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일찍부터 내장산의 '심오한' 유래를 알고 싶었다. 그러던중 1977년에 내장면 부전리 출신인 칠보중학교 동료 최재용 교사에게서 그 당시 내장사의 역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의 정보를 알아냈다. 곧장 그길로 내장으로 가서 그 주인공 최씨 스님을 찾아뵈었다. 적어놓은 자료가 분실되어 스님의 존함은 모르나 그 지역에서는 모두가 아는 원로 스님이었다. 그분은 내장사 입구 순창 가는 길의 삼바실 마을 민박촌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의 스님이었다. 어려서부터 내장사에서 자란 그분은 최씨로서 최재용 교사와 같은 집안이라고 하였다. 1960년대 불교 종파분쟁 당시 소실된 내장사가 선운사 소속으로 편입되면서 소장파에게 밀려나면서 지어둔 새 암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70세 정도로 보이는 그 스님은 찾아간 기자에게 과일가지를 내놓으면서 자상하게 맞이하여 주셨다. 우리지역엔 수많은 '바우덕이'가 있었다 그 노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내장사를 지을 때 여자스님이 거액의 시주를 해 절의 일부를 지었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노스님들에게서 자주 들었다. 1960년대 내장사 재건축 터를 닦으며 그 여자스님의 이름이 새겨진 기와조각을 발견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여승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으나 분명히 내장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하였다. 내장사에 여자스님이 큰 활동을 한 것도 새롭지만, 좀더 들어가보면 불교탄압의 억압시대에 불살러버린 중종34년의 내장산 폐허를 농악을 리더하고 인솔하던 예술고장의 진실한 역사의 이면을 볼 수가 있다. 신앙예술가 무당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음악을 무기로 생활한 사당패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경기도 안성의 청룡사 미인 여자농악대 '바우덕이'를 생각해보면, 그 의미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녀 시주승 여성농악대가 걸궁으로 사찰을 건립하는 방법이 성행하였기에 전북지역에 큰 건물이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농악을 연구한 기자로서는 귀중한 자료이다. 삼국시대 화랑도와 원화들이 얼짱 미인으로 음악소리를 가지고 정치하듯이, 불교탄압의 혹독한 조선유교시대 이러한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내장사가 건축되고 생존했다. 근래에 들어서도 일제시대에는 도로개설, 비용이 많이 드는 교량 건설이나 면사무소 경찰지서건설에는 농악을 앞세워 자금을 조달하였다. 예술을 애호하는 지역이기에 농악을 치면 돈이 저절로 순탄하게 나오는 시주정신에서 이룬 신앙공동체 내장사가 중종과 이승만의 예술적 무감각 속에서 사라졌다. 내장사가 불타는날 , 그리고 산내면과 쌍치면 전체마을이 불타는 날 하늘에서 검은 눈처럼 재가 내려오는 것을 기자는 보았다. 자연재해로 소실된 강원도 낙산사와는 또 다른 내장사의 아픈 역사이다. 정읍의 문화유산을 낙산사처럼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다 강원도 낙산사의 소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낙산사는 주변경치도 좋지만, 역사적 고찰이라는 점에서 중요한데 이것이 사라졌다. 내장사 역시 안전지대는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전통시대에 이지역 돈줄로 행세했던 단풍사찰의 풍경에 풍악소리의 진풍경을 복원시켜 미래를 대비하자. 국악발상지 전북 학생둘의 국악 수준이 전국 하위다. 어쩌면 전북은 '예술의 부의황제(청나라 끝임금) 시대'로 접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정읍의 내장사는 예술과 신앙으로 심은 아름다운 단풍수와 아름다운 사찰건물이라는 문화유산을 상속받은 곳이다. 그러나 정읍농악, 정읍사와 같은 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이 정읍출신 대기업사장의 헌금처럼 저절로 굴러든 행운 이외는 재원이 없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