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한눈에 보기
2. 감사와 찬양과 이웃과의 관계
3.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라!
*청중의 적용 포인트 |
1. 감사와 찬양과 나의 삶의 관계
감사와 찬양이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감사와 찬양을 하기가 힘들 곳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오늘부터 감사하고 찬양하고 살아야지’라고 하며 결심해도 버스 타면 다 잊어버립니다. ‘왜 나는 이 모양일까.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되지 않는구나. 나는 왜 이럴까’하고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우리에게 부패한 습성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심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롬 1:21)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영화롭게 생각하거나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부패한 심성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부패한 심성은 미움, 분노, 시기, 비판, 원망과 같은 부정적인 태도는 쉽게 취합니다. 어린 아이조차도 누가 안 가르쳐 줘도 미움을 갖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비판하고 원망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부패한 성품의 자연적인 발로인 것입니다. 나는 평안을 갖고 행복을 얻고 기쁨을 갖겠다고 하면서도 마음엔 미움과 분노와 시기와 비판, 원망 등의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행복과 기쁨이란 날개를 치고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좋은 환경이나 지위나 명예 등 외부적인 조건이 행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저는 요사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젊은 형제들을 만나면 하나님이 주신 시간 동안 행복하게 살라고 늘 부탁을 합니다. 울고 살지 말고, 미워하고 헐뜯고 싸우지 말고, 주어진 시간을 될 수 있으면 귀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그냥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서울대를 나오고 하버드를 나오고, CEO가 되고 돈을 많이 벌고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 영화를 가지면 행복하겠지’라고 하는데 그것은 조건은 될지 몰라도 그 속에서 행복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수백만 명을 만났는데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고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기쁜 것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일례로 남미의 역대 대통령들은 저와 친분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쿠데타를 당하고 쫓겨 나가고, 또 선거를 통해서 돌아오기도 하고 피투성이가 되고 가정이 엉망이 되는 것을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세계적인 긍정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 박사는 물질이 주는 만족을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비유합니다. 물질적인 기쁨이란, 처음에는 아주 맛있지만 점점 녹아서 별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참 맛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몇 번 핥아 먹을 때는 맛이 있는데 조금 지나가면 혀가 그만 마비가 되어서 맛있는 것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덤덤하고 마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세계의 행복도 그런 것입니다. 좋은 집을 짓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처음에는 굉장히 좋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나가면 그것이 보통이 되어버리고 시시하게 보이고 별로 감격이 없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큰 인기를 얻고 성공을 거둔 연예인이나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나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는 정재계 인사들 가운데 불행한 종말을 맞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화려하고 풍성한 생활 속에서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으로 인생을 파멸 시키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호주 시드니에서 조금 떨어진 남태평양에 외딴 섬나라가 있습니다. 바누아투 공화국입니다. 이 나라 인구는 19만 명에 문맹률이 85%나 됩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천 불도 되지 못합니다. 아주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신경제학 재단(NEF)이 2006년에 발표한 행복지수 순위를 보면 세계 178개국 가운데 가장 행복하다고 국민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나라가 바로 이 바누아투 공화국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스위스,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호주 이런 나라들이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환경이 좋으니까 행복지수가 높을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가장 가난하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바누아투 공화국이 행복지수 1위로 나온 것입니다. 물질이나 좋은 환경, 지위나 명예 등 외부적인 조건이 행복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50년 목회생활 동안 심방을 다니다 보니, 부자들 집에 가면 별로 웃지 않는데 가난한 집에 가면 잘 웃습니다. 부자들은 근엄하고 점잖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명쾌하게 웃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가면 대문에서부터 ‘하하하…하하하…, 목사님 어서 오세요. 하하하하’하고 웃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웃는지도 모르게 웃습니다. 아무런 삶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 웃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거듭나서 마음의 바탕이 변화되면 우리가 행복을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환경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바탕이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마음의 바탕이 변화되면 비로소 환경도 감사히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데 환경을 아무리 변화시켜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돼지소굴을 아무리 청소를 하고 이부자리를 깔아놓아도 얼마 있지 않으면 다시 돼지소굴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화되어야 됩니다. 기독교 교도소를 만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도소에서 내에서 마음에 변화를 받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교도소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말씀 듣고 찬송하고 변화받아서 마음 바탕이 달라져야 교도소에 들어간 보람이 있지 들어갔다가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가서 나오면 효과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안 됩니다. 옛사람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 말은 쉽지만 막상 그것이 잘 됩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우리 속에 이 역사를 일으켜 주셔야합니다. 자력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넘치는 마음의 샘은 마음이 변화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데 그 샘물이 마음속에 솟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믿음, 소망, 사랑, 의, 평안의 샘물이 솟아나기 위해서 이 샘물을 여는 것이 바로 감사와 찬양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우리 마음에 감추어있던 샘물을 열어서 우리가 행복을 맛보고 그 샘물을 마실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마음의 미움을 제하여 주고, 분노를 가라앉히고 우울증을 치료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입니다. 보통 좋은 약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몸속에 온갖 좋은 약 공장이 다 돌아가서 온 병을 치료하지만, 마음이 상하여 근심을 하면 뼈조차 마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도의 요가 중에서 웃는 요가가 있습니다. 모여서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배를 안고 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가 나았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웃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하루에 150번을 웃는다고 하는데 어른들은 하루에 다섯 번 밖에 안 웃는답니다. 기왕 교회에 모였으니 한번 웃어 볼까요? 좋은 일은 억지로 해도 괜찮습니다. 웃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 웃어도 우리 속의 신경은 우리가 진짜 웃는지 가짜로 웃는지 모른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할 수 있으면 많이 웃으시기 바랍니다.
캘리포니아 데이비스대학교 심리학과 로버트 에먼스 교수와 마이애미대학교 심리학과 마이클 매컬로프 교수는 공동연구로 감사와 심리적 변화의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사람들이 감사하고 찬송하며 웃고 지내면 삶에 대하여 더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면 내가 사는 것이 참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낙천적인 성격으로 변화됩니다. 늘 마음이 우울하던 사람이 즐거워하게 되고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열정적으로 일하게 되고 결단력이 강해지고, 유머 감각이 생기고, 힘든 일을 처리하는데 자신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감사를 하고 즐거운 마음을 갖게 되면 운동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숙면을 취하게 되고,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지고, 인생의 목표가 뚜렷해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됩니다. 타인을 돕는데 적극적이 되며,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고, 부자에 대해서 시기, 원망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를 보면 ‘자기가 뭐 잘났다고 건방지게, 더러워서 못살겠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공짜로 부자가 되면 그런 욕을 먹어도 좋지만 실제로 부자가 되려면 애를 많이 써야 됩니다. 교회도 하나님이 성장시켜 주시지만 게으르게 놀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말씀 드리거니와 50년 목회 동안에 한 번도 휴가를 가본 적이 없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일을 해야 교회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참된 부자는 죽도록 뼈가 부러지게 일을 해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아냥거리다가다도 우리가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하면 부자도 ‘부자 될 만하니까 부자가 되었지. 감사하다’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 한사람 밑에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이 밥을 먹고 삽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나라도 부자들이 많이 생겨나야 됩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부자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20명, 30명, 100명, 200명, 1,000명씩 먹여 살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뻐하고 즐거우면 일을 체계적으로 하게 되고, 보다 창조적이고 열린 시각으로 상황을 보게 되며, 어려운 상황에 더욱 탄력적으로 대처하게 됩니다. 스트레스에 강해지고, 가족관계가 돈독해지고, 신앙심이 깊어집니다. 감사와 찬양이 이런 큰 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쓴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어릴 때부터 고통의 연속이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고아로 자랐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혁명당 활동을 하다가 소련 황제에게 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고 시베리아로 유배 가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시베리아에서 해방되어 나와서 결혼했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아내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다시 천신만고를 겪고 재혼했는데 첫 아이가 또 병들어서 죽어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간질병에 걸려 평생을 고통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질병을 ‘거룩한 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일에 감사했었습니다. 그는 감사를 하지 않고는 정신적으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감사를 통해서 그 신앙이 더 굳어지고 깊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쓴 책들이 오늘 역사에 남아 있는 불후의 명작들이 되어서 「죄와 벌」이라든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같은 책들은 오늘날도 온 세계 사람들에게 찬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그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한 것이 오히려 고통을 승리의 발판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솔제니친은 시베리아 정치 수용소에서 11년의 고통 가운데 암이 걸려서 죽음에 이르자 예수님을 믿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출옥한 후에 수용소의 참상을 폭로하는 소설인 「수용소 군도」를 써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 속에서 솔제니친은 ‘감방이여 고맙소’라고 고백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시베리아 감방에서 11년 동안 갇혀 있지 않았었다면 결코 이라는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노벨 문학상을 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역경이 오히려 축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를 믿고 감사할 줄 아는 삶을 가졌기 때문에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경을 당하여 원망, 불평, 탄식하면 뼈가 마르게 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우리 삶 가운데는 감사할 것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안, 기쁨의 샘을 여는 문이 바로 감사와 찬양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빌헬름 웰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2. 감사와 찬양과 이웃과의 관계
여러분, 감사와 찬양은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참으로 좋게 만들어 줍니다. 이웃에 감사하면 이웃의 자존심을 높여 주며 기쁨을 갖다 주게 되고 이웃을 보고 비난하고 욕하면 이웃을 짓밟고,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어 원수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에게 감사하고 이웃이 한 일을 찬양하면 이웃이 자존심이 생기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여러분, 조금 책임 있는 위치에 오르면 욕도 많이 얻어먹습니다. 저 역시 욕을 많이 얻어먹습니다. 인터넷을 열기면 하면 조용기 욕을 하는 것이 언제나 나오는데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가다가 잘한다는 칭찬이 나오면 기분이 굉장히 좋습니다. 사람이니까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면 ‘참 감사합니다. 참 훌륭하십니다. 잘하십니다’하고 칭찬하면 말로써 서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집에서 부부간에라도 남편이 아내보고 ‘여보 참 고맙소. 전에 몰랐는데 요사이 가만히 살펴보니까 꽤 예쁘게 보이는데… 당신은 언제나 예뻐’라고 하면, ‘또 날개 없는 비행기 태운다’ 하면서도 아내는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 당신 왜 이렇게 많이 늙었나. 쭈글쭈글하고 이제 볼품 없구나’ 그러면 ‘자기는 안 그런가, 자기는 더 못났는데…’ 하는 반항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서로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칭찬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6-17절 말씀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 삶에 기름을 치는 것입니다. 이웃과 선한 관계를 맺어주기 위해서는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야, 그 사람이 네 자녀를 칭찬하더라’라는 소리를 들으면 벌써 마음속에 선한 감정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들으니까 그 사람 뒤에서 자네에게 나쁜 욕을 하고 손가락질 하더라’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감정이 악화되고 미운 생각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롬 15:2)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행복하고 감동을 받게 해야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부모님에게 감사편지를 쓰라는 숙제를 냈습니다. 지금까지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감사편지 한번 쓰지 않았으니까 이제 부모님에게 감사하다는 편지를 쓰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길러 주시고 먹여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대학까지 들어오게 해주시니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학생들이 다 열심히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자기 부모에게 붙였습니다. 객지에 나와 있는 학생들은 고향으로 부모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부모들이 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마음에 감격하고 학교 당국에 감사하다고 편지를 쓰고 전화 연락을 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부모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읽어본 부모님들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가 좋아지고 학교와의 관계도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사랑을 받아도 꼭 감사편지를 해야 되는데 이 감사편지를 제일 등한이 하는 것이 우리 한국 사람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에 가서 집회하고 돌아오면 꼭 고맙다는 편지가 날아오는데 우리 교회 와서 집회하고 가도 고맙다는 편지 한통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다고 은혜 받았다고 편지를 해오는 그 분은 내 마음속에 기억에 꼭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집회를 해주고도 고맙다는 편지도 않고 감사하다는 내용의 이메일이라도 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는 더 감사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서로 도와줄 마음이 생기고 경계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데 갚아주고 도와주고 돌보아주고 싶은 생각이 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50년 목회하면서 가끔 배신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고 돌보아준 사람이 나중에 배신하고 험담하고 고발하며 온갖 고통을 줄 때 그때는 그냥 눈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피눈물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욕은 못하고 같이 저주는 못하니까 피눈물이나 흘려야지 뭐 별도리 있습니까? 서로 도와줄 마음이 생기고 경계심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 1:10)
좋은 친구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서로 감사하고 칭찬하면 좋은 친구가 되고, 헐뜯고 흉보면 친구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 16:7)
그 원수와 더불어 화목하게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칭찬하고 이웃에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감사와 찬송의 생활을 하면 내게 유익이 되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살면 어떻게 될까요? 하늘나라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궁전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청와대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하늘나라 궁전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하나님 궁전에 감히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감사와 찬양을 하면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고 하늘나라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 4-5절을 우리 다 같이 읽어 봅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러분, 감사하면 하나님 문에 들어가고 찬송하면 하나님의 궁전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큰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특별히 기도원에 가거나 특별한 교회에 찾아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 사무실에서 내 부엌에서 내 안방에서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서 감사하고 찬미하면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 궁전 앞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면 그 간구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감사와 찬양 중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시 22:3)
찬송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게 하는 향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합니다. 여러분 이 우주에서 하나님 보다 높으신 이가 있습니까? 안 계시지요. 하나님보다 영화로우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영화의 극치를 가지고 계시며 지극히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 더 높아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높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면 하나님이 존귀를 받고 영화로움을 느끼시기 때문입니다. 최고로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더 높이고 더 영화롭게 하는 길이 바로 감사와 찬양인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을 하면 하나님이 정말로 더 높아진 마음으로 고요한 가운데 영화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여러분, 자녀들이 부모에게 와서 감사를 하면 여러분 마음이 화끈해지고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참 자식 잘 길렀다, 더 잘 돌봐줘야 되겠다’라는 영화로운 마음이 생기고 도와줄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아낌없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 속에서 나온 자식이라도 늘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면 도와 줄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바로 우리의 찬송을 통해서 구원과 도우심의 팔을 뻗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5-26절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한밤중에 차꼬에 차였습니다. 온몸은 맞아 상처를 입어 아프고 빈대, 벼룩이 들끓는 곳이지만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부르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감동을 하시고 영화로움을 느끼셨는지 빌립보 옥토를 잡고 흔들어 버렸습니다. 거대한 진동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다 끊어져버리고 그들은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불행과 우울증과 고통으로 묶어 놓지만 감사와 찬양은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양은 굉장히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면 입에서 연기가 나오게 됩니다. 옛날에 우리 어릴 때 여우 잡으러 가서 생나무를 꺾어다가 불을 붙여서 여우 굴에다 찌르면 여우가 그 연기 때문에 코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서 튀어 나올때 몽둥이로 때려잡았어요. 그래서 옛날에 다 여우 목도리 하고 다니는 사람은 그렇게 여우 때려잡아서 여우 목도리 하고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연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아주 달콤한 향기가 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 향기를 흠향하시고 기뻐하시고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 69:30-31)
하나님께 황소를 잡아서 재물로 드리는 것보다도 감사와 찬양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영화롭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짊어지고 고생을 당했는데 감사의 말을 안 하면 헛고생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몸 찢고 피 흘려 얼마나 고통을 당했습니까?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그 예수님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을 하면 주님의 고통이 가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애를 써서 자식을 낳고 난 다음에 자식이 응아하고 울고 나오면 구로한 어머니가 그 고통을 잊어버리고 구로한 것을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주를 지으시고 인생을 만드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당한 것을 가치 있고 보람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감사와 찬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 13:15)
M. J. 라이언은 「감사」라는 책에서 인생을 변화시키는 감사의 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하면 기쁨이 넘치며 언제나 생기가 있고 우울증이 치유된다. 감사하면 건강해지고 걱정 근심이 없어지며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고통과 분노가 사라지며 부족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 감사하면 공허하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게 되고 상처받더라도 사랑하며 무엇이든지 나누어 주고 싶어진다. 감사하면 모든 생명체와 교감이 있으며 평범한 일상도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격언 또한 “지옥이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고 천국이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라고 말합니다. 템플턴상으로 유명한 존 템플턴은 그의 책 「열정」에서 감사의 생활을 실천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첫째, 감사할 대상을 찾아 칭찬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라. 둘째, 우리가 열망하는 좋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미리 감사부터 먼저 하라. 셋째, 우리에게 닥친 문제와 도전 과제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감사와 찬양은 내 자신의 삶을 행복하고 발전적으로 변화시키고 성공적인 삶으로 이끌며 이웃과 함께 협력하며 잘 살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감사와 찬양을 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양의 삶은 손해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개인에게도 플러스가 되고 이웃과의 관계에도 플러스가 되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는 더욱 큰 플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인 것입니다. 성령은 감사와 찬양을 하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환경에 처해 보십시오. 내 위치에 처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감사 찬양할 처지가 됩니까?’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처지가 안 되니까 더욱 감사하고 찬양해 불평의 처지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와 찬양은 여러분에게 좋은 선물을 가져오지만 원망과 불평은 여러분에게 수렁을 만들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조용기 목사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 역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
순복음선교회 총재
국민일보 회장 겸 발행인
사단법인 굿피플(NGO) 명예총재
교회성장연구소 명예총재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저서>
「4차원의 영적세계」, 「4차원의 영성」,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나는 이렇게 설교한다」, 「희망목회 45년」외 다수