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사적공원
▪소재지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229번지 일대
▪관리자 : 부산 수영구청 051-610-4062
수영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곳으로 경관이 빼어나다. 뒤로는 산세가 수려한 금련산이 있고 앞으로는 광안리해수욕장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해의 명승지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어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수영이란 지명도 수군절도사영의 준말이었는데 현재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수영동 수영교차로에서 북쪽으로 200m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수영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남해안의 4군영을 관할했던 수군총괄 군영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던 자리로서 현재는 성은 없고 성지 관련 유적만 수영공원에 남아 있다. 이 공원 안에는 25의용단을 비롯한 사당 및 충혼탑 유형문화재 3종과 수영야류 등 무형문화재 3종, 수영동 곰솔, 푸조나무 등 천연기념물 2종, 안용복장군 충혼탑 등 비지정문화재 5종이 있으며, 이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가 있다. 특히 왜인들에게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 받아온 안용복장군 충혼사당 및 충혼탑을 비롯하여 송씨할매당, 할배당 등 수영 사람들의 혼이 담겨있는 역사와 교육의 장으로 부산의 해양민속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 문화유적 공원이다.
▶사적공원 문화재
좌수영 성지(시지정 기념물 제8호)
좌수영(左水營)은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水軍)의 본영(本營)으로 본디 부산포에 있었다. 그러다가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직전에 이곳으로 다시 옮겨 왔다가 인조때 감만이포로 옮겼고, 효종 3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온 뒤 고종 32년(1895) 구군제가 폐지될 때까지 수군절도사의 진성(鎭城)으로 사용되었다. 성의 축조연대는 미상이나 현재의 것은 숙종 18년(1692)에 좌수사(左水使) 문희성(文希聖)이 개축한 것으로, 둘레가 9,190척에 석벽 높이는 4m이며, 3개소의 우물, 4대문과 4곳의 배수구, 옹성(甕城), 치성(雉城), 보루(堡壘) 등이 있었다. 일제침략기 때 관리소홀로 대부분 폐허화하고, 성벽과 남문, 홍예, 배수구 등만 남아있다. 이곳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종군, 왜학훈도(倭學訓導)가 있었으며, 7개의 진(鎭)이 소속되어 모두 65척의 전선과 40척의 나룻배가 경상도 동쪽 해안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25의용단(시지정 기념물 제12호)
임진왜란 때 수영성을 지키며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25명의 의로운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수사로 있던 박홍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때 수병(守兵)과 성민(城民) 25인이 성문 밖의 선서바위에 모여 피로써 맹세한 후, 바다와 육지에서 적을 상대로 7년간 대항하였다. 이러한 사연은 광해군 원년(1609) 지방민들의 청원으로 알려지게 되어, 동래부사 이안눌이 이때의 일들을 모아『정방록』을 만들고, 이들의 집 문에 ‘의용(義勇)’이라는 두 글자를 써붙여 그 뜻을 기리도록 하였다. 순조 때에는 동래부사 오한원이 이들의 후손들에게 역(役)의 의무를 면제시키고 글을 지어 포상하였다.
철종 4년(1853)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비를 세우고, ‘의용단’이라 이름하였으며, 제실·의용단을 설치하여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제사는 원래 좌수사가 주관하였으나, 고종 31년(1894) 관제개혁으로 좌수영이 폐지되면서 수영면의 면장이 이를 맡아하였고, 최근에는 수영기노회에서 제사를 주관하여 모시고 있다.
수영동 푸조나무(천연기념물 제311호)
푸조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이고 잎의 측맥은 7-12쌍이며 곧게 잎의 주연(周緣)에까지 도달한다. 잎의 표면은 거치고 잎 뒤에는 짧은 복모(伏毛)가 나있다. 이 나무는 서해안을 따라 경기도에 걸쳐 따뜻한 지방에만 자란다. 곰솔, 팽나무와 함께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을 잘 견디기 때문에 해안에 심어 바닷바람을 막아 주는 방풍림에 적당하다. 팽나무와 비슷해서 곳에 따라서는 개팽나무 또는 검팽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부산 좌수영성지의 푸조나무는 마을의 당산목(堂山木)인데, 사람들은 나무 안에 할머니의 넋이 깃들여 있어 아이들이 나무에서 놀다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고 하며, 지신목(地神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상 1.08m쯤 되는 줄기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이처럼 푸조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왔으며,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수령(樹齡)은 500여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5.5m, 가슴높이 주간 둘레 6.3m, 3.88m이고, 수관폭은 동-서 15.6m, 남-북 14.9m이다.
수영동 곰솔나무(천연기념물 제270호)
곰솔은 우리나라 남쪽해안을 따라 분포하고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교목으로 소나무와 함께 쌍유관속아속(雙維管束亞屬)에 속한다. 곰솔은 소나무과로 잎이 소나무 잎보다 억세기 때문에 곰솔이라고 부르며, 소나무의 겨울눈은 붉은 색인데 반해 곰솔은 회백색인 것이 특징이다.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으로도 부르며, 또 줄기 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이라고도 한다. 바람과 염분에 강하여 바닷가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나 방조림으로 많이 심는다.
부산 수영동의 곰솔은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민속적·문화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수령(樹齡)은 400여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23.6m, 가슴높이 줄기둘레가 4.5m이고, 수관폭은 동-서 23.4m, 남-북 24.2m이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좌수영(左水營)이 이곳에 있을 때 이 곰솔은 군사를 보호해 주고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인 군신목(軍神木)로 여겨 군사들은 곰솔에게 자신이 무사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옆에는 신을 모셔 놓은 당집과 장승이 서 있고, 앞쪽에는 곰솔 한 그루가 더 있다.
수영성 남문(시지정 유형문화재 제17호)
수영성은 조선시대에 낙동강 동쪽에서 경주까지 우리나라 동남해안을 방비했던 해군의 본영인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 있던 곳이다. 이 성문은 지금의 자리에서 200m쯤 떨어진 수영동 286번지(옛 수영초등학교자리)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으로 지금은 다 허물어진 채 홍예석만 남아 있다. 『좌수영지(左水營誌)』에 의하면, 수영성은 동서남북 네 곳에 성문이 있어 동문을 영일문(迎日門), 서문을 호소문(虎嘯門), 남문을 주작문(朱雀門), 북문을 공진문(拱辰門)이라 하였는데, 남문이 6칸으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나타난다. 남문 문루 위에는 큰 북을 달아두고 쳐서 시각을 알리며, 이에 맞춰 성문을 여닫았었다는데, 문바깥 양쪽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박견(拍犬)을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박견은 조선개를 말하는데 도둑을 지키는 개를 성문 앞에 둔 것은 왜구의 동태를 감시하던 이 성의 임무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 성문의 건립연대는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동래(東萊) 감만이포(戡蠻夷浦 = 남구 戡蠻洞)에 있었던 좌수영이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옮아갔다가 임진왜란 전에 이곳에 옮겨지고, 인조 13년(1635)에 다시 감만이포로 옮겨졌다가 그곳이 왜관(倭館)과 가까워 효종 3년(1652)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나타나 건립년대는 1652년경으로 짐작된다.
▶교통편
지하철 - 2,3호선을 타고 수영역에서 하차하여 2번 출구를 이용하여 도보로 10분.
버 스 - 5, 5-1, 20, 36, 42, 49-1, 51-1, 54, 62, 63, 131, 141, 210번 이용
수영사적공원(수영교차로)하차 후 도보로 10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