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복-9월의 어느 멋진 날
열흘 전쯤의 일이다.
“다른 법무사에게 일을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등기수수료를 우리보다 20만원이나 싼 40만원을 받는다고 했데요.”
서초동 우리 법무사사무소 ‘작은 행복’의 살림살이를 도맡다시피 하고 있는 유숙현 실장이 내게 한 보고가 그랬다.
내 평소 ‘형님’이라고 호칭하는 서울 한남동 주류도매상 ‘선호상사’ 조영철회장이 그 부인이름으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면서 우리 사무소에 등기를 맡겼는데, 그 부인이 전화를 해 와서 우리 사무소가 다른 곳보다 비용을 더 많이 받는다면서 수수료를 적게 받는 법무사에게 그 등기를 맡길 것처럼 그렇게 뜻을 내비쳤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 부인 뜻대로 해드려. 우린 어차피 없었던 일로 치면 되잖아. 혹시 조회장님이 내가 삐쳤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니 우리가 그 등기를 맡지 않는 이유에 대해 좋게 좋게 말씀드려야 해.”
섭섭해 하는 유실장을 내 그렇게 달랬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그 부인한테서 전화가 다시 왔는데요, 남편이 그러기를 수수료가 많니 적니 계산하지 말고 무조건 우리 사무소에서 등기를 하라고 해서 다시 맡겨야겠다고 했어요.”
유실장의 보고가 그랬다.
내 짐작대로였다.
우리 사무소 법무사비용은 전적으로 유실장의 몫이다.
유실장이 이차저차 요차조차 사연을 다 짚어서 적당하다싶은 금액으로 수수료를 책정하기 때문이다.
수수료 책정에 내가 개입하게 되면, 유실장의 재량이 그만큼 줄어들고, 그 줄어든 만큼 일할 의욕이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규정대로 받을 수도 있고 적게 받을 수도 있는 수수료 같은 법무사비용은 전적으로 유실장에게 맡겨놓고 있는 것이다.
조회장이 의뢰한 그 등기도, 유실장이 나와 조회장과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어서 법정 수수료에서 상당한 금액을 깎아서 60만원이라는 수수료를 통보했던 것인데, 그 부인이 여기저기 다른 법무사들에게 물어봐서 비교분석 결과 그 중 가장 싸다는 덤핑전문 법무사를 찾아냈고, 그리고 그 법무사에게 등기를 맡기려고 했던 것이었다.
결국 20만원이라는 돈이, 우리 사무소에 일을 맡기느냐 안 맡기느냐 하는 선택의 잣대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나와 조회장 사이에 그 돈을 잣대로 해서 뭔가 일을 그르칠 일이 아님을 내 잘 알고 있었기에, 다시 부인의 마음이 되돌아 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7년 전으로 거슬러, 우리 사무소 개업 초기의 일이다.
개업 며칠 후, 조회장이 우리 사무소를 찾아와줬다.
사실 나와 조회장과의 인연 맺어짐은 그때로부터 다시 20여 년을 더 거슬러 올라서의 일이었다.
내가 대검찰청중앙수사부 수사관으로 근무할 때였는데, 당시 종로쪽에서 컴퓨터 게임과 관련된 사업을 하던 내 중학교 동기동창인 김동극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인연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반반한 그 모습으로 미루어 내 또래라고 생각해서 친구처럼 지냈다.
히지만, 차차 그 나이가 나보다는 서너 살 더 위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형님’이라고 깍듯이 존칭을 해왔다.
특별히 내게 사건부탁을 해서 내 처신을 어렵게 한 적도 없었다.
늘 그 모습만큼이나 처신이 반듯했고, 부자임에도 그 부자를 내세워 내게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온 조회장이었기에, 그 방문이 나로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개업을 했으니 축하해주러 왔어.”
“형님, 귀한 발걸음을 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김동극 사장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인도 같이 일한다면서.”
“그렇습니다. 직원들 밥도 챙겨주고 회계도 맡아주고는 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부인을 편하게 해드려야지, 이렇게 고생시키면 되겠나.”
“믿을 사람이 없어요.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아내가 빼먹는 것은 그게 그거지만, 남이 빼먹으면 그냥 잃고 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망하기 십상이어서 아내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부인은 어디 계시는가?”
“바로 여기 칸막이 뒤쪽에 있어요.”
그 첫 발걸음에서 나와 이어진 대화가 그랬다.
그리고 곧 조회장의 부름을 받아 아내가 그 칸막이 뒤에서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어허, 부인께서 큰 고생하시네요.”
“아닙니다. 남편 하는 일이니 당연히 저도 나서야지요.”
“잘하셨습니다. 이 친구 잘 도와주세요. 남편 입장에서는 아내의 도움이 그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됩니다. 나도 뭔가 도움이 되도록 애써보겠습니다.”
조회장이 아내와 나눈 대화가 그랬다.
그리고 주섬주섬 상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만 수표 몇 장을 꺼내서 아내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이렇게 말 한마디를 더 전해주고 있었다.
“개업 초기에는 별로 수입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살림살이가 힘들 수가 있는데, 그때 보태 쓰도록 하세요.”
그 돈, 500만원이었다.
내가 31년 9개월의 검찰수사관 생활을 끝내고 일반인이 된 이후로, 내게서 멀어지는 야속한 인심들 속에서, 조회장의 그 돈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내가 손사래 치며 나설 수밖에 없었다.
“형님, 이건 너무 큰돈이야. 받을 수 없어요!”
내 그 말, 돈이 궁했던 당시로는 어쩌면 입에만 발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조회장은 이 한마디 답변으로 떳떳하게 해주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주는 건 당신 부인이야. 당신이 나설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 그동안 당신한테 뭔가 부탁해서 덕 본 일은 없어. 그러나 당신이 내 옆에 있었다는 그 자체로, 나는 마음 놓고 사업을 할 수 있었으니, 내 당신 덕을 봐도 단단히 본 거야. 그러니 공것이 아니다 이 말일세.”
아내가 떳떳하게 그 돈을 받을 수 있게끔, 그 빌미를 조회장은 그렇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아내의 감동은 당연했고, 옆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런 조회장이었기에, 돈 몇 푼으로 법무사를 바꾸려 하는 그 아내에 대해 작은 꾸짖음이 있겠구나 하는 내 짐작은 당연한 것이었다.
조회장의 그 단안은 나와 아내에게 큰 힘이 됐고, 유실장을 비롯한 우리 직원 모두에게 나의 인간됨됨이를 보여줄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됐다.
그래서 내 그 조회장에게 이렇게 문자메시지 한 통을 보내서, 내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형님, 참 고맙습니다. 그동안 주위의 배신으로 속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달랐습니다. 돈의 크고 작음에 얽매이지 않고, 무조건적 신뢰를 보여주셨습니다. 나도 기쁘고, 내 아내도 마찬가지로 기뻐했습니다. 더더욱 고마운 것은, 우리 직원들에게 내 그동안 주위의 신뢰를 얻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내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부인께도 내 고마워하는 이 마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늘 건승하시고, 늘 복되시기를 내 진정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아우 기원섭 마음」
곧 답이 왔다.
그 내용, 이랬다.
「십 몇 억 하는 새 집을 사면서, 몇 푼 안 되는 등기수수료로 마음 휘둘릴 사람이 아니네. 그 새 집에 들어올 복이 멈칫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일세. 당연한 것을 가지고 고마워하는 당신의 마음이 도리어 더 고맙네. 부인 잘 챙겨드리고, 법무사로서 꼭 성공하기를 바라네. 조영철 마음」
그날, 참 멋진 날이었다.
그렇게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내 생각의 세계는 아내가 마음 다친 사연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역시 우리 사무소 개업 초기의 일이었다.
내 고등학교 친구 부인이 내 아내의 마음을 다치게 한 그 장본인으로, 내 아내가 부부동반으로 제주여행에 초대해서 그 비싸다는 중문 신라호텔에 투숙하게 했던 인연까지 있는 부인이다.
그 부인이 개업한 지 한 달 만에 자기 동생이 집을 샀다면서 첫 등기를 맡겼었는데, 그 하루 뒤에 그 동생으로 내 아내에게 전화를 하게 해서 그 등기의뢰를 취소해버렸었다.
아내가 그 부인에게 처음 그 의뢰를 받았을 때, 아내가 내게 자랑삼아 말하기를, 그 부인이 우리 부부를 위해서 개업선물을 준 것이라면서 그렇게도 기뻐했던 것이, 지금도 내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있다.
그렇게 기뻐했던 아내였는데, 그 하루 뒤에 당초 일을 맡긴 그 부인 본인도 아닌, 그 동생이 아내에게 전화를 해 와서 등기 의뢰를 취소했으니, 그 실망스런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었다.
의뢰를 취소한 것도, 그냥 다른 곳에 맡긴다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듣는 아내 기분 나쁘게, 이렇게 말했다고 아내가 내게 전했다.
“다른 법무사보다 10만원이 더 비싸요. 왜 그렇게 비싸게 받으세요? 그래서 못 맡기겠어요.”
그렇게 다짜고짜 통보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비정한 폭언이었다.
그 다른 법무사의 수준으로 깎아주면 어떠냐는 식으로 부탁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부인, 그 이후로 내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나도 안 본다.
알량한 돈 10만원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치졸한 방법으로, 내 사랑하는 아내의 인격을 뭉갠 것만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가 그런 것이 아니라, 여동생이 그런 것을 어찌하느냐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동생의 그런 처신을 방조한 것이 더 비겁하고 야비하다.
그날, 참 더러운 날이었다.
2015년 9월 18일 금요일의 일이었다.
오전 9시쯤에 서울 서초동 우리 법무사사무소 ‘작은 행복’을 나섰다.
오전 10시쯤에 은평 쪽 어느 중개사사무소에서 전세권 말소를 의뢰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였다.
부랴부랴 달려갔고, 자칫 주차위반 딱지가 붙여질 수도 있는 골목길에 어렵게 차를 주차시키고 그 중개사사무소를 찾아갔다.
임대인의 입장인 집 주인도 있었고, 그동안 전세권 설정까지 해놓고 살아온 임차인 입장의 전세입자도 있었다.
위임장에 해지증서에 인감증명서 해서, 말소에 필요한 서류 일체를 구비하고 임차인으로부터 말소비용 5만원까지 받아서, 관할 등기소인 은평등기소로 서둘러 달려갔다.
등기신청을 끝내고 빨리 서초동으로 달려와야 할 일이 있어서였다.
은평등기소에 막 들어서는데, 내 핸드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오고 있었다.
낯선 전화번호이긴 했지만, 그래도 혹 누군가 급하게 나를 찾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전화를 받았다.
저쪽에서 들려온 말이 이랬다.
“임차인인데요, 아직 등기신청 안 하셨지요? 집 주인하고 합의 했는데요, 그 신청을 우리가 직접 하기로 했어요.”
전세입자였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말소비용 5만원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법무사로서 애씀이 없지는 않았고, 그 애씀에 대한 보상을 주장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야비한 사람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이전투구의 형국이 될 것임이 빤했기 때문이다.
“그러세요. 여기 기다리고 있을 테니, 서류 받아가세요.”
태연한척, 그렇게 응대하는 것으로 그와의 인연을 끝냈다.
그래도 그날, 참 추악한 날이었다.
추악했지만, 그렇게 뒤로 물러섰던 것은, 서둘러 갈 곳이 있어서였다.
지난 9월 15일 화요일부터 서초구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리풀 페스티벌’ 행사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 중에 이날 오전 11시 30분에 우리 사무소에서 가까운 곳에 새롭게 들어선 ‘사랑의 교회’ 야외광장에서 열리는 ‘거리 음악회’가 바로 내가 서둘러 가야할 그곳이었다.
일이 착착 진행이 됐으면, 서두르지 않아도 그 음악회에 발걸음하기가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전세권 말소에 필요한 일건 서류를 챙겨서 은평등기소에 갔다가 그 서류를 등기 당사자들에게 되돌려주느라 기다려줘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지경이어서, 거의 1시간 가까이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고, 그래서 음악회를 처음부터 보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어서, 그렇게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뚫릴까 했던 강변북로는 역시나 막혀 있었다.
밀리고 밀린 끝에, 30분이나 더 늦은 12시에 겨우 ‘거리 음악회’가 열리는 ‘사랑의 교회’ 야외광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아내도 함께 발걸음 했다.
마침 연주되는 곡이, 우리에게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노르웨이 출신의 연주자그룹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의 ‘봄의 세레나데’(Serenade To Spring)라는 곡이었다.
하나같이 싱싱한 젊음의 SDC인터내셔널 스쿨 학생들이 연주하는 그 곡을 들으며, 내 그동안 가슴에 앙금으로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더럽고 추악한 추억들을, 내 뇌리에서 깔끔하게 지워버리고 말았다.
이날, 9월의 어느 멋진 날이었다.
첫댓글 세상사 별일도 많지않는가 ? 그러나 바쁘게 생활하는것이 좋지않겠는가 ~ 절대만족은 없어니 자족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