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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신춘문예 당선작
한글회화 20호 유화 2010 금요비
경향신문
아버지의 발화점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 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쟎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 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늘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거에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 버릴 집을 지은 걸까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조세희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동아일보
오늘의 운세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조선일보
유빙 <流氷>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한국일보
새는 없다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서울신문
새장
강정애
나무 밑 떨어진 이파리들은 모두
누군가 한 번쯤 신었던 흔적이 있다
낡은 그늘과 구겨진 울음소리가 들어있는 이파리들
나무 한 그루를 데우기 위해
붉은 온도를 가졌던 모습이다
저녁의 노을이 모여드는 한 그루 단풍나무 새장
새들이 단풍나무에 가득 들어 있는 저녁 무렵
공중의 거처가 소란스럽다.
후렴은 땅에 버리는 불안한 노래가 빵빵하게 들어 있는
한 그루 새장이 걸려 있다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는 새들
촘촘한 나뭇가지가 잡고 있는 직선의 평수 안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후드득, 떨어지는 새들의 발자국들
모든 소리를 다 비운 새들이 날아가는
열려 있으면서 또한 무성하게 닫혀 있는 새장
허공의 바람자물통이 달려 있는 저 집의
왁자한 방들
잎의 계절이 다 지고 먼 곳에서 도착한 바람이
그늘마저 둘둘 말아 가면
새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새의 혀들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의 혓바닥들만 부스럭거릴 것이다
모두 그늘을 접는 계절
간혹, 지붕 없는 새의 빈 집과
느슨한 바람들만 붙어 흔들리다 간다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의 귀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매일신문
1770호 소녀
우광훈
꿈꾸듯, 한 편의 오래된 우화(寓話)가 소녀의 동공 깊숙이 스며든다. 소녀는 과묵하고 비밀스런 눈빛으로 책장만을 넘겨댄다. 별이 뜨고, 소녀는 마을 어귀 파피루스 숲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광활하고 황량한 사막이 있는, 때론 우아하고 권위적인 무덤이 있는 이곳 오시리스 동물원으로 흘러든다. 바다표범도, 펭귄도, 사막여우도, 치타도, 판다도 없는 이곳에는 햇볕에 잘 그을린 허허로운 얼굴에 키 큰 금발의 코끼리가 있다.
소녀는 향수어린 얼굴로 코끼리를 바라보다 석관 속에 놓인 접시저울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타조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그녀의 심장. 사육사의 경쾌한 신호음에 맞춰 코끼리가 저울 위로 올라선다. 똬리를 튼 비단뱀처럼 매끄럽게 내려앉는 그녀의 영혼. 순간 불꽃이 흩날리고, 파도가 울부짖고, 사자(死者)가 춤을 춘다. 기괴하고, 음울하며, 극도로 염세적인 그들만의 연극. 불멸을 향한 오래된 문명의 허망한 몸짓.
나일강에 물그림자 드리우고, 피안(彼岸)에 다다른 소녀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목욕을 한다. 늙은 고양이처럼, 별과 달이 질 때까지
그녀의 푸른 목덜미 아래로
모래 이빨 자국만이 선명하다.
☆ 1770호 소녀= 1976년 맨체스터대에서 로잘리 데이비드 박사가 집도한 이집트 미라. 학자들은 방사능 분석을 통해 서기 105~405년 사이에 미라로 제작된 갈색 눈의 소녀로 추정하고 있다.
문화일보
할머니의 눈썹 문신
강은진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한글회화 100호 유화 2009 금요비
경남신문
마드리드 호텔 602호
이재성
독한 럼주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하급선원들이 돌아온 바다와
떠나갈 바다를 위해서 건배를 하는 사이
호텔 602호는 마스트를 세우고 바다 위에 떠있다.
아니 이미 항진 중인지도 모른다. 바다에서
허무, 낡은 시집의 행간, 해무는 같은 색이다.
점점 깊어지는 밤의 해무
수시로 무적이 길게 혹은 짧게 울리고
J는 아직 조타륜을 잡고 자신의 바다를 항해 중일 것이다. 조타실의 문을 열자
바다 속에서는 해독할 수 없는 안개가 타전되고
나는 이미 길을 잃은 한 척의 운명
해도를 펼쳐 북극성의 좌표를 찾는다.
J도 이 바다를 떠나 희망봉을 찾아 갔을 것이다.
스무 살, 바다를 잡을 때마다
늘 빈 손바닥이었다.
지금도 바다는 나에게 오리무중이다.
늙은 고양이가 친숙한 비린내를 풍기며
안개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안녕, 이 하룻밤도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안녕, 나도 사라질 것이다.
J가 누워 있던 침대엔
낡은 바다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이번 항해가 길어질지 모른다.
어쩌면 무사히 귀항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드리드 항에서 이 호텔은
항해사들로 이미 만원이다.
하지만 이 호텔에는 602호는 없다.
전북도민일보
모래내시장
하미경
야채 썩는 냄새가 고소해지면
장터는 복숭아처럼 익는다
중고 가게 앞 내장을 비운 냉장고가
과일의 단내며 생선냄새며 땀내 들을
가리지 않고 거두어들일 무렵
은혜수선집은 벌써 불을 켜고 저녁의 한 모퉁이를 깁는다
박미자머리사랑을 지나면 몽땅 떨이라느니
거저 가져가라느니 농약을 치지 않은 다급한 말들이
등을 타고 내려 고무줄 늘어난 추리닝처럼
낭창낭창 소쿠리 속으로 들어간다
남들 보기 거시기 하다고 자식들이 말려도
팔 것들을 꾸역꾸역 보자기에 챙겨 나온 할머니는
돌아갈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지
빠진 이 사이로 질질질 과즙을 흘리며
복숭아 짓무른 데를 떼어 물고 오물거린다
문 닫는 속옷 가게에는 땡땡이무늬 잠옷이
잠들지 않고 하늘거린다 잠옷을 입고
늘어지게 자고 싶은 허리 대신
빈 바구니마다 어느새 어둠이 드러누웠다
전북일보
오래된 골목
장정희
작은 아버지 바지가 걸린 바지랑대 사이로 푸석한 골목이 보였다.
구암댁 할아버지 이끼 낀 돌담을 짚으며 모퉁이를 돌아가고
양철대문이 덜컹, 삽살개가 기다림의 목덜미를 물었다.
입대한 큰아들 주검으로 돌아오던 그날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는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발가락이 오그라든 대문은 문패를 버리고 밤새
신작로 쪽으로 귀를 던져 놓고 있었다.
낮은 지붕을 내려온 거미가 먼저 발을 내딛는 골목,
목줄을 잡아 맬 수 없는 굴뚝으로 연기는 담쟁이넝쿨같이 기어 나왔다.
뼈마디 드러난 상처를 덮듯 배추는 또 자라나고
햇살은 어두운 골목에 도둑고양이의 눈빛을 씨앗처럼 심어주었다.
다섯 살박이 손자가 작은 아버지 팔을 잡아당기며 대문을 나서고.
나는 빨랫줄 문 집게처럼 뻣뻣한 골목의 시간을 만지고.
바람이 골목에 발을 담글 때마다, 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수없이 들여다보았다.
경상일보
강은진팔거천 연가
윤순희
여름밤 내내 팔거천*변 돌고 또 돌았습니다 아직 물고기 펄떡이는 물 속 물새알 낳기도 하는 풀숲 달맞이꽃 지천으로 피어 십 수년째 오르지 않는 집값 펴지기를 깨금발로 기다리지만 대학병원 들어서면 3호선 개통되면 국우터널 무료화 되면 하는 황소개구리 울음 텅텅 울리는 탁상행정 뿐입니다
풀숲에서 주운 새들의 알 희고 딱딱한 것들 날마다 수성구를 향하여 샷을 날려 보내지만 죽은 알들은 금호강을 건너지 못하고 팔달교 교각 맞고 튕겨져 나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강을 건너지 못하면 저 물새들 살얼음 낀 물속에서 언 발 교대로 들어 올렸다 내릴 텐데
환하게 타오르던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의 불빛 온기는 어디까지 번져 갈 것인지요
물새들의 울음소리 팔거천 가득 울려 퍼지는 날 낮달 같은 새댁들 강변 가득 붉은 나팔 불며 여덟 갈래 꿈꾸며 비상 하겠지요.
*팔거천 : 팔공산 자락에서 흘러든 여덟 갈래 물줄기가 합쳐져 대구의 강북인 칠곡 신도시를 거쳐 금호강으로 흘러드는 하천,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달집태우기 행사를 한다.
한라일보
고사목
고경숙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불교신문
분천동 본가입납(本家入納)
이명
태어나 최초로 걸었다는 산길을 돌아
푹신한 나뭇잎을 밟으며
청주 한 병 들고 능선을 밟아 내려갔니더
누님이 벌초를 해놓은 20년 묵은 산소는
어둡고 짙은 주변의 빛깔과는 달리 어찌나 밝은지
무덤이 아니었니더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담한 봉오리
그랬니더, 그것은 어매의 젖이었니더
진초록 적삼을 살짝 풀어 헤친 자리에 속살이 드러나고
빛이 쏟아져 나왔지요
나는 그만 아기가 되어 한참동안 보듬고 쓰다듬고
얼굴을 파묻었을 때는 맥박소리가 들려오고
숨이 턱 막혔었니더
내가 오는 줄 알고
미리 나뭇잎으로 길을 덮어두고
아삭아삭한 소리까지 그 속에 갈무리해 두었디더
나는 낙엽을 밟으며 산등을 넘고
어매는 그 소리에 옷고름을 풀었겠지요
적삼 속에서 영일만 바다가 아장아장 걸어나오고
해안선이 출렁거리고
옹실몽실한 백사장이 예전과 같았니더
이 젖의 힘으로 여태껏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 살고 있고
하늘 가득 씨앗들이 날아오르고
파릇파릇 아기 부처들이 자라나고 있었니더
동양일보
끈
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눈이 내렸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 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얹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할머니 장죽에 담뱃불을 붙이시면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 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엌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 번도 보지 못한 고조할배 다녀가시고
슬하에 자식 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가시고
나이 열 여섯에 절손 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 자나 쌓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 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으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농민신문
은단풍
김남이
사원식당 앞 은단풍나무,
어린아이 징검다리 건너듯 갸웃갸웃
자그마한 풍선이 포르르 날며 구르는 듯
조심스레 입 밖으로 걸어 나오는
그 소리 은은하고 맑아서
나중에 ‘은단풍’이라는 딸을 낳고 싶었던
그 나무 밑에서 점심시간마다 우리는 비스킷을 먹었지
기계 소리도 작업반장도 없는 그 나무 밑에서 깔깔거리며
스무 살 부근을 와작와작 부셔 먹었지만
몇몇은 그 나무에 기대어 늙은이처럼 담배를 피워 물었지만
사원식당 앞 은단풍
깨끗한 아침 햇살과
강해지려고 자꾸 다짐하는 한낮의 태양과
한쪽 뺨이 그늘진 노을도 골고루 먹고
큰 키로 수천의 반짝이는 잎들 흔들 때
내가 믿는 신처럼 올려다보게 하던
은단풍 은단풍 은단풍
그렇게 주문을 외면
내 안에서도 나무 한 그루 뚫고 나와 삐죽 솟던
그 나무에 무엇인가 자꾸 매달고 싶던…….
강원일보
덩굴장미
김영삼
저 불은 끌 수 없다
차가운 불
소나기 지나가자 주춤하던 불길 거세게 되살아나 담장을 또 활활 태운다 잔주름 늘어나는 벽돌담만 녹이면 단숨에 세상을 삼킬 수 있다는 건가 막무가내로 담장을 오르는 불살, 한 번도 불붙어 본 적 없는, 마를 대로 마른 장작 같은 몸뚱이 확! 불 질러 놓고 재 한줌 남기지 않고 스러져도 좋을 무덤, 큼직한 불꽃이 서로 팔들을 엮고 저들의 등을 밟고 올라선 불꽃들이 또 하나의 일가를 이룬 곳으로 나는 걸어 들어간다 나에게 불을 다오, 저들의 영토에 손을 내미는 순간,
나는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
불똥은 땅에 떨어져 꽃으로 자꾸 피어나는데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
전남일보
손톱 안 남자
송해영
매니큐어 칠을 한 손톱 안엔
내 손톱을 장악한 한 남자가 살고 있다.
자꾸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나를 불러들인다.
무시를 할수록 자꾸 성가시게 군다.
귓가에 쟁쟁하게 맴도는 그 말은
달콤한 사탕을 물려주는 유혹과 같다.
더욱 들여다보라고 보채는 남자,
이 남자가 주는 카타르시스라니!
칠을 벗길수록 더욱 강해지는 스릴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어 나를 정도껏 조종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한다.
바르라는 속삭임이 귓바퀴를 타고 들려오면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고 한참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나는 어디에서나 돋보일 것을 예상한다.
그냥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일주일은 잠잠할 테지.
손톱 속 남자는 변덕이 심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 것, 어느새 이 유혹에 빠져 있다.
손톱 안에 살고 있는 남자,
칠을 지우면 죽어버리는 가혹한 운명의 남자,
내 손톱 안엔 한 남자가 징그럽게 살고 있다.
_2011년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드립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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