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 "자유를 향한 10만의 행렬은 질서정연했다"
특종! 흥남철수작전 지휘 이몬드 장군 생전 인터뷰
에드워드 M 알몬드 장군(1892--1979)
金永男(전 조갑제닷컴 기자)
한국 전쟁 당시 흥남 철수 작전을 지휘한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아몬드 장군. 그는 흥남 철수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피란민들은) 공산주의가 싫어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이다. 나는 인도주의적으로 해야 할 일을 했다. 철수 작전을 계획할 시간도, 안전성을 검토해 볼 시간도 없었다. 그냥 기본 상식을 따랐을 뿐이다.”
후퇴하는 군대가 10만 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전쟁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전을 펼친 名將(명장)이 82세 때 외손자인 토머스 퍼거슨 예비역 대령에게 남긴 말이다. 1943년에 태어난 퍼거슨 대령은 할아버지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고 했다. 퍼거슨의 아버지는 1944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戰死했다. 군인이었던 그의 외삼촌 역시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아기 퍼거슨을 데리고 자신의 아버지, 즉 아몬드 장군이 주둔하던 일본 동경으로 가서 함께 생활했다.
퍼거슨 씨 역시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해 장교로 임관했다. 월남전 때 라오스에서 근무했으며 그 후에는 교단에 오르기 위해 듀크 대학교에서 역사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이후 미국 군역사 연구소에서 공부하던 그에게 다음과 같은 과제가 내려졌다. “존경할 만한 군인을 인터뷰하라.”
1975년, 퍼거슨은 외할아버지 아몬드 장군이 지내던 앨라배마州를 찾아 한 週를 같이 보내면서 14시간에 달하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할머니는 남편 아몬드 장군의 기력이 혹시 떨어질까 우려해 손주의 인터뷰를 계속 막으려 했다고 한다.
내가 14시간 가량의 녹취 파일을 들어보니 아몬드 장군이 한국에 갖고 있는 특별한 애틋함이 느껴졌다. 인터뷰가 진행된 앨라배마주의 자택 지하실 천장에는 크게 한국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흥남 철수의 秘話를, 지도를 가리키며 소개해나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그가 태어난 버지니아주 특유의 사투리가 인상적이었다.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흥남 철수 당시 상황을 소개해달라
“당시 지휘관으로서 내 임무는 최대한 많은 민간 군무원들과 反(반)공산주의자들을 배에 싣는 것이었다. 우리만 바라보는 피란민을 외면할 수 없었다. 화물칸에 있던 탱크와 물자들 사이에도 공간이 많았기에 그곳에 피란민들을 태우기로 했다.
철수 작전 때 人力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차마 싣지 못하고 버리고 가야 하나 고민하던 기름 드럼통 같은 물자들이 많았다. 그때 피란민들에게 일을 시켜보자고 결정했고 그들은 2인 1조로 50갤런짜리 드럼통을 굴리며 배에 싣기 시작했다. 이들이 없었으면 이 물자들은 불 태워졌거나 적들에게 뺏겼을 것이다. 아주 큰 도움이 됐다.”
아몬드 장군은 철수 상황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영화에서처럼) ‘아비규환’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피란민들이 미군의 지시를 잘 따랐다고 설명했다. 손주 퍼거슨 대령은 흥남 철수 당시 화물칸 안에 있던 피란민들이 어떻게 불을 지폈는지 요리를 하고 있어서 선원들이 화를 냈다는 얘기도 할아버지를 통해 들었다고 했다.
흥남 철수를 회고하며 아몬드 장군은 외손주에게 “철수하지 않고도 중공군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 장군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중공군에게는 이렇다 할 무기도 없었고 사람이 많은 것뿐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퍼거슨 대령에 따르면 백악관을 비롯한 워싱턴에서는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무조건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워싱턴 일각에서는 38선 이북으로 북진할 시 중공군이 개입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맥아더 장군도 중공군 개입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은 어땠는가?
“나는 당시 원산 지역에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대규모 중공군 개입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소규모의 중공군 부대가 압록강을 건널 것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소규모 개입은 美 해군과 공군 폭격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우리가 당시 알지 못했던 점은, 영국군을 비롯한 유엔군 일부는 중공군에 대한 폭격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당시 영국은 북경에서 모택동과 일종의 외교적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은 중공군이 개입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공격할 마음도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10군단이 원산 지역에 상륙하기 직전 상황인데, 당시 압록강 북부에 중공군이 모이고 있는 것을 알았는가?
“10월 29일 맥아더 장군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7사단이 함흥 지역에 도착했을 때 장진호 부근에서 무장한 중공군을 만났다. 당시 군복과 무기를 들고 있던 중공군 16명을 포로로 잡고 인터뷰를 했다. 통역을 대동했지만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다.
내 첫 질문은 어디 소속인가였다. 그들은 당시 중공군 지휘관 중 한 명인 ‘린뱌오 (林彪임표)’라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임무가 무엇인지 묻자 그들은 부산까지 가는 것이었다고 했다. 부산에서 무엇을 할 계획인지를 물으니 미군과 한국군을 비롯한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제대로 무장한 중공군을 처음 봤기 때문에 이를 맥아더 장군에게 보고하는 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10군단을 동부에 상륙시킨 맥아더 장군의 초기 계획은 서쪽으로 진군해 8군과 합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8군이 평양으로 진군하게 되자 10월 19일 10군단의 임무를 만주 쪽으로 북진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 계획은 무엇이었는가?
“초기 10군단의 목적은 8군의 평양 공격을 돕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군 26연대가 함흥 지역에서 중공군을 발견한 뒤 맥아더 장군은 10군단을 북동지역으로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8군과 10군단 사이는 산과 중공군이 가로막고 있어 비행기를 사용하지 않고는 물자를 나를 수 없었다.”
퍼거슨 대령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훌륭한 군인이자 가족에 헌신하려 최선을 다한 가장으로 기억했다. 퍼거슨은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만났을 때 약속을 하나 했다고 한다. 나는 군인이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약속한다. 내가 은퇴하고 나면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여생을 함께 하겠다고”라고 전했다.
이러한 이유로 아몬드 장군은 부인의 고향인 앨라배마주로 이주했다. 손주들이 놀러 오면 놀 수 있도록 운동기구도 만들고 할머니를 위한 화원을 가꾸기도 했다.
아몬드 장군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 중 한 명은 아마도 퍼거슨 대령일 것이다. 퍼거슨 대령의 어머니=아몬드 장군의 딸은 전쟁 이후 戰死한 남편의 동기생인 군인을 만나 재혼했다. 퍼거슨 대령은 저녁 식사 자리 등에서 새 아버지와 맥아더 장군과 관련해 대화를 많이 나눴다고 했다.
퍼거슨 씨는 맥아더를 존경한 반면 자신의 새 아버지는 맥아더를 독불장군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신기한 점은 아몬드 장군과 퍼거슨의 새 아버지, 그리고 퍼거슨 대령 모두 한국에서 근무를 했다.
퍼거슨 대령은 1979년 아몬드 장군 장례식을 위해 직접 弔辭(조사)를 작성하기도 했다. 장례식장에서 조사를 읽지는 못했지만 그가 작성한 글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말은 셰익스피어의, ‘겁쟁이는 천 번을 죽지만, 사나이는 한 번만 죽는다’였다. 오늘 우리는 한 사나이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는 애국자이자 군인이었고, 지도자이자 아버지, 그리고 나의 할아버지였다.>
퍼거슨 대령은 영화 ‘국제시장’이 미국에서 상영되자 여러 차례에 걸쳐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 시작 부분에 아몬드 장군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를 본 뒤 “할아버지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데 그건 조금 어색하긴 했다.
하지만 너무 좋은 영화다. 빨리 영상 파일이 공개된다면 친지와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했다.
끝으로 퍼거슨 씨는 이러한 말을 했다. “흔히 한국 전쟁이라고 하면 인천상륙작전이나 서울 수복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흥남 철수 역시 매우 중요한 작전이라고 생각한다. 피란민을 군용선박에 태우기로 결정한 할아버지가 매우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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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장군은 흥남철수 작전 때 10군단장으로서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및 한국군 1군단을 지휘했다. 당시 나이 58세의 역전의 용사였다. 1차 대전 때 소령으로 프랑스에서 참전 부상당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때는 최초의 흑인 사단인 92보병사단장으로서 3년간 이탈리아 전선에서 고전했다.
戰後 맥아더 원수에게 발탁되어 일본 점령군, 즉 극동군 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있다가 10군단 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 작전 지휘관이 되었고 서울을 탈환한 후 원산에 상륙, 북진 중 중공군의 역습을 받고 철수했었다. 그는 1951년 중공군에 대한 반격 작전을 펼 때 공을 세웠다.
그해 2월 중장으로 승진, 7월 미 육군 워 칼리지 교장으로 전보되었다. 1953년에 전역했고, 1979년 86세로 사망했다. 중공군 개입에 대한 오판과 무리한 공격명령 등에 대한 비판도 받는다. 워커 8군 사령관과의 협조도 원활하지 못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말로리 아먼드 2세는 육군대위였는데, 1945년 3월19일 프랑스 전선에서 전사했다. 종전 두 달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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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美軍] 아, 장진호(湖)!
美 7사단 사망자만 무려 2500여 명.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이 미군들의 목숨값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證人(회원)
장진호(湖)는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강(江)을 댐으로 막아서 만든 인공호수이다.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美 해병1사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 1만5000여 명이 개마고원 장진호 주변에서 12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몰렸다가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를 뚫고 후퇴에 성공한 전투이다. 美 해병1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북괴군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던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으며, 미군의 戰史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美 해병1사단 외에 美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자신들의 10배에 달하는 12만 중국군 병력의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이 중국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작전을 말한다. 흥남철수 작전개시일에 평양에서도 같이 철수했다. 이른바 1·4후퇴다. 장진호전투에서 중국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 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중국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그 과정에 중국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미군의 희생도 컸다. 미 7사단 사망자만 무려 2500여 명.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이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죽어갔을까?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이 미군들의 목숨값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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