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이씨 묘역과 종가댁
팔도 풍수 지리학회에서는 정기 답사를 일찍 끝냄으로 예정에는 없었지만 분당 중앙공원에 둘러보기로 하였다 이 곳은 우리 학회 회원이라면 한 번쯤 둘러보게 될 정도로 친숙한 곳이었다 중앙 공원은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 1-2 에 자리 잡고 있다 중앙 공원 내에는 한산 이씨 묘역과 宗家宅이 있어서 동시에 陽宅과 陰宅을 踏査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한산 이씨 묘역은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목은 이색의 4대손인 이 장윤의 묘를 손자인 토정 이 지함이 영장산(해발88m) 자락에 자리잡은 이진봉(중앙 공원의 봉우리)이 마치 거북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자리를 잡으면서 한산 이씨의 종산으로 400여년간 지속되고 集成村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으며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묘역을 보존하고 종가의 초 가 한 채를 복원하였다 연못은 인위적으로 경주의 안압지를 모방하여 파게 된 것이다 작은 섬을 세 곳에 만들어 토정 이 지함 선생의 동양적인 이상의 세계를 표현하였고 아치형 돌다리를 만들어 이 지역 사람들이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게 하였다
분당구 수내동이 있는 성남시는 옛날에는 광주군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 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첫 도읍지라는 얘기가 기록으로 전하며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한양 도 성을 지키는 아주 중요한 지역으로서 남한산성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한산성의 성자와 남쪽의 남자를 합하여 성남이 된 것이다
지도를 놓고 이 지형을 바라보면 성남시 한 가운데로는 한강의 지류인 炭川(탄천)이 흐르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서울, 동쪽으로는 광주군, 북쪽으로는 하남시, 서편으로는 과천시와 의왕시, 남으로는 용인시와 접하고 있어 서울시와 인근 위성 도시와의 연계 교통망이 편리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1989년부터 정부에서는 수도권 인구 분산을 위해 분당 지역에 신시가지 조성 사업이 전개되면서 지금의 분당구가 만들어졌다
분당 주민들에게 쉼터요 놀이터로 사랑 받고 있는 중앙 공원은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면서 향토적인 공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아무도 태어날 때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름이 없었지만 쓰기 위해서 붙여지게 되는 것이다 정 해권 회장님께서 이 곳 분당 지역의 수내동이 살기가 좋다고 하는 것도 그 이유를 이름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탄천은 경기도 용인시에서 발원해 성남시와 서울시 송파구 강남구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준용 하천이다 炭川(탄천)은 다른 이름으로 거무내 또는 숯내 라고 불리었다 이 숯내가 수내가 된 것이다 다른 뜻으로 물길 안에 있다는 뜻도 있다 현지에서 오래 계셨던 분들은 숲 안, 숲의 안쪽 마을이라고 해서 수내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 곳 영장산(해발88m)의 자락에 자리한 한산 이씨 묘역은 여러 기가 있으나 풍수적으로 자리가 형성된 李 潗(이 집) 묘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李 潗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로서 1703년 蔭職(음직)으로 穆陵寢郞(목릉침랑)에 제수되었다 이 비신의 비문은 전면에만 있으며 표면은 결락이 심하여 글씨를 제대로 알아보기가 어려웠으나 이 순자 부회장님과 함께 살펴보았다
有明 朝鮮 通政 大夫 守 黃海道 觀察使(유명 조선 통정 대부 수 황해도 관찰사) 兼(겸) 兵馬 水軍 節度使 巡察使(병마 수군 절도사 순찰사) 海州牧使(해주목사) 韓州(한주) 李公(이공) 諱(휘) 潗(집) 之墓(지묘) 貞夫人(정부인) 杞溪(기계) 兪氏(유씨) 부좌 합장 묘이다
묘역에 상석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전면 중앙에 觀察使 李公 潗墓 좌에 廣州上 突馬艮龍 艮入首 艮坐坤向 丙巽 得水 酉破 山丙寅 이라고 碑文에 적혀 있어 눈길을 끌었다
보충 설명하면 龍은 艮方에서 入首하여 艮坐坤向을 놓았으며 得水는 丙方 巽方 물이 去水 破口는 酉破口로 보아 庚酉 破口에 艮坐坤向이면 文庫消水로서 물은 左水倒右 龍은 右旋龍이 원칙이며 向上作局을 하여 물의 得水處는 向上墓宮 向上絶水 向上胎水 向上養水의 기운이 되며 向上生宮에서 穴의 向과 만나 向上 沐浴宮으로 破口 된다
文庫消水는 이른바 祿存 流盡이면 佩金漁라 하여 필시 총명한 秀才가 출생한다 이 곳은 물이 內堂은 盆唐川이 外堂은 炭川이 金星環抱하고 있다 물에는 三勢가 있다 得水 取水 去水가 있는데 得水는 龍과 穴이 물을 얻는 것을 말한다 陰靜한 龍穴이 물을 얻어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 요소이다 得水하는 방법에는 主龍의 生氣를 保護하면서 인도해온 元辰水 骨肉水 이다 이 물로 인하여 龍脈의 地氣가 흩어지지 않고 먼 거리를 行龍할 수 있는 것이다
혈에 이르러서는 入首倒頭 뒤에 蟬翼을 따라 양쪽으로 갈라진 다음 脣氈 앞에서 다시 합쳐진다 한산 이씨의 많은 墓 중에서 李 潗 墓(이집묘)의 자리로 많은 회원들이 앉게 되었던 것은 우선 첫째로 肉厚處(육후처) 肌附飽氈(기부포전)이 발전되었으며 入首倒頭(입수도두) 蟬翼(선익) 脣氈(순전)이 뚜렷하고 무엇보다 尋穴(심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過龍造葬 三代內 絶香火(과룡조장 삼대내 절향화)로서 龍은 반드시 進行이 끝나야한다 즉 龍盡穴的(용진혈적)하여야 한다
둘째로 主龍 능선과 內靑龍 內白虎 사이의 골짜기를 따라오는 물 좌우 양쪽 골짜기에서 得水한 물이 明堂에서 합해진다 이 물이 盆唐川과 만나게 되는 內得水가 된다
셋째로 外靑龍과 外白虎 사이에 여러 골짜기에서 나오는 물은 外得水 이 물은 炭川을 이루어 흐르는 外明堂을 이룬다 이곳은 물이 풍부하다
넷째로 이 곳 영장산은 해발88m로서 아주 낮은 산이며 碑文에서도 突馬 艮寅이 적혀 있다 예전에 돌마면 숲안리로 불렀다한다 이 산은 풍수지리상 眠弓砂로도 불리었다 마치 활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활은 어떻게 보면 天馬砂로서도 보이며 天馬는 速發富貴가 특징이다 주변에는 산이 없는 평지에서 영장산이 우뚝 솟았다 碑文에는 突馬란 표시가 있다
풍수지리에서 들판 가운데 아름답게 우뚝 솟은 산이 있으면 그 곳으로 기가 모이기 때문에 그 곳은 힘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뭔가 한자리 예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은 橫龍入首한 龍脈으로서 龍이 힘이 좋아 아래에도 여러 기의 묘를 썼으며 수내동 가옥 한산 이씨의 종가 집 가옥에도 여기가 흘러 橫龍入首 하였으며 뒤에는 樂山이 있고 回龍顧祖(회룡고조)를 한 좋은 집터였다 山管人丁(산관인정) 산은 사람의 성정을 관리하고 水管財物(수관재물)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고 했다
이 일대에는 총 70여호가 모여서 살았는데 그 중에서 한산 이씨가 30여호 가량되는 집성촌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옥이 6.25사변으로 전소되거나 파괴되어 후에 다시 복구하였으나 그 원형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다행히도 한산 이씨 宗家宅 家屋을 포함한 3,4여호만이 피해를 면하였으나 후대에 많은 보수가 이루어져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집은 한산 이씨의 종가집이 유일한 실정이다
종가집은 한산 이씨 살림집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었으며 지은 수법으로 19세기말 건물로 추정된다 바깥마당에 면한 일자형 문간채 뒤에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안채 뒤로는 넓직한 뒷마당이 흙담에 둘러싸여 있다
안채는 10칸 규모의 초가로 1칸 반 건너방과 4칸 대청 2칸 안방을 일렬로 배열하였고 안방 앞에서 꺾여 부엌과 광이 있다 안방과 건너방에는 받침이 설치되어 공간의 효용도가 높다
문간채는 6칸 규모를 가진 초가인데 가운데에 대문이 있고 오른쪽에 온돌방이 있다 6.25때 총격으로 한산 이씨 묘역에는 많은 비문의 상처가 있었는데 한산 이씨 종가집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그래도 이 자리가 명당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양택을 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이다 하지만 문을 잠가 놓고 관리를 안하고 있으며 정상적인 공기의 순환이 안되어 지붕이 부식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대부분 도심 속의 공원들이 평지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중앙 공원은 영장산을 주산으로 하고있어 공원으로서 가치가 높다 우리 국토는 7할이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부터 우리 삶과 문화 역사는 대부분 자연스럽게 산과 관계를 갖게 된다 이곳은 저 푸른 하늘과 땅이 닿는 자리에 먼 곳 가까운 곳 산능선이 맑은 하늘과 선을 긋고 있는 것이 공원 속의 진풍경이 되었다
조선 시대 眞景畵(진경화)를 그린 겸재 鄭 敾(정선)의 산수화처럼 이곳은 모든 산과 더불어 쾌적하고 아름다운 도시 분당주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서 이루어졌고 많은 이 들의 진솔함이 담겨져 있는 삶의 모습들을 함께 조화시키고 있다
중앙공원은 지나간 역사가 기록 속에 묻혀서 한낱 과거 속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 숨쉬고 움직이며 가능하면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거울로서 이곳을 찾게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귀감이 되고있다
한산 이씨 묘역을 점지한 토정 이 지함 선생은 조정의 당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을 멀리 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가난하게 보냈으며 서울 마포 강변에서 흙으로 낮은 움막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寧枉百里步(영왕백리보) 차라리 백 리 걸음을 돌아간다 해도 曲木不可息(곡목불가식) 굽은 나무 아래에서 쉴 수가 없다 寧忍三日飢(영인삼일기) 차라리 사흘을 굶을지언정 邪蒿不可食(사호불가식) 똑바로 되지 않은 쑥은 먹을 수 없다
토정 이지함은 1573년 선조 때 공의 나이 57세에 추천으로 천거되어 포천 현감이 되어 첫 음식상을 성찬으로 올리자 바로 상을 물리치고는 힘든 백성들을 생각하여 잡곡밥 한 사발과 나물국 한 대접을 담아 오게 했다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62세 때 아산 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어 재직 중 에는 걸인들에게 수공업을 가르쳐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도 하였다
물질과 욕망에 어두운 사회 속에서 달과 구름을 벗삼아 자연 속의 삶을 즐기려 했으며 백성을 하늘 같이 여긴 선생의 뜻이 담겨져 있기에 이곳은 역사와 교육적인 의미에서도 소중하므로 인근의 주민들이 가족 동반으로 함께 자주 찾게 되는 공원이다
충과 효의 가훈을 바탕으로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수많은 충신 학자 대신 및 관료들을 속출한 명실상부한 명문거족으로 백성을 내 몸처럼 아끼며 어진 목민관으로 언제나 그들을 위해 부귀영화를 버린 고귀한 선비정신의 뿌리는 변함 없는 가문의 얼과 숭고한 정신으로 이어져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을 밝혀 주고있다 (최윤상님 글 모셔왔습니다.) |
첫댓글 가만히 앉아서 묘역과 종가를 잘 둘러 보았습니다. 다만 종가집 관리가 부실하다니 안타까운 일. 토정 이지함선조님의 위대한 업적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중앙공원 이야말로 산 교육장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