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참 덧 없는 것 같다. 한 때 라스 베가스에서 코리언의 이름을 떨치던 숙자. 애자 . 민자 ㅡ 김씨스터즈. 애자의 죽음을 맞았던 사연을 들으면 가슴이 저민다. 미국인 남편을 만나 딸과 아들을 낳은 숙자의 인생사도 코리언의 슬픈 이야기 그 자체다. 벌써 85세가 된 숙자. 5살이 많은 나의 이복누나다. 난 다음과 같은 거짓아닌 거짓말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이달 22일에 인천에 나를 만나러 온단다. 숙자는 부동산중개사 자격을 땄단다. 영어로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숙자의 컴퓨터엔 한글이 깨진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다 죽을 때가 되니까 가까워 지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어 오래 살고 볼 일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suekimboni@msn.com Lim Chang Woo who said that he has a permanent resident right of America called my wife, Myung-ok, realtor, yesterday and he wanted to sell his land out called "woodland" near northern Seoul area. He also wanted to price it totally, around 2 billion won more. The woodland spaces around 12,000 pyung( around 3,960 square meters) and he wants to sell it out for 200,000 won(US$200)per 1 pyung. If you succeed to sell that land adding US$100 per 1 pyung, your commission will be US$ 1,200,000. He said he'll send documents of that woodland to my office's fax machine, but still he didn't keep his word. That woodland is called "green belt", but someday government will lift it's green belt limitation of developing.........everyone knows that fact. I'm curious about him, how do you make aqaintance with him? and you can trust him? Cause our sponsor wants to know about him..... If he run away before hand over the right possession of the woodland. Anyway, we'll wait and see till he send documents to us..... Thanks......Bye.
-- Kim Young-Nam 김치 깍두기 ㅡ 김시스터즈 김영일 작사 이뵹룡 작곡 머나먼 미국땅에 10년 넘어 살면서 고국생각 그리워 아침저녁 식사때면 런치에다 비프스테잌 맛 좋다고 자랑쳐도 우리나라 배추김치 깍두기만 못 하드라 코리아의 천하명물 김치 깍두기 깍두기 자나 깨나 잊지 못할 김치 깍두기 낯설은 타국땅에 몇몇해를 살면서 고향생각 그리워 오나가나 식사때면 런치에다 비프스테잌 맛 좋다고 자랑쳐도 우리나라 된장찌개 고추장만 못하드라 코리아의 천하진미 뚝배기에 된장찌개 자나 깨나 잊지 못 할 된장찌개드라. 우리나라 명태찌개 고추장만 못 하드라 코리아의 천하일품 김치 깍두기 깍두기 자나 깨나 잊지 못할 김치 깍두기 1930년대 중반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동화시키고자 문화말살정책을 강화했고 이에 조선일보는 그 문화를 지키려 맞대응했다. 조선의 학술문화를 발굴 선양 보급하는 조선학(朝鮮學) 운동을 비롯해 한글 보급운동, 향토물산 장려 운동 등을 펼쳤으며 그 일환으로 조국애를 대중가요를 통해 심으려는 애향가(愛鄕歌) 가사 현상모집을 했다. 이때 입상한 가사가 ‘목포의 눈물’이다. 이 가사에 손목인이 곡을 붙여 목포가 고향인 18세의 무명가수 이난영이 부른 이 노래는 억눌린 채 잠재된 민족의 공감대에 불을 댕겨 발매되자마자 5만 장이나 팔려나갔다. 당황한 총독부는 발매 금지시키고 관계자를 불러 조사를 했다. 이 노래의 가사 가운데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가 조사의 초점이었다. 노적봉은 유달산의 별칭으로 이순신 장군의 왜적 섬멸과 연관이 있는 전설의 산이다. 곧 삼백년 원한이란 300년 전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조선침략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이 대목이 암암리에 민족공감의 고리 구실을 한 것이다. 이때 작곡가 손목인은 ‘원한’이 아니라 남녀사랑을 상징하는‘원앙’이라고 변명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결국 ‘삼백년 원한 품’은 ‘三柏淵 願顔風’으로 무슨 뜻인지 모르게 바꿔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기구한 곡절이 담긴 ‘목포의 눈물’ 이다. 곧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노래가 아니라 민족 저항의 표출이었다.
민족가수로 아로새겨진 이난영은 작곡가요 악극단을 거느린 대중가요의 대부였던 김해송과 결혼했고 한국전쟁 때 남편의 납북으로 생이별, 자녀에게 노래를 가르쳐 김시스터즈로 미국에 가 활동하게 했다.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시신은 파주 광탄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 이듬해에 목포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그녀가 읊었던 저항정서만은 귀향했지만 그녀의 영혼은 연고 없는 땅에서 방황해왔다. 그 고독한 영혼을 40년 만에야 태어난 고향이요 노래의 고향이기도 한 목포로 이장키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라는 노래비 속의 구절을 ‘당신이 흘린 눈물은 보석입니다’로 바꿔 새겨야 할 판이다.' 2006년 3월에 목포 유달산의 품에 영원히 안겼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 ) * 경기 고양 벽제 용미리 가족묘지(묘경계석 김영조 )에 안장. 2006년 목포로 이장 * 작곡가 이봉용은 이난영의 친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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