(眼象) 문양을 새겨 놓았고, 금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초석이 두 줄로 놓여 있습니다. 바깥쪽의 낮은 초석이 오래된 것이고, 안쪽의 높은 초석이 후대의 것이라 판단되므로 금당이 두 번 이상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앙에는 H자형으로 짜여진 불상 지대석이 드러나 있다. 불상 지대석은 8매의 장대석으로 구성되고 표면에 팔부중상이 안상 안에 모각되었습니다. 금당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50m 지점에 양쪽으로 귀부를 두고 그 사이에 또 하나의 동향한 독립된 건물지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입니다. 1984년 발굴조사 당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각종 와편(瓦片)과 토기편, 금동여래 입상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서울대학교도서관에 탁본만 전하는 영암사적연국사자광탑비(靈岩寺寂然國師慈光塔碑,1023년 건립)의 비문에 의하면, 932년에 태어난 적연국사가 개성 인근의 보법사(普法寺)와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다가 물러나 1011년 가수현(지금은 폐읍이 된 삼가현의 옛 이름)의 영암사에서 기거하였고, 1014년(고려 현종 5년) 향년 83세로 입적하여 영암사 서봉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는 현존하지 않지만 현재 영암사지에는 당시 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귀부가 남아 있고, 서봉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적연선사의 부도가 대기(大基)마을 뒤쪽, 영암사에서 서쪽으로 약 1.5km 지점 산중턱에 현존하고 있어 이 절터는 비문에 기록된 영암사지로 판단됩니다.
건물지의 초석이나 축대 등이 대부분 파손되어 원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드물지만, 일반사찰에서는 보긴 힘든 것이고 경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대찰(大刹)이자 통일신라 말 고려 초 산지가람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전체 높이는 2.31m로 금당 앞의 석축 위에 있으며, 석축 바로 앞에는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보물)이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고, 이 석등은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고,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고 있습니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이 사실적입니다. 하지만 다리에 손상이 많아서 아쉬움을 줍니다. 불을 켜 놓은 부분인 8각의 화사석(火舍石)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습니다. 4면에만 길고 네모난 화창(火窓)이 뚫려 있는데, 화창의 주위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인 작은 구멍이 남아 있습니다. 또 화사석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 되어 있습니다. 사천왕은 불교의 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당시 호국사상의 목적 아래 많이 나타납니다.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조각(귀꽃)이 솟아있습니다.
아래받침돌은 위아래 2단으로 이루어졌고, 제법 높은 8각의 아랫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로 보이는 짐승이 1마리씩 웅크린 모습으로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윗단에도 1장의 꽃잎이 위로 솟은 복련(覆蓮)의 연꽃무늬가 각 면마다 1개씩 돋을새김되었는데, 연꽃잎 안은 또 다른 꽃무늬로 장식 되어 있습니다.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의 윗단처럼, 꽃잎 속에 또 다른 꽃무늬가 장식된 1장의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무늬가 각 면마다 1개씩 돋을새김된 모습입니다.
이 석등의 쌍사자 다리가 손상된 것이나 조각이 쓸려 닳은 것은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려고 할때 생긴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에 견줄 수 있는 뛰어난 모습의 석등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 전체 모습
금당지로 오르는 무지개 모습의 계단
금당에 이르는 돌계단이 있는데, 통돌을 밖으로 휘어지게 깎은 무지개 다리 모양이며, 6단을 파냈다.
화창 4면에 새겨진 사천왕상
금당지 사방의 계단 모습과 금당지 주초석 모습
금당지 오르는 계단의 소맷돌에는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가릉빈가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상상의 새로 기독교의 천사와 흡사 합니다.)
금당지 기단 면석에 새겨진 사자 모습의 안상
가구식 석축 모습
석축 위의 돌로 된 배수구 모습
주변에 버려진 건축 부재들
또 다른 서쪽의 금당지 모습과 동.서 양쪽 귀부
합천 영암사지 전체 전경
1984년, 1999년, 2002년 총 3회에 걸쳐 동아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었습니다. 하지만, 금당지 서쪽 뒤편에는 별도의 건축터가 확인 이외에, 금당지 우측 뒤편에도 필자가 보았을 때 별도의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고, 전면 앞 석축의 서쪽 언덕 숲에도 주초석이 일부 보여 별도의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 앞쪽 언덕 아래 묵논에도 일부 석재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곳도 의심의 눈길이 갔습니다.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보물)
이 탑은 탑신부가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 금당 앞에 새로 세운 두 채의 건물사이에 서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석탑으로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습니다.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편이며 2·3층은 크게 줄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씩이고, 처마 밑이 수평이며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습니다. 탑의 머리장식부분은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지붕돌의 윗면에 쇠막대를 끼우던 구멍이 있습니다.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전체의 균형을 잃지 않았으며 각 부재의 짜임새 또한 간결합니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고 있으나, 기둥 표현이 섬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9세기경으로 추정합니다.
(참조) -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자료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