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성 마녀의 헌 책방 -1 -

[REPI]

 연못가에 뿌려진 하얀 종이조각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찢어진 책은 얼마전에 새로 구입한 참고서로, 수학시간 부교재로 수학선생님이 다음 시간 꼭 가져오라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던 책이었다. 누가 범인인지는 대충 짐작은 갔으나 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채 바지를 걷어 올리고 연못 안으로 들어가 종이들을 건져내었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않아 종아리에 닿는 연못의 부유물들이 기분나쁘게 피부 위를 스쳐나갔지만, 제법 추워진 날씨에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얼음장같은 연못물의 온도때문인지 지독한 냉기에 곧이어 다리의 감각이 사라져버렸다. 이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만치 찢어진 문제지는 다시는 쓸 수 없겠지만, 이름이 떡하니 적혀있는 것이 이곳에 둥둥 떠있는 것을 선생님이 발견하게 된다면 호되게 혼날 것이 뻔했다. 아니면 교우관계 문제로 교무상담실로 불려가게 되거나….

어머니께 받은 용돈은 딱 문제지와 차비, 그리고 간식거리 약간을 사먹을 수 있을만큼의 돈이었고, 통장에 돈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쓸 수 없었다. 2만원가량이나 되는 문제지를 살려면 다 합쳐봐야 만원 안팎인 소지금으론 택도 없었다. 종이를 모두 건져내고 연못물을 가르며 밖으로 나와 가방을 매었다. 가져온 까만색 비닐봉투에 건져낸 쓰레기들을 죄다 집어넣고 양말로 종아리와 발을 닦은 뒤 걷어올린 교복바지를 내린 다음 천천히 운동화를 신었다. 오늘 청소당번이 누구였더라….

보나마나 그 녀석일게 뻔했지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 뒷뜰청소 담당의 얼굴을 상기해냈다. 유쾌한 장난은 아니지만 나는 실소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유치하고 소심한 녀석인줄은 알았지만 이번 일은 꽤나 대범했다. 내일 학교에 가면 어떤 식으로 골려먹어야 하나 천천히 생각하며 나는 손에 든 까만색 비닐봉투를 소각장안에다가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교한 학교는 꽤나 한적하면서도 섬뜩한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2-1 교실 쪽 창문을 바라보며 아직까지 저곳에 남아있을 한 녀석을 떠올리며 교문쪽으로 발을 돌렸다.

 무서웠을거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겠지…. 책을 찢기 전에 몇 번이나 망설였을 것이다. 꽤나 소심한 성격을 가진 왜소한 체구의 미화부 위원장의 이름을 다시한번 상기하며 교실 안에서 수학문제지를 예습하고 있을 녀석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곤 아까 연못에서 종이조각들을 건져내느라 답장하지 못했던 친구녀석의 문자에 답장버튼을 눌러 한 글자 한 글자씩 적어나갔다.

 '나 김상윤이랑 주번이라서 오늘 학원 좀 늦는다'

'김상윤'

미화부 위원장이자, 안경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우리반의 최단신 꼬꼬마녀석. 녀석은 아버지가 건축업을 하시고 어머니가 교수이신터라 척 보기에도 부유하게 자라나 귀한 대접을 받았다는 티가 나는 녀석이었는데 그것은 외향적인 것에 한해서이고 성격을 말하자면은 그야말로 소심함의 극치인 녀석이었다. 수줍음 많고, 소심하고, 감정변화가 꽤나 뚜렷하게 보이는 녀석.

 녀석은 날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혐오했다.

그렇지만 녀석은 내 앞에서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고,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것이 그다지 달갑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녀석이 날 싫어한다고해서 괘씸하다거나 서로 싫어한다거나 하는 유치한 감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김상윤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무얼 하던, 무슨 말을 하던, 무슨 짓을 당하던-

나는 안경을 고쳐쓰며 버스를 타기 위해 하교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바짝 추워진 날씨로 인해 길 곳곳에 심어져있던 나무들의 잎사귀는 죄다 말라 떨어져버렸고, 주위에는 환경미화부들이 떨어진 낙엽을 쓸어 한데 모으고 있었다. 학교 앞에 부쩍 많아진 문방구들을 하나하나 지나치면서 나는 그 입구에 잔뜩 서있는 초등학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때 저 곳에 김상윤과 내가 서있었다. 잔뜩 흥분한채 오락기를 두드리던 김상윤과 그 옆에 서서 녀석이 게임을 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나.

그렇게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김상윤은 불쌍하다는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동전 백원을 건내며 옆의 게임기를 턱짓으로 가르키곤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너나 실컷하라고 대답해주었고, 김상윤은 자신의 호의가 거절당했다는것에 기분나쁜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다음 라운드로 넘어간다는 오락기의 효과음에 고개를 돌려 게임에 빠져들곤했다. 그 곳은 조그마한 상자안에 김치만두를 팔고 있었고 그 옆에는 여러가지 캐릭터 모양의 뽑기를 할 수 있는 기계가 있었는데, 늘 하교할때마다 김상윤은 그곳에 멈춰서서 한 시간은 훨씬 더 넘게 머뭇거리곤 했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바로 옆에 서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몇개의 문구점을 더 지나쳤을까….

나는 그때의 김상윤이 자주 들리곤했었던 문구점까지 발걸음이 다다르자 잠시 멈추어 고개를 들었다. 인자한 인상의 주인부부가 운영하던 조그마한 문구점은 사라지고 어느새 그곳에는 헌 책방이 들어서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길에서 벗어나와 책방 앞에 섰다.

꽤나 세련되어보이는 간판에는 행운서점이라 간결한 서체로 쓰여져 있었고, 안이 훤히 보이는 투명유리 너머로는 건물 자체를 확장한듯 예전보다 조금은 더 넓어보이는 내부에 책이 꽉 들어차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어명의 여학생들이 책하나를 들고 저들끼리 히히덕거리고 있었는데 겉표지에 쓰여져있는 제목을 보아 연애소설인듯 했다.

순간, 오늘 완전히 쓰레기가 된 수학 참고서가 생각났다. 이런 곳에서 수학 참고서를 팔 리는 없겠지만, 나는 조용히 헌 책방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훅 풍겨오는 삭은 책 냄새에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책장안에 꽂혀있는 책들 대부분은 꽤나 오랜 시간을 지내온 책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아는 책이 몇몇권이 보였다. 찾아볼 것도 없이 이곳에는 내가 필요한 수학 참고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학생들의 키득거리던 소리가 점점 사라져간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삭은 종이의 냄새는 진해졌고,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기에 낡은 책의 윗부분들을 쓰다듬으며 나는 자리에서 멈추었다. 낡은 책 사이에서 떡하니 꽂혀있는 새 책에 눈길이 간 것이다.

나는 홀린듯이 그 앞으로 다가가 그 책을 꺼내들었다. 방금 전까지 연못에 갈기갈기 찢겨 널부러져 쓰레기가 되어버린 그 수학 참고서가 이 헌 책방안에 있었다.

나는 꽤나 놀라 정말로 이 책이 내가 찾던 그 책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신기하다는듯 고개를 들어 참고서가 꽂혀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문득 참고서가 있던 자리 양 옆에 있던 책들에 눈길을 주었다.

'푸른인어 이야기'

판타지 소설인가 싶어 책을 반쯤꺼내 표지를 보았지만, 책은 그저 연한 베이지색의 평범한 겉표지로 뒤덮혀있을뿐이었다. 나는 문득 내용이 궁금해져 반쯤 꺼낸 책을 완전히 꺼내 내용을 보기위해 책을 꺼내었다.

"아무것도 없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것인지 어느새 내 뒤에는 한 남자가 꽤나 졸린 듯 두 눈을 비비며 서있었는데, 방금 일어난듯 머리가 굉장히 흐트러져있는데다 옷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완전히 빼낸 푸른인어 이야기라는 책을 바라보았다. 나는 왠지 모르겠지만 책을 펼치기 전에 한번 더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책을 펼쳤다.

"아…."

"없다고 했잖아"

마치 다이어리의 맨 뒷장처럼 책의 각 장은 금색으로 겉 테두리만 예쁘게 꾸며져있을뿐 테두리 안에는 아무런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유없이 그 하얀 종이를 한번 쓰다듬다가 이내 책을 다시 닫고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여기 주인이십니까?"

"아니"

"종업원이세요?"

"뭐…, 그거 비슷해-"

종업원이라면서 꽤나 건방진 남자의 태도에 나는 살풋 미간을 찌푸렸지만,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보여 이내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어쨌든 우연찮게 이곳에서 필요한 것을 구했으니, 나는 이것을 구매하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천천히 책장들을 한번 더 둘러보다가 종업원이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에게 다가가 책을 내밀었다. 남자는 내가 내민 책을 내려다보더니 나를 한번 바라보았다가 이내 귀찮다는듯 책을 받아들어 계산대로 향했다. 남자의 걸음걸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는데, 이곳 주인은 왜 이런 남자를 점원으로 쓰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않았다. 서비스 정신이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태도로 장부로 보이는 책에 책제목과 가격 출판사와 저자를 쓴 남자는 비고란에다가 체크를 한 뒤 책을 내밀었다.

"얼마에요?"

"이미 계산했잖아"

"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보다 혹시 나도 모르게 돈을 내밀었었나 싶어 지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9000원 지폐가 그대로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참고서 살 돈이 굳었다는 생각에 그 이상 덧붙히지 않고 책을 받아들었다.

"저 이야기책 너 가져가라"

"전 다이어리 같은거 안써요"

"책이야"

"아무것도 안쓰여져 있는데요?"

남자는 계산대에서 고개를 내밀어 푸른인어 이야기라는 책이 꽂혀있던 쪽으로 시선을 주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계산대 안으로 고개를 쑥 넣었다. 남자의 행동에 나 또한 책이 꽂혀있었던 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는데, 남자는 귀찮다는듯이 계산대에서 나와 무언가를 건냈다.

"책이 널 골랐어"

"…네?"

"저 책이 널 골랐다니까? 그러니까 가져가"

"저기…, 무슨 말이세요?"

남자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나에게 건내었던 무언가를 다시 주머니로 회수하더니 터벅터벅 걸어나와 이야기책이 꽂혀있던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푸른인어 이야기라는 책을 꺼내들고는 억지로 나에게 내밀었는데, 나는 당황스런 얼굴로 남자를 쳐다볼뿐 남자가 안겨준 책을 억지로 내밀진않았다. 별로 필요한 책은 아니지만 공짜로 준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때문인지, 책이 날 골랐다는 어이없는 말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짜로 주시는거에요…?"

"공짜로 줄 수 밖에 없으니까, 가져가-"

"…"

"그리고 그 참고서는…"

"…네?"

"다시는 험하게 다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남자는 제 할말만 하고 다시 계산대 안의 조그마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품에 안긴 수학참고서와 푸른인어이야기책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섬뜩한 감각이 등뒤로 스쳐지나갔다.

온 몸의 털이 쭈뼛서는 서늘한 감각에 나는 나도모르게 주위를 슥슥 둘러다보다가 이내 도망치듯 헌 책방에서 뛰어나갔다.

'이상하다…이상해…'

헌 책방이 들어섰다는 얘기는 언뜻 들었었다. 그것이 몇 개월 전쯤이었나, 몇 년 전쯤이었나….

연애소설이나 자기계발도서 혹은 시험문제출제유형에 맞춘 최신 참고서가 베스트 셀러로 손꼽히는 판국에 고리타분한 옛날 책이나 파는 헌 책방은 확실히 학교 앞에선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때까지 행운서점이라는 유치한 상호명을 단 이 헌 책방을 모르고 지나쳐왔던걸까….

나는 헌 책방을 나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책방 안을 바라보았다. 연애소설을 보며 킥킥거리던 여고생은 어느새 집에 간건지 보이지 않았고, 끝없이 이어진 책장의 행렬속 끝에 놓인 계산대에는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가 올려져있었다.

시력이 좋은 편은아니지만, 그것은 마치 나더러 보라는듯 열심히 반짝이고 있었는데, 나는 이윽고 그것이 아까 점원이 건내었던 수상쩍은 물건이란 것을 기억해냈다.

'다시 받으러 들어가야하나…'

하지만 나는 이미 한참이나 늦은 학원시간때문에 더이상 고민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그 날, 나는 학원에서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든 순간, 화려한 색의 비늘꼬리를 단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가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

여인은 허공위를 마치 바다 속 처럼 헤엄치고 있었으며,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여인은 나의 시선을 눈치챈것인지 즐거이 헤엄치나 문득 멈춰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기에도 넋이 나갈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그녀는 나에게 헤엄쳐 다가와 무어라 중얼였는데, 그 순간 날아들어온 회초리 때문에 나는 잠에서 깨고 말았다.

내가 푸른인어 이야기라는 책을 펼치게 된 것은 바로 그 수업이 끝난 다음 쉬는시간이었다.

평소 독서에 큰 관심도 없고 읽어봐야 온라인게임 가이드책이나 읽는 수준이었던 나는 펼쳐든 책 속에 아까는 없던 이야기가 쓰여져 있는것에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한번 놀란것은, 글 옆에 조그맣게 그려진 삽화때문이었다.

푸른인어…. 내 꿈 속에서 헤엄쳐다니던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 삽화로 그려져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두려움, 경이로움, 섬뜩함 같은 감정보다는 신기함과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앞섰다. 책 앞 부분의 내용은 푸른 인어들의 탄생과정을 서술해놓았는데, 내 꿈속에 나타났던 그녀는 바다의 신에 의해 가장 먼저 태어난 어머니 격의 푸른인어였다.

그녀의 이름은 루리아로, 이는 어머니란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바다의 신이 가장 아꼈다고 하는 북해의 바다의 여왕이었으며, 수천명의 인어의 어머니였다.

"야야, 김상윤왔네-"

"…"

나는 책에서 눈을 떼어 고개를 들고는 벌컥 열린 앞쪽 문을 바라보았다. 김상윤은 한 눈에 보기에도 꽤나 심하게 얻어터진듯, 입술 옆이 발갛게 부어 나타났는데,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며 괜찮냐고 묻는 한마디 없이 키득키득 웃기만했다. 나에게 말을 걸었던 준호녀석도 그저 그 모습을 보고 웃기만 할뿐 더이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녀석은 오다가 질나쁜 녀석들에게 돈을 뺏겼을 것이다. 소심하지만 불의를 가만히 참지않는 성격에 한번 대들었을테고, 돈만 주면 그냥 넘어갈것을 신나게 얻어터지고 돈도 뺏기고 그렇게 터덜터덜 걸으며 학원으로 왔을 것이다.

김상윤은 키득거리는 웃음사이를 지나와 내 앞에 잠깐 섰는데, 녀석이 날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차가운 냉기가 흘러넘쳤다. 꽤나 증오심을 담은 눈동자에 나는 덤덤한 반응으로 대응해주었는데, 내 옆에 서있던 준호녀석이 상윤이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듯 뭘 꼬나보냐고 소리치며 녀석의 어깨를 툭 쳤다.

"니 짓인거 다알아…!"

상윤이 녀석은 그렇게 꿍얼거리며 뒤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아버렸다. 준호녀석은 저새끼가 뭔 소리를 지껄이는거냐며 분개했지만 나는 조용히 준호 녀석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아마도 김상윤은 내가 수학참고서 일을 가지고 자신에게 보복을 했다고 생각한 듯싶었다. 아니라고 오해를 풀어봤자 김상윤은 더욱 더 분개할 것이다. 녀석은 이미 내말이라면 무조건 질색을 하고 보니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펼쳐들었던 푸른인어 이야기로 시선을 주었다.

북해바다의 인어여왕 루리아, 그녀는 인간들의 배에 납치된 자신의 딸들을 찾으러 북해를 헤엄쳐 인간들이 사는 인근 해변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인어인 그녀는 물 밖에서는 한시도 살 수 없었으며, 인간들처럼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없었기에 해변에서만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던 루리아는 한 인간마법사의 도움으로 두 다리를 가지게 되었고, 물 밖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지만 목소리를 잃고 말았다.

인간마법사는 그녀를 데리고 루리아의 딸들이 잡힌 한 귀족가의 저택으로 갔고, 그녀는 큰 저택의 한 켠에 마련된 거대 수족관에 갇혀 힘없이 헤엄치고 있는 그녀의 딸들을 발견한다.

그녀의 일곱딸들중 두 딸은 이미 달라진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어버렸고, 다섯딸들은 병에 들어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인간마법사에게 자신의 딸들을 구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인간 마법사는 루리아에게 말한다.

"김상윤, 너 왜이렇게 늦은거냐?"

"…"

"어머니한테 전화드렸다! 어머니께 잘 말씀드리고, 오늘 못배운 내용은 과제로 내줄테니 내일까지 해와라-"

"네-"

어느새 쉬는 시간이 끝나고 들어온 수학 선생님은 김상윤을 따끔히 혼을 낸 뒤 수학책을 펼쳐들었다. 나는 뒤통수가 따끔따끔거릴정도의 뜨거운 시선이 뒤에서 느껴지는 것을 느꼈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준호녀석은 저런 찌질이따위가 덤벼들지 못하게 한번 신나게 밟아주라고 얘기하지만, 나는 김상윤이 소심하게 까불거릴때마다 그저 눈짓만 슬쩍 줄뿐 어떠한 린치도 가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녀석을 비참하게 하고, 또 기고만장하게 한 것인지 오늘 처럼 조금은 도를 넘어서는 짓을 하게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런짓을 당해도 김상윤녀석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녀석의 분노를 이해하는 것도, 봐주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를 건들지 않았다.

분명 누가 듣는다면 정말 유치하고 별 것 아닌 일로 나에게 집적거린다며 비웃을 그런 내용의 분노였지만, 나는 김상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녀석은 내가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오늘과 같은 소심한 복수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 녀석의 행동을 덤덤한 마음으로 일관할테고, 녀석은 또 그것에 화를 낼 것이며, 또 다시 소심한 복수를 해댈 것이다.

나는 펼쳐들고 있던 푸른 인어 이야기 책을 덮고 수학책을 펼쳤다.

그간의 내용들을 판서하며 수학 선생님은 열심히 오늘 배울 공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고, 학생들은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내며 열심히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 적었다.

그렇게 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또 수학 선생님의 판서를 올려다 보며,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문득 오늘 찾아 간 헌 책방을 떠올리며 책상 서랍안에 넣어둔 푸른인어 이야기의 표지를 손으로 쓸었다.

불친절했던 책방의 점원은 나에게 이 책이 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말해주었었다. 이 책 옆에 떡하니 놓여있던 수학 참고서…. 그리고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름다운 꼬리를 가진 푸른인어 루리아-

판타지 소설을 자주 읽어본적은 없지만, 마치 동화같은 전개로 이어지는 푸른인어 이야기는 여타 판타지 소설과는 무언가 달랐다.

"그럼 이 부분은 김상윤이 나와서 풀어보자-"

수학 선생님의 지명에 의자를 끄는 소리와 함께 김상윤이 일어섰다. 김상윤은 내옆을 슥 지나가며 차가운 바람을 일으켰고, 나는 무심코 푸른인어 이야기에 대한 신경을 그에게 옮겼다. 그는 마치 보라는듯 분필을 들고 수학문제를 척척 풀어나갔는데, 학원에 늦어 배우지 못했을 수학 공식도 응용해가며 풀어나갔다. 복잡한 수학 식 아래에 세개의 점을 찍고 답을 적은 김상윤은 보란듯이 답에 두어번 동그라미를  긋고 돌아섰다. 녀석은 돌아보자마자 나에게 시선을 주었는데, 그의 표정에는 마치 자신이 자랑스럽다는듯한 표정이 짙게 묻어나왔다.

내가 김상윤보다 못하는 유일한 과목은 수학이었기때문이다.

그래봤자 2~3점 차이이긴 하지만, 김상윤은 유일하게 나를 뛰어넘는 과목이 수학 시간이었기에 수학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옆에 앉은 준호녀석은 재수없다고 나에게 수군거렸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마도 시선을 피한 내 행동에 김상윤은 더욱 더 승리감에 도취될 것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던지 말던지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대의 심장을 나에게 준다면 당신의 딸들을 모두 북해로 보내줄 것이오]

[그 약속을 내가 죽은 뒤 지킨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죠?]

[내가 원하는 것은 그대가 죽길 바라는 것이 아니오-]

[그럼 무엇을 원하는 건가요?]

[나의 아내가 되어주시오]

잠에 들지도 않았는데 눈앞에서 루리아가 헤엄친다. 이미 그녀는 그 아름다운 꼬리를 잃고 목소리를 잃었을텐데 내 눈앞의 푸른인어는 화려한 색채의 꼬리와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짓에 따라 시선을 돌리며 그녀의 노래를 감상했는데, 그녀의 노래 때문에 수학 선생님의 목소리도, 주위 아이들의 사각거리는 연필소리도, 수군거리는 소리도 모두 들리지 않았다.

소설에 몰두하게 되면 이러한 환상을 보게 되는 걸까?

하지만 눈 앞의 푸른인어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선명했으며, 마치 실물처럼 허공을 헤엄치며 원실 안을 휘저었다.

'울지말아요- 당신의 눈물에 섞인 북해의 편린이 내 심장에 박혀들어와 나는 너무나도 아프답니다, 왜 그렇게 아파하나요? 나의 기도는 당신의 가슴에 닿지 않은 것인가요? 아니면 당신의 가슴에 닿은 나의 기도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었나요?'

그때였다.

내 어깨를 툭치는 감각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수학선생님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시간에도 그러더니…안그러던 애가 왜이러는거냐?"

"죄송합니다…"

"몇번이나 부른줄 아니? 빨리 나가서 저거 풀어-"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나갔다.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지만, 난 한참동안 그 문제를 바라보다가 분필을 놓고 말았다.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실망한 듯한 선생님의 얼굴, 저것도 못푸냐는듯 웃고있는 아이들, 승리감에 도취되어 기뻐하고 있는 김상윤….

나는 그 속에서도 푸른 인어를 찾고 있었다.

"그다지 어려운 문제도 아닐텐데…, 공식을 못외운거니?"

"아니요"

머릿속엔 이미 그 답이 나와있다. 순차적으로 식을 적어넣고 밑에 김상윤이 했던 것처럼 답만 크게 적어넣으면 될 뿐인데 나는 쉽사리 분필을 잡지 못했다.

그제서야 나는 묘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는 김상윤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상윤이를 가르켰다.

"네가 풀어줘"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리고 고개를 돌려 김상윤을 바라보았다. 김상윤은 내 지목에 조금 당황한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기분나쁘다는듯 나를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왔다.

그리곤 칠판위에 올려진 분필을 들어 문제를 한번 더 확인하더니 이내 한문장씩 식을 적어나갔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벗어나 상윤이가 풀고 있는 문제를 바라보았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계산을 끝낸 문제였지만 나는 상윤이 막힘없이 풀어나가는 식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일 그 헌 책방에 다시 찾아가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정체불명의 헌 책방과 사연많은 한 남자 고등학생의 이야기~

(+ 원래 제목을 바꿨습니다 ~ 왠지 원래 지은 제목보다는 이 편이 훨씬 더 소설 내용을 반영하는것같아서...;)

[도도한여인]

오 독특하다 ㅋ ㅋ 재밌어요!!

[레이스]

오 ~ 내용이 좋아요1 ㅎㅎㅎ

[샤샤야일로와]

헐... 대박!! 이런 문체 되게 좋아용ㅠㅠ 판타지인가요.;; 여튼 다음편 기대하구 가용!!

[리클라이]

재밌어요~ ^^

[바다.☆]

되게 분위기 있는 소설인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