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문: 당신은 죄사함에 대해서 무엇을 믿습니까?
답: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만족(보상)사역 때문에(요일 2:2; 고후 5:19,21) 내 모든 죄와 죄의 왜곡성 곧 일생동안 싸워야 하는 이 죄의 왜곡성을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으시고 내게 은혜로 인한 그리스도의 의(義)를 선사하시어 내가 심판대 위에 결코 서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Quid credis remissione peccatorum?
-Deum, propter satisfactionem Christi, meorum peccatorum atque illius etiam pravitatis, cum mihi per omnem vitam pugnadum est, memoriam omnem deposuisse, & me iustitia Christi gratis donare, ne unquam in iudicium veniam.
(참고성경구절)
시 32:1-2; 사 43:24-25; 고후 5:19
(해설)
제 56문에서 58문까지는(죄사함, 육체의 부활, 영생)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 다룬다. 우리는 이것을(56문) 다시 세 가지 질문을 던짐을 통해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① 무엇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죄를 생각하지 않으시려고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만족 사역에 근거하여, ② 그는 무엇을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내 모든 죄, 죄 버릇, ③ 죄사함은 당신에게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심판대에 서지 않는다.
I. 죄 용서의 근거
1. 하나님의 용서하심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인간은 더러 감정적인 충격을 받으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 또는 다른 사람들 눈앞에서는 자신의 체면 때문에 용서하는 체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철저하게 체험하지 못한 자들은 쉽게 용서하지 못할 뿐아니라 용서했다가도 다시 자신의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용서를 포기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처럼 잊어버리신다.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 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 103: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의하면 그는 반드시 죄를 심판하신다. 죄는 인간을 실존적으로 비참하게 만들고 왜곡되게 만들어 불행속으로 몰아 넣는다. 인류의 문화는 죄에 억눌린 문화이다. 이 죄는 어떤 인간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죄용서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자기의 공의의 속성과 충돌하시지 않으시고 죄용서를 하신다는 것은 그의 지혜에 속한다. 자기 아들을 자기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희생제물로 삼아 심판하시고 그의 공로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롬 3:25; 벧전 2:24; 엡 1:70).
2. 수직적인 차원의 죄와 수평적인 차원의 죄
모든 죄는, 심지어 인간에 대항한 죄도 하나님을 대항한 죄이다(시 51:6).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행동이 수직차원과 수평차원이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이런 죄 개념은 다른 어떤 종교에도 없다. 이웃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될 사랑을 베풀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수직차원의 범죄가 되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 만족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는 각자가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함을 가르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이 제시한 방법은 재물을 바치거나 덕과 공로를 쌓아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 스스로 무엇인가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타락한 인간이 아무리 무력해도 하나님 앞에 합한 공로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구원의 방법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주신 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그것은 우리 대신이 죄없는 사람이 우리 자리에서 대신 우리 죄에 대해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는 그 구원자만 믿고 의지하며 연합하기만 하면 의롭다 여기는 구원방법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공의만족사역이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II. 죄사함의 정도
1. 완전하 사함
하나님은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죄와 심지어 죄의 버릇도 용서하신다.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런 의미에서 조상의 저주가 지금 예수를 믿는 나에게 양도된다는 말은 잘 못된 것이다. 죄용서가 안 되는 죄도 있다. 그것이 바로 성령 훼방죄인데,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훼방죄는 범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속에 성령이 내재하시기 때문이다.
2. 죄버릇
하나님은 우리의 자범죄 뿐아니라 우리가 일생동안 싸워야 할 죄의 버릇도 용서하신다. 죄버릇이란 악한 정욕인데 이것은 신자들이 사망의 몸 안에 살고 있는 한 일생동안 싸워야 할 그 무엇인데 항상 따라 다니며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게 만든다. 성화는 이 죄의 버릇이 얼마만큼 없어졌느냐에 따라 그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고매한 신앙인격을 지니도록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의 과거의 상태보다도 현재의 상태에 대해 한탄하고 자기에 대항하여 싸웠다. 중생한 자만이 이런 싸움을 싸울 수 있다.(롬 7:23-25; 갈 5:17; 시 103:3).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시 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여기 ‘네 모든 병’은 죄버릇으로 인해 우리가 도덕적으로 나약함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훼방죄는 사함을 못받는다(마 12:31). 성령훼방죄란 지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서 외적으로 표시가 드러나고 또 마음속으로 이것은 성령의 역사임을 자인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부인해 성령을 창피케 하는 것인데 성령을 근심시키는 자들은 이런 죄를 범한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이런 죄를 범하지 않는다.
III. 죄사함의 방법
1. 죄용서는 하나님께서 죄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심과 은혜로 그리스도의 義를 선사하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소극적인 측면에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시는 반면에 적극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부여하신다.
1) 더 이상 생각하시지 않으심: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미 7: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스바냐 3:17에 보면 ‘너를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말이 나온다.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의 사랑하시 가운데 침묵하신다’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시고 침묵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생각하시지 않음을 통해 그리고 죄를 찾아 벌하시지 않음을 통해 용서하시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의를 선사하심을 통해: 우리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주셔서 더 이상 부끄럽게 하지 않으신다. 즉 우리 위에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덮어주시어 우리의 수치가 드러나지 않게 하신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이게 되어 죄용서 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롬 3:24; 사 61:10).
인격적인 신을 모르는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이런 죄사함의 원리는 없다. 기독교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자기와 인격적으로 관계하는 인간과 관계하는 차원에서 죄사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삶의 한계를 정하는 율법이 있음과 그 율법을 주신 창조주시며 동시에 율법의 순종여부를 가리시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IV. 죄용서의 유익
1) 하나님이 나의 죄를 영원히 생각하시지 않으실 뿐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선사하시기 때문에 죄사함은 완전한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무서운 심판대 위에 서지 않아도 되는 유익을 얻는다(요 5:24; 롬 8:33-34).
2) “죄사함을 믿는다”는 말은 그 내용에 대해 모두 다 알 뿐아니라 죄사함을 신중한 마음으로 찾아 갈구하며 또 회개하고 믿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시 51:3; 32:5).
죄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우리가 멸망하지 않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실존적인 부담이 없어져서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 동시에 못된 행실을 고치려는 성향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 때문에 불안 공포를 가지게 되고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죄를 범하는 것이다.
*샤머니즘의 죄용서의 의미, 유교의 죄용서의 의미, 불교의 죄용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제 57문: 육체의 부활은 어떤 점에서 당신을 위로합니까?
답: 나의 영혼이 이 생애 후에 그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즉시 취하여감을 당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내 육체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부활하여 다시 내 영혼과 하나로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육체와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Quid te consolatir Resurrectio carnis?
-Quod non tantum anima mea, postquam é corpote excesserit, é vestigio ad Christum suum caput assumetur: verum quod haec quodq; caro mea, potentia Christi excitata, rursus anime mee unietur, & glorioso corpori Christi conformabitur.
(참고성경구절)
고전 15:42-44; 고후 4:14; 빌 3:20-21; 요일 3ㅣ2
(해설)
위의 내용은 ① 죽을 때 영혼을 취하여 감, ② 육체의 부활, ③ 영혼과 부활한 육체가 만남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죽음은 인간을 불안하게 하고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인간의 실존문제이다. 모든 일반종교는 이 죽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 죽음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이 죽음은 우리의 현세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온갖 인간의 범죄행위는 그 심리적 동기를 따지고 보면 이 죽음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역사를 보면 인간은 이 죽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그러나 어느 하나 확신을 주지는 못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육체의 부활신앙에 대해서 뚜렷한 증거와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해 준다.
육체의 부활은 세 가지 측면에서 나를 위로한다. ⑴ 내 육체가 죽음에서 부활한다는것, ⑵ 그것이 다시 내 영혼과 만난다는 것, ⑶ 그 육체가 영화스럽게 변한다는 것. 제 57문은 참된 신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다.
I. 죽음 후의 상태
1.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 영혼과 육체가 밀착으로 연관되어 있다. 죽음이란 이 두 요소가 분리되는 현상을 말한다(창 35:18; 왕상 19:4).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인간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떨어지는 순간부터 ‘사망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데(영적인 죽음) 누구든지 이 상태 속으로 들어가면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육체적 죽음)이다. 우리가 죽은 것은 우리가 ‘사망의 상태’ 속에 살기 때문이다.
2. 영혼은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불어넣으신 그의 입김이다. 영혼은 육체와 분된 후에도 사멸되지 않고 존재한다. 그런데 육체는 영혼과 분리됨과 동시에 썩어 먼지로 된다(창 2:7; 전 12:7; 마 10:28). 육체가 앞으로 부활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영혼이 죽음 후에도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다.
3. 죽음 후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이 둘은 철저하게 하나에 속하기 때문이다(고후 5:4). 그러나 죽음 후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의 상태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완전하다: 그들이 그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취하여 감을 당함과 아울러 약함 곧 지상생애 동안 이 죽을 몸에 붙어 있는 연약함, 낭패,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축복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계 14:13; 빌 13:23; 고전 5:8).
4. “즉시”라는 말은 인간의 영혼이 죽음 뒤에 어떤 중간 단계 이를테면 연옥에 머물다가 가는 것이 아니고 죽자마자 즉시 주님께로 감을 가르쳐 준다(눅 23:43; 요일 1:7; 행 7:58). 중세 신학은 이 연옥 사상을 만들어 돈을 긁어모우는 수단으로 삼았다. 면죄부 판매는 바로 이것이다.
5. 그리스도의 피로 의로워진 무리들이 불신자들과 처음으로 분리되는 것은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서이다(눅 16:22-23; 행 1:25; 히 9:25).
* 윤회적 환생설은 근거가 있을까? 환생설을 보증하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환생설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것을 예언한 구절과 그 성취 사건만큼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근거가 없다. 이것은 사단의 속임수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환생설이 인정되면 부활신앙은 무너질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심지어 힌두교도나 불교도들고 윤회적 환생의 고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여기서 환생하는 것에서 위로를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구가 환경오염으로 시궁창이 되었을 때 환생한다고 생각해 보라. 서구인들이 환생설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기 위함이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못박는다(히 9:27). 이것은 하나의 경고인 동시에 위로의 메시지이다. 계속 범죄하는 자들에게는 죽은 후에 받는 심판은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복된 세상을 받는 축복인 것이다.
II. 세상 끝 날의 육체의 부활
1. 죽음후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실은 이방인들도 믿는다. 그러나 육체가 부활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만 계시하신 진리이다. 구약의 믿음의 열조들은 이 사실을 믿었고 주님도 분명히 이 진리를 선포하셨다(시 16:8; 요 11:25; 마 22:29,31-33). 제 57문에 나오는 “이 내 육체”란 이질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고 내게 속한 것이다(욥 19:25,27; 고전 15:16).
그 날 이 세상에는 파노라마한 장면이 연출될 것이다. 성경은 예수께서 십자가 못박히셨을 때 이미 예표적으로 성도들이 부활했음을 증거한다.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마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2.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모든 주장들은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꾸짖을 수 있다(마 22:29). 부활은 인간이 예술품을 창조하는 것처럼 자연적인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기적인 것이다. 죽음은 육체를 완전히 못쓰게 마멸시키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구성요소를 분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해된 각 요소들은 다른 요소들과 더불어 결합하여 재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첫 인간을 땅의 먼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먼지로 된 그 육체를 다시 소생시킬 수 있다(눅 1:37).
육체가 부활할 때 썩어 없어진 본인의 몸의 여러 구성요소들이 다시 모이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몸의 요소가 섞여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다(살전 4:13-14).
3. 육체의 부활을 증명하는 자연현상의 예: ① 나방이는 애벌레와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나 차원이 다른 상태로 되었다. 애벌레가 1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면 나방이는 3차원에서 사는 것이다, ② 곡식알이 땅에 떨어져 식물로 자라나는데 곡식알의 상태와 식물의 상태는 다른 것이다(고전 15:43:42-44).
4. 부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① 부활은 성령의 사역이다(롬 8:11), ②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 이유는 육체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마무리 작업에 속하기 때문이다(요 6:39),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부활한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 -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 사건, -⑵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심(마 9; 눅 7; 요 11 등등). ③ 부활은 아버지의 뜻이다(요 6:39).
5. 부활한 내 몸은 다시 내 영혼과 결합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나의 전 인격이 구원과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새롭게 되는 것이다(겔 37:5-6). 부활한 육체는 ‘그리스도의 영화스러운 몸과 같이 된다’.(빌 3:21; 고전 15:42-44).
6. 부활한 몸의 특징: 영화롭게 된 몸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산하게 되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육의 정욕이 없다. 즉 인간중심 내지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마 22:30). ②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자는 것에 대해 자유로와진다(고전 6:13). ③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장애를 받지 않는다(요 20:19,26).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닫힌 방 안으로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오셨다. ④ 그 몸에 광채가 난다. 변화산에서 변한 예수의 몸은 이 사실을 암시한다(마 17:2). ⑤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다. 육안에 있는 현재의 몸으로 하나님을 보면 죽어 버린다(고전 13:12; 요일 3:2). ⑥ 이 몸은 이제 썩지 않는다(고전 15:53; 눅 20:36).
7. 부활의 순서(고전 15:23-26,51): ① 잠자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저 일어나서 변화됨, ② 그 다음 불신자들의 부활하는데 이것은 영벌을 받기 위한 중간 단계임(고전 15:15; 요 5:28-29; 살전 4:16-17; 계 20:4-6,12).
8. 악인과 의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근거: ① 먼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죽어 먼지로 된 인간의 시체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 ② 하나님의 의는 천하 인간을 공의로 심판하기 위해 다시 살리신다(행 17:31). ③ 육체가 부활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다(단 12:2).
9. 육체의 부활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악인을 부활시켜 그 악을 심판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성도의 부활을 통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순서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전 15:31). 또 그리스도의 영광을 지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타냄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한다.
10. 육체의 부활이 주는 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지금 나의 육신이 불구로 있다해도 부활때 완전해 진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 소록도 문둥이 신자들은 육체의 부활때 가질 영광스러운 육체를 고대하면서 활기 있게 신앙생활을 한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허무주의에 빠져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산다. 내가 이 생애동안 즉 몸과 영혼을 끈질기에 지니면서 육체의 구원을 기다리되 현재의 상태와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며 위로를 받는다.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니고 있는 우리는 자기 아들됨을 사모하고 육체의 구원을 기다린다.
11. 프러시아의 황제 빌헬름의 황후인 루이제 헨리테는 자기 아들 활태자가 죽어 슬픔에 빠졌을 때 부활찬송을 작사했다: “예수, 내 소망이여”.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를 위하여 쉬이 불속에라도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육체의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도 그렇고 사도시대도 그렇고 그 후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핍박이 있는 곳에도 죽음을 마다하고 순교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는 육체의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자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라고 일컬었다(히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