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월 29일(양력) 일본 효고현 히로시에서 부 천두용과 모 김일선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히메지시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2년 재학중 해방을 맞음. 1945년 일본에서 귀국,마산에 정착함. 1946년 마산중학 2년에 편입.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중 "죽순"에 시 '피리','공상'을 발표. 1950년 미국 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 1951년 전시중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학 입학.송영택,김재섭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 1952년 "문예"지 1월호에 시 '강물'이 유치환에 의해 1회 추천되었으며,5~6월 합본호에 '갈매기'가 모윤숙에 의해 천료되어 추천이 완료됨. 1953년 "문예"지 신춘호 "신세대 사유"란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와 11월호에 '사실의 한계-허윤석 론'이 조영현에 의해 추천완료 되어 본격적으로 평론활동을 시작함. 1954년 서울대 상과대학 수료. 1956년 "현대문학"지에 월평 집필, 이후 외국서를 다수 번역하기도 함. 1964년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약 2년간 재직.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약 6개월간 옥고를 치름.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심한음주로 인한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짐.행려병자로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됨.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행방불명,사망으로 추정되어 유고시집 "새"가 조광출판사 에서 발간됨.이로써 살아있는 시인의 유고시집이 발간되는 일화를 남기기도 함. 1972년 친구 목순복의 누이동생인 목순옥과 김동리 선생의 주례로 결혼. 1979년 시집 "주막에서" (민음사)를 간행. 1984년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오상출판사)를 간행. 1985년 천상병 문학선집 "구름 손짓하며는" (문성당)을 간행. 1987년 시집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일선출판사)을 간행. 1988년 만성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함.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통고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소생. 1989년 3인 시집 "도적놈 셋이서" (인의)를 간행.시선집 "귀천" (살림)을 간행. 1990년 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강천)를 간행. 1991년 시선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미래사)을 간행.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답게)을 간행. 1992년 `시집 "새" (답게)의 번각본 간행. 1992년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민음사)를 간행. 1993년 4월 28일 오전11시20분 의정부 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청산)가 출간됨. '시인 천상병'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1967년 7월 14일자 신문을 펴든 문학인들은 1면 톱기사로 실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의 전모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실린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뜻밖에도 시인 천상병(千祥炳,1930~1993)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재불화가 이응로(李應魯),재독작곡가 윤이상(尹伊桑),그리고 몇몇 재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어마어마한 "간첩단"사건으로 확대.조작된 것이다. 중앙정보부 발표문에 따르면 천상병은 강빈구와 만난 자리에서 "동인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어 수사대상 인물임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할 목적하에 동인에 대하여 중앙정보부에서 내사중이라고 말하여 상피의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한뒤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원 내지 6천5백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姜濱口)는 동독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천상병은 예의 다른 문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빈구로부터도 막걸리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것이다. 그것이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시인 천상병이 "국사범"으로 조작되는 사건의실체였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문인들은 어처구니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어쨌든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러운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당한 그날은...//이젠 몇 년이었는가/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진실과 고통/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서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전기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도 갔다오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스무 해나 지난 뒤에 털어놓았다. "그날은-새"라는 시는 "그날"의 고통과 치욕의 경험을 간결하고 단호한 시행 속에 압축해놓고 있다. "고문은 받았지만 진실과 고통은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나는 진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남들은 내가 술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뿐이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불편한 손놀림과 발걸음,잿빛의 얼굴,입가에 허옇게 달라붙은 침의 흔적, "괜찮다,괜찮다,괜찮다..."라고 말하는 그만의 어눌하면서도 동어반복적인 화법 등. 그의 이런 "특징"은 과도한 음주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의 히메지에서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하기도 한다. 곧 6.25전쟁이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문예"에 "나는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작(詩作)과 함께 비평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고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 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던 천상병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명동이나 종로에서 더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왔지만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천상병이 죽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안됐어.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인 민영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 60여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장정의 천상병시집 "새"가 나오는데,시집출간 소식이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된 탓에 서울시립정신병원에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 천상병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새는 그의 시 세계의 중심 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는 시적 자아의 대리자 또는 자유 지향성의 상징이다. 새는 삶과 죽음,천상과 지상의 교차점을 향해 날아간다. 삶은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다. 그러자 시인은 죽은 다음날 새가 되어 돌아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응시한다. 영혼이 새가 되어 다시 삶을 바라보자 그것은 홀연히 찬란한 것으로 비친다. 그렇게 시인의 초연함은 삶의 절망과 고통을 한 순간에 찬란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시인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며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은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다. 그는 시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유유자적 떠돌며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이나 밥값 명목으로 2천원씩을 아무 거리낌없이 뜯어낸다. 시인은 악의 없는 "갈취범"이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가난은 내 직업이지만/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이 햇빛에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나의 과거와 미래/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괴로왔음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라고,/씽씽 바람 불어라" ("나의 가난은") 병원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인은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1979년에는 첫 시집 "새"에 실린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선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낸다. 이어 1984년에는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7년에는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든다면"을 내놓는다. 말기에 이르면 천상병은 천진 난만할 정도로 단순한 어조로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을 예찬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깊이 스며든 그의 유고시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과 그섭리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시에서 하느님은 대우주에 비견되는데,그는 절대자를 향한 무궁한 외경심과 찬양 속에서도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하는 순진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대우주의 정기(精氣)가 모여서/되신 분이 아니실까싶다.//대우주는 넓다./너무나 크다.//그 큰 우주의 정기가 결합하여/우리 하느님이/되신 것이 아니옵니까?"(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19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한 시인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낸다. 19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의정부시립병원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그가 죽고 난 뒤 몇 백만원인가 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 시인의 가족으로는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다. 시인의 장모는 그걸 사람들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감춘 것이 하필이면아궁이 속이었다. 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가난하게 하지만 순진무구했던 시인이 죽어서도 "만악의 근원"인 돈을 없애버리려고 "장난"을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죽은 해 "진짜"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나오고,세해 뒤인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 천상병의 시세계를 중심으로 - 극빈의 생애, 순수의 노래 -천상병의 시세계를 중심으로 - <목차> Ⅰ.서론 Ⅱ.시세계의 특성 1. 가난과 초월의식 2. 소외와 외로움의 정서 3. 일상적 현실 인식에의 후기시 Ⅲ.시적 상징 1. 새의 상징성 Ⅳ.결론 * 참고문헌 Ⅰ.서론 하루치의 막걸리와 담배만 있으면 스스로 행복하다고 서슴없이 외쳤던 시인, 천상 병(1930-1993)은 생전에도 기이한 일화를 바탕으로 세인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시세계보다 그의 생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사후에도 각종 언론매체나 연극 등을 통해서 꾸준히 회자되어왔다. 그러한 생애에 가려 40년의 긴 시력에도 불구하고 시세계에 대한 연구업적이 그리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작고한 93년 이후부터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 고 있고, 최근에는 그의 시세계를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한 업적을 볼 수 있었 다. 이자영은 천상병의 시세계를 크게 공간지향성과 시간지향성으로 나누고, 공간지 향성에서는 '하늘’과‘새’를 시간지향성에서는 ‘과거 회상적 의지’‘현실 만 족적 삶’'미래 지향적 의지’로 세분하여 작품분석을 하고 있다. 김희정은 그의 전기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한 바 있다. 김희정은 그 동안의 연구 업적에서는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시의 구체적인 형식과 구조미를 연구했다. 전기시에서 단순서술형어미를 비롯하여‘의문형어미’들이 주가 되고 있는 반 면에, 후기시들은 ‘감탄형 어미’와 기도문적인 어미들이 빈번하게 출현하고 있음 을 지적했다. 또한 한 행이 4음보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최소한의 문장으로 화자 의 ‘근원적 슬픔’과 ‘존재론적 고독을 ’서정적인 명징함과 슬픈 투명성으로 그 려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천상병은 세속적 명리를 떨쳐버리고 순수한 시를 쓴 시인이다. 이 땅에는 가난한 시인도 많고 가난한 일반인도 많지만 천상병처럼 그 가난을 직업처럼 생각하며 순 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는 천상병 특유의 아이처럼 순수한 기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천상병의 전반적인 시세계의 특성을 살펴보고, 천상병 시에서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새’의 상징성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Ⅱ. 시세계의 특성 1. 가난과 초월의식 천상병의 시는 처음부터 줄곧 가난의 정조가 깊게 베여있다. 그 스스로가 돈에 대한 관념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칭하듯 그는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생활하 고 있다. 그가 단지 가난한 일상만을 문제삼았다면 그건 개인의 진부한 넋두리나 한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난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초월 하려는 의지로 반전시키고 있어 시를 읽는 사람들을 자못 엄숙하게 만들곤 한다. 즉 가난으로 얼룩진 슬픔과 절망을 넘어 관조해버리는 성숙한 내면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산소에 있고 외톨박이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노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소릉조> “여비가 없으니”고향에도 못 가는 가난의 쓸쓸함과 절망감이 애통하게 묻어난 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의 가난은 그저 넋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없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라고 독자를 반문하는 해학과 여유 를 보여준다. 가난하기 때문에 어쩌면 저승에도 못 갈 수 있다는 가난한 자의 행복 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눈물겹도록 따뜻하고 비장한 그의 초월의식을 느끼 게 한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선 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나의 가난은> 전문 그는 진정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이다. 하루하루 한 잔의 커피와 담배와 버 스 값만 해결되면 행복해하는 초연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가난은 내일 일을 걱정해 야 하는 불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라고 말 하며, 무한한 자연과 햇빛 앞에서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평등한 것이어서 그의 가 난은 떳떳한 것이라고 자위한다. 이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부의 축적에 애쓰는 사 람들의 가슴을 뜨끔하게 해줄 풍자적인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마지막 연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선/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라는 표현에서는 삶의 비장함과 엄숙함을 느낄 수 있고, 이 는 가난으로부터 진정 해방된 그의 초월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편지>전문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지난날의 내게 쓴 편지형식의 시다. 여 기서‘배부른’의 상황은 분명 예전보다 나아진 상황일 테고, 화자는 혹시나 배고 팠던 기억을 잊을까봐 스스로에게 걱정이 된다고 한다. 한 그릇 점심을 배불리 먹 은 것에서도 지난날의 배고팠던 자신을 반추해보고 미안해하기까지 하는 그의 겸허 한 자세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삶을 아주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거기엔 뿌리 깊은 가난으 로부터 그가 겪어야 하는 생생한 일상의 모습이 있고, 인생과 삶을 바라보는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이는 곧 그의 빈곤에 대한 관조적인 자세와 초월의지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무욕의 삶은 후기시인 1980년대 초의 <나의 가난함>으로도 일관되고 있 다.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중략)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나의 가난함> 가운데서 위시는 성경에서 인용한 시구인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더 어려운 일’이라는 그의 산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가 난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즉 물질적인 가난함이 오히려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안겨주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는 철저히 무욕의 삶을 실천 했던 그의 가난에 대한 초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외로움과 소외감의 정서 천상병 시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정서는 외로움과 소외감이다. 김재홍은 천 상병의 시가 소외의식을 기저로 하면서 외로움과 슬픔의 정서를 드러내고 나아가 수직 상상력의 방향성을 지니는 주요한 특성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면 시인의 이러한 외로움이나 소외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50년대 이 후 이 땅에 태풍처럼 밀어닥친 외국 문학 사조의 영향으로....(중략)... 순정한 서정 시들은 맹물같이 무미하대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리고 천상병은 그의 산문집을 통해 유년시절은 비교적 부유하고 평탄하게 보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볼 때 천상병 시에서의 외로움과 소외의식은 그의 문학에 대한 갈증과 행복했던 유 년의 회상에서 파생된 현실과의 괴리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산등성 외따론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누인다. 가을은 다시 올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들국화>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갈대> 들국화나 갈대는 다같이 외로움 또는 슬픔의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된다. <들국 화>에서 화자가 지칭한 ‘외따론’곳은 그야말로 소외의 공간이다. 바람도 불지 않는 아주 적막한 곳이어서 괜히 몸을 뒤척여보는 얘기 들국화, 이는 곧 외로움의 정조이기도 하다. 각각 외로운 처지인 들국화와 화자의 마음이 하나일 수 있는 가을 이 다시 올까? 반문함으로써 더 비극적인 정조를 자아낸다. <갈대>의 공간 또한 달빛만 환하게 비치는 외로운 밤이다. 갈대와 화자는 서로의 그 외로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타인의 눈 속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들여다보 는 한층 더 깊어진 외로움의 정조가 베여있다. 지금은 다 뭣들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얼마나 출세를 했을까? 지금은 어디를 걷고 있을까? 점심을 먹고 있을까? 지금은 이사관이 됐을까? 지금은 가로수 밑을 걷고 있을까? 나는 지금 걷고 있지만,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마는 그들은 다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동창> 사실, 이 시대에 직업이 시인인 시인은 거의 없다. 그것은 이상인(理想人)으로서 의 시인은 존재할 수 있지만 생활인으로서의 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문단의 많은 문우들이 그를 천재시인으로 회자했듯 누구보다도 명석한 두뇌와 이지 적이었던 그가 별다른 직업도 없이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서 떠올려보는 '동창생각' 은 그 무엇보다도 깊은 소외감이었을 것이다.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날 지경인 그의 소외된 현실을 볼 수 있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우수를 씹고 있는 나는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한다 비는 슬픔의 강물이다 내 젊은 날의 뉘우침이며 하느님의 보살피심을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가 새삼스레 생각나누나 교회에 혼가 가서 기도할까나 -<비> 위의 시가 1975년에 발표된 것으로 보아 시인이 말하는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 는 이전에 타계한 신동엽과 김관식을 지칭하는 듯 하다. 비를 바라보며 시인은 먼저 작고한 친구들을 떠올린다. 친구들이 떠난‘슬픔의 강물 ’같은 빗속에 혼자 남은 시인의 그 공간 또한 소외된 외로운 공간이다. 이처럼 그의 시세계의 또 다른 특징으로 볼 수 있는 외로움과 소외의식은 <들국 화>, <갈대>, <비>와 같은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토로하기도 하고, <동창>에서와 같이 가난으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3. 일상적 현실인식에의 후기시 천상병후기시의 특징이라면 시적 변용을 전혀 거치지 않은 일상적인 현실을 그대 로 담은 것과 순수한 동심을 노래한 것이다. 이러한 후기시를 읽으며 필자는 문득 시인이 시적 퇴행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잠깐 빠지기도 했다. 이남호는 이러한 천상병의 후기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천상병의 후기시들을 읽을 때 보통 때와는 다른 독법을 지녀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여, 천상병은 시인 이전의 시인이고 그의 시들은 시 이전의 <시의 원료> 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과도한 단순성과 심한 어눌함을 보여준다. 그렇지 만 그것들은 순수한 원료이기 때문에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뮤즈의 노래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단도직입적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①누가 나에게 집을 사주지 않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목터지게 외친다. 들려다 오 세계가 끝날 때까지...(중략)....나는 결혼식을 몇 주 전에 마쳤으니 어찌 이렇게 부르짖지 못하겠는가? -<내집> 가운데서 ②우리 집도 초가요 옆집도 초가야. 우리 집 주인은 서울 백성. 옆집 사람과는 인사한 적이 없다. -<수락산하변5>-가운데서 ③KBS 라디오의 희망음악은, 아침 9시 5분에서 10시까지인데 나는 매일같이 기어코 듣는다. 고전 음악의 올림픽이요 대제인 고전 음악 시간을 내가 듣는 것은, 진짜로 희망이 우러나는 까닭이다. -<희망음악>가운데서 ①에서는 아무런 시적인 변용도 없이 집에 대한 갈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②는 시인의 거주지를 대상으로 쓴 시로 이는 ‘수락산변’의 연작시로 이어지게 된다. ③은 라디오의 고전 음악 프로에 대한 간단한 감상을 적고 있는 작품이다. 위의 작품들에서 특별한 시적 변용이나 상징성을 찾아 볼 수는 없다. 과연 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시적 장치를 배제한 시가 독자에게 파고드는 힘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러한 그의 후기시는<가장 사실적인 사물들과 언어로써 정치와 자연의 의미를 전달하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집을 나서니 여섯 살짜리 꼬마가 놀고 있다. ‘요놈 요놈 요놈아’라고 했더니 대답이 ‘아무 것도 안 사주면서 뭘’한다. 그래서 내가 ‘자 가자 사탕 사줄께’라고 해서 가게로 가서 사탕을 한 봉지 사줬더니 좋아한다. 내 미래의 주인을 나는 이렇게 좋아한다. -<요놈 요놈 요놈아>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난 어린애가 좋다> 천상병 후기 시에 드러나는 특징중의 하나인 동심 지향성을 엿볼 수 있는 시편이 다. 환갑의 나이에도 어린이와 사탕 한 봉지로 친구가 되어 서슴없이 요놈이라 불 러대며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건, 그건 그만큼 시인이 맑고 천진하다는 것이다. 천상병 시에서 동심 지향성은 그대로 선 지향성의 표상이자 천진성의 시학에 원천 이 되며, 휴머니즘 정신의 실질적 기반이 된다. 이것은 현실도피나 패배의식에서 비 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천상병 특유의 생래적 선 지향성과 휴머니즘의 자연스런 유도 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외에도 그는 일상적인 소재들을 시에 많이 담았다. 아내, 장모님, 조카 영진, 아이들을 비롯한 주변인물과 똘똘이, 복실이 등의 강아지들이 다. 이처럼 천상병의 후기시는 전기시 와는 사뭇 다르게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친 근한 일상의 소재들을 바탕으로 시적 변용이나, 수사 또는 상징적 의미를 배제한 채 일상적인 관찰을 투명하게 표현해낸다. Ⅲ. 시적 상징 1. ‘새’의 상징성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상징은 그 작가의 전 작품 내지는 작가 의 전 생애와의 연관성을 떠나서는 이해되기 힘들다. 천상병의 시세계에 대한 선 자들의 업적을 살펴보니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부분이 ‘새’와 ‘하늘’에 대한 상징이었다. 이는 새와 하늘이 그의 전기시부터 후기시까지 지속적으로 나타 나는 중심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작품 속에 자주 나타나는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대상을 논의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여기서는 ‘새’의 상징 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보고, 후기시에는 어떠한 변모 양상을 띠게 되는지 살펴보도 록 한다. 자연물 중에서도‘새’는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자연물 중 가장 활동적 이란 점, 그 비상으로 인해 이상지향적 존재로 생각되기 쉬운 점, 인간과 가장 가까 이 있다는 점 등에 착안하여 ‘새’에 대한 인간인식의 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① ............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대자대비처럼 가지 끝에서 하늘 끝에서..... 저것 보아라, 오늘 따라 이승에서 저승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간다 -<새,1966> 가운데서 ② 어느날 병사는 그의 머리 위에 날아온 한 마리 새를 다정하게 쳐 다보았다. 산골 출신인 그는 새에게 온갖 아름다운 관심을 쏟았다. 그 관심은 그의 눈을 충혈케 했다. 그의 손은 서서히 움직여 최신 형 기관총구를 새에게 겨냥하고 있었다. 피를 흘리며 새는 하늘에 서 떨어졌다. 수풀 속에 떨어진 새의 시체는 그냥 싸늘하게 굳어 졌을까. -<새, 1966>가운데서 같은 해에 나온 두 편의 시에서 각각 다른 새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①에서 의 새는 일기의 변화, 즉 삶의 고난 속에서도 대자대비처럼 넉넉한 마음으로‘이승 에서 저승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간다’고 하듯, 초월의 의지마저 볼 수 있는 자유 로운 비상이다. 하지만, ②에서는 총에 맞아 날 수 없는 새이다. 총에 맞아 떨어졌 다는 것은 곧, 자유의 단절, 지상에서의 삶의 황폐, 나아가서는 인간적 삶의 고뇌를 말해준다. 위 두 편에서 말하는 새의 상징은 ‘비상’과 ‘삶의 고난’을 보여주고 있다. ①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 1959>전문 ② 저 새는 날지 않고 울지 않고 내내 움직일 줄 모른다. 상처가 매우 깊은 모양이다. 아시지의 성(聖)프란시스코는 새들에게 은총설교를 했다지만 저 새는 그저 아프기만 한 모양이다. 수백년 전 그날 그 벌판의 일몰(日沒)과 백야(白夜)는 오늘 이 땅 위에 눈을 내리게 하는데 눈이 내리는데.......... -<새,1965>전문 ①에서 시인은 그의 삶처럼 쓸쓸한 영혼의 빈터엔 그가 죽고 나서야 새가 울고 꽃 이 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죽음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산다는 것, 아름다운 것, 사랑한다는 것’에의 노래로 한창일 때 그는 ‘슬픔과 기쁨, 좋은 일 과 나쁜 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정감에 가득 찬 계절이라고 노래한 다. 그의 삶이 외롭고 가난했기에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이 상징화된 것이다. 여기서 새는 시적 화자의 대리자아로서 시인의 내면풍경을 대변한다. 새는 외로움과 아름 다움 및 사랑의 표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부활의 새, 영혼의 새로서 나타난다. <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와 같 이 새는 시인 자신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포괄적인 상징성을 지니는 것이다. ②에서, 이 시의 새는 깊은 상처에 의해 비상의 의지가 꺾인 새로 상징된다, 즉 날 고 싶지만 날지 못하는 새라기 보다는, ‘날기’를 거부하고 ‘나는’새의 고유한 속성마저 망각할 정도로 퇴화해 버린 엄청난 상처의 새로 제시된다. 슬픔이 너무 깊으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처럼 ②에서의 새는 비상도 울지도 못한다. 하늘의 은총 설교로도 달래지지 않는 새의 아픔과 상처가 짙게 자아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에 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삶의 고난을 반영하여 삶의 비극성을‘새’라는 상징을 통 하여 응시하고 있다. 이제 몇 년이었는가 아이롱 밑 와이샤쓰 같이 당한 그날은........ 이제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그날은-새> 시인의 그 유명한 동백림 사건 속에서 태어난 시가 바로 위의 시다. <아이롱 밑 와이샤쓰 같이 / 당한 그날>이란 표현에서 시인이 겪었을 그날의 처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가늠해본다. 여기서‘새’의 상징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그날의 고통스러웠을 전기고문을 회상하면서 시인은 새를 통해 시대의 구속과 억압을 고발 하고 진실이 더 강하기에‘소스라치게 날개 펴는’모습을 보여준다. 조금 비장하고 저항적인 새이기도 하다. 이렇듯 천상병 시에서의 새는 다양한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상징되기도 하는데, 후 기시로 가면 극히 사소하고 구체적인 새의 이미지로 변화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어느날 일요일이었는데 창에서 참새 한 마리 날아 들어왔다. 이런 부질없는 새가 어디 있을까? 세상을 살다보면 별일도 많다는데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한참 천장을 날다가 달아났는데 꼭 나와 같은 어리석은 새다. 사람이 사는 좁은 공간을 날다니. -<창에서 새> 나는 새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텔레비 옆에 있는 세 마리의 새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짜 새가 아니라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새 세 마리>가운데서 참새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날아와서 내 방문 앞에서 뜰에서 기분좋게 쫑쫑거리며 놀고 있다. -<참새>가운데서 위의 시편들은 그의 후기시의 변모된 새의 이미지를 대변해주는 작품이다. 전기 시에서의 내면의 깊은 성찰과 울림을 토로하던 이미지는 찾을 수 없고, 모조품이나 참새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평범한 새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적인 변용도 절제 되고 등장하는 새의 이미지가 너무 평화롭고 자유로와 전기시에서 느끼지 못했던 시인의 편안한 일상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이상으로 천상병 시에서 중요한 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새’의 상징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전기시에서의 새의 상징성은 현실의 고난과 비극을 토로하고 때 론 그걸 극복해내려는 자유로운 비상과 초월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후기 시에서는 시적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가운데 전기시에서 끊임없는 비상을 꿈꾸던 새가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Ⅳ. 결론 천상병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며 순수한 시를 노래하다 간 시인이다. 사실 삶과 문학이 천상병 시인만큼 일치하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고도의 물질만능주의 시대 에 그의 순수한 삶과 문학이 전해주는 의미가 커 그의 발자국을 되짚어보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그의 시세계의 특징으로 첫째, 가난과 초월의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다. 가난의 문제는 그의 시 전반에 걸쳐 스며있는 소재다. 그의 삶은 ‘여비가 없어 고향에도 못 가는’ 질곡의 삶이었지만 가난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겸허 한 울림으로 퍼져 나온다. 거기엔 삶의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그의 초월의식이 베 여있기 때문이다. 둘째, 외로움과 소외감의 정서가 나타나고 있다. 그가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길 바란다고 해도 근원적인 외로움과 가난에서 비롯된 소외의식을 배제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조는 <갈대>나 <들국화>, <비> 와 같은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나, <동창>이나 자신의 거주지<수락산하변 연작시>에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가난을 통해 드러난다. 셋째, 일상적 현실에의 후기시이다. 천상병의 후기시는 극히 일상적인 현실에 머물 며 천진한 동심을 노래하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시적 변용이나 상징 성들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오히려 기교 없는 기교가 보여주는 시의 강한 힘을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천상병 시에 나타나는 시적 상징을 알아보았는데 여기서는 ‘새’의 상 징성에 대해 논의해보았다. 전기시에서의 새가 삶의 역경 앞에서 상처받고 그 속 에서 초월하려는 비상의 의지를 상징했다면, 후기시에서는 아주 구체적이고 즉물적 인 새를 통하여 자유와 평화로움을 상징하고 있다. 이상으로 천상병 시세계의 개략적인 흐름과 ‘새’의 상징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의 시가 너무 개인적인 일상에 머물어 보다 넓은 세계를 수용하지 못하고 후기시 로 갈수록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가 보여준 극빈의 생애와 순수의 노래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메마른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줄 것이 다. <참고문헌> 천상병, 「새」, 조광출판사, 1971. , 「주막에서」, 민음사, 1979. ,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답게,1987. ,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강천, 1990. , 「나 하늘로 돌아가네」, 청산, 1993. , 「천상병 산문전집」, 평민사, 1996. 목순옥, 「날개없는 새 짝이 되어」, 청산, 1993. 이자영, 「천상병 시의 공간과 시간」, 동아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7. 김희정, 「천상병의 전기시 연구」, 서강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0. 박숙애, 「천상병 시 연구 」, 경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8. 윤호병, 「시인의 존재와 고뇌」, 『시와 사상』, (1996, 겨울호). 이남호, 「녹색을 위한 문학」, 민음사, 1998. 우영옥, 「박남수 시에 나타난 새의 심상」, 경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8. 김준오, 「시론」, 문장사, 1982. 김용직외,「문학의 이해」,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1994 自由人 천상병 시집 분석 및 비평 박 종원(충남대학교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수필가, 문학평론가) 천상병 시인은 <천상병 전집· 散文> (1996년 평민사刊) 중 들꽃처럼 산 '이순(耳順)의 어린왕자'에서 "중학교 6학년(지금의 고교 3년)이 되자 어느 대학을 갈까 망설였다. 적성에 맞는 문과를 택할까, 아니면 다른 학과를 택할까 고심하다 모든 학과를 종이쪽에 써서 멀리 날아간 것을 택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서울대 상대였다."라고 쓰고 있다. 이렇듯 대학의 학과를 선택한 방법이나, 서울대 상대 졸업반 마지막 학기에 졸업 후의 한국은행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학교를 그만 두게 된 동기도 시인 이상의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 그의 말은 안락한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한 그의 자유성향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인생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던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른 것도 단지 친구의 수첩에 그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에게는 물론 자신을 아껴 주시는 분에게까지 가식 없는 쓴 소리를 하고 그래서 흔한 문학상도 탈 수가 없었으며 문인의 각종 회합에 참석도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간 해서는 원고 청탁도 받을 수가 없었던, 그래서 더욱 자유스러웠던 천상병 시인이었다. 그에게 있어 1976년 7월의 동백림 사건과 1980년의 간경화진단과 관계없이 일관된 자연친화(自然親和)의 의미는 그가 사람에게서 멀어져서가 아니고 천상병 시인이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상을 보는 자유로운 시점 때문이었다. 특히 6개월간의 고문의 후유증과 간경화로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현실과 자연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긍정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천상병 시인의 영혼이 자유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시점(視點)의 자유 사람이 자의식(自意識)으로 이 세상의 다른 존재와 객아(客我)의 같은 점과 다른 점들을 인식하면서 자아정체성(自我正體性)을 형성하고 자아(自我)의 존재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사람이 세상을 보는 4단계의 시점의 변화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의 전제(前提)는 궁극적으로 우리는 삶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긍정해야 하고 그래서 과정에 시련과 고통이 끊임이 없다고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1단계는 자아 또는 "나"라는 인식주체를 가지고 살지만 자아라는 것을 뚜렷하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단계이다. 이 막연한 자아는 자신의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사유하게 된다. 시점이 자아로 고정되어 있어서 이러한 자아가 배제된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아와 세상과의 거리감도 거의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제1단계는 진정한 의미의 자의식과 그에 따른 자아정체성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며 객관적으로 객아를 보는 능력이 약하다. 시선(視線)의 방향을 “→”로 표현하면 제1단계는 다음과 같다. 제1단계: 자아(自我) → 세상(다른 사람, 자연, 죽음) 제2단계는 진정한 의미의 자의식과 그에 따른 자아정체성이 어느 정도 형성되는 상태이며 객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능력이 제1단계보다 강하다. 따라서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아라는 의식으로 살았고 앞으로도 살아야 하고 혼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자아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의식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러한 자신의 자아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극단적인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곧 그 외로움을 덜기 위해 이 세상의 다른 존재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 경우 이 세상의 다른 존재와 객아를 대비하여 차별화하여 거리감을 느끼기도 하고 공통점을 찾아 일체감을 느끼기도 한다. 즉,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생명이 짧거나 또는 긴 자연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거나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허무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 동질감을 느끼거나 자연과 하나가 되기도 하지만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들이 더 눈에 많이 띄기 때문에 제2단계에선 대체로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이 표출된다. 제2단계를 시선의 방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세상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자아는 객아가 된다. 제2단계: 자아(自我) ←→ 세상(다른 사람, 자연, 죽음) 천상병 시인은 1951년 12월에 발표한「갈대」에서 적막 속에서 자연과 함께 느끼는 현실과의 거리, 외로움 그리고 안타까움을 환한 달빛을 동원하여 정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 「갈대」 전문 천상병 시인은 1974년 8월에 발표한「눈」에서 고문에 대한 분노와, 신(神) 또는 어머니를 비유하는 맑은 하늘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고요한데 잎사귀가 날아와서 네 가슴에 떨어져 간다 떨어진 자리는 오목하게 파인 그 순간 앗 할 사이도 없이 네 목숨을 내보내게 한 상처 바로 옆이다 거기서 잎사귀는 지금 일심으로 네 목숨을 들여다보며 너를 본다 자꾸 바람이 불어오고 또 불어오는데 꼼짝 않고 상처를 지키는 잎사귀 그 잎사귀는 눈이다 눈이다 맑은 하늘의 눈 우리들의 눈 분노의 너를 부르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눈이다 - 「눈」전문 천상병 시인은 1970년 6월에 발표한「한낮의 별빛」에서 자신을 새에 비유하고 한낮에 별빛을 상상하면서 현실과의 지독한 거리와 슬픔을 그러나 희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상병 시인이 「한낮의 별빛」에서 한낮에 별빛을 볼 수 있는 것은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존재들을 시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인식하려는 희망에의 의지와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성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돌담 가까이 창가에 흰 빨래들 지붕 가까이 애기처럼 고이 잠든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슬픔 옆에서 지겨운 기다림 사랑의 몸짓 옆에서 맴도는 저 세상 같은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물결 위에서 바윗덩이 위에서 사막 위에서 극으로 달리는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새는 온갖 한낮의 별빛 계곡을 횡단하면서 울고 있다. - 「한낮의 별빛」 전문 천상병 시인은 「갈대」, 「눈」, 「한낮의 별빛」에서 안타까움, 분노, 슬픔을 애절하지만 희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천상병 시인이 <천상병 전집· 散文> 중 김윤성(金潤成)론에서 "이 희망이야말로 진짜 문학의 핵심인 것이다. 문학이 희망이라는 것은 아무리 절망적인 표현에 꽉 차 있다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남는 독후감 속의 한 구석에는 희망의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라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즉, 현실에 고통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현실을 긍정하려는 처절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 천상병 시인은 고통 속에서도 현실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정신적인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본다. 제3단계에서는 있음의 세상의 의미와 자아정체성을 한 걸음 더 나아가 없음의 세상에 비해서 찾게 된다. 시점을 이 세상이 의미가 있게 보이는 지점과 의미가 없게 보이는 지점의 중간으로 옮기면 이 우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세상과 객아를 보는 시점이 의미가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므로 세상과 자신의 삶은 의미가 있지도 없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있음의 세상이고 죽음은 없음의 세상이라면 제3단계는 시점을 자아를 포함한 삶에서 벗어나 죽음과 같은 거리에 놓고 중간 위치에서 다음과 같이 삶과 죽음을 보는 단계이다. 따라서 제3단계에서는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 모두를 담담하게 인정하거나 이 우주를 구성하는 어느 존재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 오히려 허무감이 증가할 수 있다. 제3단계: 있음(삶) ← 자아(自我) → 없음(죽음) 천상병 시인은 1959년 5월에 발표된「새」에서, 외롭게 살다 간 자신의 삶을 삶과 죽음의 중간시점에서 보며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는 삶에서 약간의 거리에 있었던 자신을 새에 비유하고 있다. 자신의 삶은 슬픔과 기쁨 그리고 나쁜 일과 좋은 일들이 모두 있었다고 미리 회고하고 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새」 전문 또한 천상병 시인은 1967년 5월에 발표된 「새」에서 자신을 새에 비유하면서 삶과 죽음 또는 있음과 없음의 세상을 같은 거리에서 보고 있고, 그러한 자신의 현실에서의 역할 또는 자신의 모습에 연민과 사랑을 느끼고 있다. 저것 앞에서는 눈이란 다만 무력할 따름 가을 하늘가에 길게 뻗친 가지 끝에, 점찍힌 저 절대 정지를 보겠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미묘하기 그지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橋는 무슨 상형象形인가. 저것은 무너진 시계視界 위에 슬며시 깃을 펴고 핏빛깔의 햇살을 쪼으며 불현 듯이 왔다 사라지지 않는가. 바람은 소리 없이 이는데 이 하늘, 저 하늘의 순수균형을 그토록 간신히 지탱하는 새 한 마리. - 「새」 전문 제4단계에서는 있음과 없음의 세상에서 다시 객아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의 방향이 추가되어 자아는 시공간적으로 우주의 다른 존재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된다. 나아가 우주의 한 구성요소인 자신은, 비록 짧지만 인간의 자아로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하며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같은 기회를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자아라는 의식 속에서 살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긍정적인 동질감을 느끼고, 역시 우주의 구성요소인 자연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더 나아가 진정한 자아정체성 또는 자신의 인생의 의미는 우주의 질서 또는 조화에의 기여에 있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제4단계에서의 하나밖에 없는 자아에 대한 인식은 제2단계에서의 극단적인 외로움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자아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있고 그 어느 것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는 무한의 자유를 느끼게 된다. 따라서 제2단계에 비해 제4단계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감정이 표출된다. 제4단계를 시점과 시선의 방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제4단계: 있음(삶) ←→ 자아(自我) ←→ 없음(죽음) 천상병 시인은 1970년 6월에 발표한「귀천」에서 이 세상의 삶을 잠시 후면 사라질 이슬과 노을빛에 비유하면서, 삶을 ‘짧지만 아름다운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삶에서 죽음의 세상을 긍정하고 죽음에서 삶의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천상병 시인은「귀천」에서 양쪽의 세상을 모두 긍정하는 제4단계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귀천」 전문 천상병 시인은 1978년 3월에 발표된「구름」에서 자신을 어느 곳에도 자유스럽게 가는 바람을 긍정하며 따라 다니는 구름에 비유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렇듯 천상병 시인은 제4단계에 오르고 난 후에 발표된 많은 시들에서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건 하늘의 빈털터리 꽃 뭇사람의 눈길 이끌고 세월처럼 유유하다.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 이 나그네는 바람 함께 정처없이 목적없이 천천히 보면 볼수록 허허한 모습 통틀어 무게 없어 보이니 흰색 빛깔로 상공上空 수놓네. - 「구름」 전문 자의든 타의든 현실과 거리를 둔 적이 있는 사람은 시점의 변화를 안다. 자의로 현실과 거리를 두고 삶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깊이 생각할 때 시점은 삶과 죽음의 중간이 될 수도 있고, 타의로 현실로부터 배척당했을 때 시점은 죽음에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천상병 시인은 1959년 5월과 1967년 5월에 각각「새」를 발표하였다. 이 모두 제3단계에서 세상을 본 것인데 이는 동백림 사건으로 1967년 7월부터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 전의 일이고, 그 후 행려병자로 병원에 실려 가기 전의 일이며, 1980년에 간경화로 1주일 시한부 선고를 받기 훨씬 전의 일이다. 따라서 천상병 시인은 외적인 상황에 의해 타의적으로 시점을 삶과 죽음의 중간지점으로 옮기게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철학적으로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하여 자의로 시점을 변화시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천상병 시인은 천부적인 자유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시사랑문인협회 손근호 시인이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시사랑문인협회는 2000년 8월에 전신인 시사랑 동인으로 출발하여 2001년 3월에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그 후 2002년 5월에 천상병 시인 문학비를 건립하였고 2003년 5월에 제1회 천상병문학제를 경남 산청에서 개최하였다. 한국시사랑문인협회의 귀천시비제막과 천상병문학제는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나"라는 눈으로 비록 짧지만 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한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천상병 시인을 재조명하고자 했다는 데에 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천상병 시인은 삶의 허구에서 벗어나 진실한 자연을 사랑했지만 삶의 허무와 무의미만을 노래하지 않고 삶의 진실인 사랑과 행복을 희망을 잃지 않으며 추구하였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그의 시는 큰 힘이 되고 있다. 또한 한국시사랑문인협회가 월간문학지 시사문단을 발행함으로써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문인들을 늘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삭막한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큰 희망이 된다. 맺음 천상병 시인에게 시(詩)는 고통이 가득한 현실에서 희망이었다. 천상병 시인은 현실과의 거리를 느낄 때면 언제나 자연으로 달려가서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신(神)에게 좀더 다가가기 위한 중간 지점이기도 했다. 하늘은 신(神)과 가장 가까운 자연이었고, 새와 구름은 하늘에 근접한 자연이자 천상병 시인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천상병 시인에게 있는 현실과의 거리감이 옥고나 간경화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자유성향은 천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천상병 시인의 자유성향이 시점의 자유를 낳게 했고, 그의 시는 삶 너머의 세상의 시점에서 우리의 삶을 더욱 희망적이고 아름답게 느끼게 했다. ▶ 천상병 시인에 대하여 신경림의 시인의 대담 중 발췌 여하튼 옛날에는 모이기만 하면 꼭 문학 이야기를 했어요. 누구 시가 좋다 나쁘다 그런 이야기하면서 술상도 엎지르고. 제가 천상병 시인하고 처음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르네상스’라고 음악을 틀어주는 다방이 있었는데 거기에 평론가 유종호씨와 갔더니 유종호씨가 임재경이라는 신문기자를 소개시켜주었어요. 그리고 임재경이라는 분이 황명걸이라는 시인을 소개해줬어요. 그 황명걸 시인이 늘 같이 다니던 사람이 천상병 시인이었어요. 소개를 받으면서 악수를 하는데 천상병 시인이 하도 못생겨서 갑자기 웃음이 쿡 나왔어요. 그랬더니 왜 웃냐고 그러더군요. 하도 못생겨서 웃었다고 하니까 천상병 시인이 그래요. “이놈아, 사돈 남 말하지 말아라!” 그렇게 해서 굉장히 친해졌는데 그 당시에는 술만 먹으면 꼭 문학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한번은 소설 이야기가 나와서 내가 월북작가 현덕(玄德)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고 하니까 천상병 시인이, “니가 현덕을 어떻게 아냐”고 그래요. 그래서 현덕의 소설 한 대목을 줄줄 외웠어요. 그랬더니 천상병 시인이 깜짝 놀라면서 “야! 너 나하고 친구하자”그래요. 그래서 더 친해지게 됐죠. 김지하 시인하고도 이용악의 「북쪽」을 서로 외우면서 친해지게 됐구요. 그때는 술 먹거나 안 먹거나 매일 문학 이야기 하고 그랬지요.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 같은 시는 제가 참 좋아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시도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자연을 뭔가 새롭게 보게 만드는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이 시의 가장 절창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대목인데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소풍 나온 거라고 보는 거죠. 이 시를 읽으면서 천상병 시인은 뭔가 한 발짝 앞서 있는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천상병 시인한테 설명을 들었더니 자기가 가톨릭을 믿으면서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하더군요. 이 세상 사는 건 잠깐 소풍 나온 건데 아름답고 즐겁게 살다 가야 된다고 해요. 뭔가 세상을 착하고 순하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시인 것 같습니다. 시라는 건 또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켜주는 기능도 하는 것 같아요. ▶ 중광스님과 천상병, (목순옥 여사... 날개없는 새 짝이 되어 中)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남편과 중광 스님은 서로를 '보살님', '도사님'으로 부르며 좋아하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주부생활'에서 기획한 기사의 대담자로서 처음 만났다. 스님이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광주로 우리가 갔었는데 남편이 스님을 '보살님'으로 부르자 스님은 대뜸 남편을 '도사님'이라고 부르면서 서로 반가워 하면서 막걸리 파티가 벌어졌었다. 중광 스님은 일찍이 사진으로 남편을 대했다고 말했다. 중앙대학의 윤명심씨가 70년대 초에 찍은 남편와 사진이 있었는데 아주 분위기가 독특했다. 코트를 걸친 채 벽에 기대어 눈을 내리깔고 있는 남편을 보고 중광 스님은 깜짝 놀랐다고 했다. '다 비운 상태다. 전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찍혔다. 도대체 이 사람 누구냐'며 알아봤더니 천상병이라는 시인이었다고 했단다. 만나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질 않자 그림을 한 장 그려 놓고 언젠가 만나면 주겠노라고 간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광 스님은 남편에게 한 마리의 학을 그린 그림을 주었는데 남편이 병원에 있을 동안 진 빚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스님은 "괜찮다'며 "또 그리고 싶지만 그때는 너무 순수한 생각으로 그렸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그림은 안 나온다'며 아쉬워했다. 자주는 못 만났지만 중광 스님이 '귀천'에 오면 남편은 세금을 만원씩 내라고 했다. 중광 스님은 남편이 장모의 장례비 걱정을 하는 걸 듣고 '내가 보탤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곤 했다. 입원해 있을 동안 중광 스님이 면회를 두 번 왔다. 한번은 내가 저녁에 갔더니 '낮에 중광 스님이 다녀가셨다'고 했다. 그런데 돈을 20만원 두고 갔다고 했다. "이거 봐라? 중광 스님이 다녀가셨는데 돈을 이십만원이나 두고 가셨다." "그래요?' "그것도 어쨌는 줄 아나? 나도 몰랐는데 가시고 나서 베개 밑에 손을 넣어 보니까 있었다. 중광 스님은 그런 분이다. " 그 돈은 남편의 마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후배인 의사가 중광 스님 편에 보낸 10만원에 스님이 10만원을 더 보태서 준 것이었다. 남편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이 이야기를 시로 써 놓기도 했다. ▶소설가 천승세씨가 말하는 ‘천상병과의 추억’ 천상병의 문단 후배이면서 각별하게 고락을 나눴던 소설가 천승세씨가 ‘천상병에의 추억’을 담은 글을 문화일보에 보내왔다. 천씨는 현재, 오는 5월10일 출간예정인 ‘소설 천상병’(도서출판 답게) 마무리 작업 중이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제 몫의 한 생애를 갈무리하는 동안 제 이름과는 판이 다른, 혹은 제 생김새에 걸맞은, 타의적 별칭(別稱)을 얻게 돼 있다. 그 별칭에 의해서 본의 아니게 폭삭 망조가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엉뚱한 찬사의 별칭으로 인해 구제불능한 사회악적 인성(人性)도 느닷없이 삶의 당연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이런 통념적 의외성에 거의 무방비로 취약한 입장이 바로 ‘이미 죽고 없는 자’들이다. 이 대목에서 천상병에 대한 세속적 평설과 다분히 편견의 조악성에 의해 시의적절하게 매겨졌을 그의 ‘별칭’을 다시 생각해 본다. 천상병은 예사롭지 않은 그의 특질성(特質性)과는 달리 ‘너무 일찍 꺼버린 목숨’ 탓으로 ‘너무 억울한’ 흠과 탈을 제 홀로 뒤집어 쓴 것은 아닐까. 천상병이 살아 있을 적부터 그가 죽고 없는 오늘까지 끈질기게 천상병을 수식하고 있는 별칭들을 살펴보자. ‘기인’ ‘괴물’ ‘흉물’ ‘광인’ ‘걸인’ 따위의 피상적 외형묘사에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주벽과 패덕한 방탕으로 삶을 일관했다”(오늘도 어느 서점에 꽂혀 있을 인물사전의 앞풀이 대목)는 인상비평에 이르기까지, 천상병에 대한 위의 생각들은 모질다 못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피상적 관찰’이 아닌, 주도면밀한 ‘문명비평’의 목적으로 생겨난 ‘별칭’들은 또 어떤가. 이런 의도의 별칭들도 결코 기죽지 않는다. 이른바 ‘퓨리턴(Puritan·청교도)’ ‘자유인’ ‘자유주의자’ ‘순수인’ 하는 따위의 덤턱스러운 찬사 역시 그것들의 본질적 속성과는 다분히 거리가 멀고, 따라서 엔간히 과분해서 때로는 몹시 괴란쩍다. 천상병의 ‘별칭’들 대로라면 그의 자유분방한 행동에 으뜸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이른바 ‘불편성’(不便性)일 것이다. 작정했던 대로 용돈을 수금하고 또 그런 의도를 재빨리 알리자면, 무엇보다도 우선돼야 할 전제가 기동성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상대자(즉 천승세)의 생활수준이 먼저 녹록해야 한다. 최소한 전셋집(이를테면 방은 두서너개쯤)에서 살고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요, 한 통화만 하면 데꺽 내용을 알아차릴 수 있는 전화기 정도는 필수품이어야 하겠다. 그런데 이 무슨 해괴한 변고인가. 상대자 천승세는 연년생이나 다름없는 다섯 자식들, 게다가 꽤나 몸집이 좋은 65㎏(체중 말이다)짜리 조강지처마저 얼싸안고, 단칸셋방에서 살더라. 전화기 한 대 들어박힐 틈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상병은 왜 애꿎은 천승세만 동무 삼고, 달달 볶아댔을까. 어째서 천승세는 그의 평화 속에서 그중 만만한 ‘봉’이었을까. 이른바 천상병 일대기에서 제일 ‘암흑기’라 할 만한 (따지고 보면 제가 태어난 날로부터 죽는 날까지가 다 캄캄했지 웬일로 해돋는 아침이 따로 있었겠나)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 이후부터 그는 우이동의 내 단칸셋방을 무단점거(?)하고, 장장 여덟 달동안 속편하게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었던가. 그 때야말로 나 천승세는 ‘가난해도 그쯤 가난할 수는 없는’ 모지락스러운 ‘절망고(絶望顧)’에 시달리며 ‘살아 있어도 죽은 목숨’ 격의 신세였다. 삶의 효율성에서는 어김없이 빵점이요, 그야말로 ‘한데’나 다름없는 그 황량한 곳이 어째서 천상병 입장에서는 ‘우주’ 그 자체였을까. 천상병과 나 천승세 둘이만 알 수 있는 ‘암묵적 내통’이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 뜨거웠기만 했던 세월을 잊을 길 없다. 그가 떠났어도 비오는 토요일 오후, 인사동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있는 작은 찻집에 들어섰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느 집 궁색한 부엌같은 속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주방에서는 차 끓이는 손짓이 분주하다. 진한 모과향이 음악 선율에 실려 흐르고 삼삼오오 모여 앉은 손님들은 어른 밥그릇만한 토기찻잔을 손에 쥐고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판자때기를 이어 붙인 듯한 긴 의자가 3개의 벽면을 빙 둘러싸고 있다. 한지를 씌운 갓등은 따뜻한 느낌이다. 벽을 둘러보니 책장에는 시집이 빼꼭이 꽂혀 있다.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순옥씨가 운영하는 찻집'귀천'의 모습이다. 그가 떠난 지 10년이 넘었다. 그가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인 87년에 쓰여진 시 <달빛>이 최근 공개되었다. [ 미발표 시 ] 달빛 / 천상병 [천상병 시비에 시인의 얼굴이 나타나 숱한 화제를 낳기도 했다.] 봄이 오는 계절의 밤에 뜰에 나가 달빛에 젖는다 왜 그런지 섭섭하다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려고 하고 있고 나는 잠들기 전이다 밤은 깊어만 가고 달빛은 더욱 교교하다 일생동안 시만 쓰다가 언제까지 갈 건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으니 어쩌면 나는 시인으로서는 제로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돌아가신 부모님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양지는 없고 이 시는 그의 대표작 <귀천>을 연상시키듯 이승에서의 삶을 담담히 회고하며 저승의 삶을 엿보고 있다. 평생을 동심속에 살았던 천상병은 세상에서 기인같은 생활로 알려졌지만 문단에서는 우리 시대의 가장 빼어난 서정시인으로 평가돼 있다. 그의 작품은 우주의 근원과 죽음의 세계, 인생의 비극적 현실을 간결하게 압축함으로써 감동을 주었다. 아직도 '귀천'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 끊기지 않는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던 그는 이제 없지만, 모과차를 마시며 그의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떠난 후에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그는 그가 말했던 것처럼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