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사투리 -‘국동떡’ 이바구(외동아들 계철이)
(작성 중)
1960대 초, 필자의 향리 괘릉리(掛陵里) ‘국동댁’에는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2년 후배인 ‘계철이’가 살고 있었다.
외동이야기 어느 파일에서 소개한 대로 그는 필자의 충성스러운 ‘꼬봉’이자 위로 누나와 아래로 누이 하나를 두고 있는 ‘외동아들(獨子)’이었다.
비록 외동아들이었지만, 가세(家勢)가 너무 빈한하여 학교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아버지인 ‘국동어른’을 도와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계철이’의 누나는 필자의 연상(年上) 친구였던 ‘계남이’로 열아홉 살에 앞마을로 시집을 갔다가 스무 살 때 병을 얻어 친정에서 투병(鬪病)하다가 죽었다. ‘계남이’ 누부야가 죽자 ‘계철이’의 동생 ‘계순이’도 외동딸이 되었다.
‘계철이’가 열일곱 살 되던 어느 쌀쌀한 봄날 새벽부터 시작되는 그의 하루일과를 통해 당시의 외동사투리를 되살펴 본다.
‘계철이’는 오늘도 ‘횟대’를 치며 울어재끼는 달(닭)소리와 옆집 가지(강아지) 짓는 소리를 잠결에 어렴풋이 들으며 눈을 떴다. 일나야지 하면서도 몸은 얼렁 일나지지 않는다. 문살에 희뿌옇게 먼동이 트는 것을 느끼고서야 하품을 크게 하고 일나가주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바에서(방에서) 나오자마자 우선 무지게(물지게)를 지고 동네에서 젤로 큰 개울 가 ‘대동웅굴’로 갔다. 벌서 동네 안들덜 하고, 처자덜이 새미 가에서 보살을 ‘옹가지’에 대고 쓱싹 쓱싹 박짜로 맞차가주고 씪고 있다.
물 깃기
뭥가 얄구진 잡땀(雜談)을 하다가 ‘계철이’가 근차 오이까 처자들은 남사시러버서 그런지 뒤로 돌아 서가 있꼬, 안들덜은 희쭉꺼리먼서 고개를 숙인 체로 계속 보살을 쓱싹 쓱싹 씩꼬 있다.
‘계철이’는 아지매들에게 “보살 씩닝기요”하고 인사를 한 후 물통에 ‘다리박’ 끈을 매달어 물통 채로 물을 퍼 올랬다. ‘다리박’으로 물을 퍼 올릴라 카머 시가이(시간이) 너무 마이 걸리기 따문에 씸(힘)이 씬(센) 사나덜(사내들)은 모다 이런 식으로 지고 온 물통에 줄로 묶까가주고 퍼 올랬다.
다리박(두레박)
‘계철이’는 이렇게 물통 채로 퍼 올린 물을 넉 짐이나 져다가 정지 문 앞 물또오(물독)에 항거 버놓고, 개똥망태기를 둘러미고 고작(골목)을 나섰다.
밭뚝과 보리밭을 일로절로 질러 댕기먼서 개똥을 주울라꼬 찾아 댕갰으나, ‘개똥도 약에 씰라카머 없다’꼬 벌서 부지런한 사람이 한 바꾸 돌고 간 모양이다.
너덧 모대기(무더기) 죠(주워) 가주고 ‘정낭’에 가따 여코(넣고), 엇떡(얼른) 퍼지라꼬 짝대기로 휘휘 저서도 정낭물이 맹물이라 꾸렁내너 고사하고, 더덕 내미(냄새)도 안 난다.
당시의 정랑(재래식 변소)
‘계철이’는 다시 ‘거럼(거름)’ 모대기에 나(놔) 둔 ‘비짜리(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환하게 씰고(쓸고), 쌉작 밖 고작까지 씰었다.
그라고 마당에 쌓아둔 ‘거럼’모대기 밑에 처진 ‘거럼’을 ‘수굼포(삽)’로 떠 올러노코 나이 날이 화이(환히 ; 환하게) 밝어 온다.
이때 ‘국동어른’이 옹주마리를 꺼올리먼서 ‘정낭’에서 나온다. 그라고 큰 방쪽을 보고 “계수이너(계순이는) 아적 안 일났나?. 가서나(가시내)가 아적꺼지 디배져 누벗으머 우짜노” 하며 해(혀)를 찬다.
수굼포
‘국동띠기’까지 거들고 나선다. “가시나가 저렇게 낄바져 가주고 어디 서묵겠노. 어제 ‘방깟띠’ 정구지 밭에 가보이 밭뚝 밑에 ‘나세이’ 하고, ‘달레이’가 쌔 비렀뜬데 그거라도 쫌 케다가 문체 묵꼬, 요새 보드랍은 쑥도 쫌 뜯어가주고 보리가리에 버물러 묵으머 얼매나 좋노, 열니 살이 다 되가는 가시나가 저래 끼일바저가주고 어짜노.” 라면서 부창부수(夫唱婦隨)로 계순이를 몰아부친다.
국동떡 들깨밭과 정구지(부추) 밭
듣고 있던 ‘계철이’가 아부지를 보고 “아따마 쪼매 더 자구로 나(놔) 두이소. '계수이'너 어재 낮에는 소꼴을 두망태기나 비 왔쩨, 엊저녁에는 ‘미영’을 한 광지리나 자서 놓고 새북에 잠 들었능 거 같뜬데, 기양 쫌 나 두이소.”
“계수이 동무들은 다 주학교(중학교) 보냈는데, 우리만 저거를 공부도 몬시키고 만날 일만 시키이 너무 애연해서 못 보겠꾸마는요. 그란데 아부지하고 어매는 만날 '계수이'만 머라카고 있시이 인자 너무 머라 카지마소.” 하며, 헛간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때 정지에서 ‘국동띠기’가 한 손을 치마 자락에 썩썩 문때 딲으머, 밖으로 나오면서 “가시나가 공부는 무슨노무 공부, 딸아덜은 일이나 올케 배와 가주고 나무(남의) 집에 가가(가서) 어런 잘 심기고, 알라(아기) 잘 노코, 농사일 잘 거들고, 질삼이나 배와 가주고 식구들 헌옷이라도 마뜩바시 입해 내 보내머 대는 기지, 가시나가 공부하머 건방져가주고 안 된다.”
“그라이까네 이 종낙아! 니너 실때 없는 소리 하지 마레이. 이 종내기 따문에 저 가시나 바람 나겠데이.” ‘국동띠기’는 ‘계철이’ 한테 푸닥까리 하능거 맹기로 한바탕 쏴부치고 다시 정지로 디간다.
당시의 정지(부엌) (마른 '물거리'를 때는 대도 옆 아궁이로 연기가 역류하여 부엌 안은 언제나 연기투성이가 된다. 날씨가 궂을 때는 특히 그렇다. 사랑하는 우리들 어머니들은 한 평생을 이 연기를 마시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계철이’는 생각에 잠긴다. 비록 자기도 학교에 댕기지 몬하고, 겨울 농한기에 서당(書堂)에 땔나무 해주는 값으로 명심보감(明心寶鑑)과 소학(小學)까지는 억지로 배왔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만은 어야든동 주학교(중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길라꼬 겐또로 잡었는데, 부모님의 생각은 너무나 차이가 있다.
하긴 하나뿐인 아들마저 겨우 소학교(小學校)만 시기고 만 이 가정에서 딸아까지 주학교 공부를 시킨다는 것은 언감생심이기는 했다. 가세가 너무 빈한하여 공남금(公納金) 부담이 만만치 않기 따문이었다.
그러나 집안일을 거들어줄 사람이 없따는 이유로 어린 것을 머섬(머슴) 부리듯이 부려묵어야 한다는 것이 ‘제철이’로서는 너무나 속이 상한다.
땔나무 해오는 '계순이'
‘계철이’는 머릿방 가매솥에 끓인 여물을 마구(외양간)의 구시(구유)에 퍼다 주고, ‘솨지(송아지)’ 등더리를 빗자리로 한 분 씰어주이 ‘솨지’는 좋타꼬 꼬랑대기를 달랑거리머 꼬대기더니, 정신없이 여물을 십퍼 묵는다.
‘계철이’는 ‘이 ’솨지‘가 장래 우리 집 살림 밑천이 될 끼라꼬 생각하먼서 ‘솨지’ 등더리(등허리)를 다시 한 번 씨다듬어 좃다.
‘구시’와 ‘여물’
소죽 끓인 가마솥에 찬물 한 바가치를 퍼바가주고 냉기(冷氣)를 가시게 한 후 세수를 하면서 어떡 저 ‘솨지’가 애미소가 되가 새끼 낳기를 맘속으로 빌었다.
이 ‘솨지’는 달포 전 설민장떡(薛面長宅)에서 ‘배내기’로 얻어 온 ‘솨지’다. ‘재철이’가 너무 부지런하고 착해가주고, 그 집에서 맘써가주고 암솨지(암송아지) 한 마리를 ‘배내기’로 준 것이다.
솨지(송아지)
잘 키와가주고 애미소가 되가 ‘솨지’를 노머, ‘솨지’는 ‘계철이’가 미기고, 애미소넌 ‘설민장떡’에서 다부(도로) 델꼬(데려) 가는 ‘배내기 솨지’였다.
‘계철이’가 ‘솨지’한테 소죽을 주고, 바에(방에) 디가니 화리(화로 ; 火爐) 우에 얹어 논 딘장 추발이(뚝배기)가 뿌글뿌글 구수한 내미를 풍기머 끌코 있다.
‘계철이’는 샛문으로 '계수이'가 디 미는(들이 미는) 개다리 밥상을 받어 아부지 잩에(한테) 갔따 드리고, 딴 식꾸의 밥그럭과 나물 ‘대지비’, ‘지렁 종지기’를 받어 방바닥에 다 나(놔)도 어매(어머니)의 밥그럭이 안 빈다.
어매 밥그럭은 언제나 꼬두박 바가치(바가지)인데, 오널은 그 바가치가 비지 않는 기다. 계수이 밥또 쪼맨한 종지에 보리밥 누룽지마 한 등거리 당게 있다.
계순이 꽁보리밥 밥그릇
“어매야 어떡 들오나라 ‘아직(아침)’ 묵짜” 하고 '계수이'가 어매를 부르이 ‘국동띠기’는 “나너 누렁지 끌거노코 쪼매 있다가 무글란다. 니거나 어떡 묵어라. 니가부지도(너희들 아버지도) 쌔기(빨리) 잡숫꼬 자(장에) 가셔야지 늦을라.” 하더이 고작으로 나갔삔다.
아매(아마도) 어매는 오널 설민장떡(설면장댁)에 보리바아(보리방아) 찍으로 가머 저념(점심)때너 보리뱁이라도 배부리게 얻어 묵을 끼라꼬 믿꼬, ‘아직(아침)’은 굶을라꼬 생각한 거 같었다.
‘계철이’는 밥그럭에 고봉으로 담은 보리밥을 반쭘 묵따가 낭가놓고 밲으로 나왔다. 한참 묵을 때라 이런 밥이야 두 그럭을 묵어도 배가 안 찰끼지마너 어매와 계수이를 생각하이까 더 묵을 수가 없었다.
‘계철이’는 산에 나무하러 갈라꼬 낫을 ‘수틀’에 갈고, ‘까꾸리’를 찾아 지게에 얹꼬 고작(골목)으로 나오니 ‘상준이’와 ‘태석이’도 지게를 지고 나오며 ‘계철이’를 보자 “아직(아침) 묵었나” 하고 먼저 인사를 한다.
수틀(숫돌)
“오야 니거들도 ‘아직(아침)’ 묵었나” 답례(答禮)를 하고, “오널은 어디로 가꼬?” 하다가 셋은 미리 수의라도 항거 매로 그대로 ‘감산사(甘山寺)’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싸리밭디’를 지나 ‘감산사’ 입구 오르막 고개를 올라갈 때는 누가 말 안 해도 언제나 돌삐(돌맹이) 한 개썩을 죠 가주고, 고개에 있는 금줄 친 ‘돌무디기(돌무더기)’에 떤지고, 춤물(침)도 세 분썩 받고(뱉고) 넘어간다.
이 ‘돌무디기’넌 ‘하이골’과 먼 산으로 땔나무를 하러 댕기는 초군들이나, 가파른 ‘괘릉재’를 넘어 양북면(陽北面) 소재지에 있는 ‘어일장’을 왕래하는 장돌배이(장돌뱅이 ; 장사꾼)들의 쉼터이자 복을 비는 ‘서낭당’이기도 했었다.
괘릉리 감산사
이 ‘돌무디기’에는 언제나 울긋불긋한 헝겊 쪼가리가 걸레 있고, 어떤 때넌 ‘백짐떡’에 ‘밍태’도 온 마리가 있을 때가 있었다. 이럴 때는 서로 먼처 죠 묵을라꼬 쪼치바리를 하기도 했다.
‘돌무디기’ 맞은편에는 ‘밋등(묘)’이 하나 있는데, 양달에다 짠디가 폭신폭신하여 누구나 길가다가 쉬어가는 동내 초당방과 같은 놀이터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초군(樵軍 ; 나뭇꾼)들이 모여 노롬(노름)도 하고, 씨럼(씨름)도 하는 운동장(運動場)도 된다.
이 고개와 ‘밋등’은 괘릉리의 동산(洞山)인 ‘수지봉(秀之峯)’의 산자락에 위치하여 나뭇꾼이든, 장돌배이든, 감포(甘浦)쪽으로 왕래하던 휴가장병(休暇將兵)이든 누구나 이 고개에 이르면 돌삐를 떤제 올리고, 춤물로 받고, 손빠닥을 합장(合掌)을 하는 등 무속의식(巫俗儀式)을 치렀다.
서낭당
경치도 좋았다. 앞에넌 불국사(佛國寺)와 토함산, 서북쪽으로너 불국사역, 동편으로너 동산령(東山嶺), 서쪽으로너 마석산(뺏돌산)과 영지 못, 뒤로너 하널을 찌릴 꺼 거튼 ‘수지봉(秀之峯)’이 낼바다 보고 있다. 여기서 말하넌 ‘수지봉’은 괘릉리(掛陵里)의 만석꾼이었던 ‘이좌수(李座首)’의 호(號)가 생긴 산을 말하능기다. ‘수지봉(秀之峯)’이라넌 글짜 중에 씰데 없는 속격(屬格)의 격조사(格助詞) 갈지(之) 자를 빼뿌리고 ‘수봉(秀峯)’이라꼬 호(號)로 지았는데, 사람덜은 그 시로부텀 그 만석꾼 영감을 ‘수봉선생’이라꼬 불렀다.
괘릉리 수지봉 (허옇게 보이는 괘릉저수지 제방 오른쪽 뾰족한 봉우리가 '수지봉'이다 옛적에는 민둥산이었지만, 지금은 아름드리 잡목들이 우거져 들어갈 수조차 없다. 저수지 제방 바로 아래쪽에 '감산사'의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물론 그 시절 그 서낭당은 없어졌다. '싸리밭디'에서 본 광경이다)
여기에서 잠시 위에서 말한 ‘이좌수(李座首)’의 '좌수(座首)'란 벼슬이 어떤 벼슬인지 잠시 소개한다. 이 부분은 외동사투로 소개하기가 좀 복잡해서 표준어(標準語)로 설명한다.
‘좌수(座首)’란 조선시대 지방자치기구인 향청(鄕廳)의 가장 높은 자리 또는 그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향청의 향사(鄕士) 중에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향사들이 선거로 뽑으면 이를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2년이었고 수령이 바뀌면 다시 뽑을 수도 있었다. 향청도 중앙관서와 같이 육방(六房)으로 조직되었는데, 좌수는 이방(吏房)과 병방(兵房)을 맡아보았다.
초기에는 수령을 견제하는 등 권한이 많았으나, 선조 이후에는 권한이 약화되어 별감 이하의 향임 인사권과 행정실무의 일부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가 대대적으로 개혁될 때 향장(鄕長)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지금의 관리직급으로 하면, 9급 지방공무원(地方公務員)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어쨌끼나 그 임시에 만석꾼이었던 ‘수봉선생’은 틈나는 대로 ‘수지봉’에 올라 가가주고 이녁 땅을 살패 밨따꼬 한다. 땅바닥에서너 이녁 땅을 다 볼 재주가 없어가주고 우얄 수 없이 산말래이로 올라갔따꼬 한다.
어떤 때너 손자덜을 델꼬 올라 가가주고, 그 손자덜에게 그 임시의 내동면(內東面) ‘배반’들에서부텀 외동읍 모화(毛火)에 꺼정 논밭을 갈키먼서 “야덜아 니거 눈에 비는 전답(田畓)이 모다 다 내 꺼다”라며 호기를 불어 너 죳따꼬 한다.
괘릉리 수봉정
그 손자 중 마지막 손자는 몇 해 전에 사망했었다. 그는 필자의 조카뻘이 되는 종친(宗親)이다. 외동읍민(外東邑民)이나, 경주중고등학교(慶州中高等學校) 출신이라면 거의가 알고 계실 괘릉리 ‘이좌수(李座首)’의 신상은 다른 파일에서 소개드리기로 한다.
앞에서 이바구한 ‘서낭당’으로 다부 돌아간다. 필자들의 어린 시절이 고대로 당게 있넌 그 시절 그 ‘서낭당’도 인자너 헌적(흔적)조차 없이 사그라지고 없어졌다.
지난 2000년 초, 당시의 농업기반공사에서 맹글어 논 괘릉저수지(掛陵貯水池)가 들앉으먼서 동산령 만디로 올라가는 열두 굽이 ‘괘릉재’도 ‘하이골’ 아흔아홉 골째기도 인자넌 모도 우거진 수풀로 막해뿌랬다.
대신 괘릉저수지 못뚝 밑에너 외동읍(外東邑) 모화리(毛火里) 지역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주거유구(住居遺構)를 이전 복원해 두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구(遺構)란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構造)와 양식들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를 말한다.
아매도 공업단지(工業團地)가 자꼬 들어서넌 모화(毛火)에너 마땅한 복원처소가 없어 사람이 안 사넌 한적한 여기에 옮게 논 거 같었다.
모화리 삼국시대 주거유구 이전복원 표지석 (괘릉저수지 제방 바로 밑 공터에 설치되어 있다) 주거유구(住居遺構)의 모양
‘계철이’ 이바구로 돌아간다. ‘계철이’가 지게를 ‘밋등’에 누패놓고 지게에 몸띠로 쭉 뻗어 눕으먼서 “상준아 니 ‘담바(담배)’ 있나”하고 힐끗 치바더 본다.
‘상준이’가 “담바는 있다마너 ‘대(담뱃대)’가 있어야지, ‘태석이’ 니 ‘대’ 안가주고 왔나”하고, 야불때기에 눕어있넌 ‘태석이’ 잩에 물어본다. 그 임시에너 촌에 ‘막꾸(궐련 ; 卷煙)’가 없을 때였다.
‘태석이’도 “아 참, 만날 가주고 댕기던 ‘곰방대’로 오널은 안가주고 왔네. 우야꼬 나도 한 모금 빨머 시푼데”하며 아숩어 한다. 여기서 말하넌 ‘곰방대’라능거너 농사꾸이나 공사판에서 일하는 인부덜이 가주고 댕기기 수월하도록 짜리게(짧게) 맹근 담뱃대를 말하넝기다.
곰방대
여기서 또 잠시 ‘담뱃대’의 구조(構造)와 종류를 알아보는데, 이 부분도 너무 복잡하여 표준어(標準語)로 소개한다.
담뱃대는 ‘대통’과 ‘설대’, ‘물부리’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앞부분은 구부러진 끝에 담배를 담는 작은 통이 붙어 있고, 바닥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설대’와 이었으며, ‘물부리’는 입에 물기 편리하도록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 진다.
‘대통’은 지름 2.3cm, 깊이 3.5cm로, 담배를 한 번 재우면 20∼30분 동안 피울 수 있다. ‘설대’는 지름 7∼8mm, 마디 사이는 20cm 정도의 가는 대를 사용하는데, 흑단재로 만든 것 외에 붉은 칠을 한 목관(木管)의 것도 많다.
‘설대’가 길어서 연기가 식어야 맛이 좋다고 한다. ‘설대’가 길고 ‘대통’이 작은 것이 파이프와 다르며,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서 주로 사용한다.
‘대통’을 안수(雁首)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생김새가 기러기의 목과 유사(類似)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담뱃대에는 ‘장죽(長竹)’이라는 긴 것과 ‘곰방대’라는 짧은 것이 있다. ‘장죽’은 양반(兩班)의 권위의 상징처럼 되었다가 담배가 대중(大衆)에 보급되면서 널리 퍼졌지만, 일반 서민들의 일상 활동에서는 거추장스러워 ‘설대’가 점점 짧아져 ‘곰방대’가 생겨났다.
장죽(長竹)
그 후 ‘곰방대’도 점점 짧아져서 호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짧아졌다. 담뱃대가 전래(傳來)된 당초의 ‘대통’은 크고, ‘물부리’와 함께 금속제(금·은·구리·적동·놋쇠 등)가 많았고, 이 밖에 돌과 옥(玉)도 사용되었다.
활석제 ‘대통’도 있는데, 6각형으로 재를 터는 부분에 ‘男’ ‘多’ 등의 문자를 은(銀)으로 써서 맞춘 것이 있고, ‘물부리’가 짧고 둥그스름한 청색 유리제의 것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궐련(卷煙)’이 보급되어 썬 담배의 수요(需要)가 날로 감소(減少)됨으로써 담뱃대는 거의 자취가 사라지고 없어졌다.
궐련
다시 ‘계철이’하고 칭구들의 담뱃대 이바구로 돌아간다. 그때 ‘계철이’가 “됐다” 하면서 ‘돌무디기’ 쪽으로 띠 올라가디마너 ‘돌무디기’ 얖(옆)에 있넌 대추나무 가재이(가지)에 걸레 있넌 비료(肥料) 포대기로 빼깨왔다.
비료포대 조(종이)를 네모로 째 가주고, 주미에 담아 차고 온 엽초(葉草)를 찝어 내가 ‘막꾸’로 뚤뚤 말아놓고, ‘부쇳돌(부싯돌)’에 ‘속케’를 대고 탁탁 치이까 ‘속케’에 연개가 모랑모랑 난다.
부싯돌
그라고 불부튼 ‘속케’로 ‘막꾸’에 대고 쭉쭉 빨어 땡기이까 ‘담바’ 연갠지(연기인지) 비료포대 연갠지 배추뿌리 만한 ‘막꾸’가 쭉쭉 타들어 간다. 그 임시의 아- 들은 장남(長男)의 경우 자기 집 ‘할매’덜 한테 ‘담바’를 일찍 배와 가주고 어릴 때도 ‘담바’를 피웠다.
‘계철이’가 담바연개를 기차(汽車) 화통(火筒)매로 훅 불어 내먼서, “산에 가봐야 할 끼 뭐가 있노. 산은 전부 ‘백구(백고)’를 쳐놨으이 산말래이(산꼭대기)에 올라 가가주고 찰떡(찹쌀떡)을 구불러(굴러) 바라 티 껍디기 하나 묻는강”하며 자탄(自嘆)을 한다.
‘계철이’가 말한 ‘백구’라는 말은 표준어(標準語)로 ‘배코’라꼬 하능긴데, ‘배코’라능거너 월래 상투를 앉출라꼬 머리 터래기를 깎어 낸 자리를 말하능기다.
그란데 이 말이 언제부터 절(寺刹)에 있넌 스님들이 부직칼을 시퍼렇게 갈아가, 머리 터래기를 민도(면도 ; 面刀)하능 거 맹기로 머리 터래기로 모다 밀었뿌는 말로 변했뿌링기라.
그라고 ‘재철이’가 “산말래이에 올라 가가주고 찰떡을 구불러(굴려) 바라 티껍디기(티끌) 하나 묻는강”하는 말은 산에 있넌 나무로 모다 남벌(濫伐)해 뿌랬으이 ‘백구’친 스님들의 머리맹기로 민등사이(민둥산이) 되가주고, 땔나무 할 끼 한 개도 없따넌 뜻이다.
썬 담배(풍년초)
참말로 그랬다. 월래 ‘하이골’에너 옛날부텀 ‘솔나무(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는데, 왜정(倭政) 때 비영구(비행기) 지럼(기름) 맨든다꼬 다 비고, 캐고, 빼끼고 해가주고 솔나무가 모다 없어 징기다.
첨에너 ‘굉다리’하고 ‘솔방구리’로 공출하라꼬 하다가, 후재에너 솔나무 껍띠기(송기)꺼지 모도 빼깨가주고 공출하디마너, 해방(解放) 임시에너 ‘솔나무’ 뿌래이(뿌리)꺼지 캐가 공출(供出)했시이 민등사이 안되고 우예될 것인가.
굉다리(관솔)
여기에다 보리꼬개가 되머 ‘송기’라는 ‘송기’너 모다 빼깨가 떡 해묵고, 나무하러 갈 때나, 소맥이러 갈 때너 아 어른 할 거 없이 배가 고파가 온 산천에 ‘송기’로 다 빼깨 묵엇뿌이까 그 많던 솔나무덜이 씨가 말라뿌린기다.
해방(解放) 후에너 온 나라가 사방(砂防)한다꼬 ‘왜싸리’하고, ‘아까시’하고, ‘오리목’을 쫌 심아 났지만, 심가 논 나무가 클 새도 없이 뿌래이꺼지 다 패다가 땟뿌이까네 산에너 그저 큰 흙 모대기만 남었지 아무 꺼도 없서 징기라.
흙만 남은 당시의 민둥산
그 뿌이가 사이(산이) 쫌 씨퍼래지머 ‘뺄개이’ 붇는다꼬 일부로 불로 찔러가주고 다 태와 뿌렀시이 여름에 비가 쪼매마 와도 산헐(산흙)이 산통 들판으로 밀고 내래 와 덮어 뿌이 ‘옹당못’이고 ‘거랑’이고 모도 미통으로 변했뿌닝기라.
그라고 ‘옹당못’꺼지 모다 파무챗뿌머 물이 없어 만날 숭녀이(흉년이) 들고, ‘거랑’꺼지 무챗뿌머 나락 한 댓빽이도 몬 거다가주고 수악한(흉악한) 고상(고생)을 안할 수 없었닝기라.
담배를 다 피운 ‘계철이’가 “이카다가 해 다 빠지겠다. 자~ 인자 나무하러 가자. 그란데 어데로 가꼬?”하며 지게를 지고 일어선다. “그래 말이다. 어데로 갈래?” 하고 ‘상준이’와 ‘태석이’도 지게를 지고 따라 일어선다.
“여기 ‘수지봉’에 디가가(들어가서) 살짝 한 짐 해가까?” 태석이의 말이다. ‘계철이’가 얼렁 말을 막는다. “그거너 안댄데-, 여기너 동산(洞山) 아이가.”
“거년(작년)에 우리 웃집 ‘요오(용우)’ 행님(필자를 말한다)하고, 다른 행님 두리가 여기 디가가 도독나무로 물거리 한 짐썩 하다가 뿥잡해가 벌전(罰錢)으로 나무 열 짐 값 물어준다꼬 식겁했다카더라. 앤된데-”
당시의 초군들
이것이 필자들이 성장(成長)하던 시절의 생활상(生活相)이었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면서 해마다 연례행사(年例行事)로 치르던 전염병과 보릿고개에서 하나 둘 죽어간 그 옛날 동무들의 모습이 이제는 아무리 연필을 눌러 그려봐도 윤곽(輪廓)조차 잡히지 않는다.
열아홉에 시집가서 스무 살에 죽은 연상(年上)의 여친 ‘계철이’의 누나 ‘계남이’ 누부야도 왜소(矮小)했던 그녀의 등판만 겨우 그려질 뿐 구도(構圖)가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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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오행님은 도독 나무하다가 식급했네. 그리고 '계남이 누부야'를 그렇게 따랐는데 일찍 작고 했네요, 속 상하겠네요.
저 민둥산에 사방을 하면서 보리고개를 넘긴 나로서는 감회가 새롭네요, 외동면내의 민둥산은 안 가본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다녓읍니다, 정라서 큰일보는 얼라를보이 옛날의 나를 보는것 같읍니다, 그때는 조도(종이) 귀해서 나락단에 부드러운 집뿍띠기를 추레서 뒷딱게를 했는데 보드러운 똥꿍게 상처를내고 피가 딲겨 나오기도 했지요,거름 할라꼬 물과 오줌을 퍼바 가주고 동덩어리가 떨어지면 풍덩 하고 똥물을 치는바람에 궁디를 배리가 웅굴땀에 어기정 거리며 걸어가서 싯어주던 울엄마,...홀랑 다 벗어라 하고 등물쳐주던 울엄마가 너무 좋앗다, 요줌도 웅굴땀에 미나리가 자라면 울엄마가 생각난다,..
괘릉 이야기가..... 외동의 역사이고.....국동댁 이야기가 .....토지소설보다 더 재미있네요...선배님 이참에 소설가로 등단하셔도 될듯합니다. 웅굴이며 ...옹가지며....안들이며...송기며.....잊어묵었던 말들이 수두룩베까리네요....ㅎㅎㅎ괘릉 관광 한번 가봐야 겠네요..모화리에서 가져다 놓은 옛집도 좀 보고.....4촌 여동생 괘릉에 좋은 주택 샀다고 했는데 한번 구경도 하고....그 아이는 참으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나마 태화고등학교를 나와서 학창시절 반장했던 신랑과 결혼하여......맞벌이로 억척같이 노력하여 ....어릴적부터 그렇게도 갖고싶었던 불국사 앞 잔디 있고 정원있는 양옥집을 800평이나 된다니..저택같기도...
했다니...얼마나 반갑고 대견스럽고 자랑스운지....내가 바로 뛰어가 봐야했는데...이번 벌초길에도 그기 들릴 시간 없을정도로 바쁘게 다니다 보니...다음에는 정말로 괘릉 구경도 좀 하고..선배님의 추억어린 얘기의 현장 답사도 하고...동생집에 가봐야겠네요.....
아이구....선배님...제발 말씀 좀 낮춰주이소....그래야 제가 편합니다. 그래서 저도 후배들에게는 말을 마구잽이로 놓기도 합니다.ㅎㅎㅎ 처음도 아니고...온라인만의 선후배도 하니고....진짜배기로 선후배이고...더구나 외동 고향의 선후배이니..더이상 설명 필요없고..우리 카페에서 선후배간에 말 놓기 운동을 벌입시다. 선후배를 몰라볼때는 ...또 한두번 인사 땡겼다해도 잘 모를때는 조심해야겠지만...이제 이정도 알고 지내는 사이는 말을 놔야합니다. ..큰소리 쳐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말 놓이소...이 카페에서 선배님보다 나이 더 드신 분은 정야님뿐입니다.ㅎㅎ그러니 정야님빼고는 막 놔도 게안심더...
서배님의 존뎃말이 저희들과 거리를두고저 하는것같아 섭섭 합니다, 막말로 농담도 못하게 하는 경계심이 생기네요, 몃번쩨 부탁인데요 부담 스러워서 뎃글도 달기 싫어 집니다,....좀 살갑게 동생 대하듯이 해 주이소, 무거버가 확 벗어 떤지고 십니더, 인자 더 부탁 안 하니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