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은 그 자신이 영화배우였고 감독이었으며 영화의 대본으로 쓸 영화소설의 작가이기도 했다.
소설 상록수가 대중적 인기리에 성공하자 곧 영화제작을 계획하였다. 신문기자를 하다가 쉬는 기간
일본에 건너가 영화관련 공부를 하기도 했다.
심훈이 연극과 영화에 심취한 것은 중국 망명과 유학에서 귀국후 부터였다.
1920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망명기간중 베이징·상하이·난징에서 활동하다 항저우의 즈장 대학에 입학했다가 1923년 귀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내세운 염군사의 연극부에 가담해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를 조직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소설 〈미인의 한〉 후반부를 번안했고,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계림영화사는 조일재의 주재로 지금 영화계에서 저명한 배우들을 망라하여 조선영화제작에 노력 중
제 1회 작품으로 일본의 원작 『금색야차』를 번안하여 각색과 감독은 사계의 일인자로 칭찬받는 이경손 씨가
하였으며 주삼손, 김정숙 양이 주연했고 정기탁, 강홍식, 나운규, 남궁운, 이규설 군 등과 김명순 양 등이 조연,
니시카와 히데오 군이 촬영하였다···” (동아일보 26. 2. 28)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상록수
다재다능했던 심훈은 영화제작자나 영화감독으로도 성공하고 싶어 했고 자신의 역량을 쏟아 부었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상록수의 영화제작에 필요한 투자자와 인적자원의 섭외등 여러가지 조치를
사전에 취했지만, 시나리오를 손보는 중에 병에 걸렸고 곧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여러 논평자들이 일제의 방해로 상록수의 영화화가 되지 못했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방해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원작 소설을 쓰는데도 검열을 피하기 위한 고심의 흔적이 보이고, 그 전에 시와 소설
여러편이 햇빛을 보지 못했으므로 심리적인 방해와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영화제작이 계획보다
늦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병상에서도 유쾌하게 호언하던 심훈의 갑작스런 사망에
또 다른 의구심이 드는점도 없지않아 있는 것이다.
어쨋든 요절한 천재의 꿈은 25년 후에 후배 영화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결과도 성공이었다.
추석을 기해 개봉된 영화 상록수는 명절 특수에 힘입었는지 아니면 기라성같은 출연배우와 감독의
명성때문이었는지 관객동원과 흥행에도 성공하고 작품도 여러 상을 휩쓸었다. 한국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감독 신상옥은 많은 작품가운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상록수를 꼽을뿐만 아니라 후대 영화인들이
기념하는 그의 회고전에도 꼭 상록수가 등장하게 된다.
상록수
일제강점기에 농촌계몽에 몸을 던진 젊은이의 아름다운 민족혼과 사랑을 그린 1961년작 한국영화.
이 영화로 감독 신상옥, 배우 김진규 최은희 허장강등은 각종 영화제에서 감독상,남우주연상,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휩쓸었다. 나중에 최고의 인기 배우가 되는 데뷔 초기의 신성일이 조연으로 단역 출연했다.
거장 신상옥(申相玉)이 감독을 한 흑백영화이다. 심훈(沈熏)의 동명소설을 김강윤(金剛潤)이 각색을 하였고,
최은희(崔銀姬)·신영균(申榮均)이 출연하였다.
농촌계몽활동에 참여했던 학생 박동혁(신영균)과 채영신(최은희)은 신문사가 주최한 보고회 겸 위로회에
참석했다가 만나 서로의 의지를 확인하고 사랑을 싹틔운다. 영신은 산골인 청석골에 내려와 청석학원
(靑石學院)을 세워 어린이를 가르치고 농민을 깨우친다. 일본 경찰의 방해로 고초를 겪다가 동혁이 잡혀간다.
그가 돌아와 보니 영신은 지쳐 숨을 거두었다.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들의 정열적인 연기가 이 영화를 더욱 격조있게 하였다. 제1회 대종상과 제5회
부일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 최은희, 제9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신영균, 남우조연상 허장강(許長江),
시나리오상, 음악상(鄭潤柱)을 수상하였다.
해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이은 신상옥의 문예영화.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심훈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심훈은 1926년 이경손의 ‘장한몽’에 출연하고 나서 신문에 난 전과자의 로맨스를 그린 ‘먼동이 틀 때’(1927)로
감독에 데뷔한 바 있다. 자신의 소설인 『상록수』를 영화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1936년 3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이 작품은 그가 죽은 지 25년 만에 영화화된 것이다.
농촌 계몽운동을 통해 일제하의 민족의식과 일제억압에 대한 저항,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망,
나라 잃은 청년들의 애국심, 농촌 계몽운동에 헌신하는 대학생들과 그들 사이의 순애를 그리고 있다.
경기도 화성군 샘골의 실제인물인 최용신의 일대기로 영화에서는 이름을 채영신으로 바꿨다.
특히 최은희의 채영신 역은 교과서에 실린 모습 그대로 청석예배당에서 어린이를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두 남녀 주인공이 그 당시 농촌에서 민족의 비운을 어떻게 타개해 나갔는가에
초점을 두고 한 여성의 신념이 힘없는 농민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불어넣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경향신문 61. 9. 26)
추석을 기해 대구, 대전과 광주(중앙), 인천(시민), 전주(오스카), 마산(강남극장) 등 8개 도시에서 동시
개봉되어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30년대의 계몽의지를 5·16 직후의 60년대 사회에서 영상화한 이 작품은 대종상, 부일영화상,
아시아영화제 등에서의 큰 성과와 흥행에서의 성공 외에 또 다른 결과를 낳았다.
권력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최은희는 이 작품으로 인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신상옥 감독과 신필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영화법을 제정하고 문화영화를 의무 상영케 하는 등 영화를 통한 공보·선전 정책에 힘을 쏟았던 박정희
정권에 있어 <상록수>의 계몽적 이미지들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음직하다. 이후 신필름의 63년작 <쌀>에서도
최은희는 적극적인 성격의 여성 ‘정희’역을 맡아 박정희 정권의 산업근대화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얼굴이 된다.
당시홍보처장이며 나중에 정보부장이 되는 이후락은 시공관에서 영화를 본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눈시울을 붉혔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에 관한 증언은 신상옥감독 생전에 안산의 상록수영화제에
초대받아 한 인사말에서도 다시 확인되었다.
'신 감독은 문학을 좋아해서 늘 소설책을 끼고 다녔고,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책을 늘 쌓아 놓고 읽었다. 신 감독 영화의 바탕은 문학이고, 거기서 출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문예작품 중의 하나가 심훈의 실화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상록수'이다.
같이 출연한 배우로는 신영균. 허장강. 도금봉. 신성일. 한은진. 윤일봉씨 등이다.
일제시대에 젊은 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농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하는
이야기다. 나는 신여성 최용신 역(실명은 채용신)을 맡았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작업이었다. 일제시대 학생운동과 그 시대 여학생들의 복장 등에 대한 고증은 필수였고,
농민들과 더불어 고생스럽게 생활하며 오로지 민족을 살리기 위해 애쓰던 학생들의 정신을 표현하는
일도 중요했다. 가난에 찌든 생활상을 표현하기 위해 멀쩡한 옷을 돌바닥에 짓이겨 누더기로 만들거나,
농가에 새 옷을 가져다주고 낡은 옷으로 바꿔 오기도 하면서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이 영화로 나는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신영균도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했다. 몇년 전 미국의 모마(현대미술관)에서 '신상옥 감독 회고전'을 했을 때 '상록수'도
상영되었다. 그때 불란서 라고시에 영화제에 소개하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영화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옛날 가장 못살고 발전되지 못한 농가의 이야기여서 요즘 같은 시대에 반응이 어떨까 했는데,
의외로 호평을 받았다. 그들도 이 영화처럼 국가적인 가난을 겪어 봤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다면서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상록수'는 2005년에 부산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1960년대엔 '상록수'가 우리들에게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일제 때 고생스럽던 시기를 경험한 관객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상록수'를 보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새마을운동을 구상했다는
말이 들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신 감독과 나에게 큰 관심을 보이며 자주 만찬에 초대했다.
그때 나는 육영수 여사와 친분을 맺기도 했다. (최은희 회고중에서)
이 영화는 2003년 5월 14일 프랑스에서 개막된 제56회 칸 국제영화제에서도 소개되었다. 칸 국제영화제가
우리나라 감독의 영화를 회고전에 초대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1978년 임권택이 김희라, 한혜숙 주연으로
이를 리메이크했다.
상록수(1961) / Evergreen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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