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최지선(대중음악평론가) | ||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김정미는 고등학교 시절, 오디션을 거쳐 '신중현 사단'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녀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1971년 12월 9일 김추자의 리사이틀에서였다. 소주병 난자 사건으로 붕대를 감은 김추자 대신 핀치히터로 등장해 "김추자 최악의 무대에서 김정미 최고의 무대가 탄생한 것이다".
김정미가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음반은 1971년 경, 앞면이 김정미의 곡들로, 뒷면이 다른 가수들의 곡으로 채워진 컴필레이션 음반 《신중현 사운드 Vol.2/(프린스, SM-7119)》라는 신중현 작품집에서였다. 그 후 몇 장의 독집 앨범을 발표했다. 《김정미 최신가요집: 잊어야 한다면/간다고 하지 마오(신중현 작편곡집)/(킹/유니버어살, KLS-44, 1972)》와 《간다고 하지 마오/아니야/(킹/유니버어살, KLS-68, 1973)》가 그것이다. 이때의 음반에는 브라스의 사용이 돋보이는데 특히 < 간다고 하지 마오> 같은 경우 소울풀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수작은 1973년 《햇님/당신의 꿈(바람)/(유니버어살, KLS-76)》과 《바람/어디서 어디까지(NOW)/(성음, SEL 100 023)》이다.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던 것처럼, 각기 다른 음반사를 통해 발표된 이 두 앨범은 수록곡들이 다수 겹친다.
김정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1970년대 초를 대표하는 '한국적 사이키델릭' 여성 보컬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1973년의 두 앨범 《바람》이나 《NOW》는 '한국적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정수'를 보여준 음반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작곡, 연주, 편곡 등을 포괄하는 프로듀서 역할을 담당했던 신중현 자신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극찬해 마지않던, 김정미와 싸이키델릭 음악에 대한 해설들에서도 잘 드러난다(이 음반은 한국의 음반 컬렉터들의 아이템으로 고가로 거래되곤 했는데, 이는 단순히 음반의 희소성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김정미의 솔로 독집 앨범들인 《바람》과 《Now》에서 연주를 담당한 밴드는 신중현의 그룹 '더 멘(The Men)'이다. 신중현(기타)과 손학래(오보에/색소폰), 이태현(베이스), 문영배(드럼), 김기표(키보드), 박광수(보컬)로 이루어진 6인조 그룹 더 멘은 여러 가수의 음반에 세션으로 참여했다. 신중현은 이전에도 자신의 밴드 활동을 했지만, 더 멘에서는 클래식 수업을 받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출신 오보에 주자(손학래)나, 어린 나이의 키보드 주자(김기표)를 영입하는 식의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김정미를 통해 '한국적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구현한 더 멘 역시 이 음반을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셈이다. 이 음반은 완숙해진 김정미 스타일을 들려주는데, 보컬은 독자적인 표현보다는 이 밴드와 융합되어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특히, 특유의 사이키델릭 여성 보컬이라는 명성에는 손색이 없다. 김정미가 좋아했던 밴드가 제퍼슨 에어플레인이었다는 사실에서도 그녀의 취향은 잘 드러난다. 특유의 비음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리고 섹시하고 관능적이지만 과도한 도발과는 거리가 먼, 김정미만의 보컬은 신중현이나 그의 밴드만으로 그녀의 진가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우선 《바람》의 음반 표지를 보자.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팔을 벌리고 서있는 김정미의 모습은 흡사 '한국 싸이키델릭의 여제(女帝)'라고 불리는 그녀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초상화 같다. 역시 김정미의 대표 명작 중 하나인 《NOW》의 커버 사진도 상징적이다. 커버 상단에는 'NOW'라는 노란 글씨가 새겨 있고, 배경 사진에는 푸른 하늘 아래 코스모스 꽃밭 속에 김정미가 서 있다. 당시 사이키델릭에 관심 있었던 신중현 음악을 생각해보면 이 꽃들은 바로 히피즘의 그 '꽃'인 셈이다. 이 사진은 신중현이 직접 찍었다. 음반을 발표할 음반사를 그가 직접 찾아 나서야만 했던 당시 상황 때문에 앨범 커버 제작 역시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지만 질과는 무관하게 신중현의 컨셉과는 부응한 표지가 아닐까. 하지만 열악한 제작 환경에도 불구하고 《NOW》에는 김정미식 사이키델릭의 화룡점정이라 할 <바람>을 비롯해, 포크와 사이키델릭이 조우하는 <봄>과 <햇님>같은 최고의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바람》에서와 유사한 레퍼토리이지만 보컬의 창법이 조금 바뀌었다는 느낌도 감지된다. 말하자면 포크적인 느낌이 한층 강화되었다고나 할까. 또한 <봄>과 <햇님>에는 오보에 같은 관악기와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 사운드가 추가되어 있는데 이런 인스트루멘테이션은 과도하지 않게 사용되었다. 기타의 경우에도 대부분 이펙트 사용 없이 건조하게 사용된다. 이런 연주는 김정미의 독특한 보컬을 강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편으로 신중현의 부단한(그리고 평생의) 관심사였던 한국적 록 음악에 대한 관심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곡은 <나도 몰래>일 것이다. 한국 민요의 5음계 및 장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전통악기인 가야금 소리와 비슷하게 조율된 기타 연주도 이때부터 나타난다. 소재의 측면에서도 '한국적'인데 <가나다라마바>의 타이틀(한글의 음절), <아름다운 강산>의 '아름다운'(이상하게도 역설적인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한국의 자연에 대한 찬가가 그러한 곡이다. 이처럼 사운드와 가사 등에서 나타나는 한국적 정서는 싸이키델릭한 무드와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이것이 토속적이면서도 이국적이고 관능적이며 몽환적인 김정미의 보컬과 함께 구현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김정미의 진가 역시 신중현과의 협업을 통해서만 더 잘 발휘되었던 것 같다. 이후 김정미는 신중현과 함께 킹에서 지구로 이적한 뒤 《이건 너무하잖아요/ 갈대(지구레코드, JLS-120920, 1974년)》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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