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박 5일 동안 두물머리에 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제는 아프리카 방송 덕분에 그곳 영상과 미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컴퓨터로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후기라도 올라와 있을까 하고 카페에 와 봤는데
아무 소식도 없는 걸 보니,
상황이 글을 쓸 수 없는가 보네요.
아마, 이 카페에 오시는 분들도 저와 같은 비슷한 마음으로 들르시겠죠.
문득, 몸이 갈 수 없으니 글로라도 같이 해야겠구나 하는 맘으로
글을 적어봅니다.
아무 글이 없으면 또 여기에 왔던 걸음이 허전할지도 모르고요^^
제가 양수리 두물머리를 알게 된 것은 정약용 때문이었지요.
천주교 때문에 집안이 모두 쇠락해지고, 본인 역시 강진으로, 다산으로 귀향을 갔던
정약용은 1784년 배를 타고 두미협(지금의 하남시 검단산과 남양주시 예봉산 줄기가 이루었던 한강의 협곡)을 내려오면서
맏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에게서 서학에 대해 처음 전해 듣는다고 합니다.
정조 때 대과에 급제한 후, 33세 때는 경기도 적성, 마전, 연천, 삭녕 지방의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민정을 살폈기에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굶주리는 백성에 대한 연민이 컸던, 그리고 그들을 위한 제도를 펼치고자 했던 정약용이기도 합니다.
정조가 승하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즉 그의 고향이 바로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마현(마재)로 가서 집을 짓고 여유라는 당호를 붙여 살고자 했지만,
다음해 마흔살에 바로 천주교도 사건(책롱사건과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유배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의 고향 마현은 산 위에 철마(鐵馬)가 있다고 해서 마현(馬縣)이라고 불렸다고 하지요. 소내라고도 불렸는데, 이곳은 양수리(우리 말로 두물) 근처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곳, 지금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그곳입니다.
정약용이 57세 때 다시 18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돌아온 곳도 마현이요,
75세에 생을 마친후 그의 유언에 따라 묻힌 곳 역시 마현입니다.
예전에는 금빛 모래밭이 있는 지금보다 더욱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하죠.
정약용은 유배시절, 그 고향을 그리며 시름을 달랬고, 고향을 그리는 그림도 그리고,
고향에서 오는 편지에 답을 쓰면서 글을 짓기도 했습니다.
아래 글도 그런 글 중 하나입니다. 한글로 번역된 것으로 옮깁니다.
가꾸어보렴 했던 '집 주변'
거기에 계신 모든 분들의 안녕을 빌며,
그곳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분명 누구보다도 그곳을 사랑했던 정약용의 마음 역시 저와 다르지 않을 거 같습니
다. 농부를 사랑했고, 어린 백성을 귀히 여겼던,
그리고 이땅에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드리워진 하느님의 첫 뿌리이기도 했던
그였으니까요.
아들에게
서울 소식 올 때마다 마음이 놀란다네.
집에서 온 편지 만금의 값어치라 뉘 그랬던가.
시름은 바닷가 구름처럼 개었다 다시 일고
비방은 산의 소리처럼 조용하다가 다시 들리네.
세도가 떨어져 따르는 이 없어도 섭섭치 않고
가문은 쇠했지만 이런 아들이 있어 기쁘구나.
글공부는 편지를 쓸 만치 되었으니
이제 집 주변을 가꾸어 보렴.
정약용
첫댓글 물빛님!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