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를 모시러 짐꾼으로 변장하고
- 정하상 -
무수한 순교자들이 놀라운 신앙과 복음을 증거하며 이름없이 죽어간 가운데 세월은 흘러갑니다.
그리고 잊혀진 동토에 불쌍한 2세대 마저 박해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 기막힌 박해 속에서 주문모 신부마저 돌아가시자 다시 사제를 모셔오기 위한 사제영입운동이 전개되지요.
이것이 2차 사제영입운동인데, 권요한, 신베드로, 최모로스 같은 사람들이 주축이 됩니다.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1차로 1811년에 서신을 전달할 의무를 띠고 이여진이 베이징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1812년 12월 9일자로 이 편지가 비오 9세 교황께게 전달됩니다.
그분은 최초로 한국교회의 편지를 받으셨던 비오 6세 다음 교황입니다.
교황은 사제를 요청하고 있는 한국교회 신자들의 이 기막힌 편지를 보고 깊은 동정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한국교회를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베이징의 피레스 주교는 특별히 성패를 주시고
한국교회를 축복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지만 이들은 한국교회를 위한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사제영입에 관한 소식을 받지 못한 한국교회는 안타까운 나머지 2차 서신을 발송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소지하고 가던 사람이 북만주에서 죽는 바람에 전달되지 못합니다.
사제영입운동을 전개할 수 없는 이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을 때에 놀랍게 한국교회의 맥을 이은 탁월한 공로자가 나타납니다.
이분이 바로 정하상입니다.
정하상은 한국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초대회장이시던 정약종의 둘째 아들입니다.
1801년에 정약종이 순교할 때 그는 불과 8살 밖에 되지않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어머니와 같이 옥에 갇혔다가 풀려납니다.
그런데 이들이 처음 옥에서 나와 고향 마현에 들어갔을 때에 정씨가문에서 매우 천대합니다.
다산 정약용부터 시작해서 당대를 풍미했던 네분의 대학자가 천주학을 하다 전부 패가망신을 했으니
천주교라면 진저리를 치는 거지요.
어머니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여덟 살배기 어린아이를 안고 교우촌으로 숨어들어 가서 사는데
배론으로 들어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하상은 그곳에서 어머니가 입으로 전해주는 기도문을 귀로 듣고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요. 그렇게 자랐으니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정하상의 나이가 차 이십 세가 가까워졌습니다. 어머니가 걱정을 합니다.
그도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 알고 싶어 더욱 글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고심한 나머지 유명한 선비로서 그의 아버지와 친구이며 다산 집안을 잘 알고 있는 조유스티노를 찾아갑니다.
이분 역시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함경도 고산 땅에 유배가 있었습니다.
한번도 바깥 세상에 나가본 적이 없는 정하상으로서는 함경도까지 가는 일이 큰 모험이지만 용감하게 찾아갑니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수도 없이 굶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심산유곡에 숨어살 때부터 굶주림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굶주림에 훈련된 덕분에 그곳을 찾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유스티노를 만났지요.
유배지까지 찾아온 한 청년을 조유스티노는 매우 호기심 깊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바로 명문대가인 다산의 후예거든요.
너무 반가워서 "어떻게 왔냐?" 물으니 교리공부하러 왔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정하상에게 책을 한권 줍니다. 그리고 그걸 읽고 토론을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글을 알아야 읽지요. 배운 적이 없으니 읽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스무 살이 다 돼가는 나이에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줄 모릅니다.
바로 삼촌인 다산 정약용이 조선 최고의 학자가 아닙니까, 그 후예가 글을 모르다니요.
조유스티노가 생각하니 기가 막히지 않겠어요. 그런 기막힘 속에서 그를 위로하고 한문도 가르쳐줍니다.
한자공부와 교리공부를 마치고 나니 교회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복받치면서 조유스티노의 가르침에 따라
사제를 영입해야겠다는 불타는 열의가 정하상을 어찌할 줄 모르게 합니다.
그래서 그는 단신으로 서울로 와서 비밀리에 교우들을 찾아가 열정적으로 호소합니다.
정하상의 호소를 듣고 마음이 움직여 사제영입운동 헌금을 모아서 1차로 갈 수 있는 준비가 끝났던 해가
1816년이고 그때 북만주를 간 겁니다. 당대명문대가의 후예 정하상은 짐꾼으로 변장해 부연사행 속에 끼어들어가
북만주를 가게 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걱정을 합니다. 내가 북만주 벌판에서 얼어 죽어버리면 이 일을 누가 계속하겠느냐?
아무도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같이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찾는데 그가 세번째 베이징 노정 탐사를 갈 때 난데없는 은총이 하나 뚝 떨어집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오묘하지요 유진길이라는 신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조신철이라는 사람도 만납니다. 이분들은 정하상을 찾아낸 사제영입운동의 놀라운 협력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잘못하면 얼어죽기 십상인 북만주 길을 9차례나 다녀옵니다.
이십 세에 공부를 시작해서 사십오 세에 순교하기까지 9차례 북만주를 다녀오고 또 그가 쓴 상재상서는
그가 죽은 뒤 홍콩 천주교에서 교리교과서로 사용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오늘날 한국교회 평신도들은 어떻습니까?
정약종처럼 주교요지를 쓸 사람이 있습니까?
광암처럼 십계명가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하상처럼 상제상서 같은 포교록을 쓴 사람이 있습니까?
어설픈 민주주의론이나 전개하고 신부 수녀들에 대해 비판하는 말을 잘하는 게
마치 유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않습니다.
우리가 정신차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