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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일전쟁
정성공과 그 자손의 21년 간의 짧은 통치가 끝나고 청나라의 일부가 된 이후 청나라 시대의 역사는 확 줄이고 청일전쟁으로 넘어간다.
1894년 봄에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31일 전주까지 함락시켰다.
6월 2일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조선에 상주하고 있던 청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파병을 요청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직례제독 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에 급파하였다.
때마침 중의원(衆議院)에서 내각탄핵상주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내각총리대신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이등박문)는 6월 2일 서울주재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杉村濬)로부터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즉시 각의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결국 조선이 정치적인 파탄에 빠진 그를 살린 셈이다.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는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 일본의 의도대로 진행됐다.
전쟁의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말하자면, 막강한 대국이라고 인식되던 청국이
철저하게 패배하였으며, 일본이 청나라 전체를 점령할 기세로 전선을 확장해 갔다.
이렇게 되자 일본의 독주를 염려한 영국과 러시아 등이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은 이들을 모두 거절하고, 국제적으로 중립적으로 보이는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결국 일본과 청국은 1895년 4월 이홍장과 이토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당시는 馬關)을 체결하여 전쟁의 뒤처리를 했다.
세모노세키조약의 골자는 아래와 같다.
첫째,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 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이 독립자주를 손상시키는 조선국의 청국에 대한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 완전히 이를 폐지한다.
둘째, 청국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대만·펑후(澎湖)열도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
셋째, 청국은 전비배상금으로 고평은(庫平銀, 당시 청의 은본위 화폐, 단위는 냥兩이며 1냥은 37.301g) 2억 냥(약 3억 엔)을 일본에 지불한다.
넷째, 청국은 일본에게 구미 열강이 청국에서 누리는 것과 동등한 통상상의 특권부여를 승인한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지 6일 후인 1895년 4월 23일 러시아를 중심으로 프랑스와 독일 등이 일본 정부에 대해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라는 요구, 즉 삼국간섭(三國干涉)을 했다.
결국, 5월 10일 삼국의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인정한 일본 정부는 간섭에 굴복, 랴오둥반도 영유권을 포기하고, 대신 청국으로부터 배상금 3천만 냥을 받기로 하였다.
당시 청이 일본에 지불한 은화 2억 냥은 청의 2년 반, 일본의 2년의 예산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겨우 1,400 명의 전사자를 냈던 일본은 이 때 받은 막대한 배상금으로 신일본제철의 전신인 일본제철을 세우는 등으로 산업화를 서둘러 동북아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완성했다.
이와 아울러 대학을 설립하고, 무사출신 중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골라 네델란드 등 선진국에 유학을 보냈는데, 그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던 모든 학문 분야에 각각 최소 2명씩을 보내 최신학문을 배워오게 하여 제국주의의 사상적·이론적 근거를 만들었다. 이렇게 배워온 사람 중에서 지질학을 전공한 사람이 뒤에 조선에서 광물자원 수탈의 근거가 됐던 지질조사를 했고,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광개토대왕비를 조작하는 등 조선을 침탈하는 데에도 최일선에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읽다가 이 대목 쯤에 이르게 되면 역사책을 찢어버리거나 집어던지고 싶은 생각이 한두 번 드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청일전쟁의 결과 대만은 212년간 계속되었던 청나라의 통치를 벗어나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다.
4. 대만의 친일정서
우리보다 15년이나 긴 50년의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친 대만은 의외로 일본에 대한 반발이 적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역사상 한번도 대만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수립한 정부를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대만 사람들에게는 단지 맨 위의 지배계층만 바꼈을 뿐이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본이 아니더라도 근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일본이 우리를 위해서 근대화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조선과 중국을 좀더 잘 수탈하기 위한 방편으로 근대화된 문물을 조선에 들여온 것 뿐이며, 수탈해간 것이 비하면 새 발의 피 정도를 준 것이라고 받아 들인다.
그러나 대만에서는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대만인들을 교육시켜 줬고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것이 일본인이라고 받아 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노인들은 대만 역사상 일제시대가 가장 좋았다고 회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에도 일본의 대중문화가 한국에 들어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대만은 일찍부터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하여 소위 화류(和流, 일본류)가 유행해 왔었다.
삼성과 LG 등의 전자제품이 전세계에서 최고급으로 인식되며 일본제를 앞선 지 상당히 오래 됐지만 대만에서는 여전히 일제가 최고이며 한국산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통지자 입장에서도 일본을 오랑캐라고 우습게 알고 사사건건 반발하는 조선보다는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웠던 대만인들에 대해서는 훨씬 온건한 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느끼는 격렬한 반일감정을 대만인들은 다소 의아해 하는 것이다.
5. 해방 이후 대만의 약사
5.1. 2.28사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하자 대만을 넘겨받은 것은 중화민국, 즉, 국민당 정부였다.
비록 승전국의 일원으로 대만을 수복하고 유엔의 상임이사국이 됐지만 난징을 수도로 하고 있던 중화민국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내전을 쉽사리 끝내지 못하고 있었으며, 국민당 일부만 먼저 대만에 들어와 대만을 접수한 상태였다.
이와 같이 아직 장제스가 중국본토에 머물고 있어 대만정부가 제대로 체제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 대만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2.28사건이다.
'2·28사건'은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역 근처에서 전매품인 담배를 몰래 팔고 있던 여성을 본토 출신의 전매국 단속원이 구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대만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사상자가 나왔다.
사태는 일거에 확대돼 28일에는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3월 1일 이후 전 섬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당황한 국민당은 본토에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놓고 주민들을 상대로 협상할 것처럼 하다가, 3월 8일 본토에서 2개 사단의 진압군이 도착하자 3월 9일부터 대대적인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면서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 등 무고한 본성인들이 무참히 죽었고 현지의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인, 언론인들도 체포되거나 처형됐다. 정부 발표로만 2만8천여 명이라는 희생자를 냈으며, 민간에서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주장한다.
이 사건은 본성인과 1945년 이후 대만으로 이주한 중국인,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 패한 뒤 대만으로 건너온 외성인을 봉합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 이후 국민당 정부의 군사 독재는 1987년까지 계엄령으로 이어졌으며, '백색공포'로 알려진 40년의 탄압정치로 이어졌다.
1987년 대만에서 계엄령이 해제되기 전에는 이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로 여겨졌다.
본성인 중에서 직간접적으로 2.28 사건에 희생된 가족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만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냈으며, 겉으로는 어느 정도 아물었지만 조금만 건드리면 다시 터지는 마음 속의 상처로 남아 있다.
5.2. 대만의 총통들과 민주화
쑨원(孫文) 사후 중화민국, 국민당과 군대 최고지도자로 드넓은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장제스(蔣介石, 장개석, 병음: Jiǎng Jièshí, 광동어: Chiang Kai Shek, 영어: Chiang Kai-shek, 1887.10.31 ~ 1975.4.5.)는 마오쩌둥(毛泽东, 모택동, Máo Zédōng, 1893년 12월 26일 ~ 1976년 9월 9일)의
공산당에 패해 1949년 대만으로 건너와야만 했다. 그가 마오쩌둥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단 하 가지만 꼽으라면 저우언라이(周恩來) 같은 특급참모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국민당이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알려주는 얘기 중의 하나를 들면, 미국이나 서방에서 장제스의 군대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해 주면 다음 날에는 공산당의 손에 넘어갔다고 했을 정도다.
대륙을 잃고 대만으로 넘어온 장제스는 1949년부터 시행된 계엄령과 국가비상시기 임시법령이라고 할 수 있는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통해 헌정을 중단시키고, 사실상 종신총통이 되어 19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장제스의 얘기만으로도 1회 이상을 다뤄야 할 정도로 대만과 우리에게 영향이 큰 인물이지만 이제 더 이상 대만이야기를 끌고갈 시간이 없어 이 정도로 끝내니 이해를 바란다.)
장제스가 죽자 당시 부총통이었던 옌자간(嚴家淦, 엄자감,1905.10.23 - 1993.12.24)이 총통자리를 잇지만, 장제스의 남은 임기를 마치고 1978년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장경국,1910.4.27 ~ 1988.1.13)에게 넘겼다.
장징궈가 총통이 되었을 때 대만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오랜 권위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높아져 발화점을 향해 끓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1971년 미국과 중국의 수교 이후 하나둘 대만과 단교를 통보해와 외교적 고립이 극심해 가던 중 1978년 12월 미국마저 단교를 통보해 왔다. 말 그대로 내우외환의 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말년에 당뇨병과 싸우며, 대만의 미래와 생존을 위해 절치부심했다. 그러다 결국 1988년 1월 13일 병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1945년 8월 말 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앞줄 가운데)와 마오쩌둥(앞줄 오른쪽)
사이에 열렸던 국공담판에 아버지와 함께 참가한 장징궈(뒷줄 왼쪽). 앞줄 왼쪽은 회담을
주선한 미국 헐리 특사. 뒷줄 가운데는 후일 장징궈의 정적이 된 우궈정.
그러나 죽기 전인 1987년 7월 15년일에는 38년 간 선포되었던 계엄령을 해제하여 현실적인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장징궈가 죽기 전에 그의 후계자로서 부총통에 임명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 본성인 리덩후이(李登輝, 이등휘, 1923.1.15. - )였다. 리덩후이는 취임 후 국민당 내의 비판세력을 하나둘 제거해 나갔고, 당내 소장파들마저 정리해 권력기반을 확실하게 다졌다.
1996년 처음 치뤄진 직접선거에서 당선되어 3번째 임기를 시작한 리덩후이는 대만의 독립노선을 선명하게 하여 중국의 격렬한 반반을 불러 일으켰으나 개의치 않았다.
2000년 3월의 총통선거에서는 대중적인 인기가 높던 쑹추이를 배제하고 렌쟌(連戰)을 국민당 후보로 지명하자, 이에 반발한 쑹추이가 국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민당을 분열시켰고, 야당인 민진당 천수이벤(陳水扁, 진수편, 1950.10.12. ~ )을 공공연하게 지원하여 당선시켰다.
남부 타이난(臺南)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천수이벤은 명석한 두뇌와 노력으로 대만 최고의 명문 국립대만대학교 법학과 재학 중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며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젊은 시절 기업전문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며 부와 명예를 쌓아가다가 인권변호사로 전향하고 야당 정치가로 변신하였고, 타이베이 시의원, 입법위원을 거쳐 1994년 직선제 복원 후 첫 타이베이 민선시장이 되었다. 타이베이 시장 시절 성매매업소 철폐 등 강직한 시정으로 인기를 더해가던 그는 1998년 선거에서 현 총통 마잉주에게 패배하였으나, 2000년 총통 선거에 도전하여 첫 민진당 출신 총통이 되었고, 2004년 연임에 성공한다. 그는 재임 시절 탈중국화 노선을 강화하며, 대만의 완전독립을 추구하여 국내·외적으로 큰 반발에 부딪혔다.
천수이벤을 파멸로 몬 것은 다름 아닌 부패였다. 2008년 11월 11일에 천수이벤은 비밀자금 횡령 및 불법자금 세탁 등 혐의로 구속되었다. 2009년 9월 11일 1심에서 종신형과 2억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고, 3심에서는 징역 19년형을 선고받았다. 부인도 실형을 선고 받아 부부가 실형을 살고 있다.
2008년부터 현재의 총통은 마잉주(馬英九, 마영구, 1950.7.13~)다. 객가인인 그의 가족은 1948년에 대만으로 이주했으며, 그는 1950년 홍콩에서 태어나 이듬 해 대만으로 왔다.
국립대만대학 법과대학을 거쳐 미국 하버드대학 로스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다.
국민당 간부였던 그의 아버지 영향으로 국민당에 입당하였고, 1998년부터 2006년까지는 타이베이시장을 맡았다. 2005년 8월 19일에는 제4대 중국 국민당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2008년 총통 선거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수려한 외모에 청렴하고 겸손한 이미지로 여성, 특히 대만 기혼여성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남편감이라고 한다.
물러나는 천수이벤과 신임 총통 마잉주
머지 않아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 습근평, 1953. 6. 1 ~)과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며,
공공연하게 친중국 색깔을 드러내고 있어 대만독립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5.3. 23명의 샤오펑유들(小朋友, 작은 친구)
대만이야기 7에서 설명한 대로 유엔에서 쫓겨나고 대부분의 국가들과 외교관계가 단절된 대만에도 아직 공식 수교국들이 있다. 이들 국가들을 샤오펑유라고 부르고 있다. 대부분 라틴아메리카(도미니카, 과테말라, 아이티 등 12개국), 오세아니아(마셜제도, 투발루 등 남테평양의 6개국) 및 아프리카(감비아, 스와질란드 등 4국)의 소국들이다. 유럽에서는 바티칸이 유일하다.
바티칸이나 라틴아메리카의 몇몇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들이 많고 인구나 면적 등에서 소국이다. 이들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공식적인 원조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력 정치인이나 군부 실력자들에게 정치자금을 건네기도 한다. 돈을 실탄으로 사용한다고 하여 은탄외교(銀彈外交)라고 한다. 우리가 북한과 오랫동안 외교전을 벌여왔듯이 대만도 중국과 외교전을 벌이고 있는데 탄탄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만이지만, 중국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은탄외교에 사용하는 실탄도 대만이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샤오펑유들과 외교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완전고립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은탄외교를 지속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대만이 가장 신경을 쓰는 샤오펑유는 바티칸이다. 면적으로 따지자면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지만, 카톨릭의 본산이기에 '소프트 파워' 면에서는 세계 최고다. 게다가 유럽지역 유일 공식 수교국이라 대만이 바티칸에 들이는 공은 상상을 초월한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 취임미사 때도 중국의 '상당한 눈치' 속에 마잉주 총통 내외가 직접 참가해 취임식외교를 벌였다.
대만이 바티칸에 각별히 공을 들이는 또 다른 이유는 바티칸과의 외교관계가 다른 수교국, 특히 가장 많은 수교국이 있는 라틴아메리카 지역(대부분 카톨릭) 등에 미칠 파장이다. 바티칸과 단교할 경우 단교 쓰나미가 닥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티칸은 오래 전부터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를 준비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 내
지하교회 문제, 사제서품 문제(바티칸에서는 사제서품은 교황청의 고유권한이라는 입장이지만, 중국은 내정간섭이라며 자국에서 사제를 임명한다) 등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 정면 충돌하고 있어 수교가 미뤄지고 있다.
대만의 현대사와 민주화 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기묘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거 어디서 본 장면인데 하는 생각이 한두 번 드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기시감(旣視感), 즉 대자부(Dejavu)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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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만학 논문 한편을 본듯한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여행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